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하여 세상의 종말은 끝을 맞이하고, 내일의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2.

 “후우, 미친 날씨로군.”

 “어서 오십시오. 이런 궂은 날씨에 험한 곳까지 왕림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아, 고마워요.”


 우렁우렁한 천둥 소리가 울려 퍼지는 와중, 육중한 나무문을 밀어 젖히며 한 남자가 저택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반쯤 열린 문 너머로 쏟아지는 비바람은 하늘이 찢어진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 천둥은 정말로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일까.


 남자는 비를 잔뜩 머금어 도저히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넝마처럼 보이는 코트를, 공손한 자세로 손을 내민 메이드에게 건네주었다. 코트가 저 모양이니 안에 입은 옷도 거적떼기로 밖엔 보이지 않았다. 물기를 뚝뚝 떨우며 자신의 볼품 없는 꼬락서니를 집주인에게 보일까 그는 메이드에게 갈아입을 옷을 청하려 했다.


 따각. 따각. 따각.


 위층에서 나직이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두 사람의 눈이 위층에서 내려오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지팡이를 짚은 초로의 여인이 있었다.


 품이 넉넉한 숄을 걸친 탓에 가냘픈 체형은 더더욱 가녀려 보였으나, 눈빛. 그녀의 옅은 잿빛 눈동자만은 홀로 아직 그 아래 잿불을 태우듯 형형히 빛나 도저히 그녀를 한갓 노부인으로 볼 수 없게 했다. 제 몸의 수 배는 되는, 그래, 마치 사자와도 같은.


 “주인마님.”

 “레, 레오나님. 안녕하셨습니까?”


 여인은 남자를 내려다 보았다. 머리칼을 늘어뜨려 한쪽을 가리고, 한 쪽 눈만이 서슬 퍼런 잿불을 일으키며 시선을 향하자 남자는 저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끼며 새삼 자세를 고쳤다. 쥐어뜯길 것만 같은 서늘함.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함을 머금고 가늘게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게오르그 도련님이셨군요. 어서 오세요.”


 서늘함이 사라지고 안심하며 어깨에 힘을 푼 그는 새삼 자신이 물에 젖은 생쥐 꼴이란 것을 자각하고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꼬, 꼴이 이래서 죄송합니다.”

 “아뇨, 이런 곳까지 오게 한 제 잘못이지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내려왔다. 따각, 따각, 지팡이가 나무 계단을 짚었다.

 이내 남자 앞에 선 그녀는 빗물이 매달린 그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싱긋 웃었다. 누군가가 떠오르는 부끄럼 띤 얼굴.


 “아, 늙은이가 주책을. 비에 젖어서 추울 텐데 너무 오래 세워뒀군요. 어서 씻도록 해요. 콘스탄차, 깨끗한 옷도 준비하도록 해.”

 “네, 마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궂은 곳까지 와주었는데 당연한 일이죠.”


 그녀는 남자의 어깨를 한 번 툭툭 쳐준 후 메이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드가 앞장서는 뒤를 따라 남자는 저택의 안쪽으로 향했다.

 


3.

 타오르는 불꽃은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마력을 갖고 있다. 레오나는 가만히 벽난로 속에서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꽃을 응시했다.


 바이오로이드에게도 사람이라는 말이 허용될까— 그 물음에 ‘삶을 살아가는 너희들을 사람이라 하지 않으면 무어라 부를까’라며 웃는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리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잿빛 눈동자 속에 온기가 담겼다 사그라졌다.


 “레오나 님?”


 눈을 떴다. 뜨거운 물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탓인지 묘하게 달뜬 얼굴을 한 남자가, 아까와는 달리 말끔한 옷차림으로 서있었다. 눈에 잔불이 담겼던 탓일까, 아는 사람의 얼굴이 흐릿하게 겹치곤 사라지기에 레오나는 눈을 한 번 더 감았다 떴다.


