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에 정전이 발효되어 약 3년 1개월이 소요되었습니다. 이 중 급격한 전선의 변화가 있었던 시기는 발발 때부터 휴전협상이 시작된 1951년 7월까지의 1년 1개월이었고 그 뒤의 2년은 전선이 고착화되어 큰 변화 없이 휴전협상과 고지쟁탈전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휴전협상이 시작되기 전인 1951년 6월부터 전선은 서서히 변화의 폭이 줄어들었고 공산측도 고지전 준비를 한창 열을 올렸습니다. 그 후 7월에 개성에서 휴전협상이 개최되면서 전선의 급격한 변화가 사라지고 대신 고지를 빼앗고 뺏기는 고지쟁탈전이 끊기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전선의 큰 변화가 없이 많은 장병들과 물자들이 희생되어 나가고 있었죠


그런 상황에서 1952년 5월 유엔군사령관으로 부임한 클라크 장군은 이러한 전선의 고착화를 한번에 타개할 대책을 고민하였습니다. 물론 유엔군 공군이 북한 본토를 많이 공격하여 실제 북한의 육군을 묶어두는 효과도 있었고 공산측이 휴전에 응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공군의 움직임도 전선의 큰 변화를 초래하지 않는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만 행해졌습니다.


클라크 장군과 제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1952년 9월부터 전선의 고착화를 단번에 해소하고 평양-원산선까지 지상전선을 북상시키는 작전을 고안하였고 10월 16일 작전계획 OPLAN 8-52를 작성하여 보고합니다. 이 작전의 핵심은 현재의 지상 전력만으로는 공산측의 육군이 막강하여 더 북상시킬 수 없는 한계가 있으며 북한, 중공의 본토에 대한 공중폭격과 해상폭격이 전격적으로 뒷받침되면 이들을 힘에 업고 지상 육군이 대규모 공세를 하여 결국 전선을 평양-원산선까지 북상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 공중폭격과 해상폭격을 제대로 실시한 후 지상군의 북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이를 토대로 두 장군은 지상군의 북진을 위한 단계적 작전을 지도로 담았는데 작전도는 아래와 같습니다.

-> Phase 1: 작전 1단계에서 육군의 북진 방향 (하얀색)

-> Phase 2: 작전 2단계에서 육군의 북진 방향 (회색)

-> Phase 3: 작전 3단계에서 육군의 북진 방향 (빗금친 검정색)

-> 3단평행선: 작전 1단계를 실시한 후의 서부,중부전선으로 예성강하구-금천-토산(시변리)-안협-평강-오성산



위 그림을 토대로 클라크와 밴플리트 장군이 설계한 대규모 확전계획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1단계: 파주에서 임진강 이북으로 진격해 개성,개풍을 점령하고 전선을 예성강과 금천까지 올립니다. 철원에서 서쪽으로 진격해 토산 시변리까지 진출하고 북쪽으로 평강까지 진격합니다. 이렇게 하면 한강하구와 임진강 하류에 머물고 있던 중서부전선은 예성강하구-금천-토산(시변리)-안협-평강-오성산으로 올라갑니다.


2단계: 평강에서 경원선 라인 (추가령 구조곡)을 따라 원산으로 진격하고 동해안에서도 고성에서 원산까지 진격하고 별도로 해병대까지 원산에 상륙작전을 전개해 원산을 함락시킵니다. 이렇게 하면 중동부전선이 크게 북진하여 전체 전선은 예성강하구-금천-토산(시변리)-이천-판교-법동-원산까지 올라갑니다.


3단계: 서부전선에서는 각각 예성강 너머 해주-사리원 경유, 경의선 라인을 따라 진격, 방원령로를 따라 신계-수안 방면으로 진격해 평양으로 진출합니다. 동부전선에서는 원산에서 그대로 서쪽으로 진격해 마식령을 넘어 신계곡산용암대지를 경유해 평양으로 진출하여 평양을 포위해 함락시킵니다. 이렇게 하면 결국 최종적인 목표인 평양-원산선까지 진격하게 됩니다.


이 지상작전과 함께 지상작전 전에 실시해야 할 해상공격 및 공군폭격 계획도 수립하였는데 이러한 대규모의 공세를 위해서는 현재에 비해 더 많은 병력과 현대식 장비, 무기들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군사적인 면 외에 정치적인 면까지 고려해야 했고 결국 워싱턴 본부에 보고해야 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트루먼 정부였는데 트루먼 정부는 당시의 미국의 6.25전쟁 방침에 대하여 현 상태를 유지하며 지켜보고자 했고 이러한 대규모 공세 작전을 승인하는 것을 내키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시는 냉전이 격화되는 시기였고 미국은 한반도에만 신경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반대편 유럽에서도 소련의 동유럽 장악으로 인한 공산주의의 확산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서유럽, 남유럽 국가들을 재무장시키고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게다가 미국의 일반 여론도 지지부진하고 점점 길어지는 6.25전쟁, 남의 나라 전쟁에서 젊은이들이 자꾸 죽어가는 것을 보고 전쟁 확전, 지속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해졌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대선이 치러졌고 트루먼의 다음 대통령으로 아이젠하워가 새롭게 당선되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명예롭게 한국전쟁을 해결한다는 원칙을 공표하였고 한반도에 시찰을 옵니다. 전장 상황을 직접 보고 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공산군의 진지, 방어선이 너무 견고하고 평양원산선까지 북진하기 위한 작전인 OPLAN-8-52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병력, 장비의 추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따라서 아이젠하워 정부는 군사적인 면에 정치적인 면까지 추가로 고려한 여러 군사적 대안들을 마련하였고 이 각 대안에 대한 치밀한 검토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NSC-147입니다. 크게 2개의 대안으로 나뉘고 각 대안에는 3개의 방책들이 있습니다. 현재 상태에서의 지속 vs 대규모 공세를 통한 확전 간 군사적 손익과 정치적인 상황의 손익을 저울질하였고 평양원산선까지의 북진을 위한 전면적인 확전도 가능하다고 실제로 판정하였으나 이를 실시했을 경우에 초래되는 여러 리스크들도 현실적으로 걱정하였습니다. 이렇게 검토를 하다 결국 추가적인 논의 및 시행을 하지 못하고 1953년 7월에 급격히 휴전 분위기가 무르익고 결국 7월 27일 정전이 발효됩니다.


즉, 미국은 평양원산선까지의 북진을 위핸 대규모의 확전계획을 실제로 수립, 고려하였으나 이 작전은 여러 상황들 속에서 논의까지만 이루어졌고 실행으로는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안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