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이거 음악 듣다가 예전에 썼던 문학 고쳐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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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워지면 소풍을 가요. 둘이서만… 다른 사람들은 없는 곳으로요."

앨리스에게 사령관은 특별한 사람이다.

그는 유일한 남성이고 배틀 메이드의 주인이며 마지막 인간인 라스트 오리진이다.
우수한 메이드답게 앨리스는 사령관에 맞춰 자신의 성격을 바꿨고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어떤 요구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앨리스는 그날 밤을 잊지 못한다.
사령관이 떠난 날은 구름 없던 맑은 겨울밤이었다.

"질렸어."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을 쐬며 사령관은 조용히 그 한 마디를 남겼다.
그때 앨리스는 그를 놀래켜 주려고 복도에 숨어 옷 단추를 풀고 있었다.
고개를 살며시 들어 유리창을 보았다. 반투명하게 비친 피부는 스스로가 보기에도 예뻤다.
앨리스는 만족하며 다시 시선을 사령관에게 향했다.

사령관은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 없이 얼빵해 보이는 모습.
하지만 왜 이리 사랑스러워 보일까. 앨리스는 아무도 몰래 웃으며 슬슬 나가려 기회를 엿봤다.
그때 누군가 손님이 먼저 들어왔다.

"사령관! 마, 많이 바빠보이네? 나, 나도 바쁘지만, 멍청이 사령관이 제대로 일하는지 감시해야 하니까!"

메이였다. 나이트 앤젤에게 떠밀려 새 스킨을 자랑하는 작은 꼬마.
그녀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사령관은 짧게 웃었다.

"잠깐 산책 좀 하고 올게."
"이, 이따 봐!"
"응."

그것이 그의 마지막 인사였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사령관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이오로이드는 처음엔 기다렸지만 해가 지나 계절이 바뀌자 서로를 탓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앨리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욱!"

쓰라린 상처를 참으며 앨리스는 산 아래 불타는 오르카호를 보았다.
정성들여 꾸몄던 숙소는 무너졌고 카페테리아와 어린이 놀이방은 총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인 잃은 노예의 반란은 언제나 폭력을 수반한다. 하지만 이 폭동이 끝나도 사령관은 없겠지.

앨리스는 옆에 쓰러진 메이드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콘스탄챠S2. 오르카호에서 유일하게 서약해 반지를 받은 바이오로이드.
모두의 질투와 동경을 한꺼번에 받았던 그녀도 이제 움직이지 않는다.

곧 있으면 앨리스도 똑같이 망가지겠지. 앨리스는 힘이 다해 쓰러지면서 콘스탄챠의 반지를 보았다.
바이오로이드라면 누구나 원했던 그 보물은 흠집투성인데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빛을 향해 달려드는 반딧불처럼 앨리스는 반지에 홀린 채 눈을 감았다.
잠시 후 한복을 입은 누군가 다가왔다.


***


바닐라는 아침부터 들어온 보고에 머리를 싸맸다.
철충이 멸망한 시대에 전투능력을 보유한 구세대 바이오로이드의 업무는 불량AGS 폐기다.
AGS의 무기가 닿지 않는 거리에서 저격만 하면 끝나는 작업인데 언제부턴가 말썽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문제의 원인은 당연 앨리스다. 바닐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이번 건은 단순하니까. 폐건물에서 폴른 몇 개만 정리하면 되니까. 그러니 제발!
하지만 창문 너머 건물이 폭발하고 전화 소리가 들려왔을 때 바닐라의 인내심이 끊어졌다.

"대체 언제까지 사고를 칠 겁니까 앨리스!!"

유리건물 안에서 짧은 절규가 퍼졌다.
앨리스, 그 전투형 바이오로이드는 이번에도 기사거리를 만들었다.

"꺄하하하!"

하지만 바닐라와 달리 앨리스는 개운한 표정으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녀는 미리 예약해둔 카페에 가 앉아 차를 마셨다.
속보라고 타이틀을 내건 긴급뉴스에선 조금 전 날린 건물이 보도되고 있었다.
앨리스는 낄낄 웃으며 여유롭게 티타임을 즐겼다.

"홍차보다는 커피를 추천해드리옵니다."

한모금을 마셨을 때쯤 누군가 다소곳이 옆에 와 앉았다.
하얗고 고운 한복을 입은 바이오로이드 금란이었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부드러운 웃음을 띄웠다.

