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운신국, 신미제국, 그리고 침미다례


제가 살펴본 많은 논문들은 침미다례를 '신미국'과 같은 실체 또는 후신으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미국'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서'에 등장하는 표현은 '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이고, 중국 사서의 용법을 찾아보면 무슨무슨 '제국(諸國)'이라고 할 때는 '서역 제국'처럼 큰 범위를 지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안식 제국'이나 '대진 제국'과 같은 용례도 있으나, 서역의 큰 나라들인 안식국과 대진국을 '마한 신미'와 비교하는 것은 다소 곤란합니다. 애초에 진서의 편찬자가 '신미'라는 개념을 안식국이나 대진국 등에 맞먹는 큰 범주로 보았다면, '동이 중 마한의 일부분인 신미 제국'이 아니라 그냥 '동이 신미 제국'이라고 서술했을 것입니다.


가장 안전한 해석은 '동이마한(東夷馬韓)'을 주어로 보고, '신미(新彌)'는 원래 '제국(諸國)'을 수식하는 적절한 형용사가 오는 자리였으나 오사로 인해 원래 글자가 와전되어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은 그냥 해석할 수 없는 부분으로 남겨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굳이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제시해야 한다면, '진서' 장화전에는 '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보다 몇 글자 앞에 '신구(新舊)'가 나오기 때문에, 편찬자가 '신구제국(新舊諸國)'이라고 쓰려다가 동일한 자구가 반복되는 것을 아름답지 못하게 여겨 다른 표현으로 고치고자 시도했을 수 있겠고, 이러한 과정에서 모종의 이유로 엉뚱한 글자가 잘못 들어가 지금 전해지는 장화전의 내용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물론 근거가 매우 부족한 추측입니다만, '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이라는 표현에 근거해 '신미국(新彌國)'이라는 가상의 국가를 상정하는 것 역시 근거가 불충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떠한 자료를 통해서도 교차 검증되지 않는 국명이, 그것도 국명임을 확신할 수 없는 애매한 문맥에서 등장한다면, 애초에 국명이 아니거나 또는 오사라는 가설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쯤에서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일본서기'의 침미다례에 대한 기록이 '진서'의 신미국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침미다례'와 '신미국'이라는 두 이름 사이에 모종의 대응 관계가 존재한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발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응 관계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대 한국어 한자음에서 서로 다른 발음을 가지는 한자들이 고대 지명에서 대응 관계를 보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침미다례'의 '침(忱)'과 '신미국'의 '신(新)' 사이의 대응은 '미추홀(彌鄒忽)'의 '추(鄒)'와 '매소홀(買召忽)'의 '소(召)'의 경우와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ㅊ이나 ㅅ이라는 두 자음이 본질적으로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 아니라, '추(鄒)'라는 글자와 '소(召)'라는 글자가 고대에 실제로 비슷한 발음을 가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이를 ㅊ과 ㅅ으로 시작하는 모든 한자에 대해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한편, '침미다례'의 '미(彌)'와 '신미국'의 '미(彌)'는 실제로 일치하지만, '미(彌)'는 고대 한국어 표기에서 매우 흔하게 사용되는 글자이므로 그러한 일치가 특별히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명 이외의 다른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 한, 침미다례와 신미국은 유관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일부 논문에서는 심지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등장하는 마한 소국 '신운신국(臣雲新國)'까지도 침미다례와 연결하곤 합니다. 그런데 '신(臣)'은 마한 소국명에서 첫 글자로만 4차례 나타나는 글자이며, '신지(臣智)'라는 칭호에서도 첫 글자로 나타나므로, 모종의 접두사임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신(臣)'의 후기 고대 중국어 발음이 *gin이라는 데서, '건길지(鞬吉支)'의 '건(鞬)'과 마찬가지로 "크다"를 의미하는 접미사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운신(雲新)'인데, 이것이 '신미'나 '침미다례'와 유사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신(臣)'이 접두사가 아니더라도, ㄱ으로 시작하는 발음을 표기하는 '신(臣)'을 ㅅ으로 시작하는 '신(新)'이나 ㄷ으로 시작하는 '침(忱)'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신운신국'은 ㄱ으로 시작하고, '신미국'은 ㅅ으로 시작하고, '침미다례'는 ㄷ으로 시작합니다. 만약 이 셋이 서로 비슷하다면, 세상에 비슷하지 않은 지명은 없을 것입니다.


