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음 : 염석산 | Yan Xishan (閻錫山)

1883.10.3~1960.5.23

청나라의 혁명가이자 중화민국의 군인. 군벌중에선 드물게 사회개혁과 공업화에 힘쓴 인물.


1883년 산시성 북서쪽 우타이현의 상인 집안에서 출생. 평범한 유교 교육을 받고 아버지 가업을 물려받으며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가업이 몰락하며 반강제로 학당에 입학. 1904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05년 일본육군사과학교에 21기로 입학 이때 나중에 일본 군부 주요인물중 하나가 되는 오카무라 야스지등 많은 인물과 인맥을 맺음. 이후 1909년 졸업뒤 고향이 섬서성에서 군개혁등 여러 일을 하고 한편으론 혁명군을 조직하며 힘을 기름.

그러던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산서의 중심지인 타이위안에서 혁명군에 가담, 반혁명파를 숙청하고 산시성의 독립을 선포

옌시산의 봉기군이 사용했던 팔괘태극기.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고향인 산서에서 도독으로 추대. 유혈충돌을 피하며 섬서의 안정이라는 이미지를 얻고 한편으론 숙청,내몽고 원정군을 파견하는등 자체적인 산서의 군사적 능력도 키우기 시작함. 하지만 위기가 찾아오는데 위안스카이의 대총통 취임이었음. 위안스카이에게 개길힘이 없던 옌시산은 홍헌제제(중화제국 선포)를 지지하는등 위안스카이 라인을 타지만 얼마못가 호국전쟁으로 중화제국이 망하고 자신도 위기에 처하지만 다행히 위기를 넘기게됨.

이 사건으로 옌시산은 중국 내외의 문제에 관심을 껐고 내정에 집중하게됨. 청나라의 잔재인 변발과 전족을 금지하고 아편문제도 해결, 육군수계수등의 병공창을 만들며 나름 군벌중에서도 강한 편제를 갖춘 군벌로 떠오르기 시작하지만 이런 산서에서도 문제가 하나 생기는데 산서가 원래부터 너무 가난했던거임. 그래서 옌시산은 중앙은행을 설립, 지방채를 나눠주며 경제부분도 해결하려 노력하고 안직전쟁,직봉전쟁등 중국이 개판날때도 중립을 유지하며 내정에만 집중함.

그러던중 기회가 하나 찾아오는데 바로 국민혁명군이었음 국민당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1925년까진 옌시산의 군벌은 주변의 수십만 대군을 보유한 군벌들에 비해 한없이 모자른 상황이었지만 직봉풍 전쟁으로 군사력도 키우기 시작. 1926년 국민당이 1차 북벌을 선언하자 이에 호응, 북벌군 사령관들중 하나에 오르고 1928년엔 이덕분에 중국 북서부에서 가장 강력한 군벌중 하나로 성장하고 국민당 내에서도 리쭝런,펑워샹급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됨.

하지만 1928년 장제스가 편견회의로 군벌들의 권한을 제안하기 시작 이에 불만을 품고 리쭝런,바이충시등과 함께 반장전쟁을 시작으로 장풍전쟁,장당전쟁,중원대전등을 일으키는등 공격적인 행보를 취하고 외신에선 한때 중국의 차기 총통으로 평가하기도 했지만 장제스를 중심으로 국민당이 대응하기 시작하면서 얼마못가 일본이 통치하던 다롄으로 도주 1931년에야 관동군의 도움으로 다시 산시에 도착함. 장제스와 타협하여 국민당에 합류하긴 했지만 장제스에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등 계속 개기긴 했음. 이후 일본군이 그를 포섭하고자 했으나 계속 거절했고 장제스의 초공작전과 별개로 따로 공산당을 토벌하기 시작.
그런데 문제가 있었는데 10년에 걸친 내전과 자연재해로 산서의 경제가 파탄. 공산당이 활개치기 시작함 그래서 어쩔수 없이 다시 국민당과 협력하게됨. 그러던중 1936년 시안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중재하고 2차 국공합작을 맺자 팔로군을 지휘하는등 공산당과 협력하기 시작함.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2전구 사령관으로 임명. 산서 방어를 맡지만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일본군을 상대로 아무것도 할수 없었고 결국 그해 11월 타이위안을 버리고 후퇴함 이후로도 중국이 일본군한테 자진모리 장단으로 계속 털리자 일본에 대항하는것은 무리라고 판단. 1940년부터 일본과 독단적으로 협상하기 시작함

1940년, 제복을 입은 옌시산

참고로 이때 공산당은 자신들을 토벌하려 하는 옌시산이 일본과 협상하려 한다는것을 알게되고 어떻게 해서든 방해하기 시작함 그래서 중간에 협상이 결렬되는등 이런저런 수난이 있었지만 1943년 협상이 타결. 산서에서는 공산,국민당 간첩을 색출하자는등 반중 선전활동을 진행하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다시 장제스에게 항복을 맹세.
빠르게 2만에 달하는 일본군 병사,장교,기술자들을 흡수함.

1947년의 옌시산.

일본이 항복하자 자신의 군대인 19군을 동원하여 일본군 무장해제를 주도 무기를 상당수 흡수하고 일부는 군대로도 재편성 하는등 옌시산이 일본군을 모의자 중국 각지의 일본군은 산서로 몰려듬.
이로써 인력확보에 성공하고 자신들의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하지만 중일전쟁 기간동안 힘을 키운 공산당이 국공내전이 시작하며 홍군은 타이위안을 점령하기 위해 공세를 진행하지만 계속 막히고 1949년이 되기까지 점령에 실패함. 하지만 이미 전선은 붕괴되고 있었고 가망이 없음을 확인한 옌시산은 장제스와 함께 대만섬으로 탈출한뒤 사실상 정치에서 은퇴하고 일본으로 출국하게 해달라 요청하지만 장제스가 거부. 이후 양밍산에서 농사 짓고 동물 키우면서 살고 정치가 아닌 예술,지식인 모임에 참여하는등 소박하게 살다가 1960년 사망. 장례식에는 장제스가 조문을 오는등 나름 죽은뒤에는 예우를 받음.

줄서기와 정치질로 경제 성장시키고 사회관습 타파에 기여하고 산시를 어느정도 경제가 있는곳으로 발전시킨 사람. 툭하면 배신하고 줄서기 하는거 빼면 긍정적으로 평가할수 있을듯

죽기전 거의 마지막으로 찍힌 그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