 “새삼, 전보다 더 큰 것 같군요.”

 “어, 그런가요? 키는 더 안 클 텐데요.”

 “늙은이 눈에는 커 보이는군요. 아니면 제가 쪼그라 든 걸지도.”


 후후, 웃는 그녀를 보며 당황하는 남자.


 “아이들은, 참으로 금방 크는 법이군요.”

 “하하, 그런가요?”

 “예, 도련님, 그 아이도……”

 “아, 그러고 보니 어거스타는……?”

 “시내의 고아원에 봉사 나갔답니다. 오늘은 폭풍우가 심할 것 같아서 그곳에서 하룻밤 신세지라고 했지요. 내일 이 비바람이 그치는 대로 돌아올 거랍니다.”

 “아아……”

 “너무 대놓고 실망하는 거 아닌지요?”


 역시 남자란 늙은 것보단 젊은 아가씨가 좋은 법이군요. 그런 말에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놀라는 남자를 보며 레오나는 키들거렸다. 가만히 있을 때의 묘한 색기가 감도는 모습도 닮았지만,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에선 더더욱 누군가의 모습이 강하게 겹쳐 보여 그녀로선 놀리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었다.


 “어거스타도 사실 비가 오든 말든 돌아오려고 했답니다. 누구 씨가 온다는 얘기를 들어서 말이죠.”

 “읏……”
  “그래도 이런 비바람 속을 어린 여자애가 뚫을 수 있을 리가 없을 테죠. 도련님도 그 꼴이 됐는데 어거스타를 저 밖에 던져두었다면 아마 지구 반대편에서나 찾을 수 있을까요?”

 “하, 하하. 정말로 그럴 것 같아서 좀 무섭네요.”


 남자는 떠올렸다. 정말로 바람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녀린 소녀. 자신보다 연상임에도 도저히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 크리스털 세공 같은 그녀를.


 “아직 조금 추운 기운이 있다면 술이라도 한 잔 할까요?”


 “네, 주신다면 감사히.”


 공손히 끄덕이는 그에 맞추어 레오나는 몸을 일으켰다. 아니, 정확히는 일으키려 했다.


 삐걱.


 의족에서 기분 나쁜 불협화음이 울렸다. 벽난로의 불똥이 불쾌하다는 듯 튀어 올랐다.


 “엇, 괘, 괜찮으세요?”

 “예. 괜, 찮아요. 또 말썽이군요.”

 “잠시만요. 가방을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후다닥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레오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뻗은 손은 오른 눈으로. 다 아물어버린 흉터 자욱이건만, 아직도 욱신거림은 지워지지 않았다. 대전 말기, 철충의 마지막 발악이 있던 전장. 피가 튀고, 고함, 고성, 날 리도 없는 화약 냄새가, 총탄, 고철의 파편, 연기가 자욱한 와중에, 기잉—기잉—, 붉은 빛이 났다, 총격, 총격, 총격, 피하라고, 누군가가 외쳤는데, 피, 혈흔, 고통, 통각, 흙바닥에는 피와 고철과 화약과 총탄총탄총탄……


 “레오나 님, 레오나 님?”

 “……아.”

 “수리 키트 가져왔습니다. 다리, 봐도 괜찮을까요?”

 “예…… 수고롭게 만들어서 미안하군요.”


 조금 깊이 상념에 잠겼던 탓인가,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남자였다.


 “하하, 맨날 말씀만 그렇게 하시면서 정작 다시 돌아와 달라고 부탁 드리면 절대 안 오시잖아요.”

 “조용한 삶이 좋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조용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또 한 번, 우렁우렁 울리는 천둥소리. 사람 없는 저택을 왕왕 울리는 그 소리에 남자는 살짝 질겁을 하면서 가방을 펼쳤다. 그런 그의 모습을 내려다 보며 레오나는 빙긋 웃었다.


