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 아침이에요.


누군가 속삭이는 말에 눈을 떠 보니, 낯익은 여성이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남자는 그녀를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물었다.


"지금 몇 시야?"


"오전 여덞시에요. 평소보다 조금 오래 주무셨네요."


남자는 이마를 짚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꿈을 꿔 가지고."


"꿈이요?"


"응. 내가 지구의 마지막 인간이고, 잠수함에서 너랑 다른 아이들을 지휘하는 꿈이었지. 거 참."


"……."


가만히 있던 그녀는 곧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가서 아침을 준비할 테니, 주인님도 곧 일어나 주세요."


몸을 돌려 떠나는 그녀를 보고 남자는 멈칫했다. 그녀가 미끄러지듯이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끄러지듯이? 의아해서 눈을 내린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의 하반신은 완전히 이질적이었던 것이다.


"리리스?"


남자가 얼른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녀가 돌아다보았다.


"그…… 치마 아래……."


"아, 이거요. 아시잖아요? 제 하반신."


"하반신?"


"기억 못하세요?"


리리스는 긴 치마를 들추었다. 크고 구불구불한 뱀의 몸뚱아리가 뚜렷이 드러났다.


그녀의 허리 아래부터는 뱀의 하반신이어서,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아이, 새삼스럽게 너무 그런 눈으로 봐주진 말아주세요. 상처받아요."


경악해서 눈을 부릅뜬 남자를 보고, 리리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가 버렸다.


그녀가 원래 저런 반인 반수의 뱀 요괴 같은 존재였던가. 남자는 혼란스러운 나머지 머리를 싸맸다. 기억 속에서 그녀는 분명…….


분명? 분명히 어쨌더라. 그는 거기서 생각이 턱 막혔다. 어쩐지 머리에 안개가 낀 듯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고민하다가, 상황 파악을 위해 방을 나섰다.


분명 자신의 집인데도 어쩐지 낯선 집안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내려오노라니, 밑에 서성이던 강아지 귀 소녀가 반색하며 달려와 안겼다.


"쥬인님- 좋은 아침이에요. 헤헤헷."


리리스의 동생인 성벽의 하치코였다. 그는 싱글벙글 웃는 하치코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강아지 귀와 꼬리를 하고 있었지만, 눈만은 강아지와 흡사하게 변해 있었다.


평소처럼?


"왜 그러세요?"


올려다보던 하치코가 의아해서 물었다.


위화감으로 멈칫했던 남자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내 착각이겠지.


"아니, 아무것도."


남자는 하치코에게 이끌려 식당에 가는 동안 CS페로도 만났다. 고양이 귀가 달린 페로는 조용히 인사하고 나서 동행했다.


자매인데 왜 맏이는 뱀이고, 나머지는 개와 고양이인 것일까.


식당에서 밥을 먹는 동안 남자는 페로에게 이상한 점을 털어놓았다.


어째서 리리스의 하반신이 뱀으로 변하였는가, 라는 질문에 페로는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주인님. 리리스 언니께선 원래 그 모습이셨어요."


"뭐라고? 하지만 분명……."


"아시잖습니까. 언니의 모습을."


고개를 기울이던 남자는, 문득 들어온 스노우 페더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살짝 잡고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주인님."


페더의 긴 치마 밑으로, 새의 발 같은 것이 슬쩍 보였다. 거기에 그녀의 등에 달린 흰 날개도 살아 있는 올빼미의 그것이었다.


"……어어, 그래. 페더도 좋은 아침이야."


남자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페더도 이상해 보이세요?"


그는 말문이 막혔다.


"페더는 흰올빼미의 날개와 하반신을 갖고 있어요. 물론, 저도 고양이 요괴이고요."


그제야 살펴 보니 페로 역시 고양이의 눈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스노우 페더와 페로는 오히려 이상한 듯이 남자를 보았다. 그녀들의 자연스러운 태도에 남자는 자기가 잘못 생각했나 싶어졌다.


"주인님. 혹시 소설을 쓰시느라 지치셨나요." 페로가 물었다.


"소설?"


"주인님이 쓰신 소설의 리리스 언니나 페더는 인간 여성의 하반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쓰는 소설이라고?"


