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유미 경, 가짜였지만 나도 한때는 동방의 성인으로써 칭송받았던 자요. 구원을 바라는 자들의 간절함을 알기에 내버려 둘 수는 없소. 기억하시오, 구원자는 그대를 저버리지 않소."


 잠들기 전, 마지막 고요 속.



 [1]


 무릎이 새하얀 눈 속에 파묻힌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을 훑은 뒤 나오고, 입가엔 하얀 서리가 얼어붙는다.

 차디찬 바람이 안면을 때린다. 고막이 얼어붙는다.

 뽀드득,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한 발짝 내딛는 발걸음 뒤에는, 걸어 온 만큼의 발자국이 등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설산 위를 한참을 걸어올라왔다고 생각한 요안나는 찬바람이 멎자 고개를 들어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까마득한 높은 산. 돌아보아도 등 뒤를 따르는 자는 없었다. 외쳐보아도 메아리만 되돌아 오는 이곳엔 자신 외에 다른 바이오로이드가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요안나는 산봉우리에 걸친 햇빛을 올려다보며 다시 앞으로 걸었다.

 하지만 있었다. 이 까마득한 설산 위에, 요안나 외의 다른 바이오로이드가 한 기 더 있었다. 전투 능력이 있지도 않고, 강인한 육체를 가진 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민간인 쪽에 가까운 특성을 가진 바이오로이드가 이 설산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이다.


 다시 바람이 분다. 찬바람의 공기 찢는 소리가 정신을 어지럽히기 전에 요안나는 옷매무새를 바로 잡고 목을 바싹 움츠렸다.

 커넥터 유미, 조난당한 바이오로이드의 이름이다.


 조난당했다? 요안나는 스스로 떠올린 단어를 비웃었다. 조난당한 것이 아니다. 사고다. 돌이킬 수 없는 사고. 커넥터 유미에게 있어 설산의 눈사태와도 같은 대체 불가능의 사고였다.


 기본적으로 커넥터 유미는 통신 기지국 역할을 하는 바이오로이드기 때문에 전 세계 오지에 위치해 있었다. 더군다나 이런 높은 고도의 설산에는 커넥터 유미가 배치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했다. 그리고 그런 오지에 배치된 유미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보다 생존률이 높았다. 철충들도 그녀들을 발견하기 쉽지는 않았기 때문이니까. 그게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보다 커넥터 유미가 생존률이 높은 이유다.


 이 설산에 있는 커넥터 유미도 같은 이유였다. 홀로 기지국에 남았고, 오르카 호와 통신을 유지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불과 다섯시간 전까지는 말이다.

 설산에 배치된 커넥터 유미가 마지막으로 보낸 신호는 구조 요청이었다.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뻔한 이유였다. 설산에 철충이 등장했다. 그 철충은 기지국을 습격했고, 커넥터 유미는 간신히 피해 달아났다.

 그리고 그 철충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시작한 것이다. 이 차디찬 설산 속에서. 다섯 시간 동안. 자기 보호 능력도 없는 바이오로이드가.


 요안나는 커넥터 유미가 구조 요청을 할 때 우연히 근처에 있었고, 사령관의 명령도 없이 바로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설산을 오르고 있다.




 



 [2]


 커넥터 유미가 보낸 구조 요청이 그녀의 단말마와 함께 끝났다. 이후의 구조 요청은 없었다. 모두가 조용해진 통신기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그리고 몇 초 뒤, 그녀의 통신을 들은 모두가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요안나는 소란스러워진 기지 안을 바라보고는 장비를 챙겨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요안나! 어디 가!"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추운 지방을 수호하는 영령들. 그 중 가장 어린 알비스만이 요안나가 건물을 나올 때 같이 뛰쳐나왔다.

 요안나는 헐레벌떡 자신을 따라온 작은 소녀를 보며 짧게 말했다.


 "유미 양을 구하러 간다네."


 "그런 거라면 언니들을 기다려야 해! 설산에서의 철충이라면 우리들이 잡을 수 있어!"


 알비스의 눈에는 확신이 있었다.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믿음.

 요안나도 그렇게 믿었다.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수장인 레오나의 지휘 능력을 믿었다. 발키리의 냉철함과 사격 실력을 믿었고 님프의 든든한 지원을 믿었다. 베라 양의 꼼꼼한 준비와 여기 있는 알비스의 믿음직스러운 방패도 물론 믿었다.


 하지만 요안나가 의심하는 것은 그것들이 아니었다.

 요안나는 당장 설산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알비스를 돌아봤다.


 "나도 당신들을 믿네 알비스."


 "그럼 우리들을 기다려. 설산을 철충들은 나랑 언니들이 다 잡고 유미 언니도 구해올게!"


 요안나는 기특한 말을 내뱉는 알비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비스가 볼 수 있게 웃었다.

 그리고 가감없이 냉정한 말을 뱉어냈다.


 "발할라에는 고속 이동이 가능한 기체가 있나?"


 "어?"


 "철충이 발생한 위치와 유미 양의 현 위치를 알고 있나?"


 "뭐라고?"


 "아무리 자네들이 빨리 준비해서 출격한다고 한들, 그 전에 유미 양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나? 아니, 출격 준비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내게 말해줄 수 있나?"


