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리는 정치사)0.3. 70년의 논란 - 정판사 위폐 사건 - 유렉카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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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배경

일단 이름과 달리 미군정 초창기 조선공산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 서거 1주기 행사를 주최할 정도로 미군정 체제에 순응했으며, 미군정도 조선공산당을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했었다. 그러나 1946년 5월 부터 미군정은 앞서 설명했던 '정판사 위폐 사건'을 시작으로 조선공산당을 압박하고, 각종 좌파 계열 신문들은 정간, 혹은 폐간되었으며 좌파 단체들이 조사를 받은데 이어 박헌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주요 인사들에 대해 체포령까지 내려졌다. 결국 위기를 느낀 조선공산당은 1946년 7월 '신전술'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정하며 미군정에 대한 적극적인 대중투쟁을 예고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대대적인 파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와 별개로 대중들의 미군정에 대한 불만도 상당했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임금은 그대로였으며, 미곡수집 정책 때문에 식량도 전국적으로 부족했다. 일반 노동자들은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 사실상 이름만 노조인 어용단체 대한노총(놀랍게도 한노총의 기원이다.)의 개입 등에 불만을 가졌다. 그렇게 1946년 9월, 파업이 예정되었다.


-파업의 진행

(1946년 11월 22일자 전국노동자신문에 실린 총파업선언서)

1946년 9월 중순, 서울 철도국 경성공장의 노동자들이 회사에 요구조건을 내걸고 이행을 요구한다. 허나 회사는 적극적인 문제 해결 의지가 없었고, 미군정 운수부장은 "인도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사람은 강냉이를 먹으니 행복이다"라는 망언을 지껄였다. 결국 분노한 철도 노동자들은 1946년 9월 23일부터 파업에 돌입했다. 부산철도공장의 7천여명에 달하는 철도 노동자들을 시작으로 서울도 동조하며 전국적으로 4만여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우리 4만 철도종업원은 우리 철도가 또다시 어느 제국주의의 압박과 착취와 침략의 무기가 되게 함이 아니라 조국의 민주화와 독립과 부강의 무기가 되게 하기 위하여서 참다 못하여 총파업에 들어갔다. 쌀 두 말 값의 월급과 강냉이죽으로 연명하여 그뿐만 아니라 미국에 의존하여 국내 생산을 축멸시키고 종업원의 대량해고 감원까지 착착 진행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20만의 가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단연 파업으로써 무성의한 당국자의 반성을 촉하기로 하였다. 파업은 파괴가 아니다. 우리들의 요구는 정당하고 건설적이라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철도 총파업 성명서)

곧이어 9월 24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남조선 총파업회원 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총파업선언서를 발표하며  다음 12개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1. 쌀을 달라! 노동자와 사무원, 모든 시민에게 3홉 이상 배급하라.

1. 물가등귀에 따라서 임금을 인상하라.

1. 전재민과 실업자에게 일과 집과 쌀을 달라.

1. 공장폐쇄, 해고 절대 반대.

1. 노동운동의 절대 자유.

1. 일체 반동 테러 배격.

1.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적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1. 민주주의 운동 지도자에 대한 지명수배와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1. 검거, 투옥중인 민주주의 운동자를 즉각 석방하라.

1.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1. 학원의 자유를 무시하는 국립대학교안을 즉시 철회라하.

1. 해방일보, 인민보, 현대일보, 기타 정간 중인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그 사원을 석방하라.

9월 24일 서울 지역 회사와 공장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고, 같은날 대구의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으며, 9월 25일 오후 경성출판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가며 10월 2일까지 신문발행이 중단되었다. 9월 26일 대구 우편국원 노동자들이, 28일 중앙전신전화국, 10월 1일 우체국과 경성전기주식회사, 10월 3일 부산전신국까지 파업에 들어가며 겨우 서울에서만 295개의 공장, 3만여명의 노동자, 사무원 6천여명, 학교 20개, 학생 16000여명, 교수 300여명이 참여하고, 지방에서도 5만여명의 군중이 참여했다.


그러나, 이 총파업은 상당히 다급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철도노조를 제외하고는 전국적이고 조직적인 파업 능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게다가 이 파업을 이끌어야 할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지도력은 실망스러운 수준이었기 때문에 조직적인 대중운동은 되지 못했다.

거기에다 미군정과 경찰, 우익 청년단체들의 진압도 잔인할 정도로 거셌는데, 특히 김두한이 이끄는 대한민주청년동맹은 경찰과 함께 노동자 1400여명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다 사망자 2명을 낼 정도로 격했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파업의 동력은 10월로 넘어서며 급격히 약화, 끝내 와해된다.