스노우 페더가 작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어, 주인님께선 지금 쓰시는 마지막 기원이란 소설에 너무 몰입하신 게 아닐지."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아서, 남자는 잠깐 가만히 있다가 중얼거렸다.


"책이랑 착각했나."


"주인님 책은 항상 꿈처럼 생생하니까요. 헤헷."


하치코는 배시시 웃었다.


아리송해진 남자가 식사 후 작업실이란 곳으로 향해 보니, 그녀들의 말마따나 그는 정말로 '마지막 기원'이라는 작품을 집필 중인 모양이었다.


그는 리리스가 타준 커피를 마시며 글쓰기에 들어갔다.


쓰고 있다던 원고를 들춰 보니, '마지막 기원'은 어느 대목부터 작성이 중단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모르게 소설의 진도가 한 글자도 나아가지 않았다. 전부터 쓰고 있었다는 작품이 그날따라 어색하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는 머리를 싸맸지만, 머리만 싸맨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풀리지 않는 글로 골머리를 썩히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머리나 식힐 겸 식당으로 들어서자 마침 창백한 모습의 백발 미녀가 요리를 날라 오고 있었다. 주방장 소완이었다.


"소완? 어디 아파?"


소완이 핏기 없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소첩은 원래 이렇사옵니다. ……설녀로서 신체에 온기가 없으니 말이지요. 잊으셨나이까."


남자는 어쩐지 모르게 주변의 기온이 내려갔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고 나서 간신히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그랬었지, 참…… 미안."


"글에 열중하시느라 워낙 피곤하신 모양이옵니다. 당연한 것도 잊으시다니."


"흥. 주방장이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들지 않으니 주인님도 약해지신 거 아니에요?"


빗자루를 들고 있던 리리스가 미끄러지듯 나타나서 핀잔을 주었다.


"후후. 아무리 훌륭한 요리를 바쳐도, 뱀 요괴가 만날 정기를 빨아먹는 데에 어느 사내가 배기겠사옵니까."


"뭐야?"


으르렁대는 둘을 보니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둘을 진정시키고 같이 점심을 드는 도중 소완이 말했다.


"주인. 글 쓰느라 힘드시면, 오늘은 집필 대신 소첩이나 다른 아이들과 보내시는 게 어떠신지."


"음, 그럴까? 그런데 어제도 그랬던 느낌이 드는데."


"휴식은 꼭 필요한 법이옵니다. 게다가, 주인께서 잠시 집필을 중지하신다고 재촉할 이는 없사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도 집필을 하려니 왠지 낯설고 꺼려지는 참이었다.


한편, 리리스는 왠지 모르게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결국 남자는 그날 하루종일  글쓰기를 쉬고 휴식으로 보냈다. 머리 아픈 일은 뒤로 하고서 요괴 아가씨들과 어울려 보냈다.


말벌의 날개와 꽁무니를 지닌 리제, 이것저것 다 빨아 먹고 다니는 흡귀 알렉산드라, 작고 어린 페어리 여왕 오베로니아 레아 등.


그는 내심 뭔가 잊은 것 같아서 찜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같은 시간이 계속되기를 바랬다. 요괴 아가씨들과 노는 것도 즐거웠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며 편안한 삶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 * *




지구의 인간은 모두 멸망했고, 남은 건 그를 비롯한 많은 대원들 뿐이었다. 그런 악몽에서 다시 깨어났다.


누군가 속삭이는 말에 눈을 떠 보니, 낯익은 여성이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리스?"


"혹시 악몽을 꾸셨나요. 늦게 일어나셔서."


남자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일어났다. 어쩐지 머리에 안개가 낀 듯이,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으응. 잠을 설쳤나봐…… 피곤해. 지금 몇 시야?"


"열시에요."


"너무 늦었네. 가서 점심이나 먹어야겠다."


"네, 저는 먼저 가서 준비하라 이를게요."


그녀는 몸을 돌렸다.


남자는 그녀가 미끄러지며 멀어져 가자 흠칫했다. 미끄러진다고? 무심코 그녀의 상체 아래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깜짝 놀랐다.


놀란 남자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녀가 돌아다보았다.


"리리스. 그, 치마 아래에……."


리리스의 긴 치마 아래로, 크고 구불구불한 뱀의 몸뚱아리가 드러났다. 반인 반수라고 할 법한 모습이었다.


