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메인 퀘스트 31장을 온전히 다 감상했다는 가정아래 쓰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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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하기 그지없는 기계로 이루어진 세계에, 분홍빛 꽃이 피었다.

그 끝에,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봐, 그들은 이렇게 자랑스럽게 살며 생명으로 문명의 송가를 연주했어"


꽃봉오리에서 나타난 소녀의 주위를 맴도는 열두 개의 각인.

영웅들이 한 점의 고민도 없이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맡겼음을 증명했다. 그 자신의 생을 불태움으로써.

잠시나마 자신의 것이 되었던 영웅들이 통제를 벗어났다는 사실이 불쾌했는지, 

눈살을 찌푸린 기계의 신은 소녀를 향해 수없이 많은 공격을 쏘아냈다.


"이것은 영웅이라고 불린 사람들의 이야기" 


소녀는 장난스럽게 손 키스를 날리고는 작게 웃었다.

아마도 소녀의 옆에 허당끼 많은 박사가 있었다면 핀잔을 주었겠지.

융통성 없는 대장이라면 아까처럼 방심하지 말라며 충고했을까?

소녀는 그들의 대장이 늘 하던 것처럼 그녀의 몸 주위를 떠도는 기운을 제어했다. 안으로, 더 안으로.


"불을 쫓는 13인의 끝나지 않는 여정이야"


수많은 기계의 공격이 소녀의 지척에 다다랐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자신의 곁에는 열두 명의 동료가 함께했으니.

5만년, 기나긴 세월의 종착지. 현세에는 도원결의라는 게 있다던데,

자그마치 열세 명이 한낱 한시에 죽는다니, 무척 로맨틱하지 않아, 메이?

그리고, 한계까지 응축된 분홍빛이 기계의 신을 향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방문자, 너희의 길은 계속될 거야 그렇지?"


그러니, 현세에 남기는 작은 선물 정도는 받아주겠지?

계속해서 소녀가 쏘아낸 빛이 마침내 기계 신의 껍질을 벗겨냈다.


"그럼 마음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


그녀가 쏘아낸 화살이, 색색의 궤적이 쏘아내기 이전으로 다시금 시간이 되감긴다.

그래도,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래도!"


그녀는 이전과 달리 되감기는 시간을 다시 앞당겼다.  

비록 구조체이기에, 한없이 부족한 힘이지만, 지금 그녀의 곁에는 열둘의 기원이 함께했다.

그리하여 얻어낸 단 한순간의 기회.


"발자취를 따라"


달빛으로 육신을 빚어


"불을 쫓는 여정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 자신의 생으로써 무구를 벼려낸다.


"마지막에 죽은 자들의 무덤을 넘어"


그리고, 최초(起源)이자 소망(祈願)의 율자인 그녀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우리가 맞이할 수 없었던 미래를"


화살 끝에 휘감는 것은, 불합리에 저항하고자 하는 인류의 기원(祈願). 


"만들어가!"


닿아라-

그리고, 내쏘아진 분홍빛 일격이 기계 세계의 핵을 꿰뚫기 직전,


...


"싫어요."


"뭐?"


이 장소에 있어서는 안 될 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대체, 어째서? 어떻게? 왜?


 "...메이, 네가 왜 여기에?"


방황하는 두 눈, 할 말을 잃어 언어로 내뱉어지지 못하고 다만 우물거리는 입술을 보며 메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엘리시아의 이야기는 동화라면서요? 동화가 비극적인 영웅담으로 끝나면 어떻게 해요? 전 그런 이야기는 싫어요."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 자신을 메이 선배라 부르며 따르는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희생들.

분명히 누군가에게는 감동적이고 멋진 이야기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지옥일 뿐이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동화에는, 영웅담 같은 희생보다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답니다' 라는 상투적인 문구가 더 잘 어울렸다.

메이는 투정 부리듯 엘리시아를 흘겨보고는 이내 말을 이었다.


"클라인, 부탁해요."


"알았어. 1.. 24... 79... 100% 침식의 율자로부터 [정보의 낙원] 지배권한 탈취완료. 코드네임 [여명], 되감기 시퀸스 개시"


의식만을 그대로 둔 채 세계가, 되돌아간다. 