-대구 10.1사건

일단 다들 알겠지만 이 당시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릴 정도로 좌파 성향이 강한 도시였다. 그런 와중에 미군정의 경제정책과 식량 정책은 대실패했고, "쌀이 없으면 채소나 과일을 구해 먹으면 되지 않냐"는 말을 할 정도로 무능했다. 그런 와중에 그해 초 콜레라가 창궐해 대구 경북에서만 1700여명이 사망하였으며 친일 경찰은 여전히 경찰이 되어 활개를 쳤다. 이렇게 대구 경북 지역의 미군정에 대한 민심이 흉흉한 상황에서 9월 총파업이 터졌다.

10월 1일 오전, 굶주린 시민들이 모인 시위대 1천여명이 대구부청(현 대구시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이들을 막아서다 공포탄을 발사해고, 분노한 군중은 그 경찰을 구타했다. 시위대는 점점 불어나 저녁 즈음에는 대구역 앞의 수천명에 달하는 노동자와 100명의 무장경찰이 대치하기 시작했고, 결국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한다. 분노한 시민들은 다음날 죽은 노동자의 시신을 메고 대구 경찰서를 포위한 뒤 시위대 대표가 직접 경찰서로 들어가 경찰서장과 담판을 벌였다. 경국 경찰서장은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 유치장 열쇠를 건내 수감된 정치범을 석방하게 했다. 곧이어 조선공산당 대구 지부의 통제를 받는 노동자들이 경찰권을 인수하려 하던 그때, 거리 한쪽에서 흥분한 군중들이 경찰에게 투석을 가했고, 거기에 대해 경찰관도 사격으로 대응, 순식간에 17명의 시위대가 총에 맞아 사망한다. 갑작스러운 총격에 분노한 군중들은 끝내 폭도가 되어 경찰관들을 구타하고 무기고를 털어 총기로 무장했다. 평화 시위로 시작된 일이 폭동으로 번지자 조선공산당원들도 혼란에 빠졌고, 폭도들은 가옥을 털고, 경찰관을 폭행하거나 잔혹하게 살해했다. 당시 대부분의 경찰이 일제시대부터 있어온 친일 경찰이었기에 폭도가 된 군중들 앞에 살아남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런 일반 민중 외에 말단 공무원이나 의사들도 파업을 지원하는 등 호응도 컸다.

한편, 미군정은 10월 1일부터 탱크와 장갑차를 시내에 주둔시키고 있었고, 폭동이 일어나자 그대로 거리를 봉쇄한 다음 대구경북과 연관이 없는 지역의 경찰을 투입해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 오후 5시를 기점으로 대구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10월 8일 대구의 파업 노동자들이 직장에 공식 복귀하며 완전히 종료되었다.


-경북으로 퍼지다

그런데 이 사태는 경상도 전체로 퍼져나가며 경북 전체의 중소도시가 이 사건에 말려든다. 일직이 원한을 사왔던 경찰이나 서북청년단 등이 그 목표가 되어 청송, 영양, 안동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특히 칠곡군과 영천군(현 영천시)가 가장 심했는데, 칠곡경찰서장은 분노한 군중들에게 말 그대로 반으로 쪼개져서 사망했으며 영천군수는 군청 건물 안에서 산채로 타죽었다. 10월 5일 미군의 투입으로 진압될때까지 영천에서만 수십명이 죽고 1000여 채가 넘는 가옥이 불에 타며 10억원 상당의 재산피해가 났다.


이때 조선공산당 간부이자 지역 유지였던 독립운동가 출신의 박상희가 경찰의 총에 살해당하며 후일 그의 동생이 남로당에 가입하는 계기가 된다. 그의 이름은 박정희,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이였다.


아무튼 당시 경북의 인구는 317만 8750명인데 이 중 무려 77만3200명이 시위에 참여할 정도로 거샜다. 이렇게 거세고 폭력적인 시위에 이어 경찰의 진압도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폭력적이었다. 영천에선 체포된 시위대가 생매장 당했고, 다른 어디에선 수류탄을 던져 집단 폭사시켰으며 체포된 피검자들에게 물고문을 가했다. 또한 서북청년단 등 우파 단체들도 사적제재를 감행하는 등 전국적으로 1000여명의 민간인과 200여명의 경찰이 사망한다.


-이후

당시 체포된 이들은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일부는 석방되었지만 대부분은 6.25 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학살당했고, 입산한 이들은 빨치산이되었다.

또한 미군정과 우파 세력은 이 사건들을 계기로 좌익 탄압을 가속화하기 시작하며 좌익 정당들은 서로 합당하며 남조선노동당을 만들지만, 이 과정에서 좌익 내부의 갈등은 더욱 심화된다. 이는 남한 내의 공산당이 몰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