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뢰를 안 뽑은 똥칸쵸는 https://arca.live/b/hk3rd/54455572


 1.

 라이덴 메이라고 하는 소녀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은 몹시나 어렵다.


 모든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인생이 있기 마련이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그 인생의 간극에 일종의 일관성이라도 있는 반면 이 소녀에게선 도무지 그러한 면모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관점에서 그녀는 붕괴수를 처단하는 어엿한 발키리이고,


 적에게 있어서는 뇌전과 폭풍을 부르는 번개의 율자이며,


 아군으로 두면 뒤를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동료였다.


 이런 이명들은 각각이 뚜렷한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낭만이 넘쳐나서, 이것들이야말로 갓 20살 된 소녀의 모든 것이라 여겨지게 만든다.


 그러나 이 무게감 있는 이명들에 잊혀진 사실은, 그녀가 아직 미처 여물지 못한 소녀라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라이덴 메이를 칭하는 수많은 호칭 중에 오직 그것만이 그녀의 본질을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평범한 소녀.


 상황에 이끌려 특별해질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들을 하나둘 벗겨내고 나면 본디 20살의 소녀가 지니고 있을 어리고 연약한 속살이 드러나는.


 잘 웃고, 잘 울고, 요리하는 걸 좋아하고, 검도에 아주 성실한.


 그리고 그래. 함장이 굳이 라이덴 메이라는 소녀를 묘사하자면…….


 외로움을 잘 타는 아이.


 아마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었다.

 

 대기업의 영애라는 직위 때문에 진솔한 관계를 쉽게 맺을 수 없었던 까닭인지, 아니면 붕괴로 가족과 지인들을 모두 잃은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태생적인 것인지, 이 흑발의 소녀는 인간관계에 늘 목말라 있었다.


 누구나가 겪는, 집에 들른 친구들이 돌아간 후의 적막감 따위의 감각을 메이는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듯하여, 좀처럼 고요한 곳에 가만히 있는 것을 어려워하는 그런 소녀였던 것이다.


 히페리온 호에 있을 때에는 사건들이 그녀를 떠밀고 동료가 그녀를 받쳐줬기에 드러나지 않았으나, 키아나가 떠나가고, 붕괴가 종결되고, 동료들을 이어주던 연결고리가 사라진 메이에게 남은 건 짙고 검푸른 고독감뿐이었던 것 같다.


 그런 까닭에 메이는 혼자 살게 된 이후로도 자주 사람들을 부르고는 했다. 구태여 놀러 오라는 식으로 말하기보다는 이런저런 사연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좋은 차를 샀는데 받으러 오라거나, 실수로 음식을 너무 많이 만들었으니 받으러 오라거나.


 환경이 변한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고 사람이 고픈 마음에 만든 핑곗거리일 수도 있다.


 덧붙이는 이유야 함장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메이가 덤벙대는 성격이 아니었음에도 혼자 살게 되면서 부쩍 이런 ‘사람이 와야 하는’ 실수를 많이 하게 됐다는 것만은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어째서일까. 함장은 그러한 일련의 행동이 메이의 몸부림으로 느껴졌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외톨이가 어떻게든 세상에 적응해 보려고 발버둥 치는.


 마치 금붕어가 물 밖에서 숨을 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런 모양새로 보였다.

 

 그리고 그런 만큼 라이덴 메이라는 소녀가 혼자 있을 때는 어떻게 지내는지가 신경이 쓰였다.


 하루는 24시간이고 그녀의 집이 손님을 맞이하는 시간은 그 중 차마 삼 할이 되지 않을진대 남아 있는 그 지난한 시간을 홀로 메꾸기 위해 어떤 짓을 하는지도.


 홀로 무릎을 모으고 소파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방식으로 외로움을 달래는지도.


 이따금 함장에게 전화를 거는 목소리가 떨리는 느낌이 어찌하여 그리도 고혹적인지도.


 그녀의 은밀한 사생활은 남이 함부로 파헤쳐선 안 될 것이었으나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했나. 사실을 말하자면 함장은 메이의 사생활에 대해 옅게나마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오히려, 짐작이 가고 있기에 더욱 신경 쓰였다. 다만 애써 외면하려 노력할 따름이었다.


 그렇다.


 그녀의 집에 가장 많이 가는 사람으로서, 함장은 메이의 집에서 늘 나타나는 어떠한 일관성을 눈치채고 있었다.


