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신]

안녕하세요. 초시공 SS급 시련 담당자입니다.


2월 3주차 초시공 시련 채용 전형에 지원해 주신것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귀하는 아쉽게도 이번 시련에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시련용병단에 보내주신 큰 관심과 애정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귀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레딘은 휴대폰을 던지고 낡은 쇼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익숙한 천장이다.


격자 무늬 패턴도 이제 다 외울거 같다.


'씨발...'


레딘도 예전엔 잘나갔다.


온갖 전장에서 지휘관들의 러브콜이 끊이지 않았다.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거리가 넘쳐났다.


자기 좋다고 따라다니는 가슴크고 귀여운 여자애도 있었다.


물론 실직 후 어디에서도 레딘을 찾지 않게 되자,


거짓말처럼 그녀도 떠나갔다.


'턴 종료 시 2칸에 적에게 디버프 부여라며...'


레딘은 서류 전형에서 탈락한 이유를 납득하기 힘들었다.


단단함 만큼은 아직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시련의 몬스터 중 가장 잘 때려잡을 수 있는 댕댕이 형 몹이 2마리 출현한다고 적혀 있었다.


시공의 페널티나 출현 몬스터로 볼 때,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전장이었다.


레딘은 몸을 뒤집어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구직 신청했던 템플러 레딘입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제가 이번 시련에...]


긴 문자를 작성한 레딘은 잠시 머뭇거렸다.


자존심 상 차마 탈락 사유를 묻는 문자를 보내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문자가 씹히기라도 한다면 정신적 타격은 2배가 될 터.


결국 레딘은 굳게 마음을 다지고 전송을 터치했다.


이유를 알아야 적절한 곳에 다시 구직을 해볼게 아닌가.



-디링디링


[발신]

안녕하세요. 레딘님. 초시공 SS급 시련 담당자입니다.


귀하의 정성어린 의견 잘 받아보았습니다.


저희도 해당 전장에서 레딘님의 힘이 큰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맵의 지형과 밀집 되어 있는 몬스터들의 배치, 그리고 원거리 궁수 둘과 마법사가 한마리를 고려해본 결과,


전설의 저편 길드가 저희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전략은 레이X님, 셀파X님의 광역기 연타 후 란디X스님의 근,원거리를 아우르는 반격으로....


'젊은 놈들이 스펙도 좋네 시발...'


다행이 문자는 씹히지 않았지만, 대신 팩트폭력이 레딘의 명치를 강타했다.


전설의 저편.


요즘 잘나간다는 엘사리아 최강의 길드였다.


쉽게말해, 그들이 싸우면 더 편하고 효율성 있는 전투가 가능하니 자신의 전투 방식은 필요 없다는 이야기였다.


몬스터의 두개골을 직접 부수는 클래식한 전투는 유행이 지났다.


원거리 타격으로 몬스터를 걸레짝으로 만들고 역시 원거리 반격딜로 마무리하는 스마트한 전투방식이 선호되는 세상이었다.


레딘은 나직히 투덜거렸다.


"젠장.. 전투화면도 보고 몬스터 대가리 깨는 보는맛도 있고 좋잖아 왜."


요즘 젊은 놈들은 손맛을 모른다니까.



***



"어머 레딘씨 또 왔어요."


서밋 아레나 대기실에서 레딘을 발견한 여자가 반가운듯 손을 흔들었다.


같은 길드에 소속된 리아나였다.


빛의 군단 길드가 침체일로를 걷는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아가씨.


"요즘 바쁘시다던데."


레딘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말을 던졌다.


"네 이번에 토너먼트도 많이 나가게 되서 여러모로 준비할게 많네요."


리아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해실해실 웃었다.


단일 힐, 광역 힐, 턴종 힐, 디버프 해제, 강화 및 면역부여, 거기에 재행동을 부여하는 그녀만이 가진 스킬 어게인.


안그래도 만능인 그녀가 새로운 스킬을 각성하여 소환수 소환까지 한다고 소문이 쫙 퍼졌고 주가는 더 올라갔다.


'다재 다능...'


거기에 비하면 자신은 무식하게 대가리 깨는거 말고는 할줄 아는게 없었다.


그것도 반격턴 한정이었다.


물론 그거 하나만큼은 잘한다.


같이 대가리 깨지게 싸워줄 상대가 없다는게 문제일 뿐.


"요즘 저희 빛의 군단 길드원분들 잘 못봐서 아쉬워... 어맛!"


낮선 남성의 손이 어깨를 잡자 흠칫 놀란 리아나가 뒤를 돌아봤다.


레딘과 비슷한 빨간머리를 한, 왠지 비열해보이는 인상을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리아나 빨리 왔네. 어..? 레딘형도 왔어?"


"으응.. 엘윈 너는 요즘 좀 어떠냐?"


