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자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권9 > 인종공효대왕 > 인종 4년 > 2월 > 이자겸과 척준경이 궁궐을 불태우다

음력 1126년 2월 26일 임술,
양력 1126년 3월 21일

장군 이록천·김단·김언은 도망쳐 숨어서 면하였다. 이날 궁궐이 불타버리고 오직 산호정·상춘정·상화정의 세 정자 및 내제석원의 낭무 수십 칸만이 겨우 보존되었다. 백관은 낭패하여 달아나 흩어졌는데 직사관 김수자만이 홀로 국사를 짊어지고 산호정 북쪽에 이르러 땅을 파 이를 숨겨 다행히 불에 타 없어지는 것을 면하였다.


고려사 > 권98 > 열전 권제11 > 제신 > 김수자

김수자는 자가 계보이며 옛 이름은 김리이다... 인종 때 직사관이 되었는데 이자겸의 난에 궁궐이 연달아 불에 타버렸다. 김수자는 궁궐에서 숙직하다가 국사를 짊어지고 산호정 북쪽에 이르러 땅을 파고 감추어 둔 덕분에 불타지 않을 수 있었다. 직한림원으로 승진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드니 근시직에 있음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려고 수령이 되기를 청하여 예주방어사가 되어 나갔다가 죽었다. 의종 때 이부에서 아뢰기를, “김수자는 병오년의 난리-이자겸의 난에 사관에 입직하여 몸과 생명을 아끼지 않고 국사를 옮겨 보관하였습니다... 지금 김수자는 누를 끼친 바가 하나도 없고 외관으로 임명되었다가 죽은 예에 따라 공로에 따른 포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심히 애석합니다. 청하건대 옛날의 전례에 따라 관작을 추증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김수자에게 예부시랑 한림시독학사 지제고를 추증하였다.


이자겸의 난 때 다들 도망치기 바쁜 상황에서 홀로 국사를 짊어지고 숨겨서 불에 타 없어지지 않고 온전히 보존하였음


삼국사기 편찬 이전에도


고려사 > 권121 > 열전 권제34 > 충의 > 홍관 > 홍관이 이자겸의 난 때 인종의 곁을 지키다 척준경에게 살해당하다

예종이 일찍이 『편년통재』를 열람한 후에 홍관에게 명하여 삼한 이래의 사적을 모아 편찬해서 바치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권8 > 예종2 > 예종 11년 > 11월 > 왕이 편년통재 속편 편찬을 지시하다

음력 1116년 11월 미상

왕이 『편년통재』를 열람하고, 보문각학사 홍관 등에게 명하여 삼한 이래의 사실들을 수집하여 속편으로 바치도록 하였다.


편년통재 속편처럼 삼한 이래의 사적들을 수집해서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만약 김수자가 국사를 숨기지 않고 도망쳤다면 그대로 불타 없어져서 이후 편찬된 삼국사기의 고대사 내용도 더욱 빈약해졌을 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