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는 다 즐기셨습니까. 주인님. 바로 샤워 준비에 착수하겠습니다."


"그래, 꼼꼼하게 해라."


멸망 전 마천루의 최상층,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침대 위에서 아침을 즐긴 문리버 인더스트리의 회장은 침대에서 일어나 느긋하게 두 팔을 벌렸다. 밤새 복도에 도열해 있던 메이드 바이오로이드들이 세심하면서도 신속하게 비단으로 된 나이트 가운을 벗긴 후 샤워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생활복으로 갈아입기 전에, 그는 전신에 고가의 오 드 투알레트 향수를 살짝 뿌렸다. 푸제르를 베이스로 한 차분하고 품격 있는 향기는 언제나 그를 즐겁게 한다. 환복을 마친 그는 은은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한 향기를 즐기며 집무실로 향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주인님. 충실한 종, 레모네이드 델타가 오늘도 인사 올리겠습니다."


"...오늘 스케줄은 어떻게 되지? 그리고 어제 내가 처리해 놓으라고 한 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었나?"


집무실 안 회장의 책상 옆에는 회장의 비서이자 펙스의 최고급 바이오로이드 중 하나인 레모네이드 델타가 단정한 자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델타는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기분이 팍 안 좋아진 것 같은 회장의 질문에도 빈틈 없이 보고를 시작하였다.


"오늘은 15분 후인 08시 30분부터 오드리 드림위버 양이 우리 사의 새로 생산된 초고급 라인업을 보고하러 올라올 것입니다. 이후에는 전용 헬기로 이동하여 11시부터 약 2시간 동안 주지사와의 회담을 포함한 오찬을 즐기신 다음, 오후에는 집무실로 돌아오셔서 알칸사스주에 새로 건설되는 특수 섬유 공장에 대한 서류를 검토하실 예정입니다."


주인의 보좌를 위하여 경영, 금융, 산업, 과학, 심지어 범죄에 관해서도 막대한 지식량과 수완을 자랑한다는 레모네이드 기체답게 델타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자료를 첨부하여 오늘의 스케줄과 업무 진행을 보고하였다. 그 솜씨에 회장의 찌푸린 양 눈썹 끄트머리가 살짝 풀렸다.


"...또한 문리버 인더스트리에 거슬리는 시끄러운 벌레들 건입니다만, 이미 무리 내부에 공작원을 풀어 시티가드를 이용한 진압을 충분히 유도할 수 있는 상황이며, 소수의 강경파 해충은 어제 부로 타 사의 바이오로이드와 처리업체를 수배해 뒤탈이 안 남도록 청소 완료했습니다."


"나쁘지 않군. 허나 벌레들이 기어오르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확실히 남길 필요가 있겠지. 흥분한 몇 명은 회사의 공장과 중장비를 공격하려다 불운한 사고로 팔다리가 뭉개진 다음, 남의 재산을 훼손한 죄로 평생 비참하게 대가를 치르게 된다...너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느냐 델타?"


"...!! 받들겠습니다."


범죄와 관련된 지시는 도청에 대비하여 항상 이런 식으로 비유적이고 우회적으로 이루어진다. 뜬금없이 벌레 얘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델타가 말하는 바는 회사에 반발하여 공장 앞에서 농성 중인 시위대의 처리 건이었고, 회장 또한 막힘없이 그렇게 해석하였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그 불운한 꼴을 지켜보며 오늘의 보고를 기다리면 되겠군......" 이제 업무 상의 문제는 딱히 아무것도 없었지만, 무언가 매우 불편하다는 듯 문리버 회장의 잘 정돈된 콧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데 말이다 델타, 아까부터 좀 신경쓰이는 게 있다만."


"네, 무엇이신가요 주인님. 레모네이드 델타는 주인님을 위해 언제 어디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제 분명 '내일 아침에는 시제품 보고가 있으니, 특히 신경 써서 차려입어라.' 라고 명령하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주인님."


"근데 지금 그 꼬라지는 도대체 뭐냔 말이다!!"


참다 참다 폭발한 콧수염, 아니 문리버 회장의 노성이 집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집무실 밖의 메이드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였다.




펙스 컨소시엄의 일곱 기둥 중 하나이자 전미의 의복 섬유 산업을 손에 쥐고 흔드는 거악, 문리버 인더스트리의 회장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뒤틀린 선민의식에 빠진 노인네' 정도가 적당했다.


