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월 북베트남이 휴전협상을 파기하고 공격을 시작했을때 이미 미군과 한국군 거의 전부가 철수한 상황이었고 그나마 남아 있던 무기를 수령했던 남베트남군은 이를 활용할 능력도 지휘관들의 의지도 없었다


심지어 침공 상황에서도 남베트남 대통령궁에서는 쿠테타가 밥먹듯이 일어났고 부패한 장군들은 미국제 무기를 북베트남에 팔아먹었다.


한때 세계 4위권 군사력을 가진 월남군이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무기 수치상의 순서였고 이를 운영할 기름이나 노하우는 없었다


3개월만에 모든 주력군이 박살나고 수도 사이공 함락이 코앞에 다가오자 미국 정부는 모든 잔류 미국인과 유산 베트남인들을 대피시키는 작전을 수립했다


프리퀸트 윈드 작전이었다


4월 21일 가장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남베트남 18사단이 궤멸당하면서 사이공을 막을 병력 자체가 없어졌다

심지어 노획된 미국 전폭기들이 비행장을 폭격하여 수송기를 이용한 철수가 불가능해졌다. 남은 선택지는 헬기를 이용한 철수 뿐이었다



남베트남인들도 상황을 명백하게 볼 수 있었고 어떻게든 미군의 헬기를 타려고 했지만 몇백대밖에 안되는 헬기로 몇만명의 난민들을 전부 나를 수는 없었다. 각지의 헬기 착륙장에는 제발 자기들도 태워달라고 애원하는 남베트남인들로 아비규환이 벌어졌지만 미군이 할수있는건 최대한 국적자들과 지식인 계층만을 가려내어 철수시키는것 밖에 없었다


29일 미국적자들과 동맹국 시민들 절대다수가 철수했고 공식적인 작전은 끝났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외국인들과 난민들이 도움을 호소하고 있었고 아직 사이공에 잔류했던 미군도 약간이나마 있어서 철수는 30일까지 진행되었다


30일에는 주남베트남 미국 대사와 최후의 미국적자 2100명, 마지막 해병대까지 철수했다. 이때 해병대는 혼잡한 상황 속에서 철수한 것으로 보고되어 있어서 하마터면 철수하지 못할뻔했다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들은 미국 헬기를 타고 철수하려 했지만 역시 정보가 전달이 안돼서 탑승을 거부당했고 대사를 포함한 많은 인원이 포로로 잡혔다. 당시 대사가 현역 장성에 중장정보부 소속이라 북한이 북베트남이 대사 등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지만 북한이 중월전쟁때 중국 편을 들자 빡친 베트남쪽이 한국 대사를 석방해버렸다.


사실 30일 새벽까지는 헬기가 아니라 배를 타고 탈출했다면 미군의 구조를 받을 수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정보에는 어두워서 계속 헬기만을 고집했고 결국 대다수가 북베트남군에 억류당했다. 실제로 4만여명의 난민이 배를 타고 탈출해서 미군에게 구조받았다.





남베트남 헬기를 밀어버리는 미군 항모승조원



항모의 허락없이 임의로 착륙중인 남베트남 연락기



탈출한 베트남 난민



항모에 자리가 없어서 사람만 내려놓고 헬기는 바다에 처박아 버리는 남베트남 파일럿들

잘보면 헬기, 기름, 무기 할거 없이 전부 버려서 자리를 만들고 있음



그나마 여기 나오는 난민들도 대부분이 어느정도 정보를 빨리 받거나 상황을 잘 알던 유산계층



미 해군의 통솔아래 피난온 남베트남 배들



남베트남 공군은 남은 공군기들을 모아서 마지막 반공진영이었던 태국을 탈출시켰고 이 중에 드래곤플라이어 일부는 한국군이 접수했다.


남베트남 해군은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군함을 총집결시켜서 장병과 가족 등 3만여명을 데리고 미군에게 합류했다.



그리고 4월 30일



북베트남 전차가 대통령궁에 진입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남베트남 정부는 항복을 선언했지만 북베트남은 이미 멸망한 국가의 항복은 있을수 없다며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