 "아, 아니... 하지만 레오나 대장이 빨리 준비할 거야!"


 "자네들은 자네들대로 출격하게. 나는 나대로 유미 양을 구하러 이동할 테니. 걱정 말게, 자네들이 구해야 할 시신이 두 구로 늘지는 않을 거야. 난 이렇게 생각한다네, 자네들이 출격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먼저 출발하는 편이 낫다고."


 "하지만 요안나 언니는 설원용이 아니잖아..."


 "사람을 구하는 데에 용도는 중요치 않다네."


 "언니이..."


 요안나는 무릎을 살짝 굽혀 알비스와 눈높이를 맞췄다.


 "알비스 양, 자네의 생각은 지극히 올바르나 난 지금도 유미 양이 사라질까 두려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네. 설산에서의 난 쓸모가 없을지도 모르지. 난 자네들만큼 강하지고 않고 말이야. 하지만 난 지금 이 순간에도 유미 양이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네. 만약 내가 기지 안에서 편히 쉬다가 유미 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며칠을 취식하지 못할 게야."


 "언니잉..."


 "이건 내 욕심이네. 내 사명이기도 하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네. 나란 존재는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지금 위험한 상황에 놓인 유미 양에게까지 보잘것없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 내가 유미 양의 곁에만 있어준다고 해도 유미 양은 큰 힘을 얻을 걸세."


 요안나는 이제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다시 설산을 향해서 나아갈 때였다.


 "기다리는 자들은 악의 멸절을 원하지 않아. 구원을 원하지. 자네들은 자네들의 방식대로 철충을 소탕하게. 나는 내 방식대로 유미 양을 구할 테니. 그것이 이 몸에 내린 이름의 사명이라네."


 요안나가 내뱉은 긴 숨이 공기 중에 얼어붙어 흰 잔영을 만들어냈다.









 [3]


 싸늘한 바람이 휘몰아치듯 설산을 뒤덮고 있었다.

 요안나는 차가운 바람을 폐 속에 집어넣으며 산 정상을 바라봤다.

 해가 지고 있었다.


 "큰일이군."


 산은 해가 빨리 진다. 요안나는 자신이 가진 전투지식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해 진 산은 곳곳에 함정이 설치된 미로와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올라온 만큼 내려가야 한다는 건, 산을 내려갈 때는 이미 다음 날이 되어 있을거라는 뜻이었다.


 "유미 양을 빨리 찾아야..."


 수색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밤이 된다면 커넥터 유미의 생존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바닥을 향해 떨어질 것이다. 해가 미처 다 지기 전에, 커넥터 유미를 찾아야만 했다.


 높은 산에 위치한 기지국, 기지국을 습격한 철충, 유미 양의 마지막 무전, 그리고 예상되는 그녀의 탈출 경로.

 생각하자, 유미는 지금도 철충에게 쫓기고 있다. 벌써 기지를 출발한지 다섯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필사적이어야 할 때다. 요안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커넥터 유미는 기지 안에서만 생활했던 바이오로이드다. 설산에 해박하지만 철충들의 위협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마지막 통신을 이후로, 커넥터 유미의 신변을 특정할 수 없다.


 요안나가 눈을 떴다. 그녀가 기지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4]


 설산에 배치된 유미 6875 호는 눈 굴 속에서 고개를 파묻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자신이 내뱉는 따뜻한 숨이 추위를 견딜 단 하나의 방법이었다. 철충의 습격은 갑작스러웠고, 유미에게는 대처할만한 시간도 없었다. 오직 단 하나, 북부 기지에 구조요청을 전하는 것 말고는. 그 외의 장비는 모두 기지국에 남겨 둔 채 무작정 도망쳐 나왔다.


 해가 지면 기온은 급격히 떨어질 것이다. 유미도 그걸 알고 있었다. 설산에 배치된 만큼, 주변 환경이 어떤지는 잘 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유미는 차갑게 변한 자신의 입술을 만지며 무감각하게 변해버린 촉감을 느꼈다. 온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고, 피부는 새파랗게 질려 얼어붙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커넥터 유미는 간이로 만든 눈 굴에 몸을 더욱 깊숙히 집어넣으며 두 팔로 양 어깨를 감쌌다.

 유미에게 닥친 첫 번째 위협은 철충이었고, 그녀를 덮치는 두 번째 위협은 설산의 추위였다.


 "...하으으..."


 숨소리가 떨린다. 공기가 얼어붙고 있었다. 해가 짐과 동시에, 기운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너무 춥다. 너무 추워서 감각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유미는 정신을 놓을 뻔한 걸 억지로 다시 되잡았다. 유미가 믿는 건 단 하나, 철충이 그녀를 발견하기 전에 시스터즈가 그녀를 먼저 발견하는 것 뿐이었다.


 "추워...."


 그녀의 작은 목소리와 함께, 눈 굴 바깥쪽에서 들릴리가 없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스윽, 슥 하고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공포에 질린 커넥터 유미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 움직이는 듯한 소리는 점점 눈 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미는 겁에 질렸다. 주변을 살펴봐도 주변엔 도망갈 곳이 존재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눈 굴의 뒤쪽을 더 파기 시작했다. 여린 살갗이 눈 속에 파묻히며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숨이 가파온다. 그 움직임 소리는 점점 커졌다. 마치 눈 굴 바로 앞에라도 있는 것 같았다. 그 움직임 소리가 점점 커짐에 따라, 유미는 자신의 손이 찢어질 것 같은데도 눈 굴을 더욱 깊숙히 파기 시작했다.


