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라이브의 버튜버들은 모두 저마다의 컨셉이 있다.


사신, 토끼, 크툴루, 시간여행자, 천사, 악마 등등. 이 컨셉들은 각각 개성넘치고 다채로우며, 시너지를 발휘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많은 망상을 하게 만들었다.


망상이란 백수에게야 한낱 백일몽에 지나지 않지만 능력있는 자에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영감. 전 세계의 버생을 사는 이들 중 능력자들은 망상을 픽시브로, 메모장으로, 커뮤니티의 글로 옮기며 차츰차츰 문화의 끄트머리를 홀로라이브의 총천연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컨셉은 역사가 축적되어 인물이 되고, 인물 간의 관계와 시너지는 하나의 세계관이 되었다. 망상이라는 집단적 무의식의 현실적 결과물은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기에 충분한 분량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일까. 어쩌면 하루만에.


세상은 컨셉에 잡아먹혔다.


모조리, 다. 진실이 되어버렸다.




***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살펴야 하는 것은 회귀 시차 알람이다. 사나 님의 억제기는 워낙에 잘 뽑히는 터라, 매번 크로니 님이 수고를 하신다. 그러나 세상이 가볍게 멸망하고 시간이 돌아갈 때 가끔 인간미를 보여주시는데, 그 실수로 인한 시차가 천차만별이라 항상 자동 알람이 필요하다.


책상 위에 놓인, VR 차원에서 처음 선보여졌던 플라잉 크로니 회귀 시차 알람 피규어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그 네모난 턱을 치켜들고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지만... 정수리의 분침은 본래의 시간보다 34분 앞서 있었다.


시차 없이 완벽하게 회귀가 완료되었다면 '와타시, 스고이'하는, 특유의 어눌하면서도 착 달라붙는 자신감 빵빵 목소리가 들렸겠지만, 30분이나 빨라져버렸으니.



-GWAK!!



어우 듣기 좋아. 출근이 34분 앞당겨졌지만 곽로니 모닝은 기분 좋은 출발이라 할 수 있겠다. 사측에서 양해를 해주기도 하고, 흔히 들을 수 있는 곽로니가 아니니까.


우선 씻자. 아침은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씻으면서 화장실 창틀에 걸어둔 베리 화분을 들여다보자 빨갛게 익은 열매가 셋 있는 것이 보였다. 벌써 자라다니. 확실히 아침을 거르고 출근할 때마다 나오는, 집 문 옆에 자리를 잡은 나무가 챙겨주는 수액을 조금 줘 보는 것이 정답이었나보다.


문명인이라면 모두 하나 쯤은 필수적으로 키우게 되는 '뭄메 베리'. 저 열매 하나만 있으면 문명에 관련된 문제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고장난 컴퓨터? 엔진 고장? 옛날에 그런 것들을 전문적으로 고치기 위한 직업이 있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이제는 다 의미가 없는 단어들이다.


물론 굳이 키우지 않고 파는 걸 사도 되지만, 정성이 담긴 뭄메 베리는 사용할 때 '땡뀨!'하는 귀여운 목소리가 들리니, 키우지 않을 수 없다. 무료 슈퍼챗 같은 느낌이라 재밌기도 하고.


다 씻고 나와 쇼파에 앉은 뒤 아침 뉴스를 틀자 뉴스에서는 또 얼마 전 데뷔했다던 비밀결사에 대해 보도 중이었다. 이상하기도 하지. 본래 버튜버라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화려하게 자신을 뽐내는 경우가 대부분일진대 비밀결사라니? 컨ㅅ........취향이 독특한 버튜버구나 싶었다.


플라잉 크로니 시계를보니 출근까지 10분 정도 남은 시각. 아침은 포기하고 뭄메 베리를 위한 수액이나 챙겨야지 안 되겠다. 작업복으로 빠르게 환복하고 집 문을 열자 늘 그렇듯 진갈색의 나무 가지가 나를 막아섰다. 딱딱해보이는 제 몸을 유연히 늘리며 찬찬히 나를 관찰하던 나무는 연록색 잎사귀가 가득한 가지 끝으로 나의 정수리를 살짝 두드렸다. 꼭 아침밥 챙겨먹고 다니라는 듯, 약간의 질책과 걱정이 섞인 두드림. 제 주인의 인성을 꼭 닮은 나무가 아닐 수 없다.


