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 그러니까 흔히 일컫는 남도(南島) 민속학의 역사는 아주 장대하고도 기구한 것입니다. 류큐는 신석기 문화인 패총(貝塚) 시대를 거쳐 12세기 즈음 구스쿠(城) 문화를 열었고, 1609년에 들어서는 에도 막부에 의한 사츠마번(薩摩藩)의 침입에 두 손을 들고 일본의 간섭을 받아들였으며, 1879년 류큐 처분에 의해 오키나와 현으로 개칭된 후에도 그 문화적 독자성을 잃는 법이 없었지요. 13~14세기 즈음 불교와 유교 따위 여러 부류의 종교가 류큐 사회를 지나치게 되었을 때에도, 이들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고유 신앙을 유지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민족성을 고취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컨대 일본의 신사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류큐 사회에는 우타키(御嶽)라는 성역이 존재하였습니다. 이는 류큐 민속학을 통틀어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으므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민속학자 미야기 신지(宮城真治)의 저술을 조금 빌리자면 먼 옛날부터 류큐의 마을이라는 것은 언덕 위, 혹은 산의 중턱 즈음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이는 전란의 시기 적의 공격으로부터 마을을 방어하기 쉽다는 지리학적 요인도 작용했을 수 있겠습니다만, 더욱 본질적인 것은 바로 이 '우타키'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신지 선생은 말합니다. 이는 아마 이라부지마(伊良部島) 등지에서는 오가미야마(拝山)라고 불리웠던 모양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우타키는 산이나 숲, 혹은 그러한 부류의 수호신을 숭배하는 사상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곤 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옛 류큐 지역에서는 그들의 거주 이전에 '신이 머물 공간을 먼저 정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우타키'의 공간이 될 성소(聖所)를 우선적으로 정하고 그에 맞추어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아주 놀라운 사실을 의미합니다. <류큐국 유래기(琉球国由来記)> 속 쿠니가미(国頭) 지역에 등장하는 백오십여 개의 우타키는 이러한 사실에 놀라움을 더합니다.

물론 앞서 말한대로 우타키를 일본의 '신사'와 동치시키기에는 역시 무리가 있습니다. 예컨대 류큐 사회에 신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절대 무리가 있기 때문이지요. 류큐 사회와 가고시마 지역이 맞물리는 어디 즈음에서부턴가 신사의 흔적이 줄곧 발견되고는 합니다. 물론 이것들은 17세기~18세기 즈음 창립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만, 노마 요시오(野間吉夫)의 <시마의 민속지(シマの生活誌)>에 의하면 에라부지마에만 다섯에서 여섯 개의 신사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기이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타키의 내부에는 고이 모셔진 신전(神殿)이 하나 있습니다. 위치 상에서 신사에서 말하는 본전(本殿)과 비슷한 것으로, 그들이 이것을 흔히 말하기를 아샤기(アシャギ)라고 일컫습니다. 아샤기의 안에는 타마토키(たまと木)라고 하여 무녀가 앉을 때 사용하는 코시아테(腰当) 외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향로 따위가 들어있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것조차 예외에 속하는 것입니다. 아샤기는 기능적으로는 신사의 카구라도(神楽堂)와 비슷한 개념으로서, 신이 무녀에게 빙의하였을 때 그에 걸맞는 환대를 받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외에도 우타키에는 이비(イビ)와 우비지나(ウービ·ヂナ)라고 하여 무녀 외에는 아예 들고 나갈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하는가 하면, 불의 신을 모시는 누루투누치(ヌルトゥヌチ)라는 공간이 존재하기도 하는 등 신사와 비슷하게 상당히 체계적인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이비기(イビ·ギ)라고 하여 신목(神木)이 존재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것이 신사와 우타키를 흔히 비슷한 개념으로 인식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타키의 기원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류큐인들이 신이 머물 위치를 먼저 정한 뒤 그들의 거처를 마련하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신앙의 기원이 적어도 아주 오래된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지요. 이를 아주 기원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타케토미지마(竹富島)의 근간이 되었을 여섯 우타키, 즉 무야마(ムーヤマ)와 관련한 전승은 앞선 <류큐국 유래기(琉球国由来記)>의 저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금 난해하지만, 유래기에서는 타케토미지마의 사람들이 무야마를 만들고 숭배하게 된 연원을 '수호신 신앙'이라는 개념과 치환합니다. 즉 우타키의 연원은 신사와 수호신을 모시는 사당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습니다. 모시는 신 또한 다양하여 곡물의 신, 국가의 신 등 여러 방면의 제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법을 통괄하는 무녀를 통틀어 그들은 흔히 니가미(ニガミ), 니간(ニーガン)이라는 이름으로 총칭합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이들을 노로(ノロ)와 혼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적어도 먼 과거에는 하나의 마을을 기준으로 신직(神職)은 니가미의 계통, 노로의 계통의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니가미는 옛 류큐 지역을 지배했던 여성 정치 사회의 잔념으로 보는 견해인 것인데, 이 경우 니가미는 기원적으로 마을을 통치하는 대모신(大母神)으로서 작용하였으나 후에 무녀의 역할로 변모하였다고 보곤 하지요. 이러한 니가미의 아래에는 별도로 와치가미(ワチ·ガミ)라 불리우던 별도의 신들이 존재하였습니다.

노로(ノロ)라는 것은 기원적으로 니가미 숭배 사상, 그러니까 조상신 내지 수호신 숭배 사상을 제치고 더욱 나중에 등장한 태양신(日神) 사상의 무녀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본래 조상신을 모시던 니가미와의 차이성이 점점 옅어지게 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리고 추정합니다. 적어도 오모로소시가 등장한 중세 즈음에는 노로(ノロ)라는 개념이 명확히 확립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이전에도 류큐 왕국의 고자마루(護佐丸)의 아버지 야마다(山田) 아지(按司)의 무덤에 야마다노로(山田ノロ)가 합장되어 있다고 전합니다. 와치가미와 같이 노로를 보좌하는 역할로서 운치가미(ウンチ·ガミ)라는 신직 또한 존재하였습니다.


[주요 참고문헌]

湧上元雄(1978). "沖縄の御嶽と伝承", 沖縄民俗研究.
宮城真治(1987). "山原 : その村と家と人", 日本民俗文化資料集成.
福田晃/岩瀬博/遠藤庄治編者(1980). "沖縄の昔話", 日本の昔話30, 日本放送出版協会.
間野吉夫(1942). "シマの生活誌", 三元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