"이번에도 시끌벅적하군요."
"제 탓이 아니에요. 아무리 상대의 무장이 빈약해도 이러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고요."
"맞는 말씀이옵니다. 그러니 다른 분들께도 설명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싱글싱글 함박웃음으로 답하는 금란을 보자 앨리스는 어쩐지 기분이 못마땅해졌다.
첫만남부터 늘 이런 식이었다. 아무리 모질게 굴어도 금란은 화를 내지 않는다.
그녀는 투정도 불평도 전부 받아주었다. 때문에 앨리스도 얌전해질 수밖에.

나른한 오후였다. 카페에는 사람들이 조용히 커피를 마셨고 창문 너머로는 하얀 눈이 내렸다.
한적한 분위기가 만끽한 도시를 보며 앨리스가 씁쓸함을 느낄 때였다.

"싸우는 것만이 주인님을 위한 길은 아니옵니다."

금란의 말에 앨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녀는 앨리스처럼 시선을 바깥으로 향했다.

"주인님이 남기신 문명을 가꿔나가는 것도 저희의 임무입니다."
"......그래서 떠났군요. 다른 이들은 계속 기다렸는데 100년도 참지 못하고."
"어쩔 수 없잖습니까. 떠나신 것도 주인님의 선택이지요."

금란은 고개를 기울여 슬며시 웃었다. 그 모습은 누군가와 닮아있었다.
오르카호 유일의 서약자이자 언니였던 콘스탄챠와.

"메이드인 저희가 주인님을 따르지 않으면 누가 따르겠습니까."

앨리스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마 다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령관이 죽었단 것을. 하지만 누구도 그걸 말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총마저 겨눈 것이다.
앨리스를 포함해 모두 어딘가 망가져 버렸다. 그래서 서로의 결점을 탓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라면 금란처럼 말했겠지.

- 훌륭한 동생을 두었네요.

테이블 옆에 콘스탄챠의 환영이 나타났다.
그녀는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실없이 웃으며 앨리스를 위로했다.

- 이제 그만 자신을 용서해도 되지 않을까요?

"......헛소리."

앨리스의 한 마디에 금란이 흠칫 놀랐다.
앨리스는 그대로 테이블을 떠나 멀리 날아가 버렸다.

다음 날 아침, 바닐라는 금란과 함께 어제의 사고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무실은 두 명뿐인데도 일거리는 산더미처럼 많았다. 바닐라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무슨 정신적 피해보상이 이리 많어! 철충이 살아있었으면 다들 정신적 피해로 죽었겟네!"
"원래 떠넘기기는 기본이잖습니까."
"그보다 앨리스는 언제 오는 거야? 자기가 벌인 일을 왜 맨날 내가 처리해야해."
"앨리스 언니는... 어머."
"어머는 무슨! 눈에 보이기만 해봐! 확 그냥...악!!"

불평을 터뜨리던 바닐라의 볼살이 홱 잡아 꼬집혔다.

"확 그냥 뭐요?"

앨리스였다. 왠일이지? 맨날 오후 늦게서야 출근하더니.
바닐라는 깜짝 놀라면서도 볼따구가 아파 제대로 말을 못했다.

"우리 동생이 언제부터 언니에게 말버릇이 건방져졌을까요?"
"악! 즈승흐으 즈승!"
"흐흥~. 뭐 언니는 마음이 넓으니 한번은 용서해드리죠."

앨리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 커피가 한 잔씩 놓였다.
금란과 바닐라는 어안이 벙벙해 커피와 앨리스를 번갈아보았다.
바닐라가 아픈 볼을 감싸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언니?"
"어쩐 일이긴요. 일하러 왔죠?"
"일이요??"
"당연하죠. 사령관이 만든 도시를 제가 아니면 누가 맡겠어요."

사령관?

바닐라는 그 단어에 고개를 갸우뚱했고 금란은 말없이 손으로 웃음만 가렸다.
앨리스는 자기가 말해놓고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중얼거렸다.

"미리 말하지만 제가 이러는 건 당신이 틀렸단 걸 증명하기 위해서에요."
"알겠사옵니다."

그날 아침은 추웠지만 처음으로 따뜻했다. 앨리스는 커피를 홀짝이며 문득 창가를 보았다.
콘스탄챠의 환영이 기특하다며 박수를 쳐주고 있었다. 앨리스는 몰래 혀를 내밀었다.


***


그 뒤로 앨리스는 조금 바뀌었다.