 메이의 집에서는 언제나 희미한 향기가 풍기는 것이다.


 그것은 조리 중인 음식이나 거실을 장식하는 디퓨저, 세탁한 이불의 향기로도 숨길 수 없는 근본적인 향기였으며, 라이덴 메이의 사생활이란 늘 그 은밀한 향기로 뒤덮여 있었다.


 유독 가기 전에 메이에게 전화를 한 날이면 더 강하게 풍겼던,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남자인 이상 눈치챌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종 본연의 퇴폐적이고 문란한 향기.


 여성, 이라기보다는…….


 암컷의 냄새였다.

 

 

 

 

 

 2.

 화창한 날이었다.


 오전 중에 일이 끝난 김에 함장은 메이에게 연락을 넣었다. 언제나 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함장은 가급적이면 자주 메이의 집에 방문하려고 노력했다.


 [네! 그러면 오늘은 햄버그를 하도록 하죠.]


 늘 있는 일이었음에도 메이의 목소리에는 화색이 돌고 있는 걸 느끼고 함장은 내심 안도했다. 환영 인사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 형식적으로 해주는 것인지 파악하는 건 늘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메이에게 한해서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함장은 호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작은 열쇠를 매만지며 그렇게 속으로 뇌까렸다.


 이 열쇠는 몇 번인가 메이의 집에 방문했을 즈음부터 메이가 함장의 손에 쥐여 준 물건이었다. 그건 암묵적으로 언제든 와도 된다는 자유 출입권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성인 남성에게 너무 무방비한 태도가 아닌가 우려심도 들었지만 가급적이면 좋게 해석하기로 했다.


 그만큼 이상한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신뢰받고 있다는 뜻이겠지.


 …….


 아니면……그 반대로…….


 함장은 고개를 홰홰 내저어 음습한 생각을 떨쳐냈다. 설사 후자가 맞다 하더라도 그건 쓸쓸함에서 발로된 온전치 못한 감정일 것이다. 메이는 여전히 외로움을 많이 탔으니까.


 혼자 살게 된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메이는 엉성한 핑계로 사람들을 모으곤 했다.


 다행히 처음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빈도는 조금씩 줄어들긴 했어도 아마 그건 정말 메이가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되어서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라는 부분이 간신히 억제기가 되었던 것 같다.


 함장은 그와 눈이 마주치면 베시시 웃던 메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조금 손이 많이 가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는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빈손으로 가는 것도 뭣해서 그는 빵집에서 몇 가지 빵을 고른 뒤에 메이의 집에 찾아갔다. 밝은색으로 치장된 담백하면서도 단아한 이 주택은 천명에서 메이에게 제공해준 집이었는데, 방만 4개에 화장실도 2개라 혼자 살기엔 난항을 겪을 정도로 넓었다.


 그야 이런 집에 혼자 살게 된다면 누구였다 해도 외로움을 느꼈으리라.


 커다란 현관문 옆에 난 벨을 누르고 기다렸지만, 응답은 없었다. 옆의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봐서 빈집은 아닐지언데.


 “…….”


 다른 일을 하고 있나? 아니면 외출이나 낮잠? 잠깐 고민하다가 함장은 열쇠를 사용하기로 했다. 언제든 그냥 들어와도 된다고 말을 듣기도 했고, 방해를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뭐랄까, 이렇게 열쇠로 열고 들어가니 꼭 동거인이 된 기분이다.


 희미한 쑥스러움을 품고 함장이 조심스레 현관을 지나쳐 먼지 한 톨 없는 순결한 성채에 도착했을 때, 그는 거실의 커다란 가죽 소파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한 명의 인형 같은 존재를 마주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커튼 너머 햇볕에 물든 새하얀 네글리제였다.


 하늘하늘하고 매끈한 옷자락은 희미하게 살색을 비치고 있었고, 피부에 밀착되어서 주인의 육감적인 몸매를 여지없이 과시하고 있었다. 그 위로 드러난 쇄골과 목선에는 메이의 검은 비단 같은 머리카락이 매달려 요염함을 더했다.


