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https://arca.live/b/lastorigin/14944658
6
“메이의 보안카드...그게 어디 있을까?”
리앤이 터덜터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지휘관 회의가 끝나고, 그녀는 메이의 보안카드를 찾아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메이는 리앤이 3일 안에 카드를 찾지 못하면 스카이 나이츠의 소지품 수색을 허가하라며 재촉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령관은 애초에 절도인지조차 알 수 없다고 시종일관 부정적이었고, 리앤을 압박하지 말라며 시간제한은 절대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그녀는 갑자기 주어진 사건에 당황스러웠지만, 자신의 편을 들어주려고 하는 사령관을 보며 힘을 내 보기로 했다.
‘둠 브링어에 관해 안내가 필요하면 다이카가 도와줄 거야. 뜬금없이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해.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줘.’
사령관은 수사에 대비해서 정보원까지 제공해 주었고, 리앤이 협력을 요청하면 최선을 다해 도와줄 것이다. 이제 수사는 그녀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래. 시작이 반이니까!”
마법의 주문처럼 좌우명을 읊고 나니 의욕이 샘솟았다. 작은 소지품이 없어지는 이런 사건은 대부분 물건을 찾지 못했다. 경찰에 신고가 들어온 경우, 대부분은 주인이 잃어버린 경우였고 절도는 드물었다. 만약 정말로 절도라면, CCTV를 확인해 보고 용의자를 좁히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녀는 일단 사건 현장 방향으로 향했다.
사건 현장은 둠 브링어 숙소 옆 81정비소, 통칭 기동 정비소였다. 보안카드를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메이의 재킷이 걸려 있던 곳이다. 그곳에서 메이와 다이카가 그녀를 맞이해 주었다.
“어서 와. 형사. 여기 올 것 같았어.”
“네, 안녕하세요.”
메이는 ‘스카이 나이츠가 범인이다’는 확신에 차서, 기동 정비소에 리앤이 나타났을 때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사령관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듯했다. 메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즘 전력 부족 때문에, 청소는 우리가 직접 하고 있어. 이번 주에는 우리 둠 브링어가 정리를 해야 해. 보안카드가 여기 어딘가에 떨어졌다면 오늘 오전에 이미 찾았을 거야.”
메이가 직접 자신을 안내해주는 것을 보며, 리앤은 메이가 이 사건에 정말로 몰입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메이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뾰로통한 표정으로 리앤에게 정비소 내부를 보여주었다. 카드는 어디에도 없었다. 메이가 리앤의 앞에서 주머니를 하나하나 뒤져보았음에도 그 카드는 나오지 않았다. 다이카도 옆에서 말없이 도와주었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없어! 내 숙소에도 없어! 내가 잃어버린 게 아냐!”
이렇게 말하는 메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오늘 지휘관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메이는 한 번 꼼꼼하게 수색을 했었다. 아침부터 난데없이 숙소에서 보물찾기를 하게 된 나이트 앤젤이 화난 표정으로 메이에게 ‘누구는 흉부지방만 가득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다’며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신뢰하는 다이카마저 “혹시....대장님께서...어디에....”라고 말하자 뒤는 차마 듣지도 못한 채 메이의 서러움이 폭발해 버렸던 것이다. 그 여파는 스카이 나이츠와 사령관을 거쳐 리앤에게까지 오게 되었다. 리앤은 메이의 눈물을 보고 마음이 동해 메이를 위로해 보려 했다.
“걱정 마세요, 메이 대장님. 제가 잘 찾아볼께요.”
“동정하지 마! 나...난 괜찮아! 범인이나 꼭 잡아!”
리앤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메이가 눈물을 애써 닦아내며 말했다. 헛기침을 한 리앤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몇 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카드를 본 시간과 장소는 어디인가요?”
“어제 밤 열시 반 정도야. 그때는 내 재킷 안주머니에 있었어. 분명해! 그리고 열두 시쯤 재킷을 가지고 숙소에 돌아와서 잠들었어.”
