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피를 빨게 해줄테니 자지를 빨아줘 https://arca.live/b/arknights/79559959


글 재밌길래 인물만 대충 바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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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몇 시간 째 깨어있지?"

 "방금 주사를 꽂았으니까 아마 서른 시간. 아니지, 마흔 시간인가? ...잠깐, 그러면 한 대 더 꽂아야 하잖아."





 자리를 박차며 벌떡 일어서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책상 위를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빈 주사기를 하나 집어들어 팔에 찔러넣곤 괴성을 내흘리기 시작했다.





 "으오오오오..."





 주사기가 텅 비었다는 것도 몰랐던지 제 딴에는 약빨이라도 받은 듯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한다. 도대체 저 덜떨어진 꼴을 보고 그 누가 함장이라는 학식 높은 직함을 떠올릴 수 있을까. 이성과 지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몰골을 보고있으니 방금까지 미친듯이 몰려들던 수마도 순식간에 물러가고 말았다. 아마 저지능이 옮을까봐 무서워서 도망간 게 틀림없었다.





 '드디어 돌아버리고 만 건가...'





 시계를 보자 시간은 오전 세 시 반. 이 방에 틀어박힌 후 해가 뜨고 지는 걸 한 번씩 봤으니 아마 서른 시간이 맞을 것이다. 물론 이 정도 기행쯤이야 평소에도 숨쉬듯 일삼는 놈이긴 했지만, 이번에 맞닥뜨린 고난의 크기를 생각하면 더더욱 이해가 갔다. 그래, 남이야 뭐 어떻든 본인이 제일 힘든 법이겠지. 그러려니 하자.





 "그런고로 월하, 자지 빨아줘."

 "...단단히 돌아버렸군 그래."





 미친놈. 그냥 원래부터 미친놈이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지?"

 "...나, 너무 힘들어. 일이 너무 많아."

 "당연히 많겠지. 밀려있던 세 명 분의 일을 동시에 처리하고 있으니까."

 "내가 내 일을 안하는 거야 당연하다 쳐도, 왜 나머지 두 사람은 일을 안하고 간 건데."

 "그건 네가..."

 "애초에 왜 내가 일을 해야해? 난 일 하기 싫어. 하기 싫어하는 사람한테 맡겨봤자 효율도 안나온다고."

 "......"

 "그렇게 맨날 일, 일 거릴 거면 그냥 자기들이 하던가. 기왕 하는 거 공명이랑 리타가 내 몫까지 열심히 일하면 되잖ㅇ"

 "다 네 놈이 자초한 거잖아!"





 콰앙!





 월하가 책상을 내리치자 서류 더미들이 날아올랐고, 책상 한편에 쌓여있던 종이컵들도 덩달아 몸을 기울이다 떨어져내렸다.





 "히이이익...!"





 반쯤 남아 차갑게 식은 커피가 엎질러지며 스타킹으로 젖어들었지만 월하에겐 느껴지지 않았다. 나부끼는 종잇다발들 사이로 함장을 노려보는 눈은, 들끓는 격노로 인해 전에 없을 정도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호다다닥-





 함장은 집무실 구석으로 기어가 몸을 웅크리고 바들바들 떨었다. 너무나 기가 차는 광경인 나머지 순간 익살스러워 보일 법도 했으나, 월하의 두 눈은 여전히 불이라도 뿜을 듯 맹렬히 이글거리고 있었다. 장장 삼 십 시간에 걸친 연속 근무의 분노가 쉽게 사그라들 리 없었다.





 "ㅁ, 뭐야... 갑자기 왜 그러는데..."

 "네 놈이, 네 놈이 공명을 파견 보내지만 않았더라도!"





 모두 이새끼 때문이었다.





 "화내지 마라... 내 무섭다..."





 이 새끼가 공명을 파견 보낸 탓에, 나는 끝이 안보이는 서류의 산에 파묻혀 죽어가고 있었다.











01.



 사건의 경위는 일주일 전, 공명과 리타가 거품우주로 파견을 나가면서 시작됐다. 세부적인 임무 내용은 다음에 갈 거품우주 전역에 걸친 대형 붕괴수 군락의 완전 소탕. 형태는 완수 시까지 현지 체재 및 물자 역시 현지 조달. 그리고 수행 인원은 공명과 리타, 단 두 명.





 "너야말로 왜, 대체 왜 그런 거야!"





 만약 중간에 다른 어떤 권한자를 거치기만 했어도 이런 터무니없는 임무 따윈 바로 반려되고 이 새끼는 공명의 손에 처참하게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개미친새끼가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명령서의 작성부터 결재까지 자기선에서 끝내버리고 말았고, 심지어는 긴급명령의 형태로 내려온 바람에 아무리 공명이라고 한들 무를 수도 없었다.





 "...아니, 리타가 라면을 못 먹게 하잖아."