 시선을 조금 밑으로 내리면 봉긋 솟아오른 가슴이 있었다. 메이가 고른 숨을 마시고 내쉴 때마다 그 위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마치 귀에 들리는 듯했고, 마찬가지로 희미하게 보이는 배꼽 밑 도톰한 아랫배는 부드러움과 탄력을 동시에 가졌을 것 같아서 만져 보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일으켰기에 함장은 자기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함장은 조심스럽게 자는 메이의 인형 같은 얼굴을 살펴봤다. 더위 때문인지 얼굴은 희미하게 상기되어 있었고 옆에는 아직 화면이 켜져 있는 스마트폰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여지없이 그 향기도 났다.


 조금 시큼한 듯하며, 또 달콤한 듯하며, 무언가 이성을 깎아내리는 것만 같은 향기. 그 향기는 옅은 땀 내음과 몸을 뒤섞으며 한층 더 고혹적인 무언가로 변모하고 있었다.


 메이는 여기서 자신이 올 때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어떤 표정으로, 어떤 목소리를 내며ㅡ


 한 번 시작되기가 무섭게 울컥울컥 쏟아지는 불순한 생각들에 함장은 달아오르려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키고 간신히 메이의 몸에서 시선을 돌렸다. 목이 바싹 타고 위든 아래든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참아야만 한다. 그저 좋은 동료. 그 이상의 선은 허락 없이 넘으려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부엌으로 가 가져온 빵들을 정리해 넣고 거실로 돌아온 함장은 켜진 채로 공허하게 게스트와 MC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라디오를 바라봤다.


 [붕괴라 지칭되던 사건이 모두 종결되고 현재 천명에서는ㅡ]


 라디오에서는 한창 뉴스가 진행되고 있었다. 너무 조용한 게 싫다며 메이가 자주 틀고 다녔기에 이상한 점은 없었지만 함장은 그보다는 그 옆에 있는 무언가에 주목했다.


 하얀 종이 상자.


 저번에 왔을 때까지는 못 보던 그 물건은 하얗고 상당히 커다란 상자였다. 한 손으론 들기 어려울 만큼. 정리정돈을 좋아하는 메이치고는 조금 뜬금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 외에는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였다.


 그러나 상자에 다가간 함장은 그 상자가 사실은 평범함과는 먼 거리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각이 아닌, 후각이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이의 집을 맴돌던 음란한 향기가 상자로부터 나고 있었다. 향기에도 색이 있다면 상자의 순백을 끈적한 물감의 뒤범벅으로 바꿔버릴 만큼 진하게.


 안인지, 겉인지, 뭐가 됐든 이 상자야말로 메이의 사생활의 비밀을 간직한 판도라의 상자임이 틀림없었다. 함장은 본능적으로 소리를 죽이고 상자의 바로 앞까지 접근했다. 어느새 향기는 코를 찔러 마비가 될 지경이었다.


 이걸 연다면 함장은 메이의 가장 깊숙하고 끈적한 비밀을 알 수 있게 된다. 아마도 짐작하고 있었을, 하지만 감히 확신할 수는 없었던 메이의 모든 것을 말이다.


 그러나……그건 과연 옳은 일일까?


 함장은 메이의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해주던, 아플 때면 간호를 해주던, 상처라도 입으면 자기가 다친 것처럼 울상을 짓던 한 소녀의 존엄함을 되새겼다.


 호기심과 양심이라는 두 마음이 올라간 저울은 너무나 손쉽게 한쪽으로 기울었고, 함장은 상자에서 한 걸음 떨어질 수 있었다.


 “……함장님?”


 메이가 눈을 뜬 것도 마침 그때였다.


 조금만 더 욕심을 냈다면 상자를 여는 모습을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함장은 모골이 송연해졌으나, 애써 태연한 척 갓 잠에서 깬 메이에게 다가갔다.


 아직 잠에 취해서 무방비한 소녀가 반쯤 감긴 눈으로 미소 짓는 모습은 순진해 보였지만 한쪽 어깨에서 네글리제가 흘러내려 드러나는 쇄골과 겨드랑이는 감히 폭력적이란 수사어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죄송해요……마중 나갔어야 했는데, 흐아암, 깜빡 자버려서…….”


 물을 먹은 듯 흐리멍텅한 목소리로 사과하면서 메이는 비틀비틀 소파에서 일어났다. 노린 것은 아니었지만 함장은 그 짧은 사이 길게 늘어지는 네글리제의 치맛자락 틈새로 하얀 속옷이 드러나는 광경을 목도해 버렸다.