대답을 끝내고 메이가 콧물을 훌쩍이자, 리앤은 고개를 돌려 애써 웃음을 감추어야 했다. 그녀는 몇 가지 형식적인 질문을 물어보았다. 마지막 질문이 중요했다. 메이가 부차적 이득을 위해 일부러 카드를 없애 버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정말 중요한 물건일까?
“그 카드가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가요? 다른 사람이 가져갈 가치가 있나요?”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내 사진이 박힌 조각일 뿐이야. 아무 쓸모도 없어. 보안인식도 나와 카드가 둘 다 있어야 하고, 쇼핑을 하는 것도 내가 아니면 안 될 테니까. 하지만 난 그 카드가 없으면 보안구역에 가지도 못하고, 밥을 먹을 수도 없단 말야. 비참하게 내 부하에게 카드를 빌려서 구차한 밥을 먹어야 한다구! 나 혼자선 출입도 못해서 애 취급 당하고 체면이 말이 아니야! 재발급까지도 오래 걸리는데!”
리앤처럼 노련한 형사의 직감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펑펑 우는 메이가 보안카드를 스스로 없앨 이유는 없어 보였다. 메이는 말을 끝내고 “꼭 찾아!”라는 말과 함께 양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숙소로 향했다. 리앤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잠자코 있던 다이카에게 정비소 구석에 있는 CCTV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CCTV 기록을 보고 싶은데요. 어디서 확인하면 좋을까요?”
“그게 말이죠...어제 저 CCTV는....작동하지 않았어요...”
“네?!”
“전력 부족 때문에...”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실마리가 끊어졌다. 리앤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7
리앤은 착잡한 심정으로 기동 정비소를 나왔다. 분실이 아니고, CCTV도 없다면, 이제부터는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였다. 기동 정비소를 드나들 만한 전투원들을 모두 조사하는 것은 너무 긴 시간이 필요했고, 의미도 없었다. 그렇다고 메이가 말한 대로 스카이 나이츠 대원들에게 소지품 수색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럼...스카이 나이츠 대원들의 알리바이라도 찾아야 해!’
그녀가 도달한 결론은 분명했다. 카드를 찾기가 힘들다면, 극단적인 사태를 막아야 했고 그러려면 스카이 나이츠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알리바이를 증명하려고 해도 스카이 나이츠 대원들의 증언은 메이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뻔했다. 정보가 부족하다고 느낀 리앤이 조언을 구하기 위해 시티 가드 숙소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부르는 당당한 소리가 들렸다.
“거기! 진조의 프린세스 셜록이 형사를 부르느니라! 형사는 이리로 오거라!”
백발의 소녀가 헌팅 캡을 쓰고 망토에 파이프 담배까지 물고서 리앤을 불렀던 것이다. 저런 소품을 구한 것이 대견했다. 형사의 본능에 따라 쳐다 본 파이프 담배에는 다행히 아무 것도 없었다. 리앤이 쪼그리고 앉아 LRL과 눈높이를 맞추고는 웃으며 말했다.
“초천재 미소녀 형사 리앤! 진조의 부르심에 답합니다.”
“훌륭하구나. 리앤이여! 이제부터 그대를 미스 마플이라 칭하겠노라!”
“네...?”
리앤이 피식 웃었다.
“프린세스 셜록이시여, 미스 마플은 조금...”
“명예로운 칭호를 거부하지 말지어다! 짐의 인도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냐?”
리앤이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표정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녀에게 도움이 필요한 상황임은 분명했다. LRL은 리앤의 재롱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참치를 내밀고는 말했다.
“곤경에 처한 정의의 추적자로구나. 그러한 자를 방관할 수 없는 법. 짐이 하사하는 바다의 단약을 먹거라. 짐은 미스 마플을 고대의 서고로 데려가겠다.”
“고대의 서고요? 아니, 그건 너무 옛날이 아닌...”
“시끄럽구나!”