 "리타는 그렇다 쳐, 그럼 공명은?"

 "...공명은."





 출발 당일, 비보를 들은 동료들이 비행장을 가득 메웠다. 위로의 분위기 속에서 리타의 표정은 시종일관 어두웠고 등 뒤론 검붉은 오라가 음울히 일렁거리고 있었지만, 의외로 공명은 담담한 표정으로 인파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만악의 원흉은 자신의 집무실에 틀어박힌 채 블라인드 사이로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어쩐지 그날 꾼 꿈이 께름칙했던 나도 그 옆에서 눈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그년은 그냥 꼴보기가 싫었어."

 "......"





 그렇게 헬리케리어에 오르던 도중이었다. 마지막 계단을 딛고 사라지기 직전 찰나의 순간, 공명이 이쪽을 흘겨보았다. 눈을 한 번 깜빡일 정도의 극히 미세한 순간이었지만, 그 청아한 눈빛에 담겨있던 확고한 의지를 읽어버리고야 말았다. 아주 간결하고 단순했으나 그만큼 고순도로 정제된, 더없이 명백한 살의였다.





  너흴 죽이겠다.





 '...월하야, 우리 좆된 거 같은데.'

 '아아, 그런 거 같ㄱ... 어, 우리?'







 "아무튼 한계야. 더이상은 못해. 그냥 자지나 빨아줘."

 "...씨이바알..."





 왜 나한테까지 이러는 건데.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진 뒤였다. 리타는 자신의 업무 대행자로 함장을, 공명은 함장과 나를 동시에 정해두고 가버렸다. 심지어 파견이 통보된 순간부터 그 둘은 일에 손도 대지 않았고, 굳이 자신들의 손을 거칠 필요가 없었던 각종 결재 권한을 모두 자기들 앞으로 돌려놓기까지 했다. 그 결과가 며칠 째 불이 꺼지지 않는 집무실, 그리고 함께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무간지옥에 갇혀버리고 만 지금의 모습이었다.











 "그러지 말고 한번 들어봐봐. 너한테도 그렇게 나쁜 이야기는 아니니까."

 "...하아."





 월하가 힘빠진 한숨을 내뱉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배째라는 듯 뻔뻔한 태도에 배뿐 아니라 오장육부까지 모두 갈라주고 싶었지만 메스를 들긴커녕 이젠 화를 낼 기력조차 없었다. 월하도 이미 한계였다. 책상 위 그녀의 키보다 높게 쌓인 문건들을 관성적으로 읽어나가고 있었을 뿐 글씨들이 검은 무늬로 보인지 오래였고, 생각이 없다는 생각조차 없을 정도로 멍했던 머리는 눈만 안 감았을 뿐이지 뇌사상태나 다름없었다. 한참 전부터 다리를 타고 흐르던 커피를 이제와서야 눈치챌 정도로 그녀는 몹시 지친 상태였다.





 '휴지가... 뭐, 됐나.'





 월하는 굼뜬 시선으로 닦을 걸 찾는 듯하더니 이내 포기하곤 굴러다니는 중이를 하나 집어들어 대충 비벼닦았다.





 "말해봐. 들어나보게."

 "...어, 진짜?"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ㅇ, 오케이! 그럼 일단..."





 예상치 못한 긍정적인 태도. 함장은 서둘러 자세를 고쳐앉곤 방구석에서 말을 이어갔다.





 "일단 월하, 너는 내 피를 원해. 맞지?"

 "맞아. 일단은 말이지."

 "그것도 의학연구가 아닌 섭취를 목적으로."

 "그렇긴 하지."

 "내가 아무 조건없이 피를 제공한다고 하면 마다하지 않을 거고."

 "잘 알고 있군."

 "하지만 그 전제는 성립하지 않아. 너한테 피를 제공하는 환경부터가 이미 내가 밑지고 들어가는 거니까."

 "......공명인가."





 함장이 막 깨어났을 무렵, 월하가 함장을 마취시킨 후 강제로 자신의 방으로 끌고가는 일이 발생했다. 다행히도 주삿바늘, 아니, 소방용 호스만한 관이 함장의 가슴을 관통하기 직전 공명과 리타에 의해 구출되었고, 하마터면 나오자마자 말라비틀어진 미라가 되어 다시 관에 들어갈 뻔했던 초유의 사건이었다. 이후 자신을 대상으로 열린 재판에서 월하는 생명을 뺏을 의사와 관계 없이 기호품을 향유할 권리를 주장했으며, 어두운 복도의 사각에 숨어있다 목덜미에 마취제를 꽂아넣은 건 계획적이었다고 인정했지만, 이는 약물에 의한 일방적인 납치가 아니라 불필요한 과정을 생략한 초대였다고 아주 태연하게 항변했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공명은 월하가 자신의 허가 없이 함장에게 다가갈 수 없도록 접근금지 규정을 신설했다. 그리고 공명이 내린 개인적인 처분에서, 월하는 사지가 결박당한 채 차양막이 없는 활주로에 맨몸으로 내던져졌고, 반나절이 지나고 나서야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공명에게 용서를 구했다.





