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사펑 하느라 늦었다


전편 모음집 : https://arca.live/b/lastorigin/1507448 




 마츠시타는 어디선가 돌려오는 칼소리에 눈을 떴다. 만일 시대극이었다면 마츠시타는 벌떡 일어나 머리맡에 두었던 칼을 뽑아들어 달려드는 사무라이들에게 칼을 휘둘렀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무라이들을 물리친 마츠시타는 하늘을 붉게 물들며 날아오는 셀 수 없이 많은 화살들을 향해 달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이 시간에.

물론 현대 일본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사무라이도 닌자도 현대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 새벽부터 집에서 칼소리가 들릴 정도로 치안이 나쁜 곳도 아니었다. 그리고 마츠시타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최근 토모가 빠진 드라마였다. 대전란인가 뭔가 하는 닌자가 주인공인 드라마였다. 마츠시타는 토모에게 실제 닌자는 그렇게 잘빠진 타이즈를 입고 다니지 않았다고 열변을 했지만 토모는 듣지도 않았다. 재미가 우선이라나 뭐라나.

마츠시타는 칼소리를 들으며 몸을 일으켰다. 늦게까지 일한 탓일까, 너무나도 일어나기 싫은 날이었다. 하지만 직장인이란 언제나 그랬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매일같이 일어나야 했다.

“마츠시타, 일어났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토모는 마츠시타를 보자 반갑게 인사했다. 어떻게 저렇게도 잠이 없는 걸까 신기할 수준이었다. 직장이라는 회피하고 싶은 곳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마츠시타도 한창 놀고먹던 대학생 시절에는 저랬던 기억이 있었다. 어째서 지금은 그러지 못하는 걸까. 체력이 문제일까. 아니, 꿈에로의 도피가 그 무엇보다 달콤했던 것이겠지.

“아침에는 볼륨 좀 줄여. 덕분에 잠 하나도 못자겠어.”

마츠시타는 부스스한 모습으로 부엌으로 걸어갔다. 식빵 두개를 집은 마츠시타는 토스터기에 넣어 작동시켰다.

“하지만 마츠시타가 그렇게 말한 것 치고는 너무 잘 자던걸. 둘이 자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잘 잤어.”

“불길한 소리는 하지마. 잘 때만큼은 안심하고 자고 싶어.”

토모의 농담인지 진담일지 모를 말을 받아치며 마츠시타는 커피를 한잔 따라 마셨다.

“그렇게도 재밌는 거냐.”

“응.”

TV에서는 한창 두 여자가 싸우고 있었다. 필시 바이오로이드겠지. 마츠시타는 관심있게 보지 않았지만 어쩌다보니 토모가 보는 것을 같이 보느라 대충은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둘이 자매인데 싸우는 거 맞지?”

“아, 마츠시타. 거기까지 이야기 진행 안했어! 네타모레!”

“네타모레가 아니라 네타바레. 그리고 이거 재방송이잖아. 둘이 자매라고 걸린 광고도 한두개도 아니었고.”

그도 그럴 것이 토모가 보고 있는 대전란, 시들어버린 무로마치의 꽃은 이미 나온지 몇 년은 된 드라마였다. 네타라고 할 것도 없는 작품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건 재방송이 아니라 대전란 2060 스페셜이야. 무려 매화당 2분의 추가영상이 들어간다고?”

“그거 의미는 있는 거야?”

마츠시타는 매니아들이 들으면 화날 발언을 하며 커피를 마셨다. 역시 아침에는 커피가 없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아무튼 최초공개 영상이 있는 이상 재방송은 아닌 거야. 그러니까 네타모에 금지.”

“네타바레라니까.”

마츠시타는 한숨을 쉬며 토모의 옆에 앉았다.

“용케도 이걸 아침부터 방영할 수 있네. 대체 언제부터 일본은 아침부터 칼부림하는 드라마를 아이들도 볼 수 있게 만든 거지.”

“원래 아이들이야말로 제일 잔인한 법이야. 순진한 만큼 무서운 거지.”

토모는 왠지 뼈가 담긴 말을 하고 있었다.

“왜? 옆집 애들한테 한소리라도 들었어?”

“…응… 아줌마래…”

토모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토모가 아줌마라니. 그럼 마츠시타는 할머니라도 된다는 건가. 아이들다운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그렇게 반응하는 토모도 아직 아이같았다.

“애들은 다 그렇지.”