LRL이 리앤의 입에 참치가 가득한 숟가락을 밀어넣었다. 리앤은 아침부터 회의 때문에 긴장한 탓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LRL을 따라 오르카의 긴 복도를 걸었다. 네오딤이 찬양을 한 고추참치는 정말로 맛있었다. LRL이 자신이 먹다 남은 참치를 주자, 리앤은 사양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8
LRL이 말한 ‘고대의 서고’는 오르카 카페 옆에 위치한 도서관이었다. 전투원들이 쉬는 시간에 음료를 마시면서 한가롭게 독서를 할 수 있도록 사령관이 의도한 것이었다. 리앤은 적당히 LRL을 도서관에 두고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스 마플이여. 서고의 수호자가 있을 것이다. 수호자를 찾도록 하거라.”
‘서고의 수호자’는 사서를 말하는 것 같았다. 많은 전투원들이 드나드는, 이 카페 옆 도서관의 사서는 무언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LRL은 ‘영미문학’이라고 쓰여진 곳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도서관에는 햇살 같은 조명과 함께 수십 개의 높은 나무책장이 가득했다. 중간 중간에 공터처럼 비치된 소파에서 책을 읽는 전투원들이 몇몇 보였지만, 사서처럼 보이는 이는 없었다. 책 사이를 얼마나 헤매었을까, 그녀의 눈앞에 익숙한 인물이 나타났다.
“시라유리?”
단아하고 깨끗하게 다려진 교복, 분홍색 리본으로 단정하게 묶은 긴 흑발. 그 인물은 책 먼지가 조명에 노랗게 피어오르는 도서관에서 책 몇 권을 끼고 있었다. 리앤은 시라유리가 사서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네? 안녕하세요. 저를 아시나요?”
“어...?”
리앤은 시라유리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알아본 시라유리는, 그녀가 알던 시라유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리앤이, 즐거운 토모가 기억하던 시라유리는 지금 오르카에 있는 이 시라유리가 아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시티 가드의 리앤입니다. 형사에요. 제가 도서관에는 처음이라, 사서 분을 찾아 도움을 받으려고 해요.”
“그러시군요. 제가 도서관의 사서를 맡고 있는 시라유리입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시라유리가 웃으며 리앤에게 다가왔다. 리앤의 기억 속에서 시라유리는 무척 냉정하고 경계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시라유리가 친절하게 그녀를 맞아 주자, 다른 사람임을 알면서도 리앤은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을 잠재우기 위해 애써야 했다. 리앤이 자신의 상황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하던 차에 LRL이 나타났다.
“진조의 공주시여. 어서 오세요. 서고의 수호자가 공주님을 뵙습니다.”
“반갑구나 수호자여. 미스 마플이 부정한 악행에 대항하여 그대의 지혜를 구하고 있도다.”
“알겠습니다. 맡겨 주세요.”
LRL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서가로 사라졌다. 시라유리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 리앤에게 말했다.
“리앤 님께서 수사 중이시라면...대원들의 근무기록이나 출격기록, 회의기록 등이 필요하시겠군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시라유리 특유의 통찰력은 그대로인 듯했다.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리앤의 필요를 알아챈 시라유리는 리앤을 가장 구석진 서가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나무 책장과 종이 책 대신 금속 책장에 태블릿들이 가득했다.
“여기에는 오르카 인원들의 기록들이 있습니다. 매일 업데이트 되고 있고요. 아무래도 내부 자료이다 보니 열람에는 보안카드가 필요한데요. 리앤 님께선 보안카드를 가지고 가신가요?”
리앤이 고개를 가로젓자 시라유리가 미소지으며 리앤의 손을 가져갔다. 리앤이 의아해 하는 사이, 시라유리는 리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올려놓았고, 리앤은 손에 카드가 쥐여졌음을 눈치챘다. 시라유리가 포옹에 가까울 만큼 밀접하게 다가와 귓속말로 말했다. 시라유리의 가녀린 숨결이 리앤의 귀를 간질였다.
“원래 보안카드는 절대로 빌려주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리앤 님은 좋은 분인 것 같네요. 제 것으로 열람하세요.”
