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선배는 마오바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

사실 그만 그런것이 아니었다. 거리를 가면 가끔씩 운동권이나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마오바데가 그려진 티셔츠를 패션으로 입고다니곤 했다.



나는 왜 그런지 궁금했다. 물론 마오바데는 체 게바라 급으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막 얼마 전에 운동권인가 뭔가에 발을 걸친 나는 그가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선배는 '지금의 인도는 인도공산당이 없었으면 끔찍한 곳이었을것' 이라며 이야기를 꺼냈다.


1948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자와힐랄 네루의 암살로 촉발된 독립혁명으로 해방되었다고 한다. 힌두교 엘리트들이 이끌던 인도국민회의는 인도공산당과의 국공내전에 직면하였고, 독립을 이끌었다는 버프로 강성했던 국민회의측은 공산당을 압살하였다고 한다.


'그 때, 마오바데라는 젊은 제지공이 공산당의 잔당들을 이끌고, 그 먼 정글을 헤치며 해방구인 케랄라 소비에트로 향했어. 그 유명한 대장정을 시작했던거지.'


술이 들어간 선배는 아련하게 말했다.


3만명으로 시작한 '대장정'에 남은 생존자는 수백여명 뿐이었다. 그러나 농촌을 지나가며 카스트 제도의 타파와 구습의 붕괴를 요구했던 그들의 주장은 새 시대의 상징이 되었단다.


'수많은 인도 국민군의 탈영병들이 케랄라로 향했어. 그들 대부분은 수드라나 불가촉 천민들이었지. 공산당이 주장한 목소리가 농촌의 빈민들과 카스트의 천민들에게 지지를 받기 시작한거야.'


결국, 겨우 수백여명으로 시작한 인도공산당의 혁명은 인도국민회의를 실론 섬으로 추방해내는데 성공하면서 끝났다. 그러나 마오의 이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고 한다.


'너 인도민국에서 일어나는 일들 국제뉴스에서 가끔 봤지?'

나는 현 인도민국 총리 나렌드라 모디가 하급카스트에게 차별법을 제정했다거나, 처가가 미망인을 살해하거나 하급카스트들을 명예살인했다는 인도민국발 기사를 기억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마오바데는 대장정을 거치며 수많은 사람들이 카스트제도와 이전 힌두 봉건문화의 이름으로 명예살인, 차별당하는 것을 보았다. 마오와 그의 젊은 지지자들은 인도의 사회 문화의 구습을 타파하는 혁명, 즉 '문화대혁명'을 시작한 것이다.


거리에 나온 아스팔트 태극기 할아버지들도 '문화대혁명처럼 하자'고 외칠 정도로 그 사건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다. 보수적인 학자들도 문화대혁명을 까 봐야 '마오바데는 문화적 악습은 없엤으나 경제적 집산주의가 실패했다.'라고 할 정도였다.


'대학생들과 청년들로 이루어졌던 랄라 세나(붉은 병사)들은 아직도 인도의 지역 족장들이나 토호들이 지배하던 내륙에서 함께 농사짓고 교육하며 반구습 운동을 진행했어, 토호들이나 사두(힌두 종교지도자)들이 이끄는 린치로 많은 랄라 세나들이 죽었지만 결국 그들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었지.'


1969년, 마오바데는 벵골에서의 연설중 힌두 극단주의자들의 손에 암살당했다고 한다. 사후 그가 남긴 재산이라고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인민복과, 이가 나간 찻잔들 뿐이었다고 선배는 말했다.


68혁명이 한창이던 그시기, 유럽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마오바데를 추모하며 거리를 휘져었다고 한다.


'우리 농활가는것도 사실 랄라 세나들이 하던 것에서 따온거야.'


'그건 몰랐네요.'

나는 흥미롭다는듯이 대답했다.


'그럼 네오마오주의인가 알튀세르주의인가를 좋아하는 학생행진도 그를 따르는건가요.'


'아니. 전혀. 걔내는....'

선배가 눈쌀을 찌뿌렸다.


'하튼 가자. 5인교양 늦겠다.'


우리는 잠시동안이었지만 흥미로웠던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인천의 음습한 사무실로 향했다. 오늘은 거기 아저씨들이 카레랑 탄두리치킨을 사줬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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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바데 : 힌디어로 마오쩌둥이란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