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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대지 위에 도로 하나만이 검은 선을 그리고 있었다. 함박눈이 대지와 도로 위에 내리고 있었고, 대지와 눈 사이로 은색 차 한대만이 검은 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차를 몰고 있는 빨간 머리의 여성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중간중간 이빨을 부딪치거나 갈고 있었으며 이따금씩 조수석을 노려보고는 다시 끝없는 검은 선으로 시선을 두었다. 조수석에는 보랏빛의 긴 머리를 복잡하게 늘어뜨린 여성이 바른 자세로 앉아있었다. 허벅지 위로 가지런히 포갠 손은 떨고 있었다. 빨간 머리의 여성은 그 손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보라 머리의 여성은 운전자의 낮은 으르렁거림을 듣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23

새하얀 공간이 있었고, 그 안에 구 하나만 떠있었다. 두 사람이 그 구 앞으로 다가왔다. 새하얀 머리의 사람은 구를 바라보다가 옆에 선 보라 머리의 여성을 불렀다. 아이리스라 불린 그 여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구를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뒤 입을 열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노래가 되었고 노랫가락은 보이는 형태가 되어 새하얀 공간을 칠해나갔다. 노랫가락에 닿은 구는 내부에서부터 조금씩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산산조각이 났고 그 파편들은 타원형태로 모여들었다. 타원 안은 검은 빛이 넘실거렸다. 한발 뒤로 물러선 아이리스는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닿은 것 같네요, 라는 말을 들은 하얀 머리의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33

넘실거리는 빛의 물결 안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그 뒤로 차례차례 이어서 나오기 시작했다. 다섯 명이 나오자, 빛의 물결은 사그라들었다. 흰 머리의 사람은 그들을 향해 따라오라는 몸짓을 하고는 돌아서서 걸어나갔다. 다섯 명은 그 사람을 따라 걸어가면서 아이리스에게 인사하며 나아갔다. 사나라는 이름의 갈색 피부에 키가 큰 백발의 여성은 큰 웃음을 보이며 손을 흔들며 지나쳤고, 녹빛 머리카락에 나뭇가지 같은 뿔이 나온 성숙해보이는 파우나라는 여성은 작은 웃음과 함께 목례를 하며 지나가고, 푸른 머리카락에 시곗바늘 모양의 칼을 역수로 쥐어 등 뒤로 감춘 여성은 아이리스를 바라보다  오로 크로니입니다, 하고 간결하게 말하더니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웃고 지나갔고, 갈색 머리카락에 깃털 두 개가 튀어나온 소녀같은 인상의 여성은 작게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빨간 머리가 마구잡이로 뻗쳐있고 둥근 쥐의 귀 한쪽에 쥐덫이 달려있는 여성은 아이리스 앞에 잠시 멈춰섰다. 그 여성의 눈 속의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41

찰칵.

너도 날 바라보고 있구나.

41

찰칵.

너는 뒤집혀 있는데, 왜 네가 바르게 보이는걸까.

42

찰칵.

왜 넌 그대로야? 모든게 뒤집혀 보이는데.

43

찰칵.

알수 없는, 미소만.


44

포탈을 통해 넘어온 다섯 명은 자신들을 '의회(카운슬)'이라고 소개하고는, 적당한 곳에 2층짜리 건물을 지어 그곳을 자신들의 거점으로 삼았다. 건물의 1층은 홀에 적당한 크기의 원탁이 몇개 있고 주방과 결합된 아일랜드 형태의 바가 있어서 카운슬 멤버들이 식사를 하러 모이거나 간단한 모임을 가질 때 자주 사용하곤 하는 공간이었고, 2층은 각각의 개인실이나 만남을 위한 방 몇개가 적당하게 있는 개개인을 위한 공간이었다. 어느 날 정오 즈음에 아이리스는 의회의 건물 1층의 제일 구석에 있는 원탁에 앉아 사진첩을 넘기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적당하게 낮은 여성의 목소리가 아이리스를 불러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빨간 머리의 여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베이라고 불린 그 여성은 웃으며 아이리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이리스가 보던 사진첩을 어깨 너머로 본 베이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아이리스를 팔꿈치로 찔렀다. 갑작스런 기습에 놀라면서 베이를 노려보던 아이리스는 베이를 노려보더니 베이를 잡으려고 덮쳤으나 베이는 옆으로 뛰어 피했다. 얼마간 그렇게 옥신각신 하고 있더니 남은 카운슬 멤버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이리스와 베이가 추격극을 벌이며 홀에서 날뛰는 모습을 본 그녀들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104

아이리스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가득찬 공간에 서 있었다. 몇 줄기의 푸른 빛만이 어두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곳에는 크로니와 금발에 단정해 보이는 트렌치 코트를 입은 여성이 있었고, 흰 머리의 사람이 공중에 떠서 세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소리 지르면서 시곗바늘로 흰 머리의 사람을 겨누려는 크로니를 금발의 여성이 끌어안아 막고 있었다. 아멜리아 선배, 라고 불린 그 여성은 크로니를 진정시키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호흡을 골랐다. 그런 그녀들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흰 머리의 사람은 등에 맨 거대한 칼을 뽑고는 아이리스를 겨누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리스는 놀란 표정이 얼굴에 서렸으나 이내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115

아이리스. 당신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기 위해 온 희망의 현신은 맞으나, 당신이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사람들의 어두운 면까지 끌어안고 가려다 보니 당신 안의 악마가 균형을 무너뜨릴 정도로 강해졌습니다. 이는 당신의 존재에도 위험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옛 "낙원"의 터로 돌아가 내면의 악을 정화해 균형을 되찾을 것을 명령합니다. 귀환하기 위해 성 니콜라스가 최초로 선물을 나눠주던 언덕으로 가십시오. 언제 가야할 지는 추후 연락하겠습니다.