 “폭풍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평온도, 있는 법이지요.”


 그녀의 말뜻을 잘 알 수 없는 남자였다.

 


4.

 난롯가의 열기와 위스키의 취기. 열이 따끈따끈하게 오른 남자의 입은 한결 가벼워졌다.


 “정말,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입만 여시면 레오나 님 이야기만 하십니다. 제발, 저를 봐서라도 좀 돌아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미 몸도 마음도 닳은 기체에게 바라는 게 너무 많군요. 돌아가 봤자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게다가 총사령…… 아니, 아버님도 여전히 레오나 님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아버님, 이란 단어에 레오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사랑했던 사람. 아니,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 하지만 이제 더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기도 한 사람. 그리운 만큼 가슴이 아픈 사람.


 “오늘은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전언도 가져온 겁니다.”


 그는 가방을 뒤적이더니 이내 수정구슬처럼 생긴 무언가를 꺼내 들어 비칠비칠 레오나에게 다가와 건넸다. 수정구슬은 마치 마법처럼, 그녀의 손에 닿자 은은한 빛을 뿌리며 홀로그램을 띄우기 시작했다.


 [아아. 어, 벌써 녹화 된다고? 크흠…… 레오나, 잘 지내고 있을까? 벌써 못 본지 몇 년이 된 건지 모르겠네. 이젠 다들 각자 부대를 이끌고 여기저기 장악하고 안정화 하니까 곁에 없는 게 당연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따금 한 번씩은 모일 기회가 있는데 레오나 너만은 정말 얼굴 한 번을 안 비춰주는구나……]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별 거 없다면 별 거 없을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나 전쟁의 뒷처리 이야기, 그리고 함께 싸웠던 자매들의 몇몇 이야기들. 그리고.


 [레오나, 그 날의 일 때문이라면 힘들다는 건 이해해. 하지만 그럴수록 함께 하는 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해.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네 짐을 같이 짊어지고 싶어.]


 그런 말로 끝맺으며 영상은 찬찬히 흩어졌다. 만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며시 영상 속의 남자를 향해 레오나는 손을 내밀었다. 파스스 흩어지는 모래성처럼, 잔상이 허공에 사라졌다.


 “저, 레오나 님. 제가 잘난 척 뭐라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건 잘 압니다. 하지만 어머니도, 아버지도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부디 한 번쯤은 안 되겠습니까?”


 그녀는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낮게, 마치 읊조리듯. 달싹이는 입술은 엷은 소리를 자아냈다.


 “후우. 저는, 그래도 가고 싶지 않군요.”

 “레오나 님!”

 “무어라 할 말은 없어요. 그냥, 그저, 떠나고 싶은 마음도, 가고 싶은 마음도 없을 뿐.”


 그녀가 눈에 담는 것은 그저 타오를 뿐인 벽난로 속의 불꽃도, 안타까움에 가득 찬 남자의 모습도 아니었다. 창 너머, 흐드러지는 빗줄기 사이 사이 짓쳐드는 번갯살. 찢어지는 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5.

 어거스타에게 있어 가장 첫 번째 기억이라면 흔들림이다. 무엇을 보았는지, 들었는지도 전혀 기억에 없지만, 분명한 것은 굉장히 강렬한 상황이었음에는 틀림 없었으리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정도로 흔들림이란 것에 민감할 리가 없을 테니까.


 “아가씨,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아, 멀미 때문에……”

 “어제 폭풍이 친 바람에 안 그래도 안 좋은 길이 더 안 좋아졌네요. 참으실 수 있으시겠어요?”

 “네에……”


  사실 멀미라기보단 명확하지도 않은 기억들이 흔들림에 맞춰 몰려들었다간 사라질 뿐이지만, 결국 머리가 아픈 건 같으니 그게 그건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차창에 머리를 댔다. 서느런 감촉에 머리가 조금은 덜 아픈 듯싶었다.