 "뭔가 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어? 셋 다 히페리온에 있을 땐 아무 일도 없더니, 지가 출장이면 우리 둘 중 하나도 꼭 외근이 잡히는 거."

 "...그야 심증은 있었다만."





 그의 말대로였다. 공명이 있을 때 함장을 초대하려고 들면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들켜버리거나 도중에 현행범으로 잡혀서 처분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부재중일 때를 노리기 위해 계획을 짜놓으면, 공명이 출장간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둘 중 한 명의 대외 교섭 및 파견 소식 역시 연달아 들려왔다. 월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든 몸을 비틀고 틈을 비집어가며 몇 번의 시도를 해내었으나, 결국엔 숨만 붙여놓을 뿐인 가혹한 처벌과 범행 미수라는 초라한 결과만이 남았다.





 "즉, 내가 그대의 피를 취하고 싶다면..."





 공명이 본함에 있을 적엔 택도 없으니 자리를 비운 때를 이용해야 하고, 설령 어찌저찌 내보냈다한들 둘을 떨어뜨릴 계획을 짤 시간을 주지 말아야 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긴급명령이로군."





 긴급명령. 히페리온에서 함장만이 발할 수 있는 초월적 특권. 대상이 된 자는 누구든 간에 명령의 내용을 즉각 이행해야 했고, 이에 반하였을 땐 히페리온에서 누리는 모든 지위와 권리를 박탈 당할 수 있었다. 사실 이곳에 재직하는 동안 한 번도 발휘된 걸 본 적이 없어 잊고 살았는데, 이번에 이 새끼가 사용하는 걸 보고 느꼈다. 이런 말도 안되는 규정이 어떤 놈의 대가리에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그 덜떨어진 발안자 또한 이런 멍청하고 치졸한 방식으로 쓰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을 거란 걸.





 "그래서 이런 일을 벌인 거야?"

 "...? 어, 응. 맞아. 그런 거지. 역시 월하야."





 '...지랄, 딱봐도 얻어걸렸으면서.'





 그것도 이렇게 멍청하고 치졸한 자식한테.







 "...하지만 그대도 알다시피 일회성 전략이야. 이런 사달이 났으니 공명이 가만히 있겠어? 돌아오는 그 즉시 내규 개정부터 하겠지."

 "그래, 네 말대로야. 이번에 마지막이겠지."

 "그리고 그대를 갑판 꼭대기에 매다는 게 먼저일 테고."

 "...그게 바로 이번 거래의 핵심이야, 월하. 나는 아마... 아니, 확실하게..."





 늘어지는 말꼬리를 끝으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월하는 이후 이어질 말을 이미 알고있었고, 함자이 한층 차분하고 숙연해진 목소리로 뻔한 말끝을 이어붙였다.





 "나는 곧 죽어. 월하."





 '......'





  월하는 잠시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공명은 헬리케리어에서 내리자마자 함장을 찾을 거고, 함장은 어디 구석진 데서 숨어있다가 금세 들키곤 도망치다 얼마 못 가 잡히고 말 것이다. 그리고 델타한테 머리가 물린 채로 질질 끌려가며 추하게 목숨을 구걸할 거고, 공명은 박사를 갑판 꼭대기 송신탑에 아주 단단히 매단 후 곧장 조종실로 가 조타수를 잡는다.





 "그것도 아주 비참하게."

 "...음, 무척 참혹하겠지."





 주 조종석에 앉은 공명은 우선 가장 가까이 있는 거품우주의 위치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폭풍의 경로와 속도를 기반으로 최속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항로를 계산하고, 계산이 끝나자마자 함내에 재앙 진입 태세를 발령할 것이다. 공명이 직접 읊어주는 경고 방송은 소름끼칠 정도로 차분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함장의 명복을 빈다.





 "이건 마지막 기회야. 나한테는 물론이고 너한테도 그래. 넌 눈앞의 기회를 못 본 척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곧 모든 외부 구역이 폐쇄되고, 지평선 너머로 거대한 폭풍이 아른거리고 나서야 함장은 절규를 멈추고 삶을 체념한다. 히페리온이 폭풍과의 직선 경로로 진입하고, 공명은 자동 항법 모듈을 해제한 뒤 자기 손으로 가속 게이지를 올리기 시작한다. 핸들을 쥔 손엔 링거 튜브만한 힘줄이 벌떡거렸고, 최대 출력까지 당겨진 핸들이 조금씩 휘고 있었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재앙을 바라보는 공명의 표정은 무감하기만 하고, 눈동자는 마치 티끌 하나 없는 에메랄드처럼 맑게 빛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눈을 감기 전 삶을 되새길 때, 그 마지막이 너였으면 좋겠어. 그러니 부디..."