 눈 굴의 입구에 길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유미는 그때서야 겁에 질린 얼굴로 자신의 눈 굴 입구를 해치고 들어오는 침입자를 맞이할 수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네, 유미 양."


 눈 굴을 해치고 들어온 이는,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도 아닌, 기지국을 습격한 철충도 아닌 전혀 예상 밖의 존재였다.


 "프레스터 요안나 씨?!"



 요안나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자신이 두른 머플러를 풀러 유미 6875 호의 목에 둘러주었다. 얼어붙은 살갗에 닿는 순간 터질 듯이 아팠지만 곧 따뜻한 온기에 녹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요안나는 유미에게 머플러를 둘러 주곤 자신이 해치고 들어온 눈 굴의 입구를 다시 막아두고 시작했다.


 "아니, 어, 어, 어떻게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네. 얼마 전에 주군이 근처의 온천을 일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개방했거든.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네."


 담담하게 얘기하는 요안나의 모습에 커넥터 유미가 오히려 겁에 질릴 정도였다. 사실, 요안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요안나는 북부 지방에서 활동하는 바이오로이드가 아니었고, 커넥터 유미도 기지국 밖으로 당최 나가지를 않았으니까. 영화배우로 활동했던 전적이 있다- 라고만 알고있는 수준이었다.


 "아니, 어떻게 제가 여기 있는지를 알고서...!"


 유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요안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구조 요청을 한 뒤 약 반나절 정도 흐른 것 같다. 게다가 밖은 해까지 졌을 텐데 무슨 수로 자신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이곳은 기지국 근처다. 철충이 나타난 기지국 근처에 대체...


 그 모습을 본 요안나가 유미의 옆으로 와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유미는 요안나의 어깨가 닿는 순간, 몸에 따스함이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간단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네. 설산을 넓고, 유미 양이 도망칠 수 있는 경로는 무궁무진 하기 때문이었지."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바로 그 점이네. 유미 양이 알고 있는 건 나와 같네. 그 때문에 오히려 기지국 주변을 샅샅히 찾아다녔지. 덕붙에 철충들과 숨바꼭질 놀이를 했던 것은 생각하기 싫군."


 요안나가 무장을 풀기 시작했다. 그녀가 챙겨온 보온 용품과 옷가지들이 하나 둘 풀러져 유미의 허벅지 위에 얹혔다. 당장이라도 얼어 죽을 것 같던 유미는 얼른 그 옷가지들을 입기 시작했다.


 "그래서야. 유미 양은 급하게 도망쳤고, 장비가 없어서는 기지국 멀리까지 도망칠 수 없지. 그리고 유미 양의 심리 상, 기지국 근처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네. 자신의 위치가 특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이상, 마지막으로 송신된 위치인 기지국에서 벗어날 리 없잖는가."


 커넥터 유미는 요안나가 내뱉는 말들에 조용히 입을 벌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이 도망가봤자 얼마 도망 못 가고 철충들한테 잡힐 게 뻔했고, 초반에는 오히려 기지국 내에 숨어들어가 장비를 빼내올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가 차선책으로 떠올린 게 이렇게 눈 굴을 파는 거였지만.

 하지만 그 심리를 알고 이렇게 눈 굴을 찾아낸 요안나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고작 영화배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 단편적인 정보들이 깨지고 새로운 이미지로 각인되고 있었다.



 "오래 걸릴 걸세."


 "네?"


 상념을 깨고 갑작스레 말을 꺼낸 요안나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설원에서의 작전을 펼치던 발할라 자매들이라고 해도 밤의 설산에서는 추적이 불가능 할 걸세. 안타깝지만 유미 양이 이렇게 마련해 놓은 임시 거처에서 밤을 보내도록 하세. 도움이 못 돼 미안하네."


 담담하게 말을 꺼내는 요안나의 얼굴은 정말로 자신이 도움이 못 돼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본 유미가 자신의 차가운 두 손을 꺼내 요안나의 손을 잡았다.

 커넥터 유미가 프레스터 요안나와 똑똑히 눈을 맞췄다. 유미는 알고 있었다. 요안나는 스스로를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지만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요안나가 자신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어떻게 힘이 되어 주었는지를.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절망에 떨고 있지 않았다.


 "아니에요!"


 요안나는 유미의 굳은 눈빛에 무었인가를 알았는지 작게 웃었다. 그리곤 그녀가 잡은 손을 힘있게 잡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을 안 했군, 커넥터 유미 양, 이라고 했나?"


 "설산 배치된 커넥터 유미 6875호 입니다!"


 유미가 힘있게 말하자 요안나도 웃으며 그 인사를 받았다.


 "나는 프레스터 요안나라고 하네. 1000년 전의 영광스러운 동방의 기독 군주가 자네를 위해 이곳에 도착했네."







 [5]


 "요안나 씨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예요?"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잠들려 하는 찰나, 유미의 목소리가 눈 굴 안에 울려퍼졌다가 눈 속으로 스며들었다.