 “점심 안 드셨죠…? 지금……햄버그 만들어드릴 테니까…….”


 함장이 그대로 식탁으로 걸어가려는 메이를 어깨를 붙잡고 만류했다. 칼도 위험하고 가위도 위험하지만 이대로 가면 가장 위험한 건 함장의 이성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메이의 무방비한 뒤태를 5분 이상 바라보고 있을 자신이 그에게는 없었다.


 결국 메이는 식탁에 앉아 지켜보고 있고 함장이 요리하기로 결정됐다. 결정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강요였다.


 함장은 부엌의 냉장고를 뒤져 재료를 꺼내고 싱크대에서 손을 씻었다. TV를 꺼서 집은 조용해졌지만 서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


 부엌은 햇빛이 제대로 닿지 못했다. 침묵 속에서 함장은 부엌이 참 어둡다고 생각했다.


 고요함 속에 바깥세상의 여름 소리가 물에 탄 잉크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매미 소리. 현관에 걸어둔 종소리.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 바람에 나뭇잎이 술렁이는 소리.


 여름은 선명하게 거실을 비추고 있었고 거실의 하얀 카페트는 모래사장처럼 빛이 나는데 부엌은 그 화창함의 그늘인 양. 음습하고 서정적이었다.


 그리고 그늘진 부엌에서 불을 켜지도 않은 채 그 응달만이 두 남녀의 영역이 되어 두 사람은 빛을 피해 도망친 모양새였다. 


 부엌에 팬 돌아가는 소리, 식기 덜그럭거리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탁탁탁, 팔을 걷어붙이고 함장이 칼질하는 소리가 부엌에 퍼지기 시작하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식탁 맞은편에 앉은 메이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몸을 푹 엎드려 얼굴만 빼꼼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게 재료 손질이 끝날 때까지도 좀처럼 잠이 깨지 않는지 메이는 풀린 눈동자로 함장을 응시하고 있었으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한창 재료 손질을 끝낸 뒤에 뒤를 돌아봤을 즈음엔 메이는 숨을 헐떡이고 있기까지 했다.


 몸을 수그리고, 무언가 책상 밑에 숨겨둔 팔을 꼼지락대는 듯하다가, 가끔은 가볍게 몸을 비틀기도 하고.


 어디 아픈가 싶어 함장이 다가가자 몸은 푹 수그린 채 눈동자만 함장을 쫓아왔으니, 그 모습이 더위를 먹은 강아지 같아서 사랑스럽기도 하고 또 애간장이 타는 것도 같았다.


 “……함장님…….”


 메이가 무언가 갈구하는 눈빛으로 함장을 바라봤다. 함장은 허락을 구하지 않고 조용히 메이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그래도 될 것만 같아서.


 메이는 손을 뿌리치지 않고 오히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함장의 손에 얼굴을 부볐다. 손에 닿은 이마는 체온이 약간 높았지만 뜨겁다는 말보다는 자극적이란 말이 먼저 떠올랐다.


 “함장님의 손……차가워서 기분 좋네요……흣.”


 교성과도 같은 신음을 내지르면서 메이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조금만 더 이대로 계셔 주실래요? 조금만……잠깐이면 되니까.”


 손은 가만히 있었으나 메이의 머리가 천천히 움직이며 손에 닿는 곳을 바꿔갔다. 이마에서부터 뺨으로. 한참 뺨을 부비다 다음에는 그 밑, 입으로.


 마침내 메이의 혀가 애처롭게 함장의 손가락을 핥았다.


 “후후후……조금 짠 맛이 나네요.”


 ……아까 쓴 소금 때문일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흣……하아…….”


 메이의 몸이 한차례 부르르 떨렸다가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얼굴은 여전히 상기된 채 숨을 몰아쉴 때마다 함장의 손을 뜨거운 습기가 애무하듯이 감쌌다.


 끈적한 향기가 물씬 풍겼다. 메이와 눈이 마주쳤다. 슬쩍 메이의 눈꼬리가 내려가자 사각사각, 함장의 이성이 사포에 갈려 닳아 없어지려고 했다.


 메이는 오늘 명백히 이상했다. 더위라도 먹은 것인지 보통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이성의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속에 있는 본성이 그대로 노출된 것처럼 본능을 탐하는 모양새였다.


 어째서일까. 외로움에 사무쳐 있어서일까.