인류의 율자 엘리시아가 침식의 율자를 대면하기 이전으로,

메이와 엘리시아가 마지막으로 놀이동산에서 만나기 이전으로,

에덴이 엘리시아의 빈 기억을 채우기 이전으로,

아포니아가, 그리세오가, 코스마가, 칼파스가, 이전으로, 이전으로, 이전으로,

그리하여 마침내..


{안되지. 누구 맘대로?}


이리저리 뒤틀리고, 고주파 음이 섞여 있어 이해하기 어렵지만, 칼파스의 그것에 비견될 정도의 분노만큼은 둘에게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이제는 한눈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든, 기계의 탑에서 깨어난 침식의 율자가 간섭해왔다.

그럼에도 데이터 공간이라는 특성상 침식의 율자는 신과도 같아서, 기계의 탑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낙원을 집어삼켰다.


"미안해, 예상보다 침식의 율자의 회복이 42% 빨랐어. 관측된 정보에 따르면 약 2,620초 후에 침식의 율자가 완전히 회복될 거야"


담담하게 사실을 알리는 클라인의 목소리에 둘은 정신을 차렸다.


"메이, 대책은 있는 거지?"


한숨 조금, 반가움 반, 걱정 조금을 담아 엘리시아가 물었다.

실시간으로 세계가 침식당하는 중에도 이어지는 싸늘한 침묵.

불안함을 느낀 엘리시아가 되물으려하자 메이가 손에 쥔 고양이 발바닥 모양의 스위치를 신경질적으로 흔들며 말했다.


"필리스, 보고 있는 거 알아요. 언제 나올 거예요?"


그러자 풀숲에서 나뭇가지로 어설픈 위장을 한 고양이 소녀가 튀어나오며 말했다.


"히히... 메이 언니, 여전히 사람 다루는 게 거치네. 정말 내가 이런 싸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거 맞아? 흐이약" 


필리스를 향해 날아오는 기계 뭉치들을 이리저리 쳐내며 메이가 말했다.


"물론이죠. 필리스. '길'을 열어주세요"


"어디에?"


다시금 떠오르는 겁멸의 악몽에 필리스가 한차례 부르르 떨고는 물었다.

메이는 고민하지 않고 싱긋 웃으며 답했다.


"현세."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영웅 둘의 집중력이 흩어지고, 그 틈으로 강선의 채찍이 파고들었다.


"정말로? 침식의 율자가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될지 알지 않아?"


엘리시아가 화난 목소리로 되물었다.

활의 끝으로 채찍을 튕겨내고, 이어지는 기계 파편들을 무결의 돔을 전개해 튕기는 화살로 요격하며 생각한다.

낙원을 폐쇄하고, 영웅들이 목숨을 내던진 이유가 무엇이었나. 이래서야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괜찮아요. 엘리시아. 클라인, 준비는 됐나요?"


메이가 날아오는 고철 더미를 전자기력으로 묶고, 반발력을 유도해 반대로 되쏘아냈지만,

사물의 시간이 되감겨 다시금 고철이 날아온다.

그것을 필리스가 쳐내고, 이어 날아오는 기계의 탑을 발도술로 일도양단하기까지 세 호흡.

드디어 기다리던 대답이 들려왔다.


"필리스.. [부디] [길을 열어주세요.]"


강제적인 명령이라기보다는, 어떤 행위에 따를 때 힘을 실어주는 계율.

더해, 낙원 그 자체에 녹아든 아포니아의 권한이 힘을 실어주었다.

그것으로 본래라면 터무니없이 많은 힘을 요했을 '현세로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적은 한 명이 자리를 비우며 생겨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잡았다!}


터무니없이 커다래 눈에 보이는 세계를 가득 메운 기계의 산이 엘리시아를 향해 돌진했다.

침음을 내뱉은 엘리시아가 필사적으로 화살을 쏘아냈지만, 화살 조금으로 막기에는 적의 크기가 너무나도 거대했다.

마침내 기계의 산이 엘리시아에 닿기 직전,

기계의 산이 내달려온 속도 그대로 뒤로 처박혔다.


"크하하하하. 와라, 율자!"


칼파스 - 킥

전투기보다 빠르게 날아온 그의 궤적을 따라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휩쓸며 날아오는 공격들을 밀어냈다.

다급히 침식의 촉수를 맞대어 보지만, 스스로조차 불태우는 분노가 침식의 율자의 모든 간섭을 배제했다.