마츠시타는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다시 한모금 마셨다. 드라마는 아이캐치에서 광고로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 대전란 ~시들어버린 무로마치의 꽃~이 포함된 VR 전용 세트가 각 매장에서 절찬 판매중! 클리어 이후 데이터가 연동된 바이오로이드를 구매하실 수도 있습니다!

광고를 본 토모는 말없이 마츠시타를 바라보았다. 토모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뻔했다. 분명 저 VR을 사달라는 것이겠지.

“안돼.”

마츠시타가 그렇게 말하자 토모는 시무룩해하는 얼굴로 TV로 시선을 옮겼다. 마츠시타는 무정하게 거절할 사람은 아니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토모 몰래 VR을 사줘볼까 하는 생각에 잠시 인터넷으로 VR을 검색했다.

“비싸!”

가격을 본 마츠시타는 놀라며 커피를 쏟을 뻔했다. 무슨 전자기기가 100만엔이나 한단 말인가. 그 돈이 있다면 VR을 사기보다는 집을 더 좋은 곳으로 옮길 것이었다. 10만엔이라도 고민할 가격에 100만엔이라니. 말도 안되는 가격이었다. 이런 고가 기기가 인기가 있다니, 세상의 빈부격차가 새삼스레 느껴졌다.

이후 광고는 볼 것도 없는 평범한 광고들이 이어졌다. 마츠시타는 마침 다 익은 식빵을 가지러 부엌으로 걸어갔다.

“토모는 어떤 잼 발라줄까?”

어차피 선택권은 없었다. 무조건 땅콩버터와 포도잼이 같이 든 그 잼 뿐이었다.

“아무것도 안바른거. 그래야 입에 물고 달리기 편해.”

“무슨 소리야.”

마츠시타는 말도 안되는 토모의 말에 두 빵에 같은 잼을 발랐다. 그런 실없는 이야기를 하던 와중 중간광고가 끝나고 드라마는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거 먹으면서 봐.”

마츠시타는 두 빵중 하나를 토모에게 건네주었다. 토모는 아무 생각없이 빵을 베어물더니

“으에. 나 이 잼 싫어…”

울상을 지으며 마츠시타를 바라보았다.

“싫으면 얼른 먹어. 다 먹어야 다른 맛으로 사오지.”

마츠시타 역시 한입 베어물었다. 역시 추억의 맛이 제일이었다. 토모는 모르겠지만.

그릇에 한입 먹은 빵을 내려놓은 마츠시타는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밤새 별일은 없었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간단히 뉴스체크라도 하고 출근할 생각의 마츠시타였다.

“응?”

-새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광고성 메일 수신동의에 언제나 거절하던 마츠시타였다. 강제하는 곳은 그것을 위한 별도의 메일을 만들던 마츠시타였다. 그럼에도 꾸준하게 광고성메일은 마츠시타의 얼마 안되는 메일함의 용량을 메우고 있었다. 분명 이 메일도 그런 것이겠지.

마츠시타는 아무 생각 없이 메일을 확인했다. 스팸은 쓰레기통으로… 그렇게 생각하던 마츠시타는 순간 멎었다.

-백업용 메일 첨부.

낚시성 메일인가. 그런 생각이 든 마츠시타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시라이시 타다오미. 왠지 모를 낯익은 이름이었다.

“토모, 시라이시라는 이름 생각나는 거 있어?”

이럴 때 의지할만한 건 토모였다. 바이오로이드답게 기억력 하나는 좋았다. 그것을 본인이 활용을 못해서 문제지.

“시라이시? 전에 아키타시에서 만났던 기자 기억해? TV 도쿄의 기자 말야.”

“아, 기억나.”

두번 만나보았던 기자였다. 한번은 키리시마 의원의 결혼식에서였고 두번째는 아키타시에서 해상보안청을 취재할 때였다.

“근데 그게 왜?”

“이상한 메일이 와서 말야. 그런데 TV 도쿄 기자가 왜 나한테 백업용 메일을 보내는 거지?”