“고...고마워요. 시라유리.”
시라유리는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리앤은 얼굴이 달아오른 채 시라유리의 보안카드를 주머니에 넣었다. 시라유리의 호의를 접하면서 그녀는 혼란스러우면서도 마음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손을 잡고 귓속말을 속삭였을 때에는 갑작스런 스킨십에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사건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기록 태블릿들은 시라유리의 도움을 받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리앤은 가까운 책상에 태블릿을 쌓아 두고 읽어 보기 시작했다. 어제 밤, 메이가 없었던 그 시간에, 스카이 나이츠 대원들의 알리바이가 필요했다. 야간에 출격은 없었으며, 그 때 근무 중인 대원은 없었다. 수복 중이었던 대원도 없었다. 뭐라도 나와라,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 드시면서 하시겠어요?”
“네? 아, 감사합니다!”
시라유리가 어느새 차를 들고 와서는 리앤 맞은편에 앉았다. 따뜻하면서도 상쾌한 향은 복잡했던 마음에 부는 산들바람 같았다. 페퍼민트 티를 마시던 리앤의 눈이 커졌다. 우연일까?
“제가 좋아하는 차에요. 리앤 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페퍼민트 되게 좋아해요. 오늘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리앤 님처럼 순수하고 열정적인 분을 본 건 정말 오랜만이어서요. 제가 감사한 걸요. 꼭 잘 해결하시길 바랄께요.”
머그컵을 만지는 리앤의 두 손을 시라유리가 부드럽게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시라유리는 가벼운 목례와 함께 책장 사이로 가 버렸다. 리앤은 시라유리를 만난 후부터 집중할 수가 없었다. 과거 시라유리에 대한 기억들과, 지금 친절하고 적극적인 시라유리 사이에서 감정이 휘몰아쳤다. 사소한 스킨십에도 흔들렸다. 리앤은 해답을 기다리고 있을 사령관을 생각하기로 했다.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어?...”
바로 전날 밤에 스카이 나이츠의 회의 기록이 있었다. 장소는 스카이 나이츠 숙소 근처의 48회의실이었다. 참석자는 스카이 나이츠 전원. 시간대는 비슷했지만, 알리바이로 쓰기에는 조금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참석자가 스카이 나이츠 뿐인 이 회의 기록을 메이가 알리바이로 인정할 지도 의문이었다. 복도에 있는 CCTV는 전력 부족으로 작동하지 않았던 상황. 리앤은 다른 자료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기록 몇 개를 더 뒤져보았지만 소득은 없었다. 만족스럽지 못한 수확에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미스 마플이여, 서고에서 필요한 지식이 없었던 것인가?”
“네...알리바이로 쓰기에는 조금...”
“그럼 프린세스 셜록을 따라오거라. 범인은 항상 현장 가까이에 있는 법이니.”
LRL은 둠 브링어 숙소로 가자는 뜻이었다. 리앤은 별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수사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분실이 아닌 절도로 가정하면, 보안카드처럼 개인적인 물건은 평소 피해자와 접점이 많아서 해당 물건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훔칠 수 있는 법이다. 리앤이 태블릿들을 들자 LRL이 몇 개를 빼앗아 들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진조의 공주시여.”
시라유리가 웃으며 LRL로부터 태블릿을 받아들었다.
“고마웠어요. 시라유리.”
“네. 제가 리앤 님께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네요.”
리앤이 두 손으로 간신히 여러 개의 태블릿을 무겁게 들고 있었기 때문인지, 시라유리가 리앤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리앤이 보안카드와 태블릿을 건네주는 순간, 시라유리가 작은 목소리로 지나가듯 말했다.
“당신을 지켜보겠어요. 토모. 제가 그 때 당신을 죽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하지 마세요.”
리앤은 순간적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다시 마주본 시라유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그시 웃고 있었다. 태블릿을 내려놓은 시라유리는 서가 속으로 사라졌다. 리앤은 오래된 책의 숲에서 유령을 만난 것 같았다. 한기가 돌았다.
