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바다로 나온지 며칠이 되었는지 잊어버렸다. 이틀일수도, 사흘일수도, 세 달 혹은 삼 년일수도 있다. 확실한 건, 그런걸 자세히 기억할 정도의 정신머리는 없다는 것이다.


바다 위에서 돛을 접어버린 작은 캐러벨선의 위에는 다섯 명이 제각각 널부러져 있다. 흔들리는 배와 그에 맞춰 철썩대는 파도 소리는 더이상 운치도 낭만도 아닌, 거슬리는 소음에 불과했다.


선원으로 보이는 남성 셋과 그들의 선장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고픈 듯, 해적이라 하면 생각날만한 모자나 외투 등을 걸친 여성, 그리고 선원의 제복 같기도, 하녀의 드레스 같기도 한 옷을 입은 여성이 한 배 위에서 쓰러져 있는 묘한 장면이 푸른빛 캔버스 위에 그려져 있다.


우리는 조난당했다. 아니,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생각보다 우리는 먼 바다에 나온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후회가 머리 속을 잠식했다. 남자 셋. 그러니까 내 옆에 나란히 누운 이 둘과 나는 저기 저 '선장'의 상당히 애매모호하고 밑도 끝도 없는 제안에 넘어가 이 저주받은 배에 타고 말았다. 어차피 선장이 누구든 상관 없었다. 우리 모두는 도망자였으니.


하지만 차라리 우리를 쫓는 이들에게 순순히 잡혀서 진심으로 사죄를 한다면 지금 이 꼴보단 훨씬 더 볼만한 모습으로 끝낼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너희들... 혹시... 일어났어...?"


완전히 할망구 같은 목소리를 쥐어짜내는 선장이 운을 띄웠다. 우리 또한 영영 누워있을 순 없기에 대답하며 갑판에서 일어났다. 한 명, 그나마 조금 더 기력이 있는 녀석은 메이드 복장의 여자를 부축해서 앉혔다.


"우리가 대체 뭘 하려고 이 배에 탄거지?"


도저히 참지 못하고 텅 빈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가, 그만 말실수를 한 것을 깨닫고는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우리 모두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라서 안 한것도 아니었는데.


잠깐의 침묵. 허나 이후는 본격적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먼저 선장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좋죠?"


선장. 스스로를 선장이라 자칭하는 이 해적 복장의 여성은 사실 제대로 된 항해 경험도 없다고 한다. 자기 배조차도 없었다가 그나마 돈을 좀 모아서 구비한 배가 이거라나?

어쩐지. 선원 꼴랑 셋 모은 그 와중에 항구에서 바로 진수식을 하는것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어디서 데려온건진 몰라도 상당히 멍청해보이는 무녀가 와인병도 똑바로 못 깨서 그냥 선체에다가 병을 휙 던져버리는 바보짓을 진수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쳐도 선장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었다. 우리는 일말의 희망을 느꼈다.


"...이왕 이렇게 된거, 이 배 위에서 평범하게 사는건 어때?"


우리 셋은 다시 절망에 휩쓸렸다. 메이드는 결국 다시 쓰러졌다.


"잠깐, 생각해봐. 한창 때의 남녀가 같은 자리에 있으면 원래 그렇게 되는거잖아? 생명을 이어나가는거잖아?"


나는 이 헛소리를 더 듣고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육지가 그리워졌다. 뭍에서 기다리고 있는게 교수대라고 해도 말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선장!"

"이 자식! 선장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일 났다. 벌써 두 놈이 언성을 높히며 싸우기 시작했다. 내분은 확정되어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일렀다.


"애초부터 말이야, 니녀석이 제대로 된 생선을 낚아올렸다면 이 꼴까지는 나지 않았어!"

"뭐라고? 임마! 너야말로 조타를 어떻게 한 거야!"


두 뱃사람이 서로 멱살을 잡고 옥신각신하고 있던 와중에, 선장이 그 둘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외쳤다.


"그만! 싸움은 그만둬!"


그래도 선장이라 불릴만한 지도력은 갖추고 있는 건가? 의외였다. 그래. 어쩌면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걸 지도...


"너희들 말이지, 선장을 두고 싸우면 안돼! 아무리 선장이 좋아도 싸움은 그만둬주세요! 아아, 선장도 참 죄 많은 여자야..."


염병을 하고 앉아있네 진짜.


"너희들, 그거지? 처음부터 선장이라던가 노리고 이 배에 탄거였지? 한창 때의 남자 셋이 참지 못하고... 알았어. 선장에게는 뭘 하든 상관없지만 아쿠땅만은 건드리지 말아줘!"


헛소리의 장본인인 우리 셋은 그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다가, 한 명이 갑작스레 갑판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들켰다!"


"야! 저 새끼 잡아!"


결국 우리 둘은 실패가 확정된 도주범을 붙잡아 마스트에 묶어 매달아 놓았다. 그나마 옛 정을 생각해서 목을 매달진 않았다.


"이제 남은 사람은 우리 넷 뿐인가..."

"책임 같은 건 묻지 말고, 서로 협력해서 이 위기를 이겨내 봅시다."

"선장도 같은 생각이야. 아쿠땅도 그렇지?"

