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토지제도를 알려면 수조권과 소유권의 개념에 대해 알아야 함.


수조권은 쉽게 말해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임.

이 조세는 대략 1/10이고, 이 수조권의 권리주체에 따라 수조권이 국가에게 있는 공전,개인에게 있는 사전이냐로 나뉨. 이것도 나중에는 그 뜻이 변하긴 하지만 그건 후술하고.

아무튼 이렇게 수조권을 기반으로 뜯는 것을 조세, 뜯고 뜯기는 관계를 전주-전객 관계라고 함.


반면 소유권은 현대의 그것을 생각하면 됨.

물론 현대의 배타적 소유권과는 거리가 있지만, 대충 보면 그럼.

이 소유권을 기반으로 뜯는 것을 지대, 지대를 뜯고 뜯기는 관계를 지주-전호 관계라고 함. 

보통 이 지대는 병작 반수라고 해서 절반을 뜯어갔음.

다행이 조세는 전적으로 전객인 지주에게 부과되지만...이러저러한 명목으로 조세조차 전호의 부담으로 돌려버리는 경우가 많았음.


후삼국 시기 고려의 수조권은 녹읍의 형식으로 분급되었는데, 개국공신, 귀부해온 호족한테 주는 땅으로, 왕권이 강화된 후 폐지되고 대신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주는 공음전이란 형식으로 변화함.(공음전은 공식적으로 세습이 가능함)

녹읍은 원래 신라대부터 내려오는 근본있는 제도인데, 이게 조세를 거둘 권리만 주는 건지, 아니면 공물(지역토산품), 노동력 까지 징발할 수 있는 권리를 줬는지는 의견이 분분함.


후삼국 통일 이후에는 역분전이라는 방식으로 토지가 분급됨. 보통 통일 공로자들이 많이 받아갔음. 

명분은 관료전, 그러니까 관료의 생계를 위해 주는 일종의 월급이었는데, 정작 까보면 인품과 공로를 기준으로 주는, 심지어는 관료가 아닌 사람한테도 주는 왕좆대로 방식이라 전시과가 시전된 이후 사라짐.


이 전시과도 처음에는 실직이 없는(과거엔 합격했는데 직무를 받지 못한) 사람에게도 분급해 줬지만, 나중가면 실직이 있는 관료로 한정되고 그 범위도 18등급 이내로 한정됨.


국가에서 수조권을 준 이유는 직역, 즉 나라에 기여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함인데, 문제는 이 직역이 세습되면서 나라에서 준 땅이 아니라 세습된 땅, 즉 조상으로 물려받은 내 땅이라는 인식이 생겨남.

이게 고려의 행정력이 약화된 고려 후기로 들어가면 직역이 없는데도 세습으로 수조권을 가지고 있는 등의 문제가 생김.

심지어는 한 땅에 수조권자가 여러명 있는 골 때리는 상황도 발생함.


더군다나 고려후기로 가면 권문세가들의 수조지는 점차 늘어나고, 대농장이 확대되면서 관료들에게 분급해줄 수 있는 수조지가 부족해짐.

여기에 더해 수조권자가 수조지 내의 농민들을 쥐어짜내면서 결국엔 땅의 소유권을 권력자가 먹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 했음. 

물론 이 상황의 근본적인 이유는 위에서 말했던 수조권의 사유화임.

때문에 사전의 의미도 개인이 조세를 거둘 수 있는 땅->개인이 조세도 걷고 지대도 걷는 땅으로 변함.


여기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당연히 농민들이었지만, 수조지가 없어서 받지 못한 신임 관료들 역시 피해자였음.

때문에 고려정부는 녹과전이란 방식으로 어떻게든 수조지를 만들어주었지만 이는 일시적이었고, 전민변정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실각한 권신들을 조져서 수조지를 마련한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신돈이 나가리 되면서 실패함.


이런 상황에서 신임관료층은 수조권 정리쪽으로 가닥을 잡은 온건파, 아예 수조권을 전부 회수하고 다시 나눠주자는 급진파로 나뉘어 대립하는데, 조선 건국 과정에서 급진파가 승리하며 수조권은 전부 회수되고 과전법이 실시 되는데, 이 과전법이 실시되면서 수조지는 죽으면 무조건 회수되는 쪽으로 바뀌게 되고, 경기도 이외 지역에 수조지가 생기는 것도 금지함.


근데 이 과전법이 고려의 토지제도에 비하면 선진적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없진 않아서 여러 변형이 이뤄짐.

조세가 원론적으로는 1/10이었지만, 이러저러한 명목이 추가되면서 2/10까지 걷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거든.

그래서 수조권자가 직접 조세를 걷는 방식(이를 직전법이라고 함)에서 관리가 파견되어 대신 조세를 거두는 관수 관급제가 실시되고, 후에는 아예 수조권이 사라지고 녹봉으로 완전히 대체되어버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