모두가 알다시피, 파우나 님의 나무다. 그 분의 넘치는 모성으로 모든 생명체가 최소한 아침을 챙겨먹을 수 있게끔 되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컵을 줄기에 살며시 가져다대었다. 그러자 보기만 해도 청량함이 느껴지는 연하늘색 수액이 졸졸졸 소리를 내며 컵을 채웠다. 겉보기만 청량한 것이 아니라 맛도 청량하다. 다만, 다 마시면 귀여운 '땡뀨'를 못 듣기에 반만 마시고 나머지는 물통에 넣어 보관한다.


수액이 조금씩, 찔끔찔끔 나와도 끝까지 인내해야한다. 혹여 흘리기라도 한다면..... 모든 잎사귀를 추욱 내려버리고 슬퍼할 터라, 바닷물 맛의 수액을 좋아하는게 아니라면 일부러 신경을 거슬러서는 안된다.


마침내 수액 조달이 끝이 나고, 물을 담아둔 물뿌리개를 근처에 놓아주고 마당을 나서서 제일 먼저, 택시를 잡았다. 생각보다 수액이 나오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이정도로 늦게될 줄은 몰랐는데.



"아맞다 사무실이요."


"옙."



아맞다 사무실. 상당히 골때리는 이름의 사무실이지만 지금은 내 직장이다. 월급도 나름 괜찮고 업무도 어렵지 않은 편이라 간만에 오래 다니고 있다. 사장님 딸인지 조칸지 애 하나 봐야 하는 것만 제외하면 그냥 선배님 청소나 도와주러 다니면 끝.


지각은 처음이라 조금 불안해하는 모습이 나왔는지, 백미러를 동그란 눈으로 슬쩍 쳐다본 기사 님은 기다랗고 하얀 꼬리로 히터를 틀면서 내게 물었다.



"좀 빨리 가드릴까?"



평소 같으면 거절했을 제안. 하지만 이번에는 거절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회사에서는 회귀 시차로 인한 지각 정도는 괜찮다고 한다지만 여태 지각 및 결근 한 번 없이 깨끗한 근무일지를 가지고 있는 나로서 정말 지각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기사 님도 시간 쪽에 일가견이 있는 우로보로스.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 님은 어디에서 꺼냈는지 모를 선글라스를 새하얗고 둥그런 머리에 착 쓰고 구불텅 말랑이는 꼬리 끝으로 슬쩍 올리며 말했다.



"딱 보니 크로니 님 회귀 시차 탓이지요? 돈은 안 받을터니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않았음 합디다."


"아유 그럴 리가요. 저 플라잉 크로니 알람 씁니다."


"어! 그래요? 허허허. 간만에 동지를 만났네. 동지! 안전벨트 하고 눈 딱 감으시게. 금방이요 금방."



눈을 감기가 무섭게 꼭 중력이 나를 주무르는 듯한 압력이 엄습했다. 이리 휘청, 저리 흐느적. 그렇게 몇 분인가 지났나. 어질어질하던 차에 우로보로스 기사 님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왔네! 가는길 오시 보고 오는 길 오시 보길!"


"감사, 감사합니다..."



경황이 없어 일단 카드를 앞에 내고 후다닥 택시에서 내리자 기사 님은 카드를 받자마자 그대로 조수석 창문 쪽을 통해 내게 도로 카드를 건네고는 멋진 독니를 반짝이며 도로를 따라 사라졌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카드를 받아든 채 몇 초는 귀여운 세뇌노래를 들었던 때처럼 딱 굳은 채 있어야 했다.


지각도 하지 않고, 택시비도 굳었건만 맥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 자꾸만 흐느적거리려는 허벅지를 한 대 찰싹 때리고 고개를 들자 2층 창문 전면에 크게 박혀 있는 아맞다 사무실 스티커. 검정색 흰색 얼룩덜룩한 유니폼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확인한 뒤, 나는 건물에 들어섰다.


선배님은 와 계시려나. 그 꼬맹이는 학교나 갔으면 좋으련만.





다음?편


공시 공부하다 글이 녹슬까봐 끄적인거라서 몰?루


설정 하나: 어느 순간 오시가 정해지면 그 버튜버의 팬캐릭터로 모습이 변모함. 모두가 자신의 모습에 자부심을 갖고 있어 불평이나 차별, 파벌 싸움 따위는 없음. 주인공은 오시가 없어 그냥 인간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