 요안나는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유미를 살짝 내려다 봤다. 반쯤 잠긴 눈으로 조용하게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사방은 고요했다. 밖은 차가운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눈 굴 안은 정말로 조용했다. 유미의 목소리와 요안나의 목소리만이 남아 눈 결정 사이사이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었다.


 "자네가 여기 있기 때문이라네, 정확히 말하자면 지켜야 할 자가 있는 곳이기에 내가 있다네."


 "요안나 씨는 참 어려운 말을 쓰시네요..."


 유미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작게 푸흡 하고 웃었다. 요안나는 그 웃음을 이해할 수가 없어 당황했지만 그게 유미에게 일종의 농담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놓았다.


 "요안나 씨, 당신 이야기 좀 해 줄 수 있어요? 저는 기지국 안에서만 살아왔어서..."


 요안나는 그렇게 말하는 유미의 목소리가 어쩐지 아이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옛날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머리맡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던 아이들이 생각났다. 자신은 검투사로, 영화배우로, 성직자로 태어났지만 그 시절엔 분명 인간이 있었기에 그 느낌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나는 거짓된 존재라네."


 "네?"


 "평생 거짓된 꿈을 안고 살아왔지. 자신이 프레스터 존이라는, 기독 국가의 왕이라는 허황된 꿈을 안고 말이야."


 "그거... 요안나씨의 원전(原典)에 관한 이야기에요?"


 유미의 말에 요안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한때는 나도 기독 국가의 왕이라는 자부심에 취해 있었지. 스스로가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거짓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네. 인간들이 멸망하고 그, 기억과 지식에 맞물리지 않는 점이 있더군."


 요안나는 자신의 머리를 검지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렸다. 유미는 그걸 걱정스레 바라봤다.


 "알고보니 프레스터 존이라는 원전 뿐만 아니라 여교황 요안나라는 존재도 내 안에 섞여 있더군. 멸망 전의 인간들은 나를 만들어 내 유희용으로 즐겼던 모양이야. 물론 그때 얻은 지식들로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 문제는 없네만. 나는 말하자면 일종의 가짜 교황이지."


 "요안나 씨, 그래도 가짜라뇨, 요안나 씨는 여기에 있잖아요."


 "유미 양, 그거 아나? 프레스터 존이라는 존재 자체가 인간들의 허망한 믿음에서 비롯된 가짜라는 것을. 나는 말하자면 가짜의 가짜인 셈이야. 거짓으로 만들어 낸 존재를 추억하며 만들어진 가짜. 어쩌면 인간들은 천 년 전의 프레스터 존의 재림을 바라고 나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결국 동방의 기독 군주를 바라던 존재들도 멸망했고, 나를 만들어냈던 마지막 인류들도 멸망했지. 단 한 명, 사령관이라 불리는 내 주군을 제외하고 말이야."


 "...요안나 씨, 저 조금 슬퍼요."


 "슬퍼하지 말게. 나는 이미 익숙해졌으니. 벌써 몇십년 전 이야기야. 시간이 지나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걸세."


 유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요안나의 체온을 느낄 뿐이었다. 적어도 둘은 멸망한 인류와는 다르게 분명 이곳에 존재했다.


 얼마 뒤, 유미의 새근새근 잠자는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퍼졌다. 요안나는 유미가 오늘 하루 힘들었단 것을 이미 알고있었기에 조용히 자게 내버려 두었다.


 요안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고찰을 많이 한 존재다. 인류의 멸망을 지나, 이전의 프레스터 요안나들에게 기억을 이어받으며 이곳에까지 존재했다.

 스스로 믿었던 자기 자신이 깨어진다는 상실감은 누구에게 토로해야 좋을까. 요안나는 교황도 아니었을 뿐더러, 기독 군주도 아니었다. 스스로는 그렇게 믿고있었지만 그녀는 이도 저도 아닌 고작 촬영용 바이오로이드였을 뿐이다.

 프레스터 존도 아니었고, 여교황 요안나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걸까.

 쉴 새 없이 고민했고, 끊임없이 사색에 잠겼다. 돌아오는 것은 허망함과 허탈함 뿐이었다.


 프레스터 존도 아닌, 여교황 요안나도 아닌 과거의 잔재에서 파생된 그들의 그림자.


 천 년 전의 성전은 철충들과의 전쟁으로, 지켜야 할 자는 기독교인들에서 주군과 동료들로 바뀌었지만 어딘가 뻥 뚫린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막힌 눈 굴의 천장을 바라봤다.


 요안나는 어딘가 결여된 무언가를 찾아 아직도 해메고 있었다.








 [6]



 잠깐 눈을 붙였다가 떼니 커넥터 유미는 벌써 일어나 있었다.

 요안나는 가벼워진 어깨를 어루만지며 공허한 기분을 날려버렸다.


 "아, 요안나 씨, 일어나셨네요."


 "미안하군, 기다리게 했는가?"


 요안나는 빠르게 주변에 흩어진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이대로 설산을 내려가 기지에 합류한다. 그게 1번 플랜이다.

 대부분 그대로 껴입고 자서 챙기는 데 오랜 시간은 들지 않았다. 요안나는 가장 중요한 자신의 칼과 방패를 챙기며 결의를 다졌다.