"나야 뭐 그럭저럭... 여기저기 가끔 나가고 있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뭐 검혼도 있고."


레딘과 함께 빛의 군단 최전성기를 구가했었던 청년.


함께 호흡을 맞추며 기여코 피닉스를 쓰려뜨렸을때 쾌감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그런 빛의 군단 길드원들도 이제 다 뿔뿔히 흩어져 각자도생 중이었다.


'여자 하나는 잘 잡아서.. 부러운 새끼.'


빛의 군단 전성기나 프리로 뛰는 지금이나 리아나의 주가는 최고였다.


그런 그녀를 애인으로 둔 데다, 탱커 뚝배기를 가르는데 일가견이 있다는 평판을 얻은 엘윈도 썩 나쁘지는 않을 터.


레딘은 헛기침을 하고 리아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리아나 양. 토너먼트는 얼마나 나가요?"


"네? 지휘관 256명 모든 분들이 다 계약하자고 하셔서... 다 나가게 됐어요."


"......"


레딘은 신음을 삼켰다.


서밋 아레나 256강 지휘관 중에 소수나마 자신을 가끔 고용하는 지휘관도 있었다.


한 5명 정도?


그나마도 본격적인 토너먼트가 시작되면 계약을 연장할지는 미지수였다.


안그래도 전설의 저편 길드에 클라... 뭐시기라는 강력한 각성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로스터는 한정되어 있는데, 뛰어난 인력는 계속 공급된다.


두사람과 헤어진 레딘은 서밋 아레나 접수처에 서류를 제출했다.


접수처 직원은 이 사람은 질리지도 않고 또오냐는 표정이었지만.


레딘은 꾿꾿이 서류 등록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술이 땡기는 하루였다.



***



"레딘님이 나가실만한 전장은.. 이거하고 이거, 이거 정도네요."


- 안젤리카의 고장난 댕댕이 퍼핏 (AUTO)

- 사건 넘버 262 (AUTO)

- 암룡 1턴 (AUTO)


레딘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거리가 고작 이 정도라니.


"저기... AUTO는 뭡니까?"


비경 접수처의 직원은 귀찮다는듯 레딘을 째려봤다.


"오토요."


"네?"


"지휘관이 직접 지휘를 하지 않는다는거죠. 지휘 안하고 냅둬도 클리어가 되니까요."


지휘를 받을 가치조차 없는 간단한 임무라는 소리.


하지만 레딘의 처지는 찬밥 더운밥 가릴때가 아니였다.


나도 비경에서 한끗발 날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레딘은 입술을 짓씹었다.


"저기 질풍의 샘슨은..?"


형귀 댕댕이 뚝배기라도 깨야 속이 풀릴거 같았지만 접수처 직원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거기는 젤다님 쉐리님 레온님 출전이 국룰이라... 국룰 아시죠?"


"...그렇군요."


빛의 군단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쉐리의 소식을 듣자, 레딘은 자신의 자리를 그녀가 대체한것임을 알면서도 반가웠다.


들어보니 형귀 나임에도 국룰로 나간다고 한다.


'쉐리... 아직 살아있구나.'


그녀도 힘겨울 터였다.


전성기 시절, 지휘관들은 자신에게는 2룬스톤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리즈시절에도 쉐통기한이 온다며 룬스톤을 줄지 말지 지휘관 들끼리 격렬한 토론이 오갈 정도였으니까.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저기.. 장비 대여를 하고 싶은데요."


비경 직원은 이건 또 뭔소리냐는듯 의문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제가 지금 장비가 부실해서.. SR등급 서약의 검을 쓰고 있습니다."


"걍 그거 쓰셔도 되요. 어차피 오토인데 뭐."


"그래도 좀...저도 SSR 각성자인데."


비경 직원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레딘의 낡은 서약의 검을 흘끔 쳐다봤다.


"흠, 레딘님이 그동안 비경에 기여하신 공로를 봐서 특별히 대여해드리죠. 조심해서 쓰시고 꼭 반납하셔야 합니다. 사실 이거 리스틸 님 껀데... 서밋 아레나 벤치에서 맨날 구경만 하시다가 나는 걍 뻥카라도 되겠다며 여기 맡겨놓으신 거 거든요. 쓸사람 있으면 쓰라고."


접수원은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정의의 선서를 내주었다.


망치는 얼마나 사용하지 않았는지 광택이 반질발질한게 거의 신품 수준이었다.


정의의 선서.


처음에 이걸 구입했을때 얼마나 기뻤는지 잘 때 옆에 끼고 잘 정도였는데.


레딘은 정의의 선서를 치켜들고 우렁찬 고함을 내질렀다.


비경 접수처에 있는 많은 엘사리아 각성자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쇼멘돗파!"


생활고에 시달려 결국 어떤 개새끼에게 팔아버렸던 무기를 다시 쥔 순간,


레딘의 눈가에 물기가 살짝 어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