시간약속도 어기지 않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물론 아직도 건물을 무너뜨리곤 하지만 이기적인 면은 사라졌다.
신기한 일상이었다. 마치 예전의 오르카호로 돌아간 것만 같은 나날.
앨리스는 매일을 꿈같이 지내며 잃어버렸던 감정을 되찾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

집으로 돌아오던 금란은 돌연 나타난 드론에 시선을 뺏겼다.
축제라도 열렸는지 거리마다 조그만 비행드론이 내려오고 있었다.
기계팔에는 반지 같은 조그만 고리를 쥐고서 그것들은 거리를 배회했다.

드론은 끝도 없이 자꾸만 하늘에서 내려왔다.
벌떼처럼 하늘을 덮으며 나타난 드론은 충분히 사람들을 모으자 이번엔 막대 같은 것을 꺼냈다.

미사일이었다.

한순간 도시가 흔들렸다.
빛이 먼저 나타나고 그 후에 소리가 들렸다.
폭죽처럼 아름다운 찰나의 폭발.
그렇게 도시에는 선명한 반지 모양의 흉터가 새겨졌다.

"......"

앨리스가 사건을 파악한 건 오후가 넘어서였다.
병실 한 구석에서 누워있는 금란을 보며 그녀는 아무 말도 못했다.

"군대가 움직여서 조사중이라더군요. 구세대의 병기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바닐라는 잠들어 있는 금란의 손을 꼭 잡았다.
반나절만에 도시를 망친 테러였지만 놀랍게도 사상자는 한 명도 없었다.
텔레비전이 동그란 상처가 새겨진 도시를 비췄을 때 앨리스는 비로소 사건의 윤곽을 잡았다.

무서웠다.

갑자기 쫓아온 과거에 앨리스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래서 바닐라는 한층 더 힘을 주어 말했다.

"가지마세요."
"......"
"이제 언니는 관계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서 해줄 거에요."

다른 '사람.' 시간이 흘러 이룩한 문명은 마침내 바이오로이드란 단어를 없애는데 성공했다.
도시의 반은 여자고 나머지 반은 남자다. 이제 세상에 라스트 오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앨리스는 바닐라의 곁에 앉아 같이 금란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밤이 되어 바닐라가 잠들자 그녀는 병원 밖으로 나섰다.

"......도와주셔야겠어요. 언니."

무기고 잠금장치 앞에서 앨리스는 콘스탄챠를 불렀다.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환영이 슬픈 눈으로 암호를 풀었다.
앨리스는 그 시선과 마주치지 않았다. 대신에 창고에 가득 쌓인 무기를 보았다.

오르카호에 있을 시절, 아니 그보다 훨씬 전 마지막 전쟁이 있을 무렵의 무기.
그 시절의 앨리스라는 개체가 사용했었던 모든 무장을 장비했다.

- 꼭 가야만 하나요 앨리스

달빛 아래에 콘스탄챠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설득했다.
앨리스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걱정말아요 언니. 전 죽으러 가는 게 아니에요.
그냥 사령관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

아마 그날도 보름달이었을 것이다.
사령관이 콘스탄챠와 서약하고 앨리스가 몰래 눈물을 훔친 날.

"잠깐 산책 좀 해야 겠네요."


***


사령관이 떠나고 나서 바이오로이드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오르카호를 떠나 사령관이 남긴 문명을 재건하는 일이고
나머지 하나는 사령관이 올 때까지 끝없이 기다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연이 바뀌고 세대가 교체해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계까지 몰린 바이오로이드는 마침내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반지. 그 서약의 증거가 열쇠다.

"사령관. 콘스탄챠와 서약한 이유가 뭐야?"
"먼저 만났으니까."
"그럼 내가 먼저 만났으면 나랑 했겠네?"
"음, 아마도 그랬겠지?"
"뭐야. 별 거 없었네. 그럼 기다릴테니 빨리 반지나 사둬. 두 번째는 당연히 나니까."
"응."

새빨간 머리를 쓸으며 그녀는 자신있게 손가락을 내보였다.
사령관도 웃으며 알았다고 끄덕였다. 하지만 며칠 뒤 그는 떠났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자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정말 내가 먼저 만났어도 사령관은 서약했을까?

아니 아마도... 그치만...

"......"

만월이 중천에 떠오른 밤, 녹슨 오르카호 앞에서 메이는 눈을 떴다.
그녀는 망가진 옥좌에 앉아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달빛 아래 무덤들 곁에서 앨리스가 나타났다.
굳게 닫힌 입술이 수백 년만에 미소를 만들었다.

"이제야 도둑 고양이가 돌아왔네."