균형을 잃고 무너진 기계의 산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늘을 나는 거대한 고래. 엘리시아가 가장 친애하는 친구, 에덴의 붕괴수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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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하울링. 

거대한 생물이 포효했다고 생각하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소리였지만, 그 결과마저 평범하지는 않았다.

파편, 덩어리, 강선. 조그마한 기계까지. 

주위의 모든 격하(格下)의 것들이 핵폭탄이 떨어진 것마냥 기계 세계의 끝으로 밀려났다. 

그럼으로써 생겨난 공백에 고래 위에 있던 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왜! 계속 방해하는 거야!}


떨어지는 그들을 노리고 기계의 팔들을 내뻗어왔지만,

찰나지간에 그 모든 방해 수단이 잘리고, 부수어졌다.

사쿠라의 '찰나', 그리고 정신감응형 영웅들이 정신을 이어 찰나의 세계를 인식하게 만든다.

아포니아의 계율이 그들을 지키고, 그럼에도 비는 공간을 막 그려진 그림과 기계장치의 포탄이 메운다.

서로 하지 못하는 역할을 담당하기에, 따로 싸우는 것의 수십 배의 효율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13명이기에 완전했다.

구조체이기에 필연적으로 모자란 힘을 서로간의 유대로써 채워냈다.

그러나 한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절대적인 출력의 부족.


{어째서? 너희는 어째서 이렇게 필사적인데!!!}


갓 태어난 침식의 율자는 몇 번이나 목숨을 거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침식의 율자는 꾸준히 회복되는 율자로서의 힘으로 서서히 영웅들을 압도해나갔다.

단 한 번의 상처로도 침식 당해 목숨을 잃을 위험 속에서도, 영웅들은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맞섰다.

그리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완성됐어"


무덤덤한 클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낙원에 열린 현세로의 문은 무지갯빛으로 빛났다.

침식의 율자의 눈에는 그 문이 정말 아름다워 보였다.


{비켜!}


침식의 율자가 그동안 모은 힘을 쏟아내 시간을 되돌렸다.

문 주위를 지키던 영웅들의 위치가 저 하늘 멀리 밀려났다.

침식의 율자가 기계 더미에서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부분을 활용해 문을 향해 돌진했다.

메이와 엘리시아가 필사적으로 날아드는 기계들을 쳐냈지만, 순식간에 밀려나 궁지로 몰렸다.

그리고 문에서 몇 명의 사람이 걸어 나왔다.

라이덴 메이가 가장 신뢰하는 동료들.


"우와.. 이거 엄청 크네. 여태 만났던 상대 중에 가장 큰 거 같아."


하얀 머리의 소녀가 다가오는 공격을 '공간'을 격리해 막아내며 감탄했다.


"추정치 히페리온의 1,172배 크기입니다. 터무니없는 크기네요."


회색 머리의 소녀가 '이치'를 분석해 물리적으로 연결된 기계의 핵심 부분을 고장 냈다.

'이치'로 크기를 줄인 침식의 율자를 '공간'이 박리했다.

발악하듯 날아오는 침식 파동을 '정복'의 요새가 막아냈다.

탈피하듯 정신을 옮기려 하지만, '의식'이 막아섰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정된 적을 향해서, 마지막 인물이 말없이 검을 치켜들었다.

화륵-

검에 엉겨 붙은 불꽃이 살아있는 듯이 움직여 끝없이 온도를 높였다.

빨강. 노랑. 하양. 파랑. 검을 휘감은 불꽃이 온도를 높여갈 때마다, 일렁이는 불꽃의 색이 무섭도록 변화했다.

불꽃이 투명한 무색을 넘어 그저 공간의 일렁임으로만 보일 때.


{{안돼!!}}


천화 발검-

나직한 남성의 목소리와 함께 불꽃이, 세계를, 양단했다.


---------------------------------------------!!!


공간을 격리하고 정복으로 고정했음에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폭압.

남성과 '성흔계획'의 시행을 놓고 싸웠을 때를 떠올리며 몇 명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필리스에 이르러서는, 거대한 고래를 장애물 삼아 몸을 웅크리고 부들부들 떨었다.

보이는 모든 세계가 증발했다. 

정말 일부를 제외하고는, 철 쪼가리마저도 형태를 잃고 흘러내리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기화되어 눈 앞을 가렸다.


{나는..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인데...}


작게 남겨진 기계음. 이내 그마저도 사그라졌다.