 함장은 최면에 걸린 것처럼 손을 뻗어 메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마시멜로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뺨을 몇 번이고 만지다가 조금 불그레한 귀를 쓸었다. 채 덜 자란 잔머리가 솜털처럼 사부작사부작 함장의 손목에 비벼 소리를 냈다.


 함장도 더위를 먹은 듯했다. 매미 소리가 유달리 시끄럽게 느껴지고, 여름 공기가 더워 등이 끈적하게 땀에 젖은 게 느껴졌다. 속에서 꾸역꾸역 치솟는 뜨겁고 답답한 열기를 흠뻑 토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함장의 손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메이는 저항하지 않았다. 단단한 손가락이 필사적으로 라이덴 메이라는 여인을 더듬었다.


 귀에서 턱으로.


 턱에서 목젖으로.


 그리고 그 밑, 쇄골의 밑까지 뻗어 나가려다ㅡ


 부그르르르르…….


 “앗…….”


 가스레인지에 올려놨던 냄비에서 물이 넘쳤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던 함장의 이성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함장은 황급히 불을 끄고 가스레인지로 가 키친타올로 넘친 물을 훑었다.


 “…….”


 그 모습에 메이도 작게 한숨을 쉬고 일어났다.


 “역시 요리 도와드릴게요.”


 그녀는 우울해 보였지만 식탁에 유달리 어둡게 내려 있던 그늘에서 벗어나 주방 옆에 걸어둔 에이프런을 착용하고 물이 졸아든 냄비에 물을 다시 붓고 휘저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마치 모든 게 한여름날의 백일몽처럼 느껴졌다. 은밀한 밀회의 장소였던 부엌이 어느새 그저 이른 여름의 파편 중 하나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손을 더듬던 감촉만은 계속해서 메아리쳤다.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는 메이의 뒷목을 바라볼 때마다 그 느낌이 자꾸만 자꾸만 뇌 속을 헤엄쳤다.


 햄버그를 구울 때도. 수프를 끓일 때도.


 사념이 섞인 탓일까, 결국 두 사람이 합을 맞추고도 요리는 썩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식탁에 마주 앉아 달그락달그락 식기 부딪치는 소리를 내면서도 끈적한 공기는 좀처럼 풀리질 않았다.


 “……조금 짜네요.”


 가만히 수프를 입에 넣은 메이가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함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식탁은 참 넓어요.”


 메이는 다시 한 숟갈 수프를 넘겼다. 그녀의 말대로, 이 식탁은 오늘 한 모든 요리를 내려놓은 다음에도 여전히 팔 할이 넘는 공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텅 비어서, 뭐라도 담아야 할 것만 같았다.


 “예전엔 이 정도 식탁이 좁을 지경이었는데, 그래서 나름 혼자 산답시고 이만한 크기로 사버린 거였는데 말이에요.”


 그녀는 그늘에 앉아 가만히 거실을 바라본다. 햇빛은 언제나 추억을 품고 있기에, 하얀 거실은 사금을 뿌린 것처럼 그 빛에 반짝여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 고양이처럼 햇볕을 받으며 흐드러지게 대화를 꽃피울 것만 같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햇살이 아무리 화사한들 쬐는 사람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목이 마르네요.”


 메이가 옆에 뒀던 물병에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그녀는 여전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아시나요, 함장님? 목이 굉장히 마를 때요. 물을 한 모금만 마시면 오히려 더 갈증을 느끼게 돼요.”


 함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메이가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건지, 무슨 뜻을 품고 있는 건지 그도 모두 알고 있었다. 이것은 질문에 가까웠다.


 그러나 답이 정해진 문답과는 달리 가끔은 대답을 할 수 없는 질문도 존재하는 법이다.


 말로 써내려간 편지에 답이 없자 메이의 목소리는 한층 더 쓸쓸하고 우울해졌고, 보다 직접적이며 애가 타는 목소리로 변질됐다.


 “함장님……. 혹시 오늘 바쁘신가요? 언제까지……계실 수 있나요?”


 함장은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다가,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질겅질겅 씹는 햄버그에선 탄 씁쓸함 외엔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그러시군요.”


 메이는 희미하게 상기된 얼굴로 물어봤다.


 “……자고 가실 수는 없으신가요?”


 외로움에 사무쳐서, 그리움에 파묻혀서, 메이는 부탁했다.