 이윽고 재앙 속으로 진입하자 거센 진동이 이페리온을 집어삼키고 모든 외부 정보 디스플레이가 먹통이 된다. 조종실의 모두가 다급하게 상황을 주고받는 가운데, 핸들을 지긋이 누르고 있는 공명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다. 그렇게 한동안 소요가 지속되다 항법기기들이 재작동하기 시작하며 선실 앞유리로 서서히 시야가 트인다. 무사히 재앙을 통과한 것이다.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끌어내리거나, 누군가를 위해 때늦은 성호를 긋기도 한다.





 "내 피를 빨고 내 자지도 빨아줘. 월하."





 선미까지 완전히 벗어나고 나서야 공명은 핸들에서 손을 뗐고, 자동 항해로 전환한 후 작게 한숨을 내쉰다. 폭풍이 지나간 뒤의 구름 한 점 없이 쨍한 하늘. 이를 바라보는 공명의 얼굴엔 좀처럼 볼 수 없는 옅은 미소가 떠오른다. 마치 평생의 숙원을 이뤄낸 것처럼, 더없이 평온하고 흐뭇한 미소가.





 '이 정도면 거의 예지몽인데.'





 잠깐 상상만 해볼 요량이었건만 뇌가 지멋대로 시나리오까지 뽑아버리고 말았다. 디테일 면에선 약간의 차이가 있을진 몰라도, 근시일내로 이루어질 함장의 처형식은 아마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찌됐든 그의 말도 대충은 이해가 간다. 생략된 부분이 좀 있긴 했지만, 요점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선택을 서두르란 소리였다. 마치 노련한 장사치 같았다. 자신의 운명마저 저울질하는 모습이 약삭빠르면서도, 언뜻 자신의 처지를 내비치며 상대의 온정에 기대려는 모습이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말에 일리도 있고, 감정을 흔들 줄도 알았으며, 협상 스킬도 이 정도면 꽤나 합리적이었다.





 "...싫어."





 다만 그놈의 거래 조건 때문에 모두 빛이 바래고 말았지만.







 "아아, 그럼 갈아입어 오기 때문에 잠시만 기ㄷ..."





 함장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월하가 말을 마치기 전부터 승리를 직감하고 있던 그였지만, 어쩐지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음절이 들린 것 같았다. 함장의 양 손으로 바지춤을 부여잡은 채 선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만 서서히 돌려 월하를 바라보았다. 월하가 팔짱을 끼곤 심드렁한 표정으로 꼰 다리를 유유히 까딱이고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확신에 차있었는데. 저 모습을 보니 긴가민가 해졌고, 그도 모르게 얼빠진 의문이 입밖으로 튀어나갔다.

 



 "...모라구여?"

 "싫어."





 이전과 똑같은 답을 들은 순간 그의 머릿속엔 두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하나는 반향기관의 장애. 장장 마흔 시간이나 수면을 취하지 못한 데다가 지속적으로 각성제를 들이부었던만큼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었다. 실제로 아까부터 이명마냥 귀가 먹먹한 느낌도 있었으니 아마, 동일한 음절의 단어를 불안한 심리 상태와 비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인해 부정적인 뉘앙스의 다른 단어로 착각한 게 분명했다.





 "이 거래에 응하지 않겠다고."





 둘은 바로 두음 법칙. 아주 심플하고도 유서깊은 감정의 문법이자 여성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은 비범한 통찰의 산물.

 이 법칙에 따르면 여성의 싫어는 질어로, 질어는 곧 좋아로 환원된다.

 싫어. 질어. 그리고 좋아. 나는 싫은 척했지만 실은 그대가 너무 좋아. 이 얼마나 아름답고 완벽한 삼단논법인가.



 즉 둘 중 어느 근거로 본들 월하는 나의 말에 껌뻑 넘어갔고 곧 홍조를 붉힌 채 나의 물건을 입에 물곤 고개를 숙여가며 집어삼키다 목에 닿을 때 쯤 애틋한 신음을 흘리긴 개뿔 방금 뭐라고?





 "아, 아니... 왜? 대체 왜 싫은데!"

 "거래의 기본 원칙이지. 내가 상대의 것을 바라는만큼 상대도 내 것을 바라고 있어야 하지 않나."

 "...상대가 바라는 것."





 그럴 리가.





 "...에이, 설마."

 "에이는 무슨, 그 설마 맞아."





 '......'



