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길수 교수의 논문에서 인용한 내용


아리야바르마가 천축으로 떠난 것은 정관(貞觀 627~649)이라고 했다. 이때는 당나라 태

종 때로 고구리(高句麗) 영류왕 10년에서 보장왕 8년에 해당한다. 아직 조국 고리(高麗)가

국제무대에서 막강한 힘을 쓰고 있을 때 당나라로 가서 큰 뜻을 가지고 천축으로 갔다. 그리

고 열심히 공부하고 경전들을 베껴 써가지고 조국인 고리(高麗)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조국 왕실이 당나라에 항복하여 돌아갈 조국이 없어져 버린 비운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의정이 ‘이 절(寺)에서 덧없음(無常)을 느끼는구나!’ 라고 한 것은 한 스님이 다른 나

라에서 세상을 떠난 것 이상의 한을 한마디로 그린 것이다.

한편 의정이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을 쓴 것은 691년(天授 2년)이

라고 전해진다(불광사전). 691년이면 고구려가 멸망한지 23년이 지나고 아직 발해가 건국

(699)하기 전이며, 당나라도 측천무후가 나라 이름을 주(周)라고 바꾸고 집권한 685년 이후

6년이 지난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정이 해동의 구법승들을 모아 국적을 쓸 때 이미 없어

진 나라 이름을 쓸 수 없었을 것이고, 당연히 당시 해동 3국 가운데 살아남은 ‘신라’로 분류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의정은 나라별로 분류할 때는 ‘신라 구법승’으로 하고, 본

문 시작도 ‘신라사람’이라고 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쓰면서 아리야바르마가 고리(高麗) 출

신이라는 주석을 달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을 자세히 보면 아리야바르마

는 신라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가지도 않았다. 요동에서 태어나 고

리(高麗)를 떠나 당나라를 떠나 인도에 갔기 때문에 신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스님이었다.

다만 의정이 책을 쓸 때 전체적인 맥락을 잡으면서 신라의 카테고리에 넣었을 뿐이다. 의정

은 그 다음 주석을 통해 분명하게 고향과 국적이 고리(高麗)임을 밝혔기 때문에 후대의 많은

오해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의정이 당나라에게 항복한 고리(高麗)를 신라로 분류한 것을 통해 당시 당나라에서

고리(高麗)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보는 좋은 잣대가 될 수 있다. 현재 중국에서 진행

되는 역사왜곡에서는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고, 더구나 고구리(高句麗)

가 멸망하므로 해서 완전히 당나라 영토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한국의 학자나 국민

들도 고구리(高句麗) 왕실이 당나라에 항복한 뒤에는 고구리(高句麗) 땅이 당나라에 편입되

고 당나라의 지배 아래 있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역사 왜곡이

다. 만일 고구리(高句麗)가 멸망하여 당나라에 편입되었다면 의정은 당연히 아리야바르마를

당나라 구법승으로 분류해야 했다. 그러나 신라 구법승으로 분류한 것은 고구리(高句麗)가

당나라로 편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정은 기록을 보면 당시 고리가 망한 뒤 당나라에서는

고리 사람들을 신라 사람으로 분류했다는 명백한 사료가 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따로 다른

논문에서 다루기로 한다.


서길수 교수의 논문에서 그대로 인용한건데 아마 서길수 교수가 출신지가 '계귀(고구려)의 동쪽 변두리 땅' 에 있다는 내용을 보고 고려국 요동 출신이라 파악한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