"클라인 서둘러주세요."


그 파멸적인 광경을 바라보며 메이가 계획의 속행을 요구했다.


"코드네임 여명 시퀸스 재개. 1... 23... 32.. 45... 안 돼..... 시간이 맞지 않아."


그러나, 시간이 부족했다. 침식의 율자가 형태를 잃고 녹아내리는 시간이 너무 빨랐다.

더불어 궁지에 몰린 침식의 율자의 무의식적인 도움과 기원의 율자의 보조를 받을 때와는 달랐다.

때마침, 상황실에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5만 년으로는 부족했어? 조금 더 배워야겠네, 클라인"


달라붙는 듯한, 늘어지는 끈적한 목소리가 들리고,


"아.. 99. 100%. 여명 시퀸스 재개."


조금 물기를 머금은 듯한 클라인의 목소리를 뒤로하며, 불타는 세계를 배경으로 다시금 세계가 되감긴다.






 * * *






뚜벅뚜벅..

장식 하나 없이 삭막하고 적막한 통로에, 구두 굽 소리가 울렸다.

그 삭막한 풍경이, 그녀의 추억을 자극했다.


"그들은 이렇게 자랑스럽게 살아가며, 생명으로 문명의 송가를 연주했어."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노래하듯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


"이것이 영웅이라 불린 사람들의 이야기."


작은 새들이 어깨에 앉아 지저귀듯, 귓가에 울리는 음성은 더없이 감미롭다.


"불을 쫓는 13인의 끝나지 않은 여정이야."


하지만 왜일까.


"하지만 방문자."


메이의 귓가에 스치는 그 음성이 이렇게 슬퍼 보이는 것은.


"너의 길은 계속될 거야. 안 그래?"


천천히 걷던 발걸음을 빠르게 놀린다.


"그럼 마음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


마침내 도달한 홀에는 높은 의자에 소녀 한 명이 앉아있었다.


"발자취를 따라, 불을 쫓는 여정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꽃과 같은 소녀, 엘리시아. 그 요망한 핑크빛의 소녀가 넓은 홀에 홀로 앉아있음에도 공간을 메운 듯한 존재감을 발했다.

소녀가 손 위에 올려둔 것은 핑크빛의 수정꽃이 아니라, 작디작은 햄스터 크기의 앙증맞은 침식의 율자.

겉보기에도 코어 손상이 심각해 보여, 위협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소녀의 모습을 확인한 메이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죽은 이의 무덤을 넘어 우리가 맞이할 수 없었던 미래를 만들어봐"


엘리시아다운 장난스러운 목소리.

그러나 엘리시아의 상태는 겉으로 보기에도 심각했다.

손과 발의 말단부터, 천천히 바스러져 세계로 돌아갔다.

그것은 엘리시아가 다른 기억체와 달리 자신이 심어놓았던 자신의 본질인 '기원의 율자'로서의 힘을 전부 소진했기 때문이었다.

본래라면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대에 머물기 위해서 힘을 소모한 결과, 그녀의 기억체는 한계에 도달했다.

기억체지만 복구는 불가능. 복구한다 한들 그것은 영혼 없는 무언가일 뿐이겠지.

메이는 날듯이 뛰어 엘리시아를 품에 안았다.


"정말, 인사말을 40개 정도 준비했는데. 하나도 못쓰게 되어버렸지 뭐야. 너무해 메이."


투정 부리듯 곤란하게 웃음 짓는 엘리시아. 

이미 한 팔을 잃어, 하나만이 남은 손끝이 떨린다.

엘리시아가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친구들을 불러온 거야 메이?"


그 급박한 상황에서, 이 정도로 강력한 전력을 불러오다니. 이게 가능한 일일까?

더불어 엘리시아는 메이 하나가 아니라 많은 율자를 보았다. 그들이 전부 인류의 편이라니.

소녀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더니, 슬픈 와중에도 마음을 파고드는 기묘한 성취감에 엘리시아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안돼, 마지막 순간에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는 싫어. 엘리시아가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메이가 답했다.


"마지막 순간에 클라인이 낙원의 시간을 멈췄어요.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침식의 율자가 동의했고요."


그리고 낙원이 일시 정지됐어요. 메이는 뒷말을 삼켰다.

엘리시아는 납득했다. 다시 돌아오기까지 분명 많은 일이 있었겠지.