그는 언제나 상대할 가치가 없는 저 아래의 어중이떠중이들과 본질적인 면에서 선을 그었으며, 자신을 비롯한 소수의 엘리트가 대다수 멍청한 개돼지들을 위에서 주도해나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올바른 자연의 섭리라고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따라서 사회의 중심이자 최정점인 자신이 그에 어울리는 품격을 갖추는 것 또한 그에게는 논할 가치조차 없이 당연한 일이었고, 실제로 의류 산업을 운영하고 있기도 했기에 그는 예술이나 패션에도 실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런 그의 신조에 맞게 마천루의 최정상에 위치한 집무실과 그의 옷장에는 아름다운 예술품 및 옷들이 그득히 들어차게 되었으며, 마음에 드는 장인의 작품을 구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비서인 레모네이드 델타 또한 그 수집품 중의 하나인 셈이었다.


실제로도 천재 공학자 안나 보르비예프 박사와 펙스 회장들의 유전자를 결합하여 디자인된 바이오로이드 '비서 레모네이드 시리즈'는 외모, 성능, 희소성 이 모든 면에서 보았을 때 실로 특출난 존재였기에 당초의 그는 굉장히 만족해 마지않았다. 품위도 없이 돈이나 쳐바를 줄만 아는 오메가의 졸부 회장 나부랭이와 세트인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역시 주인님은 알아봐 주시는군요. 이 레모네이드 델타, 문리버 인더스트리의 얼굴에 부끄럽지 않게 어젯밤은 심혈을 기울여 드레스코드를 맞췄습니다. 일단 이 미군 점퍼는..."


"그만! 그만! 그딴 복장으로 드레스코드니 문리버 인더스트리의 얼굴이니 지껄이지 마라! 죽여버리고 싶으니!"


"실례했습니다 주인님."


삽시간에 두통이 몰려와 왼손으로 이마를 짚은 문리버 회장은 다소곳하게 자기 앞에 서 있는 실로 특출난 젖가슴 아니 레모네이드 델타를 쏘아보았다. 그 몰골이라니, 보면 볼수록 머리가 아파져 이번엔 두 눈도 질끈 감았다. 문리버 인더스트리를 대표하는 콧수염이 푸들푸들 떨렸다.


현재 델타가 입고 있는 복장과 악세서리는 다음과 같았다. 나비 모양으로 아름답게 세공된 외쪽 귀고리, 여기까진 좋았다. 알이 굵은 도금 목걸이, 황토색 미 육군 점퍼, 양 팔의 색깔이 다른 T자 로고가 박힌 맨투맨(그나마도 델타의 압도적 볼륨 때문에 로고가 늘어져 있다), 데미지드 진이랍시고 이리저리 찢어져 엉밑살이 튀어나온 청바지와 기묘하게 버클이 큰 가죽 벨트, 그리고 태그도 떨어지지 않은 어글리 슈즈. 무엇 하나 용납할 수 없었지만 이것들이 총체적으로 뒤섞이니 그야말로 시신경을 강간당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더욱 나쁜 것은 델타가 정말 옷을 입을 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도 패션에 대해 나름대로 자기 특유의 철학과 똥고집을 고수한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오늘처럼 오드리가 오는 날에는 라이벌 의식을 불태워 더욱 차림새가 기괴해지곤 한다. 사실 이건 마찬가지로 질투가 많고 패션에 대해 엄격한 유전자 제공자인 회장을 닮은 것이었지만 편협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회장은 그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고 인정하기도 싫었다.


이런 씨발,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거지? 유전자 씨앗이 오염된 건가? 분노로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미지근한 홍차를 들이키는 문리버 회장의 뇌리에 지난번 연구소에서 있었던 안나 보르비예프 박사와의 대담이 떠오른다. 델타의 기벽에 대한 실마리를 찾으려고 "혹시 평소에 무슨 옷을 입고 다니냐" 라고 한 질문에 성희롱이라고 싸대기를 맞았다. 뭔가 오해를 했는지 "허허, 이 친구야 바이오로이드가 있잖아, 왜 그리 유전자를 못 퍼뜨려 안달이신가..." 라며 천박한 농담을 던지면서도 싸늘한 경멸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오메가 졸부 놈을 생각하니 절로 과호흡 증세가 도질 판국이었다.


"후욱, 후우...됐고, 곧 보고 시간이니 오드리나 올라오라고 해. 빨리!"