 절벽을 따라 이어진 비포장도로, 그리고 그 끝에는 바다를 오시하는 높은 곶이 있다. 파도가 질투하듯 부딪혔다간 사라지고, 다시 부딪혔다가 희게 부서지는 그림 같은 장관. 천천히, 천천히 깎여나가곤 이윽고 무너져 내릴 듯 날카로운 곶의 위에 자리한 그림 같은 저택.


 차가 저택 앞에 멈춘다. 어거스타는 차에서 내린 후 트렁크에서 가방을 꺼내들었다.


 “읏, 챠!”


 과장 좀 보태 자기 덩치만한 가방을 들고 비틀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차를 운전하던 여성은 황급히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괘, 괜찮아요! 전 괜찮으니까 가보셔도 되요, 마리아 씨.”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바로 앞인 걸요으와아아앗!”


 말과 동시에 균형을 잃으며 쓰러지는 어거스타. 차마 그 참극을 볼 수 없어 눈을 감은 마리아였지만, 우당탕하는 큰 소리도, 철퍽 하며 사람이 넘어지는 성대한 소리도 나지 않았다.


 “괜찮아?”


 자기 스스로도 꼴사납게 나자빠질 것을 각오했던 어거스타는 따뜻한 품을 느끼곤 슬며시 눈을 떴다. 햇살을 살짝 등지고 그녀를 내려보고 있는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짙은 얼굴 선과는 다르게 사람을 포근하게 만들어주는 부드러운 눈빛.


 “게오르!”

 “위험하잖아.”


 어휴, 무거워라. 언제 뺏어 든 것인지 묵직한 가방을 한 손에 들고 그는 어거스타를 부축했다. 부축이 무색하게 그녀는 반가운 얼굴을 본 나머지 그의 품에 꼭 안겼다. 남자가 한 팔로도 꽉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자그마한 그녀가 매달린 모습은 퍽 우스웠다.


 “오랜만이야!”

 “응. 오랜만이야.”


 살풋 웃으며 남자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도저히 연상이라 느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인사와 함께 까치발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 손길의 따스함에 안심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연상의 포용력일까.


 “키, 또 큰 것 같네.”

 “딱히, 이제 클 일은 없을 건데.”

 “얼레, 그럼 내가 쪼그라 들었나?”


 이 말, 어젯밤에도 들었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피식 웃었다.


 “엄마는 안중에도 없나 보구나?”


 두 사람의 애정행각이 점점 무르익으려는 찰나, 남자의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둘의 귓가를 찔렀다. 어거스타는 남자의 품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는 활짝 웃었다.


 “엄마, 다녀왔어요.”
  “늦었다, 내가 직접 나오지 않았더라면 여기서 천년 만년 물고 빨고 하고 있었을 거 아니냐.”

 “아잉, 그럴 리 없잖아요, 엄마? 금방 들어가서 다녀왔다고 하려 했는 걸요.”


 흥, 하고 고개를 돌리는 레오나와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애교를 부리기 시작하는 딸이었다. 마치 토끼가 재롱을 부리듯 총총 자신의 품에 안기는 어거스타를 짐짓 밀어내는 척 하는 그녀였지만, 이내 그녀의 밝은 밤색 머리칼을 쓸어 내리며 웃고 마는 것이었다.


 “고되진 않았느냐?”

 “전혀요. 아이들, 정말 귀여운 걸요. 게다가 마리아 씨도 도와주셨고요.”


 레오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마리아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급작스레 하룻밤 묵게 해서 실례는 아니었을까?”

 “아뇨, 오히려 밤에도 아이들을 돌봐주셔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답니다.”

 “그랬다면 다행이네. 태워다 줘서 고마워, 마리아.”

 “네, 그럼 돌아가 보도록 할게요.”