(2) 침미다례가 한반도 남서쪽 끝에 있어도 되는가?


이와 같이 '침미다례'에 대한 기존의 관점에 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기존의 학설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침미다례'라는 이름은 '일본서기'에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침미다례가 언급되는 '일본서기' 권9의 기사에는 비자본(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의 7개 나라를 평정한 뒤 군대를 서쪽으로 돌려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7개 나라와 침미다례는 고해진을 통해 지리적으로 접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통설에서는 고해진을 전라남도 강진군으로 보았는데, 강진군은 한반도의 남서쪽 끄트머리에 해당하므로, 앞서 등장하는 7개 나라의 위치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조선 시대의 지명을 근거로 한 비정이므로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구계소(舊溪所)'를 음차 표기로 보고 삼국 시대의 '고해진(古奚津)'과 비교한다는 데는 설득력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이보다 훨씬 나은 해결책이 있습니다. 바로 고해진을 곡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등장하는 곡성의 백제 시대 지명은 '욕내군(欲乃郡)'인데, 백제의 관습에서는 한자음을 성부에 따라 통일하는 경향이 매우 강해, 예컨대 '욱(郁)'을 '유(有)'와 같이 읽고, '진(眞)'을 '진(鎭)'과 같이 읽었음이 확인됩니다. '침(沈, 枕)'을 '탐(耽)'으로 읽은 것 또한 그러한 예입니다. 따라서 '욕(欲)'은 경덕왕에 의해 개명된 이름에서 보듯 실제로 '곡(谷)'에 해당하는 발음으로 읽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욕내(欲乃)'는 칠지도의 제작에 사용된 철의 산지로 유명한 '곡나철산(谷那鐵山)'의 '곡나(谷那)'에 정확히 대응합니다.


여기서 '나(那)'는 고구려나 신라 지명에서 보듯 "강"을 뜻하는 고대 한국어입니다. '곡나(谷那)'의 '나(那)'가 "강"을 의미한다는 점은 '일본서기'의 칠지도 기사에서 백제 사신이 곡나를 강 (섬진강?)의 발원지로 묘사한다는 점에서도 지지됩니다. 그런데 '곡나(谷那)'에서 '나(那)'를 뺀 '곡(谷)'은 무엇일까요? '고해(古奚)'가 '해(奚)'가 ㄱ 발음을 나타내므로, '곡(谷)'은 실제로 2음절 '고해(古奚)', 고대 한국어 발음으로는 *kɔkɛ [고게]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마한 '구해국(狗奚國)'의 '구해(狗奚)'와도 동일한 발음입니다. 한편으로 '나(那)'와 '진(津)' 사이의 대응은 '웅진(熊津)'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고해진을 곡성으로 본다면, 침미다례 도륙 기사의 시점을 칠지도와 유사한 시기, 즉 5세기 중반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해진에 대해서는 평정하거나 도륙했다는 등의 기록이 없으므로 이미 백제의 영역에 속했다고 볼 수 있고, 칠지도 기사에서 곡나철산은 백제의 서쪽 경계로 묘사되므로, 곡나철산 (고해진) 동쪽의 영역화가 완료된 뒤 서쪽의 영역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국경 의식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해진이 곡성이라면 침미다례는 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3) 침미와 다례


'침미다례'는 사실 '침미'와 '다례'의 연칭입니다. 기존 연구를 조사하던 도중 전영래 (1985)의 논문 '백제남방경역의 변천'에서 침미다례를 침미와 다례로 나누어서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해당 논문을 직접 읽어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저자가 어떤 근거로 그러한 판단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결론적으로는 훌륭한 판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침미다례'는 너무 깁니다. 고대 한국어 지명 중 한자 표기로 4글자씩이나 되는 것은 흔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본서기'에 기록된 '구마나리(久麻那利)' 같은 지명들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일본서기'의 정형화된 일본어 음차 표기 체계에서 한자 1글자가 반드시 고대 일본어의 1음절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실제 한반도에서 '구마나리' 식의 표기가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침미다례'의 '침(沈)'은 일본어에서 사용되는 음차 표기자가 아니므로, 백제의 표기를 그대로 옮겨적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침미다례'가 실제로 하나의 지명인지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침미다례'라는 지명이 존재했다면, 어차피 '침'과 '미'의 ㅁ이 중복되므로, 고대 한반도의 일반적인 표기 경향에서는 '침다례'라고 적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침미다례'를 '침미'와 '다례'로 나눈다면, '일본서기'의 백제 부흥 운동 관련 기사에서 매우 유사한 두 지명의 쌍을 찾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바로 침복기성(枕服岐城)과 저례성(弖禮城)입니다. '침복기성'은 '침미'와 '침(沈, 枕)'이 일치하는데, 이 한자는 고대 한국어 표기에서 흔하게 쓰인 한자가 아니므로, 단순한 우연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일본어에서 te [데]로 읽으므로, '저례'는 '다례'와 비슷합니다.