 기왕이면 조금만 더 빨리 맞다고 해주지. 왜 하필 이 말에 긍정을 표하는 걸까. 현실로 돌아온 함장에게 남은 건 덧없는 푸념과 허망함 뿐이었다. 하긴, 이쪽이 지레짐작하고 멋대로 내건 조건이었으니 형편 좋게 끼워 맞춘 것에 불과했나. 정말 아무런 흥미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눈동자를 보고있자니 어쩐지 홀가분해진 기분마저 들었다. 이윽고 자신의 패배 이유를 단 한 마디로 압축해버린 월하의 말을 끝으로, 그는 겸허하게 패배를 인정하기로 했다.





 "이 몸은 더이상 그대의 피에 별 관심이 없어. 함장."





 끝났다. 굳게 확신하다 못해 불변이라 믿었던 상수가 끝내 패착이 되었을 줄이야. 그래도 좋은 승부였어, 월하. 이번에는 나의 패배를 깔끔히 인정하겠지만 다음엔, 다음엔 꼭.





 '...다음이 없잖아.'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거든."





 말그대로였다. 주사기로 하도 찔러댄 탓에 말라버린 핏자욱이 함장의 팔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나, 월하의 눈엔 그냥 상처로만 보였을 뿐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물론 한때는 함장의 피에 집착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피 자체가 고픈 것도 없지 않았지만 하지 말라니까 더 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도 했고, 지금도 아무런 대가 없이 피를 받을 수 있다면 받기야 하겠으나, 한 두어 번은 고민하다 선심쓰듯 마지못해 받는 척을 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대의 저승길 길동무가 되는 건 사양이야."





 아니, 생각해보니 받으면 안될 것 같았다.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받은 걸 들킨 순간 그 어떤 변수도 없이 무조건 살해당한다. 월하는 공명에게 받은 처벌들을, 공명의 무자비함과 잔혹함을 떠올렸다. 그녀 나름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은밀하게 움직인들 공명은 귀신같이 나타나선 월하를 갑판 위에 대자로 묶어 놨고,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냐는 공명의 물음에 매번 자신은 단 한 번도 지팡이를 감은 뱀 앞에 선서를 한 적이 없으니 이런 처사는 부당하다고 스스로를 변호했지만 아무 말 없이 재갈을 물릴 뿐이었다. 그리고 땡볕 아래서 노릇노릇 익다 못해 말라 비틀어져 숨이 끊어지기 직전, 월하가 혼미한 정신으로 겨우 잘못했다는 말을 미약하게 읊조리면 공명의 또 어디선가 귀신같이 나타나선 그녀를 풀어줬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치료를 빙자한 한 달 동안의 응급실 연금 처분까지. 그렇게 열 번 째로 응급실 신세를 졌을 때였을까. 살아야겠다는 일념 하에 떨어지는 링거액을 하나하나 세며 꺼져가던 의식을 겨우 붙들다, 월하는 문뜩 깨닫고 말았다. 동족들과 무수히 많은 전장에 나서던 시절보다 의사로 전업한 지금, 훨씬 더 많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걸. 그 뒤로 월하는 상처뿐인 오기를 거두고, 몇 백 년만에 처음으로 상대를 재는 법을 배웠다.



 간단히 말하면 교환비가 안맞았다. 히페리온 본함에는 수없이 많은 송신탑이 있었고, 폭풍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죽어가기엔 남은 삶이 너무 길었다. 이번 접근금지 명령을 어긴 건 과도한 업무 때문이었다고 토로하면, 아무리 공명이라고 해도 충분히 참작해줄 것이다. 월하는 죽음을 불사한 미식가로 기억되기보다는, 의학 연구자로서 천수를 누리고 싶었다.





 "...그럼 그냥 빨아줘."

 "공짜로 피를 주시겠다고? 친절도 하셔라."





  굳어버린 결심을 대변하듯 월하는 책상에 턱을 괸 채 히죽였다. 함장 역시 일부러 모른 체하는 말에 담긴 비웃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절망감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다음. 그에겐 다음이란 게 없었다. 분명 지금 이 순간에도 공명은 자신을 찢어발길 날을 기대하며 리타와 함께 죄없는 붕괴수들을 학살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히페리온에 돌아오는 그 즉시 나를 찾을 거고, 나를 매달 거고, 폭풍 속으로...





 "...아, 그냥 빨아달라고오."





 가만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네. 왜 하나같이 나를 개무시하는 걸까. 라면도 못 먹게 하지 않나, 무슨 숨만 쉬어도 버러지 보듯 하지 않나, 내가 그렇게 곧 죽는다 말을 해도 눈 하나 깜짝 안하지 않나. 그게 그렇게 어려워? 그냥 눈 딱 감고 한 번 빨아주는 게 그렇게 어렵냐고.





 "뭐라고? 곧 죽을 시한부라서 잘 안들리는데?"





 이것 봐라. 내 기분은 신경도 안 쓰고 놀리고 앉아있잖아.

 억울해. 나 너무 억울해. 이렇게 일만 하다 죽는 건 너무 억울하다고.