치밀하게 준비해 마침내 열셋의 영웅과 낙원을 구원해낸 메이가 자랑스러웠다.

시간만 충분했으면 확성기로 동네방네 한 달쯤 떠들고 다녔을 텐데, 아쉬웠다.

엘리시아는 자신의 소실되어가는 신체를 흘긋이며 말했다.


"메이, 아무래도 시간이 별로 없는 거 같아."


쓰게 웃었지만, 이내 엘리시아는 본래의 활기를 되찾고는 말했다.


"이제 [엘리시아]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야. 평생을 동화처럼 살았고, 세계를 사랑한 소녀의 이야기."


평생을 동화처럼 살아온 소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동화의 주인공 같았다.

눈물이 가득 고여 잔뜩 찌그러진 메이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엘리시아는 말했다.


"내 생각 많이 해야 해?"


비록 함께 있어 주지 못하겠지만,


"너무 서운해하지 마. 난 언제나 너의 기억 안에 있으니까."


감정 관리가 너무 어렵다. 더 이야기하면 분명 못생긴 모습으로 기억되겠지? 엘리시아는 서둘러 말했다.


"작은 선물을 남겨줄게. 내 축복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


작은 분홍빛의 수정꽃. 히아신스.

메이가 받아들자 엘리시아는 어서 가라는 듯이 웃으며 손짓했다.

그녀의 마지막은 언제나 그렇듯 [엘리시아] 답게.

홀을 빠져나가는 메이의 귓가에 엘리시아의 장난스러운 말소리가 어른거렸다.


"자. 지금부터는 너의 이야기야"


터벅터벅-.

아까 걸었던 길이지만, 메이는 보다 어둡고 침침해 보이는 통로를 힘없이 걸었다.

낙원을 빠져나오기 직전 메이의 귓가에 어렴풋하게 활기찬 소리가 들렸다.


"불을 쫓는 13영웅 집합!!!!!!!!!"


확성기? 정말이지 마지막까지도 엘리시아다워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어둠에 잠긴 통로 안에서 고개 숙인 메이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 * *






그것은 옛날 옛적에 있었던 이야기...

그날 그는 하늘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별하늘을 보았다.

별과 달이 보내온 신의 딸은 인간의 친구가 되기를 원했다.

바람은 그녀의 마차가 되었고, 사해는 그녀의 농원이 되었다. 새들은 선의 씨앗을 물어왔고, 꽃들은 사랑의 송가를 엮어냈다.

그녀는 그렇게 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과 함께 자랐고, 세계와 함께 싹을 틔웠다.


그녀의 삶은 마치 동화와 같아서, 그녀는 세계의 모두를 사랑했고, 세계 또한 그녀에게 응답해주었다.

자신만의 낙원을 바라는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엘리시아라 붙였다.

그녀는 자라나며 엘리시아라는 동화의 페이지를 채워나갔다.

동화의 끝에서, 그녀는 사랑하는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끝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인류의 문명이 엘리시아를 거두어 주었기에, 엘리시아 또한 기꺼이 웃으며 문명의 꽃씨를 남겼다.

그렇게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딸은 다시 하늘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남긴 작은 조각, 엘리시움(무결의 낙원)은, 

5만 년의 기나긴 기다림 끝에서 그녀는 그녀가 뿌렸던 씨앗이, 영원하고 무결한 꽃으로 만개했음에 기뻐했다.

그리하여, 정말 마지막으로 그녀는 세계에 장난스럽게 선물을 남기고는 끝을 맞이했다.


... 그랬을 터였다.


소녀는 위대한 흐름 속에서 눈을 떴다.

본래라면, 잠깐 머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스러져 흐름에 합류하게 될 텐데도

소녀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정신을 무언가가 지탱해주고 있음을 느꼈다.

위대한 흐름 속의 작디작은 빛들. 


그 신비로운 광경 속에서 소녀는 유난히 눈에 띄는 빛을 품에 안고나서야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인간의 순수한 소망. 기원이었다.

이 동화가 이대로 끝을 맺지 않기를..

세계를 위해 희생한 영웅이 부디 자신의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영웅? 그게 뭘까?

잠시 고민한 소녀였지만, 이내 소망이 전해온 따듯함에 마음을 빼앗겼다.


문득, 고개를 든 소녀의 눈동자에는 온통 별빛이 가득했다.

별빛, 별빛, 별빛, 세상이 온통 별빛이었다.