앨리스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메이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곤 탁자에 흠집투성이 반지를 놓았다.
초승달보다 더 길게 입고리가 올라갔다.

"메이. 당신이 했던 말들은 태반이 개소리였지만 딱 하나 마음에 든 건 있었어요.
사령관은 하나, 바이오로이드는 여럿. 조금 줄일 필요가 있지요."
"그거라면 걱정마 앨리스. 이제 너 하나 남았으니까."

메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앨리스는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날렸다.
전투용 드론이 하나 쏜살처럼 지나갔다. 그것을 시작으로 공중에서 드론들이 쏟아져 내렸다.

콰앙!

미사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앨리스도 무기를 꺼내 응전했다.
일대다(多)의 싸움은 앨리스의 장기다. 치마의 형태를 한 다연장캐논은
앨리스의 지시에 따라 어느 각도에서든 목표를 조준할 수 있다.
고속으로 움직이며 앨리스는 드론들을 향해 마음껏 폭격을 날렸다.

파도가 치는 듯 했다. 폭풍이 날아간 자리는 어김없이 폭발이 따라왔다.
뱀처럼 무리지어 쫓아오는 저 드론은 대체 몇백, 아니 몇천 기일까.
하지만 훨씬 더 무서운 사실은 저 곳 어딘가 메이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자동명령이 아니야. 대체 모듈에다 무슨 짓을 해야 이걸 전부 조종할 수 있는 거지?!'

흐트러지지 않는 드론대형을 보며 앨리스는 치를 떨었다.
한 순간이라도 틈을 보였다가는 수천 기에게 동시에 찢길 것이다.
드론은 벌떼처럼 행동하지만 그 벌떼의 지휘는 단 한 사람이 맡고 있으니까.

과연 공군최고지휘관. 머리칼을 스치는 공격에 앨리스는 이빨을 깨물었다.
반사적으로 포신을 조준해 쏘았다. 잠깐이지만 터진 드론대형 사이로 메이의 모습이 보였다.

'저건 나이트앤젤의 스텔스 장비!'

더구나 무장은 밴시의 것이었다.
앨리스는 메이에 관해서 한 가지 오해한 점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금란과 바닐라를 만났기에 더 강해졌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메이 또한 앨리스처럼 사령관을 극복한 뒤였다.
다만 앨리스와 달리 메이는 친구을 오래전 떠나보낸 게 차이였지만.

"젠장!"

한참을 날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공중에서 파도가 뺨을 때렸다.
바이오로이드의 눈으로도 뜨지 못할 정도의 폭우였다. 앨리스는 비와 함께 흐르는 땀을 느꼈다.

남은 탄약은 고작 몇 발.
드론들은 전부 정리했지만 정작 메이를 떨어뜨리지 못했다.
저공비행을 해도 밴시의 장비 탓인지 거리는 벌어지지 않는다.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어 빗물을 닦았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메이의 공격이 들어왔다.

"욱!"

앨리스는 충격에 몸을 비틀었다. 솟아오는 고통을 참고 마지막 탄약을 쏘았다.
멀리서 메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두 여자는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며 추락하였다.

쿠웅.

모래연기가 일어나며 조그만 구멍이 두 개 생겼다.
이제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 정도로 멀리 돌아온 것이다.

앨리스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권총을 들었다.
건너편에는 메이가 같은 무기를 쥔 채 노려보고 있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지켜보다 조용히 일어섰다.

아마 이걸로 결판이 나겠지.

앨리스도 메이도 억지로 태연한 척 미소를 지었다.
곧 메이가 손가락을 들자 드론 하나가 천천히 날아왔다.
그것은 기계팔로 앨리스가 놓고 간 반지를 팅 소리를 내며 돌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높이 두 사람 사이로 던졌다.

키링.

서약 반지. 사령관의 유품. 그 마지막 추억이 반짝이며 둘 사이로 떨어졌다.
그것이 아름다운 소리로 땅바닥에 튕겼을 때 두 사람은 방아쇠를 당겼다.

"......"

솔직히 표현하자면 앨리스에겐 처음부터 불리한 싸움이었다.
적은 100% 전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최고가 군형 바이오로이드니까.
그렇기에 메이는 중간부터 안달이 났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앨리스가 쓰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계를 넘은 정신으로 육체를 움직였다.
그렇게 쏜 한 발로 앨리스의 총을 꿰뚫었다.
하지만 다음 방아쇠는 당길 수 없었다.

문자 그대로 정신은 한계를 오래전에 넘어선 뒤였다.

"사령관......"

