출처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1&totalCount=1&itemId=kn&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0&levelId=kn_063_0040_0020_001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A%B9%80%ED%95%B4%C2%B7%EC%96%91%EC%82%B0+%EB%85%B8%EC%A0%84%EC%A7%80%EB%8C%80%281908%EB%85%84%29&searchKeywordConjunction=AND 한국사데이터베이스 國史館論叢 第63輯   >   조선후기 金海·梁山 蘆田지대의 노전소유와 경영(박준성)  >   Ⅱ. 궁방의 노전 소유구조와 관리   >   1. 김해·양산 노전지대의 특성


김해·양산 노전지대의 특성


김해·양산의 노전지대는 낙동강 하구 섬들과 강 양쪽 습지대에 형성되어 있었다. 〈그림 1〉은 노전이 대부분 개간된 뒤, 갈대가 자라는 순수한 노생지가 낙동강 유역에만 산재해 있던 1908년의 상황이다. 낙동강 하구의 여러 섬들 가운데 가장 큰 양산 대저도의 조금 높은 지대(〈그림 1〉의 대상면 부분)에는 조선전기에도 주민들이 토지를 경작하며 살고 있었다. 성종 때 “경상도 양산 대저도가 이름은 비록 섬이나 육지에서 불과 300여 보 떨어져 있고, 주민이 남녀 410명에 田이 200여 결이며 토지가 비옥하다”고 한 것은 그 이전에 이미 개간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註 006 그러나 그 밖의 섬들과 강 양안은 조선후기까지도 대부분 노전이었다. 지금은 예전의 노전지대가 〈그림 2〉와 같이 김해평야 일부와 부산에 대부분 속하였으며, 을숙도 철새도래지 빼고는 예전의 노전 혼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림 1〉 김해·양산 노전지대(1908년)
이 노전 지역은 낙동강이 양산협곡을 지난 다음 구포 상류 5km 지점에서 동서의 2대 분류로 갈라지면서 형성된 삼각주에 형성되어 있었으며, 하구에서 약 50km 떨어진 삼랑진까지 大潮의 영향이 미쳤다. 낙동강 하구에 있었기 때문에 홍수의 피해 또한 컸다.
방조제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조선시대에는 홍수의 피해를 더 많이 당했다. 예를 들어 1792년 대홍수를 당했을 때, 동서 10리 남북 20리로 낙동강 하구에서 가장 큰 섬인 대저도에서는 물에 휩쓸려 간 것이 362戶였으며, 대저도 위쪽에 동서로 쌓은 30리 堰 가운데 무너진 길이가 3千丈이었고, 이를 다시 쌓으려면 役丁 1만 2천명이 필요한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1885년 홍수에는 낙동강 하구 양산군 전답 가운데 침수된 것이 349결 8부 5속, 물에 떠내려 간 것이 145결 81부 9속, 원호 1,664호에서 물에 잠기고, 병들어 죽고, 배고파 떠돌아 다니는 집이 735호였다 〈그림 2〉김해양산 노전지대의 현재


〈그림 3〉 낙동강 하구 김해 여러 섬의 노전 員·作(1846년)
 이처럼 큰 홍수가 나면 제언이 무너지고 토지가 물에 잠겨 떠내려가거나 모래에 뒤덮였다. 위쪽에서 모래가 떠내려와 새로 모래벌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한편 큰 홍수가 휩쓸고 지나가면 예전의 노전도 형체가 바뀌곤 하였다. 그에 따라 노전은 경계선이 뚜렷하지 않았으며, 면적도 통상 1庫 또는 1作으로 표시하였다. 지역도 어떤 面 또는 어떤 島의 어떤 員이라고 불렀다. 員은 일반 전답의 무슨 들(坪), 作은 두락 또는 夜味에 비견할 수 있다.〈그림 3〉은 1846년 김해·가락·칠산·우부·덕도면 여러 섬의 노전 員과 作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홍수가 나서 노전이 강물에 떨어져 나가고 모래벌이 다시 생기는 큰 강 하구의 자연조건과 경계선이 불명확한 노전 지대의 특성은 이 곳에서 소유권 시비가 자주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노전은 갈대가 자라는 습지 뿐 아니라 이미 개간한 곳도 그대로 노전으로 불렀다.세금도 서로 구분하지 않고 蘆結이라 하여 일반 전답보다 저렴한 가격을 부과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노전이라 하더라도 개간한 노전인지 갈대가 자라는 노전인지 구분이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