마츠시타는 휴대전화를 집어들었다. 연락처에서 시라이시를 검색했다. 고민을 하는 것보다 직접 물어보는 것이 더 빨랐다. 하지만 연락처 어디에서도 시라이시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마츠시타는 자신이 시라이시의 명함을 받기만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서랍을 열어 한참을 찾은 끝에야 시라이시의 명함을 찾을 수 있었다. 마츠시타는 명함을 들고 명함에 쓰인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의 전화가 전원이 꺼져있거나 전파가 닿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시라이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취재를 위해 전화를 끈 것일까, 아니면 장기 취재중에 충전하는 것을 까먹은 것일까. 시라이시가 전화를 받았다면 해결될 고민이었지만 하필이면 시라이시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츠시타는 마우스 포인터를 메일 위에 올리고 고민했다. 이 메일은 봐도 되는 것인가. 혹시 실수로 자신에게 보낸 것은 아닌가. 괜히 봤다가 사단이라도 나는 것이 아닌가. 혹은 이름을 사칭한 바이러스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마츠시타가 고민하는 사이 포인터 옆에 팝업이 떴다. 메일의 미리보기였다. 얼마 되지 않은 문구를 보는 순간 마츠시타는 모든 고민을 멈추었다.

‘키리시마 건설 비리 관련 자료’

마츠시타는 망설이지 않았다. 바로 메일을 눌렀다. 그 제목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마츠시타는 알고 있었다. 시라이시가 키리시마 건설을 조사중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마츠시타는 키리시마 의원을 파고들고 싶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연계성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메일을 연 마츠시타는 바로 첨부파일을 열었다. 잠시 흰 화면이 나타났다가 바로 첨부파일의 내용이 올라왔다.

전부 스캔된 문서였다. 각 문서 한켠에는 종이가 제대로 스캔되지 못해 그림자가 지어져 있었다. 몇몇 부분은 스캔방지조치가 되어있는지 제대로 스캔이 되지 못한 곳도 있었다. 하지만 마츠시타가 이 문서가 무엇인지 알기에는 충분했다.

키리사마 건설의 회계장부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내역은 누가봐도 외부에 공개될 것이 아니었다.

“토모! 토모! 이리 와봐!”

마츠시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지금 드라마 한창이야. 다시보기는 돈 든단 말야. 지금 봐야해.”

“돈 줄 테니까. 다시보기로 보게 해줄 테니까, 빨리 이리로 와봐!”

마츠시타의 말에 토모는 마지못해 일어났다.

“뭔데 그래?”

토모는 반쯤 관심없다는 듯 다가왔다.

“키리시마 건설의 비밀장부야. 전에 확보했던 자료 기억나? 그거랑 교차검증 할 수 있겠어?”

전에 확보했던 자료. 야쿠자인 야마다 켄지에게 받았던 야마다조의 거래내역이었다. 그리고 그 거래내역에서 마츠시타는 키리시마 건설과 덴세츠 사이언스, 키리시마 의원이 엮여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이 자료까지 확인한다면 키리시마 의원이 덴세츠 사이언스와 깊이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밝힐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할 순 있을 것 같긴 한데…”

토모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뭔가 의욕이 떨어진다는 얼굴이었다.

“만일 기사가 잘 나와서 보너스 받으면, 그리고 그 보너스로 살 수 있다면 VR 사줄게!”

마츠시타는 스리슬쩍 독소조항을 붙이며 말했다. 설마 보너스가 100만엔이나 나오겠어. 적당히 토모가 좋아하는 밥을 실컷 먹여주면 될 것이었다.

"씁, 그러면 어쩔 수 없지.”

토모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역시. 토모는 머리속에 있는 기억으로 검증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

마츠시타는 토모를 놀라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토모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츠시타는 벌써 다 확인한 것인가 하며 놀라며 토모를 보았다.

“마츠시타, 교차검증할 자료를 보여줘야 검증을 하지. 그리고 마츠시타도 같이 해야지.”

토모의 말에 마츠시타는 살짝 실망한 얼굴을 하며 파일을 인쇄했다. 그리고 전에 키리시마 건설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던 문서를 찾아 그것도 인쇄 대기열에 올렸다.

“마츠시타. 키리시마는 금지 아니었어?”

토모의 말대로였다. 스미스는 마츠시타에게 다시는 키리시마를 건들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 또 들고갔다가는 기자라는 직업마저 빼앗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조사하고 싶은 것을 취재하지도 못하는게 어디가 기자란 말인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증거를 찾아내서 스미스로 하여금 마츠시타가 키리시마 의원을 취재하게 만들 것이다. 그런 부푼 생각을 하며 마츠시타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마츠시타의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만일 이래도 스미스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시라이시가 왜 백업을 보낸 것일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하지만 지금의 마츠시타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그저 눈앞의 문서를 분석하는 것만이 마츠시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