 잠시 떠나가는 차를 전송한 세 사람은 이내 저택으로 향했다. 밤새 내린 비 탓에 마당은 질척한 진창이었기에, 어거스타는 진흙이 발에 떡떡 들러붙어 비칠거렸다.


 “조심해, 넘어지지 말고.”

 “응.”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팔을 내밀어 주는 남자. 레오나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웃을 뿐이었다.


 현관에서는 콘스탄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아가씨?”

 “응, 다녀왔어! 사와 달라고 한 것들도 전부 사왔어.”

 “무거우셨을 텐데, 죄송해요.”

 “아냐아냐. 그나저나 야채가 좋은 게 많아서 나도 모르게 더 사버렸는데, 괜찮지?”

 “네, 물론이죠. 오늘 저녁은 솜씨 발휘를 해보도록 할게요.”


 그 묵직한 가방은 장바구니였던 것일까. 남자에게서 가방을 건네 받은 메이드는 그 무거운 가방을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볍게 들고는 저택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럼 나도 올라가 보마. 무슨 일이 있으면 콘스탄차를 부르렴.”

 “왜, 엄마. 같이 차 마시면서 얘기하자. 게오르도 오랜만에 온 건데 셋이서, 응?”


 팔에 살며시 매달리며 필살의 애교를 부려보는 어거스타였지만, 레오나는 피식 웃으며 말할 따름이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고, 한쪽 눈이 안 보여도, 내가 눈치가 없진 않단다. 둘만의 시간을 방해할 순 없지.”


  그녀의 말에 저도 모르게 남자는 헛기침을 하고야 말았다. 과연 지구의 절대자였던 총사령관마저 절절 매게 했던 사자의 풍모라고 해야할까. 어거스타 또한 얼굴을 붉혔다간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결국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야 말았다.


 레오나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천천히 2층으로 올라갔다. 사랑의 열병이 무르익기를 바라며.


 

6.

 하늘은 개었어도 폭풍의 잔재는 여전했다. 바람은 여전히 서느러했고, 바다는 거칠었다. 너울지는 파도의 하얀 이빨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거실의 큰 창문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벽난로의 온기를 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서로의 눈동자 속에 비친 불꽃의 온기를.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었다. 서로 겹친 손끝의 열기가 도화선이 되어 타올랐다.


 손목을 붙들었다. 얇은 피부 너머로 도근거리는 작은 맥박에 심장이 보조를 맞추었다.


 옅은 숨결. 엉겨 붙는 둘의 체온이 본능을 채근했다.


 이윽고 시선과 시선이, 손끝과 손끝이, 입술과 입술이 서로를 탐했다. 서로의 사이에 한치의 틈도 줄 수 없다는 듯 탐욕스러운 교합. 수만 리 멀리 있었던 그 시간을 한순간에 메꾸듯 열띤 키스와 손짓, 그 애무들. 새하얗게, 마치 흰 눈처럼 빛나던 피부에 붉은 열꽃이 피어 올랐다.


 응접실의 소파는 침대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컸다. 하물며 남들보다 곱절은 작아 보이는 어거스타라면 거기에 눕는들 불편할 리가 없었다. 남자는 자신의 아래에 깔린 자그마한 눈토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미 목덜미에 사냥꾼의 붉은 증표가 찍힌 채로, 토끼는 조용히 말했다.


 “사, 상냥하게 해줘.”


 사냥꾼의 이성이 끊어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달뜬 신음과 새된 교성이 이어진 것은 그리 머잖은 일이었으나, 바람을 타느라 바빴던 갈매기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고, 주방의 열기에 홀린 쥐들은 저택의 반대편에 있었다.


 그저, 미처 다 흩어지지 못하고 저택에 맴돌던 정사의 잔향이 서재에 아주 아슬아슬하게 닿았을 뿐.


 주홍빛으로 웃는 글라스 속에서 얼음이 비끄러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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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긴 것 같아서 두 편으로


다음 편: [막장대회] 폭풍의 언덕 -下-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