 메이가 천천히 에이프런을 풀었다. 등에 손을 대 매듭을 풀고 기다란 머리를 손에 쥐고 목끈을 넘겼다. 함장은 그 사소한 일련의 과정이 이상하게도 알몸이 되어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에이프런에 감춰져 있던 네글리제는 약간의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체취와 섞인 진한 향수를 느끼며 함장은 머리가 아찔해졌다.


 지금 이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손을 뻗는다면 그녀는 아까와 같이 받아들여 줄 거란 어렴풋한 확신이 들었다.


 그 매혹적인 눈빛으로, 애타는 목소리로.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문득 함장은 슬퍼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가여운 소녀는 사랑이 아니라 사람을 갈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

 함장님은 여름을 좋아하시나요?


 싫어하신다면, 어떤 점이 싫으신가요? 더워서? 끈적해서? 아니면 낮이 너무 길어서인가요?


 저는 너무 밝아서 싫어해요. 햇볕이 내리쬐는 거리를 산책하다 보면 자꾸만 옛날로 돌아가는 거 같거든요.


 노란 벽돌이 깔린 긴 거리는 꼭 성 프레이야 학원의 길을 걷는 것 같아요. 일과가 일찍 끝나면 브로냐와 함께 학원 바깥으로 산책하러 나가죠. 브로냐는 게임 이야기를 하다가 배에서 꼬르륵 소리를 내고는 해요.


 그러면 저는 ‘오늘 점심은 어떤 거로 할까?’라고 묻고, 브로냐는 ‘메이 언니가 해주시는 거라면 뭐든지 좋습니다.’라고 대답할 테니 저는 메뉴를 고민하게 되겠죠.


 그리고 장을 한가득 봐온 다음에 집에 돌아가면 성 프레이야 학원의 모두가 반겨주는 거예요.


 커다란 냄비에 한가득 스튜를 끓이고, 곁들일 요리와 상차림을 하면 가장 먼저 키아나가, 그리고 학원장님과 히메코 선생님이 냄새를 맡고 오겠죠.


 식탁은 더는 요리를 놓을 자리가 없을 만큼 꽉 차고, 눈부신 여름 햇빛 아래 다들 목이 쉴 만큼 이야기를 나눠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밤이 오고,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거예요.


 이런 흔한, 이런 시시한,


 이런 이기적인 상상을, 저는 벌써 몇 번이나 한 걸까요.

 

 

 

 

 

 4.

 함장이 제시간에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오후부터 바람이 조금 강해진다 싶더니 갑자기 시작된 비가 폭우로 변하여 번개를 몰고 온 까닭이다. 일기예보는 분명 맑음이었을 터인데 이 정도로까지 시원하게 틀린 걸 보면 아직 과학의 발전은 갈 길이 먼 모양새였다.


 무리해서 돌아가 보려고 했지만 바람은 우산을 펼치기도 어려울 정도에 번개는 지근거리에서 내리치고 있어 하루 묵으라는 메이의 의견이 더욱 마땅했다.


 저녁 식사를 끝마치고 함장은 깨끗하게 설거지를 하다가 창문을 힐끔 쳐다봤다. 번개라도 좀 잦아들면 밤중에라도 돌아갈까 했으나 지금 상황으로 봐선 요원할 듯했다.


 먹구름은 시각을 구분하기 어렵게 했으나 TV에선 저녁 버라이어티 쇼가 방영 중이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습관인지 조금 TV 소리를 크게 해놓은 한편, 메이는 소파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메이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도 함께 살랑였다.


 감상에 젖은 눈으로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는 모습은 무척 우아해서 만일 함장이 그림을 그릴 줄 안다면 그려서 보관하고 싶었을 것이다.


 먼발치에서 무슨 소설인지 묻자 메이는 작은 목소리로 ‘상실의 시대예요.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대답했다. 함장은 잘 모르는 소설이었으므로 ‘그렇구나.’하고 대답해줬다.


 냉장고를 뒤지자 딸기가 나왔다. 꼭지를 따서 쟁반에 담아 메이가 앉아 있는 소파 옆에 내밀자 메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고마워요, 함장님.”


 그리곤 책을 덮고 딸기를 하나 집어 머뭇거렸다.


 “그렇네요.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죠. 죄송해요. 이 시간에는 보통 혼자 책을 읽고 있었으니까.”


