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12월 4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가 우정총국 연회식에서 갑신정변갑신혁명을 일으킨다.
그들은 연회식에서 민영익 등에게 중상을 입힌 뒤 급히 창덕궁으로 달려가 고종에게 청군이 변을 일으켰다고 거짓 보고를 한 후 왕을 경운궁으로 옮긴 후 일본군 200여명으로 궁을 호위하도록 한다.
이후 민씨 세도가문의 주요 인사를 숙청한 급진 개화파는 이튿날 14개조 정강광무개신을 발표하고, 개화파를 중심으로 구성된 새로운 내각을 발표한다.
그러나 민비가 급진 개화파가 정변혁명의 주역임을 깨닫고 청에 원병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일본군에 의해 사실상 감금된 상황에서 청에 원병을 요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한 금상(고종)은 이미 민비에 대한 애정과 정나미가 모두 떨어진 상황인데다가 대원군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심 갑신혁명에 대한 기대감이 큰 나머지 총리대신과 "입헌개혁과 광무개신에 대한 칙령"을 승인하게 된다.
이때 동학을 믿던 전라충청권에서 근왕시민군(새조선제국군)을 건군하여 전주성을 함락시키고 바로 한양에 가 김옥균 내각과 토지개혁 협상을 하여 "조선농민자유선언"에 총리대신의 서명을 받고 광화문 월대에서 선언문을 낭독한다. 이 당시 역량을 청불전쟁에 쏟을 수 밖에 없던 청은 어쩔 수 없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한다.
개화파가 장악한 내각에서는 부산항 등의 몇몇 항구를 개항하고 미국, 일본 등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신식무기로 무장한 별기군이 창설되었으나 그 수가 적었고, 미국으로부터 구식 철갑함 두 척과 전열함 한 척을 얻게 된다.
우정국과 박문국이 설치되었으나 시민 의식의 미비로 한성 일대에서만 겨우 운영되는 상황이였고, 역시 시민 의식의 부재로 인해 개화파 내각이 추진하는 제도의 실질적인 시행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개항장의 성장으로 인구 유출을 우려한 전통적 중심지의 유력가지역 유지들과 유림들이 근대화를 방해하고,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개화파 내각의 근대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유생들의 시위가 매일 매주같이 열리고 있으며, 개화파 지식인과 유학 신사운동가들의 맞불 집회와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내각에서 추진해 야심차게 문을 연 제국기술학교는 의도와는 달리 고위층 자제들의 전유물로 전락해버렸다.
이 와중에 재정 확보를 위해 내각은 외국에서 경공업 기술을 들여오는 것을 추진하고 있으나, 이 역시 쉽지 않다.
또 청불전쟁을 끝낸 청은 다시 한반도의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북간도 문제에 대해 조선을 크게 압박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러한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 급진 개화파가 중심이 된 개화파 내각은 결국 동학군과 추가 협상 및 국왕의 지지를 기반으로 국민회의와 귀족회의를 설치해 총선거를 준비한다.
이에 여러 배경정당들과 언론사들이 창건된다.
혼란스러운 국내외 상황 속에서, 시간은 점점 총선거 날짜에 가까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