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비는 고대 한국어 연구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글에서는 광개토왕비에 나타나는, 5세기 초의 고구려인들이 자국이 아닌 나라, 자국 바깥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한 '백잔(百殘)'과 '예인(穢人)' 두 단어에 대해 역사언어학의 관점에서 살펴봅니다.


(1) 백잔(百殘)


이른 시기의 고대 한국어 표기법이 대체로 음차 위주라는 데는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백잔(百殘)'이 음차 표기일 가능성은 고려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백잔(百殘)'은 의외로 고대 한국어의 음차 표기일 수 있습니다. 그 단서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진한에 대한 기록은 "진한은 중국인 망명자들이 세운 나라이며 중국어와 비슷한 언어를 사용한다"라는 주장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예컨대 '진한(辰韓)'이라는 나라 이름이 중국 진(秦)나라에서 따온 것이라든지, 진한 사람들이 "나라"를 (중국어와 마찬가지로) '방(邦)'이라고 한다든지, 진한 사람은 낙랑을 '아잔(阿殘)'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중국어로 풀이해 "남아있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는 등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민족의 흔적을 먼 땅에서 찾고자 한 옛 중국인들의 부회에 불과합니다.


예컨대 '진한(辰韓)'이라는 명칭은 명백하게 '진국(辰國)', '진왕(辰王)' 등과 연관이 있는 것이지 진나라에서 따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 '방(邦)'은 고대 중국어로 *pˤroŋ인데, 매우 이른 시기의 고대 한국어 음차 표기를 보면 어말에 *Cra{m, ŋ} 꼴의 한자음이 흔하게 사용됩니다. '동명(東明)', '왕험(王險)', '위나암(尉那巖)'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후기 고대 중국어의 *-oŋ을 *-awŋ~*-aŋʷ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는 점, *ŋʷ은 *m과 *ŋ의 중간적인 성질의 발음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pˤroŋ은 비록 *o와 *a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Cra{m, ŋ} 꼴 한자음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고대 한국어에 실제로 존재했던 어떠한 발음 특징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초기 고대 한국어 음차 표기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명(東明)'은 고대 한국어 *tɔmɔr (현대 한국어 '드물다'의 어근), '왕험'의 '험(險)', '위나암'의 '암(巖)'은 삼국 시대 지명에 '홀(忽)'로 나타나는 고대 한국어 *kɔr에 대응하므로, 초기 고대 한국어 음차 표기의 어말 *Cra{m, ŋ}은 *CVr에 대응하는 것이고 (후대에 탈락한 모종의 접미사가 붙은 형태를 반영함), 그렇다면 동일한 규칙적인 대응에 따라 중국인들이 '방(邦)'이라고 생각한 *pˤroŋ이 다름아닌 후대의 '벌(伐)'에 해당하는 고대 한국어 단어의 발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잔(阿殘)' 또한 이러한 식으로 고대 중국인이 고대 한국어 단어를 듣고 비슷한 발음의 중국어로 해석한 부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잔(阿殘)'의 뜻풀이에서 동방인(東方人)은 "나[我]"를 가리켜 '아(阿)'라고 한다는 사실이 언급되지만, 이 '동방인'은 어떤 집단을 지칭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만약 진한 사람들의 언어에서 "나"를 '아(阿)'라고 했다면, '진한인'이라고 언급하지 '동방인'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阿)' *ʔˤaj와 '아(我)' *ŋˤajʔ는 고대 중국어 발음이 유사하므로, 여기서 말한 '동방인'은 아마도 중국어의 어떤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아잔(阿殘)'에 대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 편찬자의 해석은 완전히 엉터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한인이 낙랑 사람을 가리켜 '아잔(阿殘)'이라고 했다는 기록 자체는 사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편찬자가 진한인이 중국에서 왔다고 주장하기 위해 거짓말로 가짜 진한어를 지어낸 것이라면 아예 더 완전히 중국어스럽게 지어냈을 것이고, 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른 단어들은 일반적인 역사언어학적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는 고대 한국어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잔(阿殘)'은 무엇일까요? 이 단어의 앞부분 *ats-는 현대 한국어 '아우' (후기 중세 한국어 azo < *atsV)와 동근일 수 있어 보입니다. 즉 진한인은 낙랑 사람을 "형제"라고 부른 것입니다. 같은 민족의 구성원을 "형제"로 부르는 것은 물론 많은 문화권에서 흔히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뒷부분의 *-an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백잔(百殘)'이 나옵니다. '아우'의 고대 한국어 형태로 재구할 수 있는 *atsV와 '아잔(阿殘)'의 대응 관계는 '백제' *pakVtsɛ (?*pa-k[ɔ]tsɛ, ?*pVrV-k[ɔ]tsɛ)라는 나라 이름과 '백잔(百殘)'이라는 호칭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대응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고대 한국어에서 대상을 부르는 일종의 호칭 (지소적인 것인지 낮춰 부르는 호격에 해당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음)으로서 *-an(V)라는 접미사를 붙이는 현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백잔(百殘)'은 '백제(百濟)'를 (낮춰?) 부를 때의 고대 한국어 발음을 그대로 받아적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시기의 한국어에서 소멸한 고대 한국어의 문법 요소에 대해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이른 기록입니다.