"너무 그런 눈으로 봐주진 말아주세요. 상처받아요."


경악해서 눈을 부릅뜬 남자를 보자 리리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갔다.


그녀가 원래 저런 뱀 요괴 같은 존재였던가. 남자는 혼란스러워서 머리를 싸맸다.


한편, 방을 나온 리리스는 우울한 표정으로 복도를 미끄러져 갔다. 마침 남자의 방으로 오던 페로가 리리스를 보고 말했다.


"주인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오늘은 왠지 늦으셔서."


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페로가 잠시 가만히 있더니 다시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저, 언니. 주인님께선 여전히 기억이 없으신가요?"


리리스는 눈을 감고 말했다.


"응. 잠만 주무시고 나면 그러시는 것 같아…… 또 잊으신 모양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주인님께서 빨리 정신을 차리셔야 저희도 방도를 찾을 텐데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우리가 기억을 되찾은 것도 얼마 전 일이니까."


둘 사이에 잠시 말이 없어졌다.


"문제는…… 기억을 찾는 것뿐만 아니라 잊지도 말아야 한다는 거지만요." 페로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주인님을 믿는 수밖에 없어. 지금껏 그래왔듯이 말야."


리리스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문득 등 뒤에서 의아하게 묻는 사람이 있었다.


"너희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기억이라니, 잊다니."


깜짝 놀라 돌아다보니 바로 남자였다.


그는 리리스가 뱀처럼 변한 것이 하도 이상해서 그녀를 따라 나온 참이었다.


리리스와 페로는 당황했지만, 이내 자신들이 아는 대로 털어놓았다.


"실은……."


머뭇거리던 리리스는 이 저택이 자신들이 원래 살던 세상과 다른 세상이라는 점을 알렸다.


남자가 어안이 벙벙해 하는 가운데 페로가 이어 말했다.


"모든 건…… 그날 티타임에 리리스 언니가 꺼냈던 검은 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마도요."


"책?"


남자가 기억이 나지 않아서 관자놀이를 짚는 것을 보고 페로가 넌지시 물었다.


"주인님. 어제 일이 기억나십니까?"


"어제? 어제는 애들하고……." 무심코 말하려던 남자는 머리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자 당황했다.


페로는 리리스를 쳐다보고 이야기했다.


"하루는, 리리스 언니가 탐사에서 주웠다면서 책을 한 권 가져왔지요. 검은 표지에 오래 된 듯한 책이었습니다. 주인님께서 그 검은 책을 펼치고 살펴 보시다가…… 돌연 저희 모두의 의식이 멀어졌습니다."


남자는 잠자코 들었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이 저택 안이었습니다. 어째선지 시간이 정체된 듯한 이 저택에요.


처음엔 저도 오르카호 말고 여기가 진짜 집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리리스 언니가 알려주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여긴 주인님과 저희가 살던 곳이 아니라는 것을요. 저희들도 원래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도요.


거기까지가 저희가 기억해낸 전부예요."


남자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생각났다.


자신이 지구의 마지막 인류이며, 인류저항군 사령관이고, 여기 저택이 아닌 잠수함 오르카호에서 지낸다는 것도 떠올랐다.


그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떠오르던 악몽이, 실은 원래 현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기억들을 속속 떠올리던 남자 - 사령관을 보고 리리스는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서는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든 기억을 떠올리고 나선 주인님께 계속 말씀드렸지만, 주인님은 진실을 알고 나서도 잠이 드시면 다시 기억을 잃으셨어요. 게다가 이 꿈 속에서 벗어날 방법도 찾지 못했고요."


"내가 또 잠든다면, 지금 들은 걸 잊어버리게 된다고?"


"이번에도 그럴지도 몰라요.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되니까."


이번에도, 라. 사령관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문득 궁금해진 것이 있었다.


"그런데 리리스 너는 어떻게 기억을 되찾은 거야? 게다가 하반신도 뱀처럼 변해 있고."


리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저도 모르겠어요. 저라고 뱀녀가 된 게 편하지만은 않아요…… 어쨌거나 중요한 건 저나 페로라도 이 상황을 알고 있다는 점, 그리고 주인님과 여기를 나가야 한다는 점 아닐까요."


사령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스. 다른 애들도 이 일을 알고 있어?"


