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리는 정치사)3.3. 아무튼 내란 - 한국독립당 내란음모 사건 - 유렉카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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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사카린 밀수 사건

 

1966년 5월 24일, 삼성그룹의 계열사 한국비료공업이 일본 미쓰이 그룹과 공모해 2259포대, 무려 55톤에 달하는 사카린을 건설 자재로 속여 들여와 판매하려고 하다가 들통이 났다. 삼성은 사카린 외에도 일제 냉장고나 밥솥 등을 밀수하다 적발이 되어 몇 달 뒤인 9월 15일 경향신문의 폭로로 사실이 드러나자 부산 세관은 1059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만원을 부과했다.

허나, 정부는 삼성을 비호했다. 이는 중앙정보부의 비호하에 정권에 비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은밀한 사업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밀수한 사카린을 팔아 비자금을 조성하고 일부를 밀수를 눈감아 준 정권에게 상납한다는 이야기이다.

아무튼 이 사건은 국회까지 올라가 야당은 물론이고 심지어 여당 민주공화당까지 정부의 행태를 비판했다. 하지만 정부는 삼성 비호에 여념이 없었고, 여야는 계속해서 관련자 전원 구속과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그런 와중에, 정권의 계략에 감옥에서 고문까지 받고 돌아와 독이 오를대로 오른 김두한이 있었다.


-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

1966년 9월 22일, 국회 질의 마지막 날. 본회의에서 이만섭과 김대중의 질의가 끝나고 김두한의 질의가 시작되었다. 앞서 말했듯 김두한은 이미 한국독립당 내란음모 사건으로 인해 독이 오를대로 올라 있었고, 그날도 이상철 국회 부의장이 그의 발언 순서를 불리하게 조정하자 자기 머리를 가리키며 "당신 이거 한번 부서지는 거 보려고 그래요? 그 따위로 당신 하면 좋지 않아! 노인이니까 그냥 두지, 장 부의장(장경순)같이 유도 깨나 쓰면 날릴 테야!"라고 협박했으며 실제로 사세청장 김만기(대성학원의 설립자)를 폭행한 전과도 있었다.

김두한은 자신이 교동공립보통학교 3년 동안 2년을 낙제하고 1년 밖에 못다녀 기초상식이 부족하여 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할 줄 모르는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운을 떼었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말을 굉장히 잘하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긴 연설이 시작되었다. 현재도 그의 발언은 국회 회의록에 남아 있으며, 엄청 길기에 여기에 따로 서술하지는 않겠다.

김두한은 먼저 이 사건의 부정과 불의에 대한 열변, 그리고 감옥을 자주 들락거렸지만 또 다시 들어갈 심정이다, 자신의 반공 투쟁에 관한 자화자찬, 이승만과 자유당 이야기, 미군정 시절 오키나와 형무소에 갔다는 이야기, 정치적 신념, 북한 공산당들보다 남한에 이상적인 복지국가 건설을 해야 한다는 등 장황하게 연설을 늘어놓았다.

하다하다 이상철 부의장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냐고 눈치를 주자 15분 정도라고 답한다. 이상철은 다른 의원들의 양해를 구하고 김두한의 발언을 허락했고, 이때까지만 해도 김두한의 행동에 다른 국회의원들도 별 제지 없이 재미있게 보는 분위기였다.

(야인시대에서 묘사된 오물 투척 사건, 각색이 많이 들어가 있지만 김두한이 똥물을 퍼부은 것은 사실이다.)


김두한 의원(계속): 이것은 서독 사람이 먹지 않고 기업주와 노동자가 합작을 해 가지고 구라파 시장을 획득하는 피와 노력의 대가에 있어서 미국 다음가는 달러 보유 국가가 되었습니다. 패망한 일본이 서독과 같이 부흥해서 아시아의 반공의 거점을 설정하는 대국가로 등장했고, 우리는 38선을 지정학적과 전략적 위치에 놓고 북한 공산당보다 남한은 이상된 복지사회국가를 건설해야 머지 않은 장래에 유엔 총회에서 어떠한 방식이든지간에 통일할 때 우리가 마음 놓고 대다수의 80%의 무산대중의 대한민국의 운명을 같이 할 수 있는 역사적 시간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아야 되는데, 전부 관료했던 놈, 친일파 하던 놈, 모리배하던 놈 갖다가 놓고, 이 나라의 국가조직을 하면 이 나라는 강도집단이오,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집단인 이상 이것은 애국정당이라고 보고, 애국정권이라고 볼 수 없는 만큼,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의 도당의 두목으로 규정하여 나는 역사적 국민에게 고발하는 동시에, 이 나라의 헌정을 파괴하고 민족요인을 파괴하는 이승만 정권을 파괴해서 나는 최후에 내 생명이 있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것을 3대 민의원 적에 그 때 자유당 국회의원들이 웃었습니다.