"알겠습니다 주인님."


"어머, 아까부터 집무실 바깥에 대기하고 있었어요. 문리버 수석 디자이너 오드리 드림위버, 주인님을 뵙습니다." 


방문이 열리며 직접 재단한 드레스를 입은 오드리 드림위버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문리버의 신제품을 착용한 마네킹을 든 메이드 바이오로이드들이 그 뒤를 따랐다.


"오랜만이구나 오드리. 거기 서 있는 건 신경쓰지 말고 보고를 시작해도 좋다. 지금 그 드레스는 못 보던 건데, 내가 맞춰 보지...혹시 토가를 재해석한 건가?"


"후후, 엑설런트하게 맞추셨어요. 주인님께 이번 라인업의 테마인 '르네상스' 를 전달하기 위해 직접 제작한 작품이랍니다. 구조 자체는 단순해 보이지만 먼저 바깥쪽과 안쪽의 원단을..."


수석 디자이너 오드리의 설명을 곁들여 우아하면서도 예술적으로 제작된 신제품의 라인업을 보고 있자니 회장은 아까 델타를 보고 주화입마에 빠질 뻔했던 시신경과 뇌가 깨끗이 씻겨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음음, 그렇지, 이게 의복산업을 선도하는 문리버 인더스트리지. 이게 정신적 성교지. 어느샌가 그의 콧수염 밑에는 미소가 방긋 걸려 있었다.


"...또한 이번의 초고가 라인업에선 세트 상품으로서 고대에 몸에 바르는 향유(香油)로 사용되던 소재들 또한 재해석, 이 향을 베이스 노트로 활용한 새로운 향수를 계획하고 있어요. 시제품 향수는 개발이 완료되는 대로 보내드릴 예정이에요."


"허허, 대단하군 대단해, 소름이 쫙 돋을 지경이야. 너도 와서 이거 좀 봐라 델타, 보고 있으면 말문이 턱 막히면서 무슨 느낌이 딱 오지 않냐?"


"그렇군요..."


회장은 '이거 너도 보고 좀 배워 패션 테러리스트 년아' 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자기만의 패션 자부심과 회장님의 총애를 받는 오드리에 대한 질투가 역시너지를 일으킨 레모네이드 델타는 이 말을 정반대로 곡해해 일생일대의 입방정을 치고야 만다.


"주인님 말마따나 보온성도 없고 멋도 없고, 가져다 줘도 안 입을 옷 같습니다. 미군 점퍼 쪽이 낫군요."


"...!!"


"뭐...뭐라고...! 히익,"


자신의 작품에 대한 모욕에 항의하려던 오드리가 옆에서 붉으락푸르락하는 회장의 안색을 보고 질겁을 하며 말을 삼켰지만, 아직도 회장이 자기 편을 들어주고 있다고 착각한 델타는 의기양양하게 입을 나불거리고 있었다.


"호호, 이제야 뭔가 깨달으셨습니까? 이런 삼류 디자이너에게 위대한 문리버의 의복 디자인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 주인님, 이참에 이년을 분해기에 갈아서 특수 모듈이나 뽑아 버리고 다른 바이오로이드를 설계헥"


"주, 주인님! 고정하세요! 잠시 휴게실로 가셔서 머리를 식히는 게-누가 주인님 옮기는 것좀 도와줘! 여기!"


"아 놔봐. 이 놈의 새끼가 진짜...!"


결국 회장의 혈압이 오늘 두 번째로 폭발하여 델타의 이마를 마호가니 지팡이로 후려치고, 불의의 일격을 맞은 델타가 머리를 감싸쥐며 땅바닥을 뒹구는 사단이 나고서야 이 촌극은 일단락되었다. 또한 레모네이드 델타는 '근신 30일 및 사내외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지정된 정장만 입을 것' 이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애꿎은 오드리 기종을 향한 델타의 원한과 질투가 더 깊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 씨발, 오드리 그 옷도 존나 못입는 패알못 빨래판 년이...나중에 두고 봐라 진짜.'


오드리 입장에서야 기가 막힐 일이었지만 원래 더 나은 자는 열등한 자를 질투하지 않는 법, 칭찬 받을 정도로 일을 잘했다는 것만이 그녀의 죄이자 억울한 점이었다.




문리버 회장이 왜 오드리를 총애했을까에 대한 망상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