 "저도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어요. 한 5분?"


 "유미 양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바로 설산을 내려가야겠네. 오래 지체할수록 철충이 우리들을 찾아내기 쉬워질 거야."


 "기다리고 있었어요."


 장비를 챙긴 요안나는 굴 벽 앞에 선 유미를 지나녀 눈 굴의 입구를 주먹으로 쳐 부셔버렸다.

 뚫린 구멍 사이로 새벽의 햇빛이 조금씩 새어들어왔다. 요안나는 눈이 부신 것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눈 굴의 입구를 발로 차 완전히 걷어버렸다.


 "가지."


 요안나는 안쪽의 유미에게 손을 뻗어 그녀를 눈 굴 속에서 당겼다. 그녀와 함께 눈 굴에서 빠져나온 요안나는 설산의 새벽을 온 몸으로 맞이했다.


 아직도 차갑지만 작은 눈 결정이 뺨에 닿았다.

 눈보라는 멎어 있었고, 해가 뜨기 시작해 시야가 밝아지고 있었다.

 내려가야 할 길을 확인한 요안나는, 유미를 부축하며 설산을 하산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설산을 내려가기 시작할 찰나, 요안나는 깜빡 잊고 잠들어버려 유미에게 묻지 못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유미 양, 기지국을 습격한 철충의 부대는 어느 정도나 됐지?"


 "대충 3~5기 정도 였던 것 같아요. 딱 한 부대 분량."


 "어떤 철충들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나?"


 "날아다니는 칠러하고... 램파트를 기본으로 하는 철충들... 그리고 하베스터."


 "하베스터라고 했나?"


 "네. 덩치 큰 놈이었어요."


 요안나는 설산을 내려가며 생각에 잠겼다. 철충들도 생존한 유미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유미가 어디서 어떻게 본 부대와 연락을 취할지 모르니까. 아마 철충들도 다들 흩어져서 찾고 있을 것이다.

 AGS를 기반으로 하는 철충들이니 밤에도 움직였을 테고, 그러다 보면 행동 반경도 넓어져서 대부분은 기지국을 벗어났을 가능성이 있었다. 요안나는 그 가능성을 생각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철충들은 뿔뿔히 흩어져 있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 때문에 하산 시 철충들을 만날 확률이 높았다. 그러자면 자신이 처리 가능한 건 기껏해야 램파트를 기반으로 하는 철충 한 두 기나 칠러 한 두기. 만약 하베스터를 만난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요안나는 뒤의 유미가 잘 따라오나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유미 6785호는 뒤에서 잘 따라오고 있었다. 다만, 사색에 잠겨 걸어내려오다 보니, 사무용으로 만들어진 유미와 신체능력 차이가 있어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요안나는 유미에게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유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추운 건가? 하고 생각하던 찰나, 유미가 자신에게 큰 소리로 경고하는 것이 들렸다.


 "요안나 씨! 뒤에!!"


 공포에 질린 눈, 새파랗게 변한 얼굴색.

 요안나는 그 즉시 허리춤에서 방패와 검을 꺼내 몸을 뒤틀었다.


 방패가 자신의 몸 앞에 위치했다고 생각하는 찰나, 무거운 중량감이 자신을 덮쳤고, 프레스터 요안나는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하베스터!!"


 요안나는 자신을 날려보내는 철충놈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 묵직한 중량과 파워를 가진 거대한 하베스터를 말이다.






 [7]


 격통과 함께 땅으로 추락한 요안나가 눈 위를 굴렀다.


 "크헉!"


 폐가 짜부라지는 것 같다. 그나마 아래에 눈이 깔려 있어서 충격 흡수가 된 것 같았다.

 요안나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커넥터 유미를 손으로 제지했다. 그 손동작을 보고 커넥터 유미가 그 자리에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가 띵하고 온 몸에 통증이 느껴진다. 고작 한 방, 방심했다고 해도 한 방이다. 중량 차이는 방패를 든 자로써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다른 철충이었다면 어떻게든 했을 텐데. 하필 저 놈이, 하필 하베스터가.

 생각해보면 간단했다. 하베스터는 그 크기만큼 기동성이 좋지는 않으니 기지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우리들과 마주친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요안나 씨! 괜찮아요?"


 "가까이 오지 마시게. 위험하네."


 "그건 요안나 씨도 마찬가지...!"


 요안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다잡고 방패를 들었다. 두 무릎을 대지에 박은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았다. 눈은 전방에 있는 하베스터를 향했다. 그 괴물같은 몸뚱아리가 이 쪽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안나 씨 도망쳐요!"


 "늦었네."


 요안나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들킨 이상, 끝이다. 여기서 승부를 봐야 한다. 요안나의 머리가 쉴 틈 없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요안나는 다른 군사용 바이오로이드 들에 비해서 특별하 강하거나 튼튼하지 않다. 살인 기술을 배웠기는 하지만 고작해야 영화배우용 바이오로이드, 근본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략적인 면에서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보다 뛰어났다. 천 년 전 종교전쟁을 한 것을 베이스로 삼았기 때문일까, 요안나의 머릿속에는 차마 다 담아내지 못한 전투용 교과서들이 가득했다. 언젠가는 써먹어야 할, 바로 그 지식들이 말이다.