 낯섦을 토로하는 메이를 두고 함장은 손을 씻으려 했으나 메이가 재빨리 옷소매를 붙잡았다.


 “함장님도 같이 드셔요.”


 함장은 과일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고 집안일을 좀 더 해두고 싶었지만 메이의 권유엔 완강한 구석이 있어서 하릴없이 메이의 옆에 앉았다. 메이는 다시 독서를 시작했다.


 “…….”


 그는 TV에 주목하려 했으나 옆에 있는 메이의 모든 것이 신경 쓰여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조심하지 않으면 무심코 끌어안아 버릴 것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자꾸만 낮의 메이의 모습이 생각났다. 코끝을 간지럽히던 향기라든가, 애타게 자기를 부르던 목소리라든가, 자기를 갈구하던 눈빛이라든가.


 한여름의 습한 그늘 속에서 벌어진 환상 같은 일이었으나 그 환상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채로 그의 옆에서 책을 읽고 있지 않은가.


 함장은 들키지 않게 메이의 옆얼굴을 훔쳐봤다. 메이의 표정에 희미한 기쁨이 서려 있어 혼자가 아닌 게 그렇게나 좋을까 싶었다.


 몇 장인가 사부작 사부작 책장을 넘기던 메이는 문득 강물 흐르듯이 중얼거리길,


 “혼자가 아니니 이렇게 좋네요. 뭘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괜스레 TV 소리를 크게 해둘 필요도 없고.”


 라고 말을 던졌다. 담담한 어조에 평온한 표정은 거기까지만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메이는 ‘계속 이럴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라고 넌지시 말하는 것이었다. 무슨 뜻인지 알기에 더더욱 대꾸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메이는 자신을 사랑하는가? 함장은 자신에게 물어봤다.


 나는 메이를 사랑하는가? 함장은 그렇게도 물어봤다.


 고개를 돌린 메이와 함장이 시선을 교환했다. 서로의 화살표는 방향은 마주 봤으나 평행선을 긋고 있었다. 따라서 함장은 대답해주지 못했다. 답장할 수 없는, 연가조차 되지 못한 편지는 그렇게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메이는, 조금 아프게 웃었다.


 “함장님, 그러면 머리라도 좀 빗겨 주실 수 있을까요?”


 함장이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가 TV 옆 화장대에서 얼레빗을 가져와 함장의 앞에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고풍스러운 생김새가 메이와 똑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르륵사르륵.


 메이가 머리를 모아 뒤로 넘기면 함장은 빗으로 조심스레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머리를 쓸어내리는 소리가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혔다.


 메이의 머리카락은 한밤의 강물 같아서 그 위를 타고 내리는 빗이 마치 나룻배처럼 보였다. 배는 끊임없이 강의 상류와 하류를 왕복했고, 그럴 때마다 강물은 한층 더 아름답게 흘렀다. 누구나 여기서 배를 타고 있다면 마음을 잃고 표류할 것이다.


 “그……죄송해요.”


 잘못 들었나 싶어서 함장은 빗질을 멈췄다. 메이는 여전히 무릎을 모으고 앞을 보고 있었다.


 “낮에 저, 좀 이상했었죠.”


 함장은 대꾸하지 못했다. 메이는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누구나 그럴 때가 있지 않나요? 갑자기 외로워서 안절부절못할 때. 그러니까, 일종의 응석 같은 거였다고 생각해주세요.”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다시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다.


 “아니면……이런 여자는 너무 천박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다시금 머리를 빗던 손이 멈췄다. 함장은 작게 한숨을 내쉰 다음, 조금 더 어른 된 자로서, 외로움과 사랑의 차이나 신중함과 절조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메이는 잠자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 하고 싶으신 건지 알아요.”


 어렴풋이 보이는 반대쪽에선 메이가 주먹을 꾸욱 모으고 있었다.


 “지금이 힘든 시기라 그런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진정될 거다. 한번 엎지른 물은 돌이킬 수 없다. 몸을 함부로 다루면 안된다……뭐 그런 이야기잖아요.”


 부드럽게 수긍하자 메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낙담은 머리카락을 타고 이어져 함장의 손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저도 아무한테나 그러지 않는걸요.”


 메이가 갑자기 뒤를 돌았다.


 “외로워서면, 안되는 건가요?”


 메이의 투명한 감색 눈동자가 함장을 직시했다. 예의 흐릿한 눈빛이 아닌 선명하고 뚜렷한 눈빛이었다.