 내 말이 이해가 안 가? 나 곧 죽는다니까? 왜 공감을 안 해주는 건데?





 "알았으면 그만하고 이리 와서 앉아. 죽을 때 죽더라도 할 일은 해야지."





 ...계속 그렇게 나오시겠다면, 이쪽도 다 생각이 있거든.





 "안 들리나? 빨리 앉ㅇ"





 자고로 궁극의 생각이란, 바로 생각을 멈추는 것. 쌓여만 가던 억하심정에 더해 약속된 파멸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컸던 그는, 스스로 끝없는 퇴행의 길을 걷기로 했다.





 "...빨아줘!! 자지 빨아줘!!!!"

 "어, 어이! 진정해..."

 "응애!!! 자지 빨아줘!!!"

 "멈춰, 멈추라니깐! 이 무슨 추태냐!"

 "응애! 젖줘!!"

 "함장..."

 "응애애애!!!!!"





 빼애액-!





 "......"





 훗날 월하가 말하길, 비록 우리 문명이 겪은 패배가 수없이 많았다지만 그 모든 풍파를 매번 극복해냈고, 그렇기에 인류는 합리적인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이룩할 수 있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을 목격한 그 순간만큼은, 이번에야말로 사회의 몰락을 직감하곤 미래 인류에 대한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렸다며 회고했다.





 '....너무 추해. 어쩜 저리 추할 수가 있지?'





 그저 본능에 모든 걸 내던진 채 팔다리를 버둥대고, 악에 받친 감정뿐인 괴성을 목놓아 내지르며 떼를 쓴다. 본능 아래 짓밟혀버린 이성의 말로와 감정에게 삼켜져버린 지성의 종말. 본디 사회화라는 게 얼마나 무용한지를 몸소 보여주는 행태는, 일찍이 그녀가 목격한 문명의 패배 중 가장 처참하고 추악한, 반박의 여지가 없는 참패 중의 참패였다.





 "...그만! 그만하면 됐잖아!"

 "응애! 응앸... 켁! 케흑, 컥..."





 결국 억지로 소리를 쥐어짜내다 사례가 들렸고, 숨을 고르는 모습조차도 추하기 그지없었지만, 월하는 그제서라도 함장이 좀 잠잠해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통 속에 격동하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희번뜩해지며 자신을 향하자, 월하는 자신의 희망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를 통감했다. 그의 광기는 이제 또다른 국면으로 나아갔을 뿐이었다.





 "...이것들이, 이것들이 나를 무시해?"





 퇴행의 다음은 울분이었다. 가슴 속에 쌓이고 쌓이다 곪아 터져버리고 만 오갈 데 없는 분노. 넘치는 화를 주체 못하는지 함장의 온몸이 부들거렸고,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을 파르르 떨어가며 무언가를 찾는 듯 했다. 그렇게 자기 주변을 한참동안 더듬대던 함장은 발치에 놓인 주사기를 겨우 손에 쥐어들었다. 이윽고 그의 불안한 시선이 서슬퍼런 주사기의 첨단과 경악에 찬 월하의 얼굴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고, 분노에 차 씩씩대던 숨소리가 불안하기만 하던 때였다. 돌연 함장이 주사기를 자신의 팔뚝에다 힘껏 찔러박은 후 지체없이 피스톤을 당겼다.





 "익, 이익...!"

 "ㅎ, 함장! 진정해! 그러다 진짜 쓰러진다고!"





 극도의 불안에 의한 강박성 자해. 예상치 못한 유혈사태긴 했지만 그나마 말로 형용되느니만큼, 이해조차 어려웠던 방금 전보단 피를 보는 지금의 상황이 훨씬 더 나았다. 게다가 마구잡이로 찔렀는데 용케도 혈관에 닿았는지 주사기는 점점 붉게 차오르고 있었다. 피는 그녀의 전문 분야였다. 저 정도 주사기론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는 걸 잘 알고있었지만, 함장의 현재 몸상태를 고려한다면 빈혈로 인한 졸도나, 머리에 몰려있던 피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며 약한 쇼크 정도는 올 수 있었다. 이를 고려해 그를 자극하지 않도록, 월하가 아주 서서히 함자에게 다가가려던 순간이었다.





 "...너네들은 죄다 똥이야, 똥! 에잇, 받아라!"





 더이상 피스톤이 올라가지 않음을 눈치챈 함장이 주사기를 팔에서 뽑았고, 월하에게 겨눈 뒤 엄지를 눌렀다.





 찌익-!





 "...! 이게 뭐하는 짓인가!"

 "...이힣, 이히힣!"