(2) 예인(穢人)


어떤 사람들은 '예맥(濊貊)'이라는 것이 '예(薉~濊~穢)족'과 '맥(貊)족'의 연칭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예맥족은 예족과 맥족이 각각 존재했고 그 둘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 예맥이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문헌학적으로만 봐도 큰 문제가 있는데, 당시 중국인들이 예족과 맥족을 명시적으로 서로 대비시킨 기록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국 문헌에서 민족명으로서 '맥(貊)'이 처음 등장하는 것이 매우 이른 시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예맥'은 원래 '예(薉~濊~穢)'가 이름이고, '예(薉~濊~穢)' 한 글자만으로 민족을 나타내면 헷갈릴 수 있기 때문에 그 뒤에 오랑캐를 가리키는 '맥(貊)'을 덧붙여 '예맥'이라는 표현을 만들었다는 것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해석일 것입니다. 원래 '맥(貊)'은 전혀 다른 이민족을 가리키는 단어였지만, 중국인들이 고대 한국어 화자들과 처음 접촉한 시기에는 원래의 맥족은 소멸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별 생각 없이 '오랑캐'의 일반 명사로 재활용했을 것입니다.


'예(薉~濊~穢)'의 고대 중국어 발음은 *ʔwajs인데, 저는 국명 접미사 '반(番~潘)'과 '패(沛~浿)'의 대응을 근거로 이 *ʔwajs가 고대 한국어 *w[ɛ]r(V)에 해당하는 발음을 음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추정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구체적인 부분은 유보하더라도 아무튼 *wV로 시작하는 발음임은 명확한데, 이른 시기의 고대 한국어 지명들 가운데 높은 중요성을 가진 것의 다수가 이 *wV로 시작합니다. 나열하자면 '왕험(王險)', '현토(玄菟)', '위나암(尉那巖)', '위례(慰禮)' 등이 모두 그러한 발음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조선과 고구려와 백제의 수도 이름이 모두 같은 발음으로 시작하고 그것이 바로 '예(薉~濊~穢)'와 일치한다는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취급하기는 어렵습니다. 적어도 압록강 유역에서 한강 유역까지의 범위에 거주한 고대 한국어 화자들은 자신들을, 또는 자신들이 사는 땅을 '예(薉~濊~穢)'라고 불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반면 '맥(貊)'과 같은 발음이 들어가는 고대 한국어 지명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즉 '예(薉~濊~穢)'가 고대 한국어 발음을 고대 중국어로 받아적은 이름인 것과는 달리, '맥(貊)'이라는 명칭에는 그 바탕이 된 고대 한국어 실체가 없고 중국인들이 막연히 이민족을 부르는 단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맥국(貊國)'이니 '양맥(梁貊)'이니 하는 것들은 한반도의 어떤 집단을 가리키기 위해 후대에 창작된 한자 표기일 뿐, 예컨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일본 열도의 어떤 이민족을 한자로 '숙신'이라고 적었다고 해서 그들이 진짜로 만주의 숙신족이 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맥'의 '맥(貊)'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광개토왕비에 등장하는 '예인(穢人)'이라는 표현을 증거로 고구려인이 '예족'이 아니라 '맥족'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심지어는 그 어떠한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 '대수맥(大水貊)'이라는 괴상한 명칭을 창작해낸 사람들도 있습니다. 진한의 국명을 '진(秦)'으로 풀이한 것이 중국인의 부회이듯이, '소수맥(小水貊)'의 '소수(小水)'를 "작은 강"이라는 뜻으로 간주한 것 또한 중국인의 부회에 불과할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런 식의 주장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습니다. 