138(extend ver.)

"정말 갈거야?"

"..."

"정말 갈거냐고."

"..."

"아이리스!"

"미안해, 베이. 어쩔 수 없어."

"그 말 하나면 끝이냐고. 나한테 더 말도 안하고 그렇게 갈 셈이냐?"

"..."

"항상 그래왔지. 나만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하고 넌 그냥 어물쩡 넘어가고! 이렇게 니가 없어지는 때에도! 뭐하는거야, 나랑 말하기 싫어? 아 그래, 같이 오는게 크로니이길 바랬나보지? 아니면 누구? 이나?"

"베이."

"너랑 저 차를 타고 가는 게 데이트가 아니고 마지막 여행이라는 걸 알면 얼마나 기분 개같아지는지 알아? 그걸 달래줄 생각을 한 적은 있어? 왜, 내가 너 잊고 살길 바라는 거냐? 깔끔하게 잊었으면 좋겠어?"

"베이, 그건 아냐. 미안해. 내가 잘못 생각했어."

"..."

"있잖아, 베이. 나는 마지막만 생각했어. 웃는 얼굴로 작별하자, 슬픈 얼굴 보여주지 말자. 그거만 생각했어. 그래서 그 중간 과정은 생각도 못했어. 정말 미안해."

"너 허당인건 진짜 끝까지 변하지 않는구나. 진짜 어떻게 살아왔냐."

"이런때까지 놀리는거야?"

"아니면 뭐, 키스라도 해줘?"

"응, 해줘. 마지막인데 뭔들 못해."

"싫어. 어차피 영원한 이별도 아닌데 돌아올때 감정 담아서 해. 진하게."

"나 돌아오는데 몇백년은 걸리는거 알고 있지?"

"그게 뭐,"

"...츤츤대는건 아니지?"

"넌 이럴 때까지 내가 츤츤댈 거라 생각하는거냐?"

"그야 ...아, 갈 때가 됐나봐"

"진짜 많이 그리울거야."

"응, ...또 만나. 베이랑 노는 꿈 많이 꿀거 같아. 즐거웠거든."


151

아이리스는 손을 흔들며 웃었다. 발끝, 머리카락 끝자락, 손가락 끝은 빛의 가루가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고마워, 베이, 사랑해.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완전히 빛의 입자로 변했다. 하늘로 올라간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는 작은 빛무리만이 떠돌고 있었다. 베이는 그 빛무리에 손을 뻗어보다가 이내 거두었다. 빛무리는 이내 사라졌다.


162

베이는 아이리스가 빛의 가루로 되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다 주저앉았다. 후두둑 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저 하늘을 바라보다가 소리를 질렀다. 눈물이 눈가에서 얼굴로, 아래로 아래로 흘렀다. 하늘에서 내려온 눈이 베이의 얼굴에 닿아 녹아내렸다. 그렇게 베이는 언덕에 주저앉아 온몸으로 눈을 맞으며 울고 있었다.


  • Շ9Ɩ
  •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눈이 얼굴에 닿아서 눈물이 되니까, 어떤 의미로는 계속 눈물 흘리는게 맞을지도. 이젠 소리도 나지 않는다. 그저 끅, 끅 하고 호흡만 괴롭다. 머리도 젖어서 무겁다. 나른하다. 졸립다. 이대로 자면 얼어죽는단 소리 들을 거 같아. 근데 움직일 힘이 나지 않는다. 가야지. 가야지. 뭐 때문에? 너무 귀찮다. 이대로 얼어죽으면 파우나가 살려줄려나. 엄마 품에 안겨서 자고싶다. 파우나 목소리. 사나 목소리. 무메이 목소리. 크로니 목소리. 친구들. 친구들 목소리. 걱정하던 친구들. 내가 여기서 자포자기하면 걔네들도 나처럼 슬퍼할까. 그건 싫다. 맨날 웃으면서 하루하루 즐겁게 보내자고 한건 난데. 알아, 정신차려야 한다는거. 그래도 지금은. 조금은 이렇게 있고싶어. 눈 내리는거 맞는거도 나른해서 기분좋고, 아 그래도 할거는 끝내놓고 즐길까. 아까 떨어진거 뭐였지? 그거만 보고 늘어져야지. 이게 뭐야? 검은색, 흰색. 아, 걔 날개구나. 사라진줄 알았는데. 안으면 따뜻할까. 아 귀찮다. 좀만 누워있고 싶다. 기분좋아.

194

베이는 눈을 뜨고, 취침등을 놓은 작은 탁자에 같이 놓인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아침 8시 정도를 가르키고 있었다. 그녀는 느린 움직임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신고 창문의 커튼을 걷어낸 뒤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책상에 놓여져 있는 노트북을 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책상 위에는 엎어진 사진첩, 온갖 필기구가 담긴 통, 나란히 꽂힌 여러 언어 교재들과 공책, 몇 권의 소설, 그리고 주사위 한 쌍이 있었다. 뒤집힌 사진첩에는 2년 전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 숫자들을 바라보던 베이는 손을 뻗어 주사위를 집어 바라보았다. 검은 보석에 보랏빛 눈이 새겨진 주사위는 하얀 보석에 파란빛 눈이 새겨진 주사위와 부딪쳐 달그락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동안 주사위들을 달그락거리며 침대가에 앉아있던 베이는 이윽고 일어나서 방문을 열고, 나갔다.


213

끼익 소리를 내던 방문은 다시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