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 장군(남아있는 그림 등이 없으므로 jtbc 평화전쟁 1019장면을 사용함.)




2차 여요전쟁이 처음 시작됐을때,

양규 장군은 이렇게 좆같이 생긴 입구를 가진

흥화진(고려 최전방 요새)에 3천의 군사로 주둔중이었는데,


거란군은 황제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이 성에 공성을 해댔으나

양규장군은 이를 일주일간 막아냈다.



이에 거란황제가 너랑 안놀아 씨발련아를 외치며 흥화진을 무시했고,

40만 대군을 20만과 20만, 반으로 나누어


이 20만으로 강조의 고려 주력군 30만을 대회전으로 작살내고,



곽주, 안주, 숙주를 모두 깨뜨리고 서경(평양)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거란의 크나큰 패착이었으니,






이에 양규장군은 700명의 군사를 흥화진에서 끌고나와,

통주에서 천 명을 더해 조직한 1700명의 별동대로


거란군 6천이 지키고있던 곽주성을 야습했다.

거의 4배가 이르는 수성병력을 상대로 한 야습이었으나

이 야습의 결과로 거란군은 전멸했고 7천명의 포로를 구출, 곽주성을 수복해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거란은 퇴각로가 끊겼다.


압록강이 녹기전에 결판을 봐야하는 거란군은 여기서 압박을 받기 시작했고


여기서 거란이 할 수 있는건 고려왕을 붙잡고 전면적인 항복을 받아내는 것 뿐이었는데




고려 현종은 응 좆까를 외치면서


나주까지 빤스런을 친다.

(그런데 이건 강화도 빤스런과는 다른게, 현종은 당시 정치적 입장에서볼때

왕권확립같은걸 생각하면 오히려 항복하는게 나았을 수도 있음.

나주까지 빤스런치면서 호족들한테 약탈당하고 치욕당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어쨋든 왕을 붙잡는데도 실패했고 시간적, 물자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른 거란은

이제 후퇴하는 길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응 씨발련들아 퇴로 막혔어 ^오^

함락시키지 못했던 흥화진과 통주, 그리고 수복된 곽주성을 뚫고 돌아가기엔

거란에게 시간과 보급품은 모자랐고, 결국 거란은 우회하여

말을 끌고 산을 탈 수 밖에 없었다.


안그래도 남의 땅에서, 그것도 기병이 산을 헤치고 나간다는것은 험난했고

이를 더욱 험난하게 만드는것은

양규가 이끄는 1700별동대의 유격전이었으며


이는 거란이 원시 베트남전을 겪는 꼴이라 하겠다.


그리고

양규는 신나게 거란군의 등짝을 털면서


3만이 넘는 고려인 포로를 구출하고 만명단위의 거란군을 죽였으나..






결국 거란황제의 본대에 걸려


전사하고만다...

하지만 양규장군의 활약으로 인해

강동6주를 지켜내었고

수많은 고려백성이 살아남아 국력감소가 줄었으며

또 집요한 유격전으로 거란의 군사력을 약화시켰기에


거란의 2차침입이 상처뿐이나마 고려의 승리로 끝났다고 평가되고

3차침입의 승리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트루 제너럴 양규..그립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