9
‘수사는 잘 되고 있어? 힘든 일은 없고?’
‘잘 모르겠네. 고마워. 사령관은?’
‘나야 뭐, 원래 하는 일이니까. 이따가 볼 수 있을까?’
‘응. 나도 사령관한테 물어볼 것이 있어. 저녁에 만나!’
LRL과 리앤은 다이카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시라유리를 만난 후 리앤은 혼란과 의구심 때문에 심란했지만, 사령관의 메시지 덕분에 기분이 나아지고 있었다. 이 사건 후에 시라유리를 조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리앤은 생각을 정리했다.
분실이 아닌 절도이며, 스카이 나이츠는 당시 회의 중이었으나 알리바이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용의자를 특정하고 참고인들을 압박해서 정보를 캐야 한다.
“무엇이...궁금...하세요?”
“다이카. 메이 대장과 보내는 시간이 많은 건 누구인가요?”
“어...주로...나이트 앤젤 님하고, 저, 그리고 간혹 실피드 양 정도...?”
다이카는 말이 느려도 무척이나 협조적인 정보원이었다. 리앤은 모든 참고인들이 다이카 같다면, 시간은 조금 더 걸려도 수사가 훨씬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LRL은 다이카가 내온 다과를 먹고 있었다.
“혹시 메이 대장과 최근에 언쟁을 벌였거나, 사이가 안 좋은 대원은요?”
“스카이 나이츠...분들이랑, 최근에는 포츈 기술관님 정도요...저희에게는 잘해주세요.”
역시 스카이 나이츠인가. 회의에서 사령관과 마리의 대화를 듣고, 메이와 포츈 사이에도 갈등이 있음은 알 수 있었다. 동기는 있다고 해도, 접점이 적은 그들이 메이의 보안카드가 어디 있는지 아는 건 어렵다. 우발적 범행이거나, 보안카드를 노린 거라면 메이와 가까운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다이카. 메이 대장의 보안카드를 본 적이 있나요?”
“네...같이 쇼핑을 하거나...참모로 동행하기도...하니까요”
이상하지 않다. 메이와 자주 다니는 나이트 앤젤과 다이카는 메이의 보안카드가 재킷 안주머니에 있다는 걸 알 것이다. 동기는 모르지만, 두 사람의 알리바이도 확인해야 한다. 잠자코 있던 LRL이 끼어들었다.
“감시자여! 붉은 폭격자의 의복이 여기 있다고 들었다. 짐은 미스 마플과 지문을 확인해볼 것이다! 의복을 부탁하노라!”
“지문이요? 그게...뭐죠?”
“아, 손가락마다 있는 무늬에요. 인간도, 바이오로이드도 다 달라요. 개인 식별이 되죠.”
리앤은 다이카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다이카는 LRL에게 메이의 재킷을 건네주었고, LRL은 어디서 구했는지 장갑까지 착용하고 재킷을 받았다. 리앤은 대화 마지막에 재킷을 받아갈 생각이었으나, LRL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이 대견하고 귀여워 조용히 미소지었다. 리앤은 지문이라는 말에 동요하는 다이카가 뭔가 수상하다고 여겼다.
“고마워요. 수사에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에요.”
“네...최대한...”
리앤이 살짝 만져 본 재킷에는 습기가 남아 있었다. 누군가 재킷을 물티슈와 같은 젖은 헝겊으로 닦아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이카의 태도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리앤이 다이카를 더 압박할까 고민하는 사이에, 다이카가 호출을 받았다.
“나이트 앤젤 대령님...이세요. 가보겠습니다...”
“예. 또 뵈어요. 다이카.”
엄청난 타이밍이라고, 리앤은 생각했다. 다이카는 왠지 서둘러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지문을 떠본다는 생각에 신난 LRL과 함께 리앤은 메이의 재킷을 LRL의 사물함에 보관하기로 했다. 혹시나 싶어서 재킷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지문 채취용 알루미늄 가루는 사령관에게 부탁하면 될 것이다. 리앤은 사령관을 위해, 사건을 꼭 해결하고 싶었다.