 지휘관 급은 아니라도, 바로 그 밑 단계. 요안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가 내린 결론이다.


 "도망치게, 유미 양."


 "네? 그럴 순 없어요!"


 "잘 듣게 유미 양, 우리들이 발각된 시점에서 철충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걸세, 그러면 우리들은 어차피 개죽음 당할 거야. 하지만 지금은 하베스터 한 기체 뿐, 내가 노력한다면 어떻게든 여기서 지체시킬 수 있네."


 "그렇게는 못해요!! 요안나 씨가 희생한다는 거잖아요!"


 요안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에서 소리치는 커넥터 유미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있었다. 요안나는 자기암시를 시작했다.

 자신은 지키는 자. 약한 자들을 수호하고 이 땅에 평화를 내려 줄 자다. 그리고 성직자이자 기사이기도 하다.

 기사는, 등 뒤에 지켜야 할 사람들 두고 돌아보지 않는다.

 기사는, 지켜야 할 것을 두고 물러나지 않는다.

 이것이 방패를 든 자의 사명, 그녀가 믿고 있는 기사도이자 신념이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우리 둘 다 생존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네."


 생각의 정리는 끝났다. 남은 건 각오 뿐.


 "자네는 여기에 남아 봤자 전투에 도움이 되지 못하네. 그러니 내가 막는 동안 필사적으로 발할라의 자매들을 호출하게. 기지국으로 돌아가도 좋아. 아마 기지국 안에는 아무도 없을 걸세. 그게 우리 둘 다 사는 유일한 방법이네."


 "그런 거, 저를 안심시키려는 말이잖아요!"


 "믿게, 발할라의 자매들은 어제부터 자네를 찾고 있었다네. 동이 밝은 지금, 그녀들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을 거야. 믿게, 그녀들이 멀리 있지 않네. 필사적으로 도망쳐서, 그녀들에게 도움을 구하게. 난 여기 남아있겠네."


 "그런.... 흑, 흐윽! 요, 요안나 씨!!"


 "빨리!"


 요안나가 고함을 쳤다. 커넥터 유미는 눈물을 닦았다. 요안나의 결의는 커넥터 유미가 걲을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요안나가 제시한 답변만이 유일하게 둘 모두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커넥터 유미는 등을 돌리고 내려왔던 설산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주변을 수색하고 있는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를 찾아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마치 요안나가 자신을 찾을 때처럼, 간절하고 간절하게 그녀들을 찾아내야 한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기사는, 지킬 대상을 두고 쓰러지지 않네."


 등 뒤에 멀어져 가는 유미의 목소리와 함께, 프레스터 요안나는 방패를 들고 결의를 다졌다.






 [8]


 내 갑옷은 내 정의이며

 내 방패는 신념이고

 내 칼은 내 심판이리다.


 거대한 하베스터의 모습이 바로 앞까지 섰다. 요안나는 마치 하베스터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생각해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돼는 이야기다. 철충이 사람 말을 한다니. 하지만 마치 그렇게 생각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철충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냐'고, '고작 너로 나를 막을 수 있겠냐'고. 요안나는 그렇게 머릿속에 떠오른 말들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망치로 성벽을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요안나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베스터의 거대한 팔이 요안나를 향해 뻗어나갔다.


 요안나는 즉시 에너지 카이트 실드를 전개했다. 에너지 방패가 쇠 부분의 겉면을 타고 더욱 넓게 전개되었다. 곧이어 그녀의 무게보다도 더욱 무거운 하베스터의 팔이 방패에 닿았고, 방패가 출렁하고 움직였다.


 "크윽!"


 버텨라, 버텨야 한다. 방패에서 팔로, 팔에서 무릎으로 전달된 충격이 발바닥을 타고 땅으로 흩어졌다. 전투에서 몇 번이고 느꼈던 충격이었다.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알고 있었다. 방패병에게 중량이란 무게는 결코 무시할 것이 못 된다.


 이번엔 하베스터가 두 팔을 동시에 하늘 위로 모았다. 그러자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이 가려졌다.


 하베스터가 두 거대한 팔을 모아 내리쳤다. 이것은 감당할 수 없다. 그렇게 판단한 요안나가 눈 위로 몸을 날렸다. 그 찰나의 사이, 하베스터의 두 팔이 요안나가 서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눈먼지가 사방으로 날리고, 방금까지 요안나가 서 있던 자리에 쌓여 있던 눈이 사라져 지면이 드러났다. 요안나가 처음으로 설산의 지면을 본 순간이었다.


 하베스터의 네 개의 다리가 요안나의 신형을 따라 척 척 움직였다. 마치 거미를 크게 확대해서 다리를 네 개만 놓고, 두 개는 팔로, 두 개는 어께 위로 얹어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하베스터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하베스터의 팔이 길게 뻗어졌다. 하베스터의 특기인 늘어나는 팔이다.


 "크으으으윽!"


 하베스터의 팔이 용수철처럼 튕겨나왔다. 길게 늘어난 팔이 휘둘러치듯 요안나를 강타하려 하고 있었다. 요안나는 급히 방패를 옆면으로 세웠다. 그리고 다시금 묵직한 충격과 함께, 공중으로 떠올랐다.


