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이 지나고 요안나 아일랜드에도 봄이 왔다. 눈이 녹으며 싹이 트고 꽃이 피자 바이오로이드들의 마음도 싱숭생숭해지는데, 아직도 마음이 꽁꽁 얼어붙은 바이오로이드가 있었다.

"후..씨발..."

 뼛속까지 시리던 겨울같은 차디 찬 얼음을 잘그락 거리며 독한 술을 넘긴다. 레이시는 전투 모듈을 반납하고 요안나 아일랜드에 오고나서는 늘 술에 찌들어있었다. 인간이 멸망한 후 테마파크를 지키던 키르케보다도 더 술에 빠져있어서 노동에서도 사실상 열외되었다.

"레이시양, 아무리 그래도 대낮부터 술에 쩔어 사는건.."
"닥쳐, 닥치란 말야! 네년이 뭔데 훈수질이야!"

요안나 아일랜드에서 바텐더를 맡은 에이미가 보다못해 말리려 했지만 역시나 돌아온 건 날 선 반응이었다. 레이시는 전기를 이용해서 화폐 대용 병뚜껑을 허공에 던진 후,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에이미 언니! 여기 부탁한 파일 가져왔..아이코 죄송합니다!"

코코가 파일을 들고 도도도 달려오다가 그만 레이시와 부딪혔다. 화이트쉘을 반납하고 홀로 요안나 아일랜드에 오게 되어서,작은 체구로 움직이는 것이 서툰 탓이었다. 어린 아이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들과 달리, 레이시는 싸늘한 시선으로 코코를 내려다 보았다. 차디찬 시선은 이내 곧 불타는 분노와 증오로 바뀌어, 코코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야 씨발 너도 내가 우습냐? 우스워? 내가 여기 있으니까 너네같은 폐급으로 보이냐"

"언니..죄송해요 앞을 제대로 못봐서.."

"언니같은 소리 집어치워! 난 너같은 깜둥이년 동생으로 둔 적 없어!"

"우리 자기, 이제 그만 하죠."

어린 아이에게는 상냥한 편인 에이미가 코코를 레이시의 손에서 억지로 떼어내고는, 겁 먹은 코코를 꼬옥 안았다.

"짝!"

"꺄아악!"

에이미의 뺨이 붉어지며 고개가 꺾였고 놀란 코코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야 같은 A급이라고 똑같은 줄 알아? 난 오리진 더스트로 더 강화된 몸이야! 네년따위가 뭘 알고 나대?"

"우리 아가 많이 놀랐죠? 괜찮으니 가서 요안나 씨를 불러와요"

정제되지 않은 분노의 표출을 등으로 받아낸 에이미는 코코를 달래며 돌려보냈다.

"이 씨발년이"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자 기분이 한층 더 안 좋아진 레이시는 에이미의 머리채를 쥐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에이미가 손목을 낚아챘다.

"난폭한 방법은 좋아하지는 않지만.. 저도 인내심에 한계라는게 있답니다? 슬슬 그만하는 게 어떨까요?"

"좆까!"

파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에이미의 머리털이 곤두섰다. 에이미가 재빨리 레이시의 손목을 놓고 몸을 굴려 피함과 동시에 에이미가 있던 곳은 전기로 까맣게 그을렸다.

"난 이딴 곳에 쳐박혀서 썩을 몸이 아니야! 아니라구"

오르카 1호 제조 바이오로이드답게 수많은 전장을 헤쳐온만큼, 전투 모듈이 없어도 에이미는 레이시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전투 모듈이 없어 조준조차 제대로 하지 못 하고 무작위로 난사하는 레이시보다 전투 경험은 에이미가 더 앞섰다. 하지만 무기를 반납해서 근접 격투전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생체 에너지로 전기를 발산하는 레이시를 제압하는 건 어려웠다.

"이런 이러다 가게를 완전히 날려버리겠는데요?"

그렇다면 에이미가 취할 전략은 하나. 요안나와 치안 유지 AGS들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

"레이시 공! 이게 무슨 짓이오! 그만 하시오!"

"레이시 1072 개체, 무의미한 저항은 그만두고 항복하길 바랍니다."

"그만 하시게"

섬의 관리인 요안나가 램파트와 펍헤드와 함께 찾아왔다. 그동안 지쳐서 씩씩대던 레이시는 요안나를 보고 눈이 뒤집혔다.

"망할 깜둥이년..개같은 년.. 너 때문에..!"

순간 빠르게 날아오른 레이시는 요안나에게 달라들었지만 램파트가 나서서 방패로 막았다. 너무 빠른 속도 때문에 제어를 할 수 없게 되어서 그대로 방패에 세게 머리를 부딪히고 기절했다.

"어쩔 수 없구만..그럼 체포하겠네..."

정신을 잃은 레이시는 그렇게 연행되어 독방에 갇혔다.

...

"이제 정신이 좀 드나? 왜 그런건가"

"개새끼는 입 다물어"

얼마정도 시간이 흐르고 깨어난 레이시 앞에 펍헤드가 있었다.

"너무 그러지 말게. 어차피 같은 처지의 전기 딜러 신세인데 허심탄회하게 툭 털어놓는게 어떤가."

펍헤드는 특유의 친화력과 능청스러움으로 레이시의 분노를 흘리며 능글거렸고, 레이시는 체념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때.. 그 때 분명 내가.."