10
“첫 날부터 뜬금없이 맡은 사건 조사하느라 고생 많았어,”
“아냐. 그냥, 첫 사건이 빨랐다고 생각하려구. 사건이 예고하고 나타나는 것도 아니잖아.”
“리앤은 예쁘고, 똑똑하고, 말도 참 잘하네.”
“무...무슨!”
사령관은 리앤에게 참 다정했다. 복잡했던 하루가 사령관을 만나자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장난스럽게 사령관을 밀친 리앤이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자, 사령관도 리앤 옆에 따라서 앉았다. 리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령관. 다이카는 메이 대장과 사이가 좀 어때?”
“나쁘지 않아. 최근에는 둠 브링어에선 다이카가 가장 많이 출격했을 거야. 그 때문에 메이가 다이카를 조금 고깝게 보는 것 같긴 해. 그리고 알잖아. 다이카가 말이 느리니까, 회의 때 메이가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아서 다이카도 고민을 했던 것 같아.”
“음...그랬구나.”
리앤이 일어나서 술과 유리잔 두 개를 가지고 왔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건배를 하고 하루의 긴장을 녹이고 싶다는 둥 일과를 나누며 웃었다. 술이 몇 순배 더 돌고, 리앤이 살짝 상기되어서는 말했다.
“조금 춥네. 아참. 잊을 뻔했어! 사령관. 지문 채취를 위해서 알루미늄 가루가 필요해.”
“응 알았어. 준비해 둘께.”
사령관이 씩 웃으며 대답하고는 일어났고, 커다란 담요를 가져와서 소파에 앉은 리앤에게 덮어 주었다. 술이 몸을 조금 따뜻하게 하기는 했으나, 리앤은 자신도 모르게 춥다고 할 만큼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리앤이 가늘게 떠는 것을 보고, 사령관이 핫초코를 즉석에서 끓여 왔다. 리앤의 손에 따뜻한 핫초코가 닿자, 그녀는 한기가 사라지며 피로까지 녹는 것 같았다. 리앤이 담요의 한쪽 끝을 들추며 말했다.
“사령관도 춥지? 들어와.”
두 사람은 같은 담요 안에서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둘이 함께 수사하는 거 오랜만이네. 리앤.”
“그러게.”
“그립다. 같이 고민하다가, 맛있는 것도 먹고, 조사하다가 도망도 다니고.”
“그렇지 않아, 사령관. 난 지금이 더 좋아.”
컵을 바라보며 말하던 리앤이 사령관을 향해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의 거리는 엄청나게 가까웠다. 리앤의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쳤다. 그녀는 사령관의 볼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그때는 내가 만든 게임이었고, 사령관은 왓슨, 나는 즐거운 토모였어. 하지만 지금은, 진짜 사령관과 내가 여기 있고, 여기는, 사령관의 체온이 느껴지는 현실이야. 난 지금 정말 죽을 만큼 행복해.”
“리앤...”
“고마워. 사령관. 앞으로도 변하지 말아줘. 그러면 나, 상처받을 것 같아. 알았지? 절대로!”
그녀는 사령관이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입술이 가까워지고, 리앤은 눈을 감았다. 따스하고 촉촉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핫초코 때문인지 달콤함이 온 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마침내 리앤이 눈을 뜨고 사령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대로 잠들었으면 좋겠어... 왠지 저 문을 나가면, 차가운 공기 속에서 이게 다 꿈일 것 같아.”
“그럼...여기서 잠들면 되겠네.”
사령관이 리앤을 안아들었다. 리앤은 살포시 침대에 내려졌다. 눈을 마주친 두 사람에게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리앤은 사령관의 눈 안에 비친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사령관의 손이 그녀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몸이 따뜻함을 넘어 뜨거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령관 앞에서 모든 경계심과 나쁜 기억들이 봄날의 눈처럼 사라져가는 듯했다.
“와줘...”
리앤이 사령관의 목을 감싸안으며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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