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의 최전성기이면서 명군인 람세스 2세 사후에 제19왕조는 얼마 못 가 멸망하고 제20왕조가 창건됨.


제19왕조가 람세스 2세 사후에 빠르게 붕괴해버린 이유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다는 점도 크지만, 보기에 따라서 내부적으로는 람세스 2세가 원인 제공자임. 


일단 너무 장수했다는 게 문제인데, 자식들이 애비보다 먼저 줄줄이 죽어버리니 후계자 풀이 쪼그라 들어서 왕권에 치명타가 되기 때문. 당장 고왕국 때 제6왕조의 페피 2세가 무려 94년(보수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65년으로 보는데 이것도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님)이나 재위한 바람에 후계구도가 엉망이 되어버리고, 또 지나치게 오래 산 만큼 무능해서 페피 2세가 죽은 뒤에 고왕국은 얼마 못 가 멸망하고, 약 140년간 극심한 혼란기인 제1중간기가 도래하게 됨.


람세스 2세도 사망했을 때 나이가 90살이었고 재위 기간도 66년이니 너무 길었다. 여기에 람세스 2세는 같은 지위를 지닌 아내들이 여러 명이었고, 친자식들이 100명 정도나 될 정도로 너무 많아서 후대에 왕위 계승권 가지고 내전 일으키기 딱 좋은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람세스 2세의 직계 후계자인 메르넵타가 사망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왼쪽은 내전 선수 1번이자 메르넵타가 지명한 후계자인 세티 2세, 오른쪽은 내전 선수 2번인 아멘메세스.>


메르넵타가 세상을 뜬 후 그가 지명한 후계자인 세티 2세가 파라오가 되었지만 하이집트에서 멀리 떨어진 누비아에서는 불온한 분위기가 돌았다. 정확한 출생은 알 수 없지만 왕가의 일원으로 보이는(아마도 세티 2세와는 이복형제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람세스 2세의 친아들일수도 있음) 아멘메세스가 세티 2세의 후계자 지명에 반발하여, 메르넵타 사후 5개월 째에 상이집트와 누비아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고 파라오를 자칭함.



위 지도에서 보이듯이 아멘메세스는 누비아 지역에서 스타트를 끊고 메르넵타 사후 5개월 째에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함. 당시 쿠시 총독이던 카엠티르, 테베의 아문 대신관인 로이라 불린 로마(Roma called Roy)가 아멘메세스에 협력했는데, 아부심벨을 넘어가는 데 8개월을 소비했을 정도로 초기에는 진격속도가 느렸다. 하지만 상이집트에 진입하자 속도가 빨라져서 그 중심지인 테베는 메르넵타 사후 18개월(반란 후 13개월)에 함락되었고, 그로부터 2달 만에는 헤라클레오폴리스와 파이윰 지역까지 장악하고 세티 2세를 압박했다. 


하지만 아멘메세스는 세티 2세를 권좌에서 완전히 끌어내리는 데는 실패했고 사망해서 왕가의 계곡 KV10 무덤에 묻혔는데, 세티 2세가 반란을 진압한 뒤 철저한 기록말살 조치로 무덤을 강제로 열고 부장품은 전부 빼낸 뒤에 미라를 부숴버렸음. 모든 벽화와 부조 등에서 왕명과 그림을 지운 건 당연했고. 아멘메세스에게 협조했던 고위 관료 중 카엠티르는 똑같이 기록말살형을 받았고, 로이라 불린 로마는 기록말살은 피했지만(대영박물관에 이 사람의 화강암 상이 전시되어 있다.), 사후에 뒤를 이은 아들인 바켄콘수 2세(Bakenkonsu II)는 아버지가 아멘메세스에게 협조했다고 해서 물려받은 대신관 직에서 잘렸음. 이렇게 내전 1라운드에서 승리한 세티 2세는 반란 진압 1년 만에(재위 6년차)에 요절했다.