추운 겨울의 어느 날. 사령관은 초코 여왕의 성을 찾아갔다. 성을 방어하는 AGS는 상당히 강력해서 돌파하는데 애를 먹었다. 그러다 적을 분석한  탈론페더의 보고에 의하면 AGS의 보안 시스템이 전기에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오르카 호의 전기를 다루는 바이오로이드, AGS가 모두 차출되었고 레이시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모인 병력 중 가장 약한 레이시를 걱정한 사령관은 전투 전 레이시를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해주었다. 이번이 사령관의 관심을 끌 마지막 기회라 판단한 레이시의 초능력과 오리진 더스트가 공명하였고 그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본래 닥터의 설계대로라면, 전투에 출전한 주위 전기 속성 대원들의 전자파와 공명해서 레이시의 출력을 약간 높이는 정도여야 했다. 하지만 레이시의 초능력과 반응한 오리진 더스트의 효능이 증폭되어서, 주위의 대원은 물론 오르카 호에서 대기하던 대원들과도 공명하여 출력이 극한으로 올라갔다.

블랙리버의 역작 로크보다도 더 강한 출력으로 AGS를 한번에 휩쓴 레이시는 처음 맛보는 성취감에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이거면 사령관이 날 제대로 봐줄거야...불쌍하듯 동정하는 실험체가 아니라..날 여자로 봐주겠지.."

과도한 출력으로 머리의 장치가 웅웅거리며 경고했지만 늘 달고다니던 두통에 익숙하기에 이를 무시했다. 이제 더는 조작된 기억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불쌍한 실험체라 동정받지도 않게 된다. 오로지 레이시 그녀 자체로 인정받는 것이다.

머리의 회로가 과열로 타들어가기 직전까지 레이시는 AGS에게 번개를 흩뿌리며 날뛰었다. 생체 반응에서 이상을 감지한 사령관이 말리지 않았다면, 전기에 스스로 타 죽었을 것이다.

"네..? 저를 다시 약화시키는 수술을 해야한다고요?"

오르카호에 복귀한 레이시는 날벼락같은 통보를 들어야했다. 옆에서 거드는 닥터의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언니.. 진짜 위험할 뻔 했어. 이러다 언니가 죽을 수 있다고! 오빠가 우리들이 다치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 지 언니도 잘 알잖아.."

하긴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살아있으면 적어도 사령관이 자신을 안아줄 수 있다. 애를 먹던 AGS 세력 중 다수를 무력화 한 공이 있으니, 다시 약해지더라도 사령관은 자신을 바라봐 줄 것이라 믿고 레이시는 수술대에 올랐다. 단순히 강화하는 것보다는 다시 약화시키는 것이 더 복잡하고 어려운 수술이었고 시간이 더 걸렸다.

"으..음.."

"레이시 양, 정신이 드세요?"

수복실에서 의식을 되찾자마자 간호사 다프네에게 사령관에 대해 물었다. 다프네가 말하길 티아멧과 에밀리와 함께 초코 여왕의 성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신데렐라인 줄 알았는데 황금마차를 이끄는 말이었다. 주인공이 갈 길을 깨끗이 닦아주는.

똑같은 실험체였다. 신데렐라와 생쥐는 요정의 마법으로 변신을 했지만 생쥐는 결코 왕자님과 이어질 수 없다.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며 레이시는 비틀거리며 비밀의 방으로 향했다. 어쩌면 그래도 사령관이 자기를 기다리지 않을까, 하며 문 밖으로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를 무시하며 조용히 초능력으로 문을 열었다.

"핫..하..하응..."
"앗..아응..사령..관님.."

티아멧과 에밀리 다음에는 혹시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을까 했지만 사령관은 미스 세이프티와 퀵 카멜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요즘 초콜릿을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가 사랑도 초콜릿색이랑 하고싶더라 하하하"

"사령관님 그 발언, 인종 차ㅂ..하으응"

미스 세이프티의 구릿빛 피부에 치덕치덕 묻은 초콜릿을 혀로 진하게 핥아올리자 세이프티는 말을 더 못 하고 신음만 흘렸다.

문을 조용히 닫고 레이시는 멍한 눈으로 복도를 걸었다. 검은 색이 싫다. 실험 받을 때 전기에 타 죽은 동료 시체 색과 같아서. 초콜릿이 싫다. 초코 여왕인지 뭔지랑 엮이게 돼서.  사령관이 준 초콜릿을 입에 묻히고 다닌 에밀리가 싫다. 우루루 몰려와서 사령관에게 엉겨붙으며 선물하며 건네는 초콜릿이 싫다. 초콜릿이 싫다.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초콜릿처럼 달콤한 희망에 젖었다 쓰디 쓴 좌절을 맛보게 되어서. 코코를 볼 때마다, 요안나를 볼 때마다 그놈의 초콜릿이 떠올라서 싫다. 세이프티와 카멜의 진한 피부 위에 묻은 녹다 만 초콜릿. 전기로 다 지져서 태워버리고싶다.

...

"여기에 온 이들 중 사연 없는 이들이 어디있겠나..그래도 너무 난동부리지는 말게. 남아있는 친구가 모두 없어질테니"

"아니, 사령관님은 다시 날 불러줄거야. 난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된 특별한 레이시야.."

펍헤드는 울먹이는 레이시를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 귀한 오리진 더스트를 써줬다고.. 분명 다시 날 찾아올 거야.. 분명.."

사디어스라는 전기를 다루는 강력한 바이오로이드가 오르카호에 합류했다는 사실을 알면 레이시가 더 못 버틸 거 같아서 펍헤드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 때 그 약화 수술을 받는게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