소녀는 어느덧 늘어나 두 눈으로는 셀 수도 없게 된 별무리를 보며 정말 로맨틱한 광경이라 생각했다.

소녀는 은하수를 두 눈에 가득 담으며, 위대한 흐름을 배경 삼아 뛰놀았다.


한참을 놀다 지친 소녀는 별무리를 가득 모아 달처럼 둥근 베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베개에 몸을 기대 잠을 청했다.

문득 흐려지는 정신 너머로, 소녀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잘 놀고 오려무나.]


---


껌뻑껌뻑.

?????

꽃보다 아름다운 소녀의 눈매에는 당혹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분명히 멋지게 끝을 맺었는데, 이게 대체 뭐람?

이전 문명에서의 마지막 기억과, 낙원에서의 기억이 뒤섞여 조금 헷갈렸다.

함선 내부로 보이는 장소, 공기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개방된 상태인 것 같다.

앞에 선 꼬마들이 든 책 이름이.. ely...sian? 엘리시움? 불을 쫓는 13 영웅? 이게 다 뭐야?

심지어 그리세오의 그것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아이들은 소녀를 바라봐온다. 위험해. 너무 귀엽다.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사방에서 인파가 밀려왔다.

예전에도 인기 있는 편이긴 했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수준이었는데.. 이건 많아도 너무 많다.

함선에 근무하는 직원의 도움을 받아 도망치듯 나오며 조금 뒤를 바라보니 소녀에게 익숙한 이들이 보였다.


술잔을 들어올리는 장신의 아름다운 여성.. 고맙지만 술자리는 좀 뒤로 미뤄야 할 거 같아.

비웃는 얼굴로 사진기를 내리는 얄미운 박사.. 나중에 따로 검열을 해야 할 것 같다. 

우리팀 남성진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이게 맞아? 너무 부끄러워 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그.. 싸우지는 말고.


길에서 소녀는 마술사를 만났다.

소녀는 마술의 비밀을 궁금해했지만,

마술사는 소녀에게 작은 힌트 하나만을 남겼다.

마술사는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율자 코어 하나를 꺼내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지나가는 소녀의 귓가에 얼마 전에 싸웠던 율자의 목소리와, 마술사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 또한 동화의 한 장면 아닐까? 

소녀는 후후 웃으며 지나갔다.


격납고에서, 소녀는 꼬마 화가를 만났다.

아니 화가가 맞나? 하늘색 머리가 둘인데.

왜인지 빨간 머리 하나와 하늘색 머리 두 명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어째서?

눈동자도 뱅글뱅글 도는 걸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소녀가 조금 더 걸어서 도착한 곳은 함교로 보이는 장소였다.

사방이 트인 공간에 아름답게 수 놓인 꽃들, 아 이거 내 낙원을 따라 한 걸까?

노력했지만 아쉽게도 70점. 좀 더 노력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름다운 것에는 항상 그만한 노력이 뒤따르는 법이다.


함교의 끝에는 장신의 여성이 서 있었다.

기적을 가져다준 우리의, 나의 영웅.

그토록 고대하던 만남인데, 눈물을 보일 수는 없잖아? 언제나 엘리시아답게. 스마일.

소녀는 평소처럼 인사했다.


"하이~ 나 보고 싶었어?"


아. 목소리 삑 났어. 큰일 났다. 요망한 털을 가진 상인이라도 있다면 백 퍼센트 녹음이다. 최소 몇 년짜리 놀림감이야.

하지만 소녀의 앞에선 여성의 표정은 더 엉망이었다.

울든지, 웃든지 둘 중 하나만 하는 게 어때?

천천히 걸어간 소녀의 바로 앞에 멈춰선 여성이 필사적으로 표정을 수습하며 물었다.


"아직도 '너의 이야기'에요?"


메이, 너무 집착이 심한 거 아니야?

소녀는 살포시 웃고는, 정정했다.


"아니. '우리의 이야기'지."


소녀는 기나긴 모험의 끝에서, 마침내 자신만의 낙원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세계가 내려주었던, 이제는 인류가 소망하는, 순수의 결정체.

하늘로 돌아간 신의 딸은, 인류의 기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춤추듯 세계에 돌아왔다.


이제는, 그들이 함께 만들어 나갈 미래영겁 행복할 이야기.

                                                      -because of you-


과거의 낙원.  폐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