 잠깐 동안의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고, 요안나가 두 번째로 땅에 떨어졌다. 요안나는 입에 눈이 들어간 것을 뱉어내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누워 있을 시간따위 없었다. 그리고 누워 있던 요안나를 향해 하베스터의 네 개의 다리가 아귀처럼 입을 벌리고 그녀를 짓누르려 하고 있었다.


 "젠장!"


 하베스터의 무게에 짓눌리면 죽는다. 방패고 뭐고 없이 그냥 사그라져 버린다. 그걸 아는 요안나는 격통을 느낄 새도 없이 몸을 날려 하베스터의 다리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1초 뒤, 기우뚱해 있던 하베스터가 요안나를 향해 발을 굴렀다.


 콰앙

 땅이 들썩였다. 천지가 흔들렸다. 121톤의 토미 워커를 기반으로 한 하베스터가 발을 구르자 사방에서 눈이 쏟아져 내리고 침엽수의 뿌리가 뽑혔다. 요안나는 그 옆에서 누워 있던 것만으로 내장이 진탕되는 것을 느꼈다.

 가벼운 뇌진탕마저 있었지만 어떻게든 견뎌내려 하자 바이오로이드의 육체는 그녀를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요안나는 다시 끝내 두 발로 땅 위에 섰다.


 자신이 그 잠깐 사이에 생사를 오가는 순간을 몇 번이나 넘겼는지 모르겠다. 지금쯤 유미는 어디까지 도망쳤을까? 자신은 모른다. 어쩌면 운이 나쁘다면 기지국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철충과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유미를 혼자 보낸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방패를 놓고 싶어진다.


 "그럴 순 없지. 포기할 순 없네. 자네라는 적이 내 눈 앞에 있는 이상, 나는 내 등 뒤를 내어 줄 생각이 없네."


 요안나는 바들거리는 팔을 부여잡고 칼을 들어올렸다. 이대로만 가서는 안 된다. 하베스터의 공격을 받아내기만 하다가는 결국 죽고 말 것이다. 적어도 생채기라도 내야만 생존 확률이 올라간다. 절대로 하베스터가 공격에 집중하게 둬서는 안된다.


 "내 이름은 프레스터 요안나! 프레스터 존도 아닌, 여교황 요안나도 아닌 프레스터 요안나다."


 요안나가 칼을 들어올려 하베스터에게로 달렸다. 온 몸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하베스터의 다리가 철컥, 철컥하고 끔찍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게 보였다. 하베스터가 공격하기 전에 친다. 그게 요안나가 생각한 방법이었다.


 "날 봐라 하베스터! 그대의 팔로 나를 짓이겨라!"


 요안나의 외침과 함께, 그녀가 내뻗은 칼 끝이 철충의 표피를 배어 갈랐다.

 칼이 철을 긁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하베스터의 다리 중 하나를 배어 갈랐다. 하베스터의 몸체가 기우뚱해지며 전기 튀기는 소리가 나자 요안나는 들어왔을 때처럼 빠르게 뒤쪽으로 빠졌다.

 그리곤 요안나가 있던 자리를 스쳐지나가는 하베스터의 두 팔. 압사당하기 직전이었다. 요안나는 머리카락 끝이 잘려 나간 걸 확인하면서 그만큼 반쯤 잘려진 하베스터의 다리 중 하나를 바라봤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결코 실패하지 않을 보루이니라."


 한 줄의 짧은 찬송이 요안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의 다리가 반쯤 잘린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흉폭하게 변한 하베스터가 요안나를 향해 다시 한 번 팔을 뻗었다.

 버틸 수 있을까? 이미 피하기엔 늦었다. 한 번의 공격을 함으로써 요안나와 하베스터 사이의 간격은 너무도 가까워져 버렸고, 요안나가 피할 수 있을만한 시간과 거리를 주지 않았다.

 결국 요안나가 취할 선택은 방패를 드는 것밖에 없었고, 하베스터는 그런 요안나는 방패 째로 잡아 올렸다.


 "크아아아악!!"


 하베스터의 손아귀가 그녀를 옥죘다. 그녀가 든 전개된 방패가 키이익 거리며 하베스터의 손아귀 사이에서 마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몇 번의 공격에도 버텨내던 방패가 하베스터의 그랩에 맞아 겉표면에서 불똥이 일었다. 에너지 단자로 전개된 방패이니만큼 일정 수준 이상의 충격을 가하면 전개가 풀린다. 그게 이 방패의 한계였다. 요안나는 이를 악물었고, 몸을 비틀었다.

 이 순간에도 요안나의 방패는 불똥을 튀기며 하베스터의 손아귀가 좁혀지지 않게 버티고 있었다. 요안나는 방패를 든 손을 놓았다. 방패병이 방패를 놓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해야만 했다. 요안나는 방패를 놓고 하베스터의 손 위로 기어올랐다. 방패가 간격을 주어 간신히 올라올 수 있었다. 그리고 요안나가 하베스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 에너지 출력 방패가 해제되며 하베스터의 손아귀 사이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하베스터의 손아귀가 맞닿으며 깡 하고 쇠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요안나는 하베스터의 팔 위에서 뛰어내렸다.