고구려와 관련해 '소수(小水), '대수(大水)'는 오로지 '소수맥(小水貊)'의 어원을 풀이하기 위한 문맥에서만 등장하고 이것이 다른 기록을 통해서는 전혀 검증되지 않으므로, 자신이 모르는 언어인 고대 한국어의 어떤 발음을 듣고 진나라를 떠올린 중국인이 진한을 진나라 망명자들이 세운 나라라고 '상상'했듯이, 고대 한국어의 어떤 발음을 듣고 "작은 강"이라는 중국어를 떠올린 중국인이 그것을 "작은 강에 사는 오랑캐[小水貊]"라는 뜻이라고 '상상'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다시 광개토왕비의 '예인(穢人)'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만약 고구려인이 예족이라면 왜 '예인(穢人)'을 이민족인 것처럼 말했을까요? 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고구려가 세워진 순간 고구려인은 예족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별개로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근대적인 관점입니다. 비교적 가까운 시기의, 광활한 다민족 제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에서조차도 지배층은 자신들을 '튀르크'가 아닌 '오스만인'이라고 불렀고, '튀르크'는 피지배 계급의 호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나서야 귀족이든 평민이든 같은 '튀르크인'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고구려인, 특히 지배 계급의 고구려인들은 예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예인'이 아니라 '고구려인'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예인'을 타자의 명칭으로 전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지 않느냐고요? 한강이 왜 '한(漢)강'인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떤 일본 학자들은 '예(薉~濊~穢)'의 한국 한자음이 "일본"을 가리키는 후기 중세 한국어 단어 '예' yey와 같다는 점을 지적하며 '예(薉~濊~穢)'와 '왜(倭)'가 동일한 어원을 가지는 민족명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논할 가치가 별로 없는 엉터리 주장입니다만, '예(薉~濊~穢)'에 대해 고대 한국어 *wɛrɛ를 재구한다면 이것이 "일본"을 뜻하는 후기 중세 한국어 '예'와 대응할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일본'을 뜻하는 '예'가 '왜(倭)'에서 온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왜(倭)'는 고대 한국어에서 *r로 반영될 만한 부분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한때 고대 한국어 화자들은 '예(薉~濊~穢)', 전기 고대 한국어 발음으로 *wɛrɛ라는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은 나라들이 세워지면서 이러한 정체성은 점점 옅어졌습니다. 국경 안에 사는 사람들은 나라 이름으로 정체성을 삼고, 국경 밖에 사는 사람들을 "이 단어"로 부르게 되어, 원래 자민족의 명칭이었던 "이 단어"는 점차 외국인, 이민족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변화했습니다. "이 단어"는 삼국 시대 중반을 지나고 나면 엉뚱하게도 한반도 북부와 중부에서는 중국인을, 한반도 남부에서는 일본인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한때 "예족의 강[郁里河 = 慰禮 + 河]"으로 불린 강은 "중국인의 강[漢水]"이 되었습니다. 삼국 시대에 이민족의 범칭으로 변화한 "이 단어"는 통일 신라 시대를 거치면서 다시 경주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했던 이민족, 즉 일본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완전히 고정됩니다. "이 단어"가 바로 후기 중세 한국어의 '예'로 이어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