 얇은 핏줄기가 허공을 날아가다 월하의 발밑에서 떨어졌고 두 사람 사이엔 검붉은 점선이 그어졌다. 비록 기대한 것처럼 월하에게 닿진 못했지만 당황하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만족한 함장은 기괴한 웃음소릴 내흘렸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괴성과 함께, 이번엔 사방팔방을 향해 발사하기 시작했다.





 "히힣! 오줌발사!"





 찍, 찌이익-!





 마치 성난 유인원이 인분을 던지는 것처럼 함장은 자신의 분비물을 마구 흩뿌렸다. 실제로 본인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 듯 배설물을 입에 담으며 방안을 핏빛으로 물들여가고 있었다. 바닥. 책상. 모니터. 그리고 빌어먹을 서류더미. 자신을 억압하던 모든 것들을 자신의 색으로 덧칠하며 함장은 희열을 느끼고 있었고, 그 대상엔 월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읏...! 그만! 그만하라니까!"





 팔. 다리. 몸통. 얼굴. 그리고 머리카락까지. 검은 부분은 조화롭고 은은하게, 하얀 부분은 극명히 대비되게. 그러다 문뜩, 싫어하는 여자를 강제로 앉혀두곤 자신의 체액으로 덮어간다 생각하니 박사는 하반신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래, 뭐 별거 있냐. 이게 섹스지.





 찌익, 찍...





 고무패킹이 밀리는 맥없는 소리와 함께 무차별 총기 난사는 끝이 났다. 정신이 돌아온 함장의 눈 앞엔 진득한 냄새의 살풍경이 펼쳐져있었다. 피를 뽑았던 탓인지 머리가 평소보다 잘 도는 느낌이었고, 그덕에 함장은 총기 난사가 주는 교훈을 오롯히 느낄 수 있었다. 방아쇠를 다 당겨버린 뒤 마음 속에 남는 건, 마치 텅 빈 탄창과 같은 공허함 뿐. 그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빈 주사기를 내려놓았고, 찐득한 초연의 냄새를 맡으며 살짝 늦은 감이 있긴 했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돌아보기로 했다.





 "...후우."





 월하한테 구강성교를 졸라대다가 거절 당한 끝에 머릿속 끈을 놓아버렸고, 그렇게 유아퇴행을 일으켜 한바탕 난리를 치다가 홧김에 피를 뽑은 후 온 방안을 피범벅으로 만들어버렸다. 그것 뿐일까. 지금 눈 앞엔 피칠갑을 한 흡혈귀가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는,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사실 피를 쏴대던 중간에 정신이 돌아오긴 했지만, 지금 멈추기엔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에 그대로 주사기를 텅 비워버렸다. 심지어는 어떻게든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종반부엔 거의 월하에게만 주사기를 겨눴으니, 나는 어쩌면 송신탑 꼭대기가 아니라 이 방에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어, 월하?"

 "......"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안괜찮은 것 같다. 내려흘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볼이 평소처럼 창백하지 않고 살짝 불그스레한 걸 보면, 어떻게든 화를 참아내려는 중이 아닐까.





 "...월하, 괜찮아? 월하?"

 "...다 했어?"

 "ㅇ, 아! 응! 미안해! 오늘은 이만하고 쉬는 게 어때? 가서 샤워도 좀 하고. 방은 내가 알아서 치울테니ㄲ"

 "와서 앉아."

 "네."





 호다닥-





 진짜 존나 빨리 앉았다. 이 정도면 가히 역대급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다. 만약 히페리온 의자뺏기 선수권 대회가 열린다면 그 누굴 데려와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시린 쯤은 데리고 와야 좀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하아...





 아니, 그 시린라 하더라도 나와 동등하거나 그 이하. 아마 의자를 먼저 선점해버린 나를 밀어내려다 맥없이 튕겨나가곤 그 큰 엉덩이로 히페리온 외벽에 구멍이라도 안 내면 다행일 것이다. 그래. 이몸이야말로 의자뺏기의 왕. 정점. 그저 GOAT. 숭배합니다.





 하아...





 '......'





 함장이 피범벅이 된 종이를 거꾸로 든 채 고개를 처박고 쓰잘데기 없는 상상에 집중하는 데엔 모두 이유가 있었다. 의자에 앉은 이후부터 왼쪽에서 자꾸만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가까이 있었다. 열기 띤 입김이 정수리를 스치고, 내 것이 아닌 체온을 귓볼로 느낄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밤의 포식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아...





 '시발뭔데뭐야뭔데시발...'





 체온. 그래, 체온. 다른 누구도 아닌 흡혈귀의 체온이 느껴진다는 게 소름끼치기 그지없었다. 그만큼 열이 받았다는 거였다. 영락없이 화를 삭히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핏기 어린 볼이 실은 나를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는 것이었다니. 결국 착각 때문에 온갖 추태를 다 부리는 걸 넘어서 목숨까지 잃게 생겼다.





 '...에휴, 죽자 그냥.'