 “맞아요. 저는 외로움 많이 타는걸요. 그렇지만 인간은 외로워서 사랑을 하고, 사랑을 알아서 외로운 거잖아요.”


 메이가 되물었다.


 “인간은, 그렇게 이어져 오지 않았나요? 함장님이 평생 저를 채워주실 순 없는 건가요?”


 함장님이 저만의 것이 되어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천천히, 그렇지만 서슴없이 그녀는 두 뼘이 채 못 되는 거리를 좁히더니 함장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밀었다. 너무나 손쉽게 함장의 몸이 뒤로 넘어가, 메이는 그 위로 올라타게 됐다.


 슬그머니 함장의 무릎에 메이의 둔부가 걸쳤다. 아까까지 빗어 내리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장막처럼 함장의 시야를 가렸다. 검은색이 지나가고 남은 자리엔 온통 새하얀 메이의 몸 밖엔 없었다.


 하얗고, 고혹적인.


 “아니면……저로는 안되는 건가요?”


 “…….”


 정적이 흘렀다. 함장의 입이 들썩거리며 무언가 말을 하려다 머뭇대길 반복했고, 갈 곳 잃은 말은 입안을 그저 방황했다.


 그러는 사이 메이의 손가락은 애틋하게 함장의 이마를 쓸었다.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 이마가 드러날수록 메이와 함장 사이의 벽도 한 장 한 장 없어지는 것 같았다.


 눈동자가 서로를 응시하면 그 안은 교미를 하는 뱀들처럼 얽히고 다시 얽혀서 하나가 됐다. 메이가 몸을 숙여 함장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따뜻하고 젖은 입김이 가슴을 적시고 메이가 몸을 비틀 때마다 뭉클하고 부드러운 살갗이 피부를 지지는 것처럼 자극했다.


 심장 소리가 요동쳤다. 아래에 피가 몰려 빳빳해졌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거리에서 맡는 메이의 향기가 뇌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그 외엔 그저 고요했다. 빗소리도, 천둥소리도, 아무것도 없었다.


 “……비, 그쳤네요.”


 함장은 ‘아…….’하고 신음했다. 그 말대로였다. 어느새 비 내리는 소리도, 천둥 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날은 흐리고,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돌아가려면 충분히 돌아갈 수 있는 시간대였다.


 메이는 함장의 품 안에서 냄새를 맡듯이 깊이 숨을 들이쉬고, 스르륵 일어났다.


 “……저, 씻고 올게요.”


 그리고 홀연히 샤워실로 떠나갔다. 함장은 홀로 거실에 남아, 황망히 아까까지 남아 있던 흔적들을 긁어모았다.


 크게 한숨을 들이쉬고, 메이가 떠난 방향을 봤다. 소리의 공백에 물 흐르는 소리가 새롭게 자리 잡았다. 샤워실 옆에는 나가는 길이 있어 지금이라도 문을 열기만 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씻고 있음에도 문을 잠그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는 것.


 아마도, 메이는 선택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함장은 두 손을 모아 입에 갖다 대고 메이와 자신의 관계를 재정립해보려 했다. 지금까지 그는 메이의 감정을 외로움이라 치부했고, 사랑이 아니라 단정 지었었다.


 하지만 사랑은 뭘까. 그것이 외로움이랑은 대체 얼마나 떨어져 있는 걸까.


 왜 하필, 나인 걸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답해줄 이는 없었다. 어쩌면 함장은 라이덴 메이라는 소녀에 대해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메이는 나를 사랑하는가? 나는 메이를 사랑하는가?


 이번에는 다른 느낌으로 문장이 흩어졌다.


 문득 시선이 거실 안쪽 문갑까지 뻗었다. TV가 올려진 문갑 옆에는 여전히 예의 그 하얀 상자가 있었다.


 끈적한 향기는 그대로였고 메이는 딱히 상자에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집에 있는 동안에도 메이는 상자를 따로 치우지도 않았고, 건드리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함장에게 시간을 주었다.


 어쩐지 메이의 마음이란 그 하얀 상자 안에 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함장은 조심스레 그 앞까지 걸어갔다. 빈약한 상자는 손을 뻗는 것만으로 너무나 쉽게 열렸고, 안을 채우고 있는 물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옷……?”



 에이 양심적으로 사주겠지 에이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