천명개별 2년 음력 8월 27–28일 (서기 663년 10월 4–5일): 백촌강 전투의 패전.

음력 9월 7일 (서기 663년 10월 13일): 주유성의 항복, 침복기성(枕服岐城)의 처자들에게 나라를 뜰 것을 알림.

음력 9월 11일 (서기 663년 10월 17일): 무저(牟弖)를 떠나 저례(弖禮)에 도착.

음력 9월 24일 (서기 663년 10월 30일): 좌평 여자신,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 등이 저례성에 모임.

음력 9월 25일 (서기 663년 10월 31일): 일본으로 출발.


침복기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습니다만, 사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대놓고 똑같은 지명이 나옵니다. 바로 백제의 '두부지현(豆夫只縣)', 통일 신라 시대에 개명된 명칭으로는 '동복현(同福縣)'입니다. '침(枕)'의 백제식 한자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대 한국 한자음으로 말하자면 '탐(耽)'에 해당하는 *tɔm [도ㅁ]인데, 편의를 위해서 이것을 *tɔ [도]의 발음을 가지는 '두(豆)'로 표기하거나, 또는 ㅁ을 ㅇ으로 바꾸어 '동(同)'으로 표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지(只)'는 고대 한국어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아시는 바와 같이 고대 한국어에서는 ㄱ으로 시작하는 발음, 즉 *kɛ [게]였습니다 (전통적인 고대 한국어 재구에서는 *ki [기]로 읽습니다만 아무튼 ㄱ으로 시작한다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는 통일 신라 시대 이름인 '동복현'의 '복(福)'을 통해서도 입증됩니다. 동복현은 현재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으로 이어집니다. 곡성에서 그럭저럭 가깝습니다.


'저례'는 전라남도 영암군으로 비정할 수 있습니다. 영암군의 백제 시대 지명인 '월내(月奈)'의 '월(月)', 즉 "달"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월(月)'의 한자음은 고대 한국어에 없는 발음이므로 음차자일 수 없고, '월(月)'을 '달'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은 통일 신라 시대에 개명된 지명 '영암(靈巖)'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나(奈)'는 "강" (또는 "나루")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분리할 수 있는 요소입니다. 백제 부흥 운동의 최후를 다루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저례성은 백촌강 전투 패전 직후 일본군 장수들이 주둔했던 곳이며, 즉 한반도 남서쪽 해안에서 찾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영암군은 이러한 조건에 부합합니다.


중간에 나오는 '무저(牟弖)'는 어디일까요? '무저'는 무진주(武珍州)의 명칭이기도 한 '무진(武珍)'에 대응합니다. '무진(武珍)'이라는 명칭은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의 '미동(未冬)' 또는 '미다(未多)'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므로, '무저(牟弖)'가 가리키는 위치는 이들의 비정되는 위치인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백제 부흥 운동 최후의 거점들은 화순, 나주, 그리고 영암 등으로, 영산강 유역에 분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4) 결론


침미다례는 '신미국' 또는 신운신국과 유관하다고 보기 어려우며, 특히 '신미국'은 아예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그 존재를 전제로 하는 모든 학설은 세심하게 재검토될 필요가 있습니다.


'침미다례'라는 이름은 사실 '침미'와 '다례'로 나눌 수 있으며, '침미'는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다례'는 전라남도 영암군으로 비정됩니다. 이 두 지명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므로, '침미다례'라는 것은 동쪽으로는 화순부터 서쪽으로는 영암까지, 영산강 수계의 남쪽에 영산강의 지류들을 따라 형성된 다양한 세력들의 총칭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편, 침미다례 관련 기사에 등장하는 '고해진'은 칠지도 기사의 '곡나철산'과 마찬가지로 백제 욕내군, 즉 현재의 전라남도 곡성군으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