그러나 4.19 후에 무서운 철퇴를 내려가지고 그 역사에 번복이 왔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서 새벽 3시에 들어와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강탈하고, 국민의 참정권을 갖다가 박탈하는 그 정권까지는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고 선의로 해석하나, 과거의 자유당 이상으로 부정하고, 부패하고, 독점시켜서 전체 민족의 대다수를 빈곤에 몰아넣고 몇 놈에게 특혜조치를 한다고 하는 과거에 있었던 부정의 역사를 다시 되풀이 했을 때 이것은 건국을... 이승만 대통령의 때와 무엇이 역사가 다르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나는 대통령이 여기에 나왔으면 호되게 한 번 따지고 싶지만 국무총리가 여기 대통령을 대리하고 여기 장관이 나와 있으니까 나는 이 사람을 내각으로 보지 않고 오늘날 3년 몇 개월 동안 부정과 불의를 하는 것을 합리화시켜버린 하나의 피고로서 오늘 이 시간부터 다루겠습니다. (장내 웃음소리)

이것이 도적질해 먹는 국민의 모든 재산을 도적질해서 합리화하고... 합리화시키는 이 내각을 규탄하는 국민의… 국민의 '사카린'이올시다. 그러니까 이 내각은 고루 고루 맛을 보여야 알지…  

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


(장내 소란)

("산회 선포해요" 하는 이 있음)

부의장 이상철: 오늘은 이로써 산회를 선포합니다. (오후 1시 6분 산회)

(오물을 뿌리는 김두한)

김두한은 수행비서 채원기를 시켜 탑골공원 변소에서 똥을 퍼왔고, 그것을 국회의원들에게 퍼부어 버렸다.

속기록에는 짧게 장내 소란이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인분을 뒤집어 쓴 국무위원들의 비명과 냄새, 그리고 혼란에 빠진 의원들까지 도저히 속기사들이 적을 수 없을 정도의 혼란스러운 아수라장이 되었고, 회의는 즉각 중단되었다. 특히 김두한의 정면에 앉아 있던 국무총리 정일권은 그 인분을 직격으로 맞아 양복에 시계까지 전부 버렸으며, 앉아서 속기나 하던 속기사들도 날벼락을 맞았다.


-결과

정일권 총리를 비롯한 내각은 총사퇴를 선언, 국회에 똥물을 뿌린 초유의 사태를 일으킨 김두한은 여당에서 구속동의안을 내자 국회의원직에서 자진 사퇴한 뒤 서대문형무소에 구속수감되었다. 참고로 이 사건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표정이 굳은 채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은 국회를 뒤집어 놓은 김두한에게 화살을 돌려 여론을 바꾸려 했으나, 여론은 오히려 김두한이 깡패지만 이번 일은 정말 잘했다!는 반응이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쾌재를 부르며 김두한을 옹호하고, 직접 영입까지 시켜 김두한은 말년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당에서 지내게 되었다.


-이후

김두한은 1년 정도 수감되었고, 중정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오래지 않아 고혈압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설 도중 "북한은 서울보다 전기가 먼저 제대로 보금되었는데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해서 북한보다 더 나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발언했다가 북한 찬양으로 반공법 위반이 되어 재수감, 그리고 또 병보석으로 석방 되는 것을 반복하다 다음해 7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낙선, 이후 거의 야인으로 지내다 1972년 11월 21일 오랜 지병이었던 고혈압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삼성그룹은 이 사건의 여파로 한국비료공업과 대구대학을 정부에 헌납하고 이병철 회장은 2선으로 물러났다. 한국비료공업은 1994년까지 정부 소유였다가 다시 삼성에 인수되어 삼성정밀화학이 되었고, 2015년 이재용 부회장이 롯데 그룹에 매각해 현재 '롯데정밀화학'으로 이어진다. 대구대학은 이후 영남대학교가 되어 한동안 박씨 가문의 소유 비슷하게 흘러간다.

삼성 가문의 둘째 이창희는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1년간 감옥에 들어갔고, 본래 이병철의 시나리오에서 TBC와 중앙일보를 가지고 독립하려 했던 셋째 이건희가 이 사건을 계기로 삼성그룹의 총수가 되었다. 첫째 이맹희는 이후 삼성그룹에 일절 관여하지 못하고 죽는 그 순간까지 은둔자로 살았으며 CJ그룹의 유산상속 과정도 이맹희가 아니라 그의 장남 이재현과 처남 손경식에게 할당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