 그래, 못 볼 꼴 다 보였는데 더 살아서 뭐하겠나. 어짜피 죽을 거,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무슨 차이가 있다고. 그리고 산 채로 폭풍 속에서 온몸이 찢겨나가는 걸 느끼는 것보다야, 조신하게 앉아서 피가 빠져나가는 걸 느끼는 게 낫겠지.



 ...그래도 기왕 죽는 거, 되도록 아프지 않게 해줬으면.





 "...뭐해."

 "으아아아! 죄송해요! 죄송해요! 죽음으로 사죄할 테니 제발 고통없이 끝내주세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삶의 끝이 임박했단 사실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던 함장은 핏내음이 그득한 종이에 코를 박은 채 마지막 소원을 입에 담았고, 뒤이은 월하의 말의 뜻을 세 번이나 곱씹고 나서야 두려움을 약간이나마 거두고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왜?"





 새햐안 머리카락 이곳저곳에 피가 묻어있던 건 물론이거니와, 팔로 다 막아내진 못했던지 핏자국이 반듯한 얼굴을 적잖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평소의 그녀 답지 않게 잔뜩 상기된 볼은 아직도 화가 나있는 것만 같았고, 전등을 등진 탓인지 내려다보는 눈동자 역시 평소보다 색조가 진해서 불안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거센 감이 있는 숨결이 드나드는 얇은 입술만큼은 미묘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 부조화가 불안함을 한층 더 배가시켰다. 어찌 됐든 전체적으로 붉은 색감 강한 걸 보면 적신호 같았기에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지만, 월하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던 나머지 불경을 무릅쓰고 의문에 의문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주, 죽이려던 거 아니었어?"

 "내가 뭐 하러. 어짜피 사형수나 다름없는데."





 가라앉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비꼬는 모양새는 평소의 월하였다. 여전히 의심스러운 부분이 남아있긴 했으나 그의 기준에서 이 정도면 충분히 안정권이었다. 이에 함장은 의심의 장막을 조금 더 거두고, 조금 더 과감한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그럼 왜 그러고 있어."

 "...? 거래를 하지 않았나."





 똑같이 의문에 의문으로 답했지만 어투에서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함장이 돌다리를 건너듯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겨우 한 걸음을 내딛은 거였다면, 월하는 마른 땅 위를 걷듯 아주 평온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그럼에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운 함장을 보고 월하는 약간의 자괴감에 휩싸였다. 어딘가 엇나간 대화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 결국 이리 되다니. 차마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 망할 자식은 이래야만 직성이 풀리는 건가.





 "...그대의 승리야. 함장."





 월하는 이렇게까지 했으면 알아 들었으리라 믿었고, 놀랍게도 함장의 머릿속엔 아직도 무수히 많은 갈고리 띄워져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말뿐인 의사소통 따윈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혹은 적어도 월하에게만큼은, 여태 자신을 가로막았던 경험에서 비롯된 공포와 이딴 놈에게 끌린다는 수치심에서 비롯된 저항감 따윈 지금의 그녀에겐 고려할 일말의 가치도 없었다.



 함장의 피가 흩뿌려지던 순간부터 월하의 관심사는, 콧속을 가득 메운 질척하고 달큰한 향과 이로 인해 치달리는 충동을 어떻게 충족시키냐에 대한 것이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라 말은 했다만..."





  월하는 마치 먹이의 냄새를 찾는 뱀처럼 본능이 가르키는 대로 혀를 뻗었고, 손끝으로 닦아낸 욕망의 근원을 입가로 가져와 잠시나마 갈증을 달래봤다.





 "...이 정도로 치명적이었을 줄이야."





 말라붙은 잔여물을 겨우 한 두 방울 남짓 핥았을 뿐이었지만 그동안 맛봤던 그 어떤 진미보다도 감미로웠고, 실로 치명적이었다. 혀를 갖다댄 순간 온몸에 휘도는 환희와 이에 뒤따르는 명확한 경고. 그녀는 더더욱 조급해졌다. 적어도 이 맹독에 담긴 지독한 의존성을 인지할 이성이 남아있는 때에, 기어코 눈을 떠버리고 만 열망을 어떻게든 잠재워야만 했다. 그릇된 핏줄 속에 똬리 튼 광증과 저주가 자신을 집어삼키기 전에.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고, 심지어 해봤는지조차 모르겠으니까."





 양 볼 가득 불그스레한 홍조와 내리깔린 나른한 눈동자. 오묘한 발색으로 반들거리는 입술과 그 사이를 아스라이 드나드는 생숨. 함장은 자신 앞에 무릎 꿇은 월하를 보고나서야 그녀의 말뜻을 이해했고, 의심투성이였던 단서들이 맞물리며 물음표가 사라진 자리를 때늦은 고양감이 가득 메웠다.





 "...뭐해? 빨리 바지 안 벗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