메이드는 힘이 다 빠져버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트에서 묶여 있는 녀석이 뭐라고 말한 거 같지만, 기분 탓이겠지.


"애초에 우리가 이렇게 된건 이상한 물고기를 낚아서 식중독을 일으킨 내 잘못이기도 하고 말이지."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 운이 없었던거지."


물론 우리는 잘못한 게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저 우리들의 두루뭉술한 잘못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야, 메이드인데 요리를 끔찍하게 못해서 식중독을 일으켜버렸다고 탓하기에는, 너무하잖아?

도무지 반박을 못 할테니까 말이다. 불쌍하므로 일단 봐주기로 했다.

그리고 분명히 선장은 '애초에 선장이 잘못을 했으니까 이 지경이 난 거 아니야!' 라고 하면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애석하게도 여성을 달래는 방법은 모른다.


잘못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는 이 파란 사막을 헤쳐나가야 한다. 마실 물도, 식량도 떨어진 상태다. 처음부터 도대체 며칠분이 적재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후후후, 너희들 선장이 비장의 수도 없다고 생각했어? 선장은 말이야, 치밀한 여자라고?"


어련히 그러시겠지. 하지만 우리도 뾰족한 수는 없으니, 한번 기대해보기로 했다.

그러자 선장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선수로 가더니 해수면을 한번 쓱 훑어보고선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구든 좋으니까!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그것도 방법은 방법이지...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결국 지나가는 선박이 우리를 알아챌 수 있도록 열심히 소리를 지르는 수 밖에 없었다.

부끄러워서 큰 소리를 못 내는 메이드는 선실에 쉬게 하도록 하고.

힘도 없는 상태에서 간신히 소리를 질렀으나, 결국 우리 모두 지쳐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데 그 순간...


수면 밑에서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올라오는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다 밖으로 튀어올라왔다.

잠깐 허공을 놀던 그 존재는 갑판 위로 착지했다. 이건... 이건...


"마린  선배, 아호이~"

"구라! 선장의 부름을 듣고 와준거야? 선장은 지금 완전 감동했는데!"

"어, 아마도?"


그러더니 이 상어... 라고 주장하는 쬐끄만 여자애는 이리보나 저리보나 일반 선원인 우리 둘에게 쫄래쫄래 와서는 소리를 죽여서 진실을 말했다.


"사실... 이런 연안에서 조난당해 소리치는 바보들이 누구일까 싶어서 호기심에 와본거야."


이 꼬맹이가...


"어쨌든, 다들 걱정마! 이 최상위 포식자이자 아틀란티스 향우회의 아이돌께서 해결해줄테니까!"


무슨 향우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쪽은 해양생물이다. 아마 우리를 도와줄 가능성이 있을거야! 분명히!

우리는 덩달아 들뜬 마음으로 함성을 질렀고, 상어 소녀는 자신의 허리춤에 밧줄을 묶은 뒤 선체와 연결하여 바다로 뛰어들었다.


"오오-"

"그래, 역시 아틀란티스의 상어라면 이 정도 배는 껌이겠지!"


라고 환호하고 나서 10초가 지났다.


"...왜 물보라가 하나 없지?"

"아냐. 바닷속에서 지느러미로 헤엄을 칠테니 물보라가 없는게 당연하지."


그러고 10분이 지났다.


"우리 이거 가고 있는거 맞아?"

"원래 이런건 우리도 모르는 채 천천히 느긋하게 가다가 속도가 붙는거라고. 조금만 기다려 보자."


이제 1시간 정도가 지났다.


"혹시 누가 조커 들고 있냐?"

"선장은 그런거 없는데요~"

"저, 저도..."

"나도 없어."


그러던 와중 바다를 바라보자, 구라가 뛰어들었던 바로 그 자리 근처에서 다시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아마 그녀가 다시 수면으로 올라오려는거려나?


물론 수면으로 올라오기는 했다. 완전히 축 늘어져서이지만...


"당장 건져! 건져!"

"구, 구라?! 진짜로?"


우리는 바다 속에서 9000년을 살아온 상어가 익사하기 직전의 상황에서 건져올려 구조했다. 물론 배는 요만큼도 움직이지 않았다.


"안되겠어! 우린 이미 틀렸다고!"

"아, 아직 포기하면 안돼! 선장이 힘을 불어넣어 줄테니까! 선장이 이 한 몸 희생해서라도 불끈불끈한 너희들을..."

"염병하지 마세요, 선장!"

"일단 나부터 좀 풀어줘!"

"배고파! 무슨 배에 먹을게 다 떨어져 있어?!"

"저기, 그게..."

"이 배는 이제 끝장났어! 완전히 끝났다고!!"


우리 모두는 각자 하고싶은 말만 하며 배 위에서 소리지르며 날뛰었고, 오래가지 않아 이 바다 위, 별길이 지나는 바다를 이불 삼아 다시 갑판에 널부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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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지나가던 초계함이 발견하고서야 구조되었다.

이 정도로 가까운 연안에서 조난당한 멍청이들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서...


이 이야기의 교훈이 뭐냐면.

절대 해적 코스프레한 여자의 배는 타지 말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