세티 2세 사후에 파라오에 즉위한 인물은 십타(Siptah)였는데, 십타가 파라오에 오를 수 있게 해준 인물이 한 명 있는데 재상인 라멘세 카멘테루(Ramensse Khamenteru, 다른 이름은 베이Bay)의 활약이 컸다. 시리아 하란 지방이나 후르리인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사제로 일하다가 세티 2세 시기에 왕실 서기가 되었고 그가 사망할 무렵에 재상이 된 걸로 보임. 십타의 즉위에 공이 컸는지 왕가의 계곡에 자기 무덤을 건설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졌고. 십타 재위 초기에 묘사된 부조를 보면 십타와 비슷한 크기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십타의 재위 5년 차에 베이는 반역자로 찍혀서 처형되었고 왕가의 계곡에 건설중이던 무덤은 십타의 지시로 건설 중단되었다. 베이와 함께 사실상 이집트를 통치하던 인물이 한 명 있었는데 세티 2세의 계비이자 십타에게는 계모인 투스레트로, 메르넵타의 딸이며 앞에서 언급한 아멘메세스의 누이로 추정하는데 엄마가 똑같이 타카트(Takat) 왕비이기 때문.



 파라오는 십타였지만 재위 당시 10살 어린애였으니 실질적인 권력은 투스레트와 베이가 가지고 있었는데 베이는 십타 재위 5년에 처형되었기에 투스레트가 권력을 사실상 독점하게 됨. 이 와중에 십타가 재위 6년차인 16살에 급사했다. (그래서 보는 시각에 따라선 베이의 처형과 십타의 갑작스러운 사망이 투스레트의 음모라고 보기도 한다)


기회를 엿보던 투스레트는 드디어 단독 파라오에 즉위하게 되지만 그녀의 통치는 재앙이었다. 이미 바다 민족들이 활개치는 시점이라 지중해 무역 네트워크가 망가지면서 경제는 상황이 더욱 나빠졌으며, 레반트와 시리아 일대에서는 이르수(Irsu)라는 군벌이 투스레트와 동맹 맺고 신나게 깽판을 치고 다녔고, 이집트 내에서도 몇몇 도시들이 대놓고 반란을 일으키며 독립을 선언해버림. 여기에 내전 2라운드에 뛰어든 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제20왕조의 창건자인 세트나크테(Setnakhte)다.



이 사람이 대체 누구의 자식인지는 확실하지 않아서 제19왕조의 방계거나 아니면 대귀족 출신의 찬탈자로 봤는데, 현재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람세스 2세의 손자나 증손자가 아닐까 추정한다. 


세트나크테가 활동을 개시한 계기는 십타의 죽음이 기폭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음. 십타가 죽고 KV47에 묻힌 뒤 투스레트가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그 무덤에서 십타의 카르투슈를 지우고 세티 2세의 것으로 교체했다든지, 왕가의 계곡에 자기 무덤을 건설했던 것, 라메세스 옆에 자신의 장제전을 거의 완성 단계까지 지었다는 걸 보면 단독 파라오를 하고 싶다는 속내가 뻔히 보이는데 십타가 갑자기 죽었는데 대놓고 야심을 보이고, 자신도 왕위를 주장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으니 내전 2라운드가 개막되는 건 당연했다.


내전 2라운드는 1라운드 때와 달리 싱겁게 종결된다. 역시 상이집트에서 출발한 세트나크테는 재위 2년 차에 투스레트를 축출했고 제20왕조를 창건했다. 투스레트가 짓던 왕가의 계곡 KV14 무덤에서 투스레트의 이름과 벽화를 전부 지우고 자기 무덤으로 재활용했으며, 장제전도 매우 철저해 파괴해서 1890년대에 처음 발굴을 시도했을 때 주춧돌 몇 개만 남았다고 할 수준이었다. 여기에 십타의 무덤에서 지워졌던 십타의 카르투슈를 복구시켜줬고, 세티 2세는 다른 무덤으로 재매장 시켜준걸 보면 투스레트만 찝어서 증오했던 걸로 보임. 권좌에서 쫓겨난 투스레트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모르지만 결국은 죽었다.


이렇게 내전 2라운드를 종결한 세트나크테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집안 단속을 철저히 했고(카르나크 대신전 복구, 제19왕조의 무덤 복구, 가나안에서 활개치던 이르수 토벌 등등), 그 덕분에 아들인 '최후의 위대한 파라오'인 람세스 3세는 대규모로 침입한 바다 민족을 격파하여 이집트가 완전히 붕괴하는 건 막았다. 하지만 여러 요인으로 쇠퇴해가는 국력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던 수준이라 꾸준히 뒷걸음질 쳤고, 제3중간기가 찾아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