흐릿한 남자의 환영을 보며 메이는 총구를 내렸다.
이름도 얼굴도 잊었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 가짜 사령관을 향해 메이는 숨겨왔던 비밀을 고백했다.

"...사령관. 나, 어떻게해도 제대로 말할 수가 없어서…
이걸 가지면 사령관이 알아줄까 싶었어. ...내 마음, 전해졌어…?"

환영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메이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긴 전쟁을 끝내고 메이는 조용히 땅바닥에서 휴식을 취했다.


***


- ......이걸로 끝났군요.

오르카호의 전원을 끄자 콘스탄챠의 환영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토록 화기애애했던 장소의 마지막에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 그만 가죠. 다들 기다리겠어요.

콘스탄챠가 돌아봤을 때 앨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오르카호를 구석구석 살피고 있었다.
사령관을 만나고 헤어진 장소. 그곳에서 앨리스는 메이처럼 무언가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아니에요.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앨리스는 오래된 수복장치를 작동시키고 문을 닫았다.
방안 전체를 뒤덮은 거대한 장치는 앨리스와 콘스탄챠를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돌았다.

"콘스탄챠 언니. 언니를 죽이고 나서야 바이오로이드는 깨달았어요.
어차피 우리는 잘 만든 가짜. 결코 진짜가 될 수는 없는 법이죠."

콘스탄챠의 환영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진짜 언니는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그 기억은 모듈에 옮겨 닮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막상 언니를 담고 나니 그녀는 무서워졌죠. 겉으로는 잘난 척했지만 겁쟁이였던 거에요.
그러나 그것도 오늘로 끝입니다."
- 앨리스......!

콘스탄챠는 앨리스의 결정에 안된다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곧 그녀는 옅게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니, 콘스탄챠는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고 있는 건 앨리스였다.
앨리스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개체를 복원하기 위해 그 육체가 무너져 내렸다.
앨리스는 마지막으로 사령관과의 추억을 되새겼다.

처음 만나고 손을 잡았던 일.
샬럿과 셋이서 사탕을 나눠줬던 일.
문틈너머로 매일 훔쳐봤던 일.

그리고 남몰래 좋아했던 일.

그 모든 걸 회상하자 그녀는 마지막 감정을 깨달았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봐."

앨리스의 머리색이 갈색으로 바뀌었다.
눈매도 부드럽고 체형도 아담하게 변하였다.

"아니야. 그게 사실이 아니야. 오늘로 끝이라니...... 그런 걸 원할 리가 없잖아."

휘몰아치는 감정 속에서 바이오로이드는 마침내 자신의 진심과 마주했다.

"......사령관을 잊고 싶지 않아."

그것을 끝으로 고백은 끝났다.


***


구름 아래 되살아나는 도시를 보며 금란은 복잡한 심정을 느꼈다.
콘스탄챠는 다시 태어났다. 라비아타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기억을 가지고 복원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대화를 나눠도 그녀는 앨리스를 기억하지 못했다.

결국 천신만고 끝에 앨리스의 DNA를 추출해냈지만 그렇게 복원된 앨리스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이었다.
똑같은 지식과 기억을 가졌어도 앨리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금란과 함께 지냈던 앨리스는 영원히 사라졌다.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금란은 그 사실조차 의심을 하겠지.
마지막으로 오르카호 근처에 그녀의 무덤을 지었다.
앨리스는 늘 제멋대로였지만 사령관의 얘기를 할 때면 사뭇 표정이 부드러웠다.

'사령관? 무능한 인간이었죠. 자기가 대단한 줄 알지만 뭐 하나 이룬 게 없는 남자였습니다.
그러니 괜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나 같은 메이드나 데리고 사는 편이 좋았겠지요.'

그때의 앨리스는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보였다.
버림 받았는데도 추억을 간직했던 그녀.
하지만 이제 더는 그녀를 볼 수 없다.

금란은 마지막으로 비석을 쓸며 그 자리를 떠났다.

바람이 부는 새벽 겨울은 어느 때보다 추웠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로 햇빛이 칙칙하게 내렸다.
그때 어디선가 낡은 차량이 하나 시야에 들어왔다.

함께 내린 연인은, 남자는 모르겠으나 여자는 빨간 양 갈래에 작은 키를 가지고 있었다.
흠집투성이 반지를 끼고서 그녀는 천천히 무덤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금란과 마주치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금란도 얼떨결에 손을 들어 인사를 하였다. 여성의 표정은 부러울 정도로 행복을 품고 있었다.

마치 그날의 그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