 출력이 해제되어 볼품없어진 방패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그 방패를 하베스터에게 보이며 자세를 잡았다.

 한 치도 물러날 수 없다.



 하베스터의 공격이 잠시, 아주 잠시 멈췄다. 마치 요안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방패도 부셔진 네가 뭘 할 수 있겠냐고' 요안나는 이렇게 들리는 것 같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그 철로 된 방패에 몸을 숨겼다. 이것이다. 방패를 들고 적의 공격에 맞서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일이다.


 "동방의 프레스터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지. 하지만 나는 프레스터 존이 아닐세. 나는 요안나지.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고, 내가 해야 될 일일세."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성전에 나서는 전사와 같았다. 죽음을 앞두고 신념을 이루기 위해 두려워 하지 않는 전사. 실존하지도 않는 프레스터 존이었다. 요안나는 이제 마음속에서 그 이름을 지워버리기로 했다. 나는 요안나다. 요안나라는 이름이 가슴에 박혀 평생을 살아왔다.

 프레스터 존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천 년 뒤의 프레스터는 나타났다. 지금 이 자리에, 평생 가짜라는 고뇌를 벗어던지고 스스로를 입증하고 있었다. 

 이제서야 뻥 뚫린 무언가가 채워진 것 같다.


 "이게 내게 있어서 나의 성전일세."



 하베스터의 팔이 요안나를 가격했다.

 에너지 필드를 펼쳐내고 있지도 않은 방패가 우그러지며 하베스터의 팔이 요안나의 몸을 짓뭉갰다.

 그녀의 복부가 하베스터의 팔과 닿으며 움푹하게 들어갔고, 입에선 피를 토했다.

 흰 자위를 보이며 눈을 뒤집었던 그녀가, 충격으로 방패와 함께 설산의 눈밭으로 날아갔다.


 뼈가 부러졌다. 내장이 파열됐고, 혈관이 충격을 받아 내부에서 다 터졌다. 눈과 코에서도 피가 줄줄 새어나온다. 땅이 닿기 직전에 생각했다. 여기까지구나. 나는 과연 유미 양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일까? 눈이 서서히 감겼고, 세상이 암막으로 뒤덮였다.


 그녀의 몸이 땅과 충돌했고, 그녀는 몸을 뒤틀었으며,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9]


 시스터스 오브 발할라의 사람들이 철충들을 추격하고 있었다.


 기지국에서 그녀들을 호출한 유미 6785호는 자신이 할 일을 마치자마자 요안나가 있던 곳으로 뛰어갔다. 숨이 턱까지 닥쳐오는 것도 모르고, 미친듯이 요안나를 향해서 달려갔다.


 유미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알비스와 발키리가 도착해 하베스터를 몰아내고 있었고, 요안나의 곁에는 님프가 붙어 있었다.


 입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요안나를 확인하자, 커넥터 유미의 눈이 뒤집혔고, 알아차린 순간 그녀를 향해 미친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님프가 말리기도 무섭게, 유미가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었다. 넝마가 된 요안나의 몸을 바라보며, 설산 전체가 울리도록 오열하고 있었다.


 "요안나 씨!!!! 요안나!!!! 요안나!!!! 괜찮다며!! 살 수 있다며!! 어젯밤에는 그런 얘길 했잖아!!!!"


 "유미 씨, 진정하세요! 요안나 씨는 지금...!"


 곧이어 샌드걸, 베라, 레오나가 도착했다. 레오나는 도착한 바이오로이드를 이끌고 철충들을 추격했으며, 베라와 샌드걸은 요안나를 공중 드론에 태우고 기지로 이송시켰다.

 님프가 끝까지 말리지 않았다면 유미는 요안나를 붙들고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눈물이 마를 때 쯤, 그때서야 유미는 진정할 수 있었고, 탈진한 그녀를 알비스가 부축하며 설산에서 내려갔다.


 요안나와 유미 6785호가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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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시는 글자수 제한 때문에 이거 한번에 올리면 짤렸었는데 여기는 한번에 올라가네


덧붙여 글자수셈에 그때 못 적었던 후기도 적겠음

당시 B급 바이오로이드를 주인공으로 한 3부작 중 보호기 편이었음

글 쓸 때 플롯을 여러 방면으로 짜는데 이거 같은 경우는 대사를 먼저 만들고, 그 대사에 따라서 내용을 전개했음

워울프, 요안나가 그랬고 포티아는 스토리라인 먼저 짰음


작 중 못 넣은 대사가 이것들임

지켜야 할 자가 있는걸 알기에, 여기서 멈출 수는 없네.

자, 자매들. 주군의 적을 물리치고 영광을 맞이하자.

난 두려워하지 않네. 왜냐면 진리가 우리를 통해 승리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라네.

굳건한 무릎과 부셔지지 않는 육체만 있다면 언제까지고 당신을 지켜낼 걸세.

자네가 이미 패배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나도 없겠지. 자네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네. 그리고 나 또한 그러할 걸세.

가짜를 얕보지 마라

동방의 프레스터는 끝내 모습을 나타나지 않았지만 가짜 프레스터는 똑똑히 눈 앞에 서 있었다.


원래는 유미 대신 베라였는데 작 중 개연성을 이유로 변경당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