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임나일본부는 일본 주류사학에서도 개소리 취급하고 고고학적 증거도 있으니 거르는게 맞음. 하지만 그럼에도 일본서기를 부분 참고해야할만한 이유는 있음. 대표적인게 무령왕 관련 기록을 보면 알수있음.


※ 이 구절들은 내가 매끄럽게 읽히도록 표기 일부를 수정함. 원문에선 '모대왕'을 대중적인 이름인 '동성왕'으로 고친게 그 예임. 하지만 내용 줄거리 자체는 안 건드림.


"무령왕(武寧王)의 이름은 사마(斯摩) 혹은 융(隆)이며 백제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다. 키가 8척에 눈매가 인자하고 너그럽게 생겨 민심이 그를 따랐다. 501년에 동성왕이 백가에게 암살되자 왕위에 올랐다." - 삼국사기 제26 권 백제본기 제4장 무령왕본기 中

우선 삼국사기에선 무령왕의 출생년도에 대해선 나와있지 않음. 알다시피 신라 이외엔 삼국사기는 전반적으로 고구려, 백제, 가야에 대한 언급은 많이 부족한 편임. 우선 여기선 무령왕은 동성왕의 아들이며 본명이 융, 혹은 사마라고 언급되고 있음. 다음은 일본서기의 웅략천황 5년의 기록임.


"웅략 5년(461년) 6월 병술삭(1일)에 개로왕의 임신한 부인이 두달 전 개로왕이 염려하던대로 츠쿠시국의 카카라섬(各羅島)에서 아이를 낳았다. 섬에서 태어났다 하여 아이 이름은 세마(島)라 하였다. 동행하였던 개로왕의 아우 부여곤지가 아이를 배에 태워 본국으로 돌려보내니 이 아이가 훗날의 무령왕(武寧王)이다. 그리하여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니리무세마(主島)라 불렀다." - 일본서기 제14권 웅략천황(雄略天皇, 유랴쿠텐노) 5년 中

일본서기에선 무령왕의 탄생에 대해 삼국사기보다 훨씬 디테일하게 내용이 써져있음. 섬에서 태어났다하여 아이의 이름을 세마 라고 했다고 써져있음. 세마, 사마 발음이 비슷한걸 보면 어쨌든 사마 혹은 세마가 본명인건 확실한거 같음. 그런데 여기선 무령왕의 아버지가 동성왕이 아닌 개로왕이라고 써져있음. 즉 아버지가 두사람임.



어머니가 두 명인 말딸에 이은 아버지가 두 명인 백제왕이라니! 는 개소리고 서로 상반되는 동시기의 기록이 존재한다는건 한가지 뜻이다.


두 기록중 하나는 잘못된 정보라는 것.


여기까지 본다면 임나일본부설같은 개소리도 나왔을테니 아무리 그래도 삼국사기가 맞지않겠어~? 싶겠지만 뭐 고고학적 증거가 있어야지...



나왔다. 그것도 어마어마한게


1971년 바로 이 기록의 주인공인 무령왕의 무덤인 무령왕릉이 발견된 것이다. 비록 발굴과정이 엄청난 흑역사로서 대한민국 고고학계에 영원한 원죄중 하나로 남았지만 한국 고고학에서 새기의 발견을 꼽는다면 반드시 언급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령왕릉에선 이 미스터리를 해결해줄 지석이 같이 발견됨. 지석의 내용은 해석하면 다음과 같음.


영동대장군이신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525년) 8월 갑신일인 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뫼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지석에서는 무령왕이 523년 계묘년(癸卯年)에 6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있음. 이를 역으로 환산해본다면 무령왕은 461년에 태어났으며 이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일치함. 또한 이 계산대로라면 501년 즉위 당시 무령왕의 나이는 마흔인데 이렇게 되면 36세에 사망했다 추정되는 동성왕의 자식이 될수 없음.


즉 정리하자면 오히려 일본서기의 기록이 훨씬 정확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임. 그렇기 때문에 국내 사학계에서도 기록 하나하나가 중요한 지금의 상황에선 제한적으로나마 일본서기의 기록들을 수용하고 있는 상황이고 당장 내가 인용한 저 일본서기 기록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인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인용해온거임.


그리고 당연한 소리지만 한국 사학계에선 임나일본부를 긍정한적은 단 한번도 없음. 교차검증된 내용들에 한해서 수용할뿐임. 여기서 나온 말이 저기에서도 똑같은 내용으로 언급된다면 그게 팩트 아닐까? 오히려 자칭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한국 주류사학계는 식민사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이고 있음.


<자료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