"아니요, 아직까진 저희와 주인님 뿐이에요. 사실, 알려 줘도 다들 잠들고 나면 잊어버렸거든요. ……주인님도요. 일단은 저와 야옹이만이 잊지 않는 중이에요."


사령관은 일단 리리스 등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저택 구석구석을 돌아보니, 과연 대부분의 대원들은 꿈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요괴가 된 채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주인. 컨디션이 안 좋으신지요. 오늘은 유독 늦으셨사옵니다." 점심밥을 차리던 소완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냥 늦잠을 잤을 뿐이야."


"……뱀녀한테 너무 정기를 빨리신 건 아닐지."


그러나 리리스는 이번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주인, 글을 쓰는 게 힘드시면 오늘은 소첩과 쉬시는 것이 어떠시겠사옵니까."


"음. 생각해 볼게." 사령관은 적당히 소완을 돌려보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그 뒤, 얼마간의 조사를 끝낸 사령관은 방에 돌아와 팔짱을 꼈다. 리리스와 페로는 걱정스럽게 그의 곁에 서서 모셨다.


어떤 영문으로 이런 괴상한 저택에 들어온 것인지, 어째서 매일이 반복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곳을 벗어날 방법도 깜깜했다. 시험 삼아 저택 바깥으로 나가 보았지만, 그때마다 얼마 가지 못하고 저절로 돌아와 버리는 것이었다. 귀신이 조화라도 부리는 것일까.


그는 자신이 지휘하지 않는 동안 오르카호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걱정되었다. 말이 좋아서 꿈 속이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저택에서 똑같은 매일을 보냈는지 알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잠이 들면 또 진실을 까먹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고심하며 몸을 흔들고 있는데, 페로가 문득 말했다.


"주인님. 혹시, 여기서 쓰고 계시는 글 말입니다만."


"으응."


"이곳의 주인님께선 작가라는 역할을 맡고 계십니다. 하지만, 언니 말을 들어보니 주인님께선 매일 글쓰기를 미루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누구의 권유든, 혹은 주인님께서 귀찮아 하시든 간에요."


"……그러고 보니 오늘도 어찌저찌 너희들과 보냈네. 글도 안 써지고, 귀찮기도 해서."


리리스가 손뼉을 쳤다.


"주인님, 어쩌면 주인님께서 그 글을 완성시키실 때, 저희 모두 이 집에서 나갈 수 있게 되는 건 아닐까요?"


"완성시킬 때?"


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반복되는 일상을 깨기 위해선 다른 패턴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녀들의 말에 근거는 없었다. 그러나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그것 뿐이었다.


사령관은 급히 작업실로 향한 다음, 그가 쓰고 있다던 원고를 들췄다.


'마지막 기원'은 어느 대목부터 작성이 중단되어 있었다. 읽어 보니, 과연 사령관 일행이 꿈에 갇혀서 계속 되풀이 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대목까지 작성되어 있는 것이었다.


사령관은 얼른 '꿈에서 벗어나려는' 내용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막 글자를 쓰기 직전, 일순 멈칫했다.


오르카호에 돌아가면 또다시 전쟁을 지휘해야 된다. 하지만, 여기에 있으면 적들한테서 목숨을 위협받을 필요도 없는 것 아닐까.


이곳에선 지구의 마지막 인간으로서 살아남느라 애쓰지 않아도 된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졸릴 때 자고, 온갖 욕구를 채우기에도 충분하지 않은가.


사령관은 머뭇거렸다. 글을 쓴다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고, 어차피 꿈이라면 조금 더 오랫동안 머물러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동안 계속 글이 써지지 않은 것도, 잠이 들고 나면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도, 그래서 저택에서의 일상을 되풀이하는 것도, 어쩌면 여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가 주저하고 있는 동안 작업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귀를 기울여 보니, 많은 대원들이 몰려와서 자신들과 놀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리리스와 페로가 여기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사령관 뿐만 아니라 다른 대원들도 이 저택에서 지내는 것에 안주하는 걸지도 모른다. 요괴 모습이던 아니던 상관없이. 사령관은 뱀으로 변한 리리스의 모습, 그녀들의 안주하는 모습과 자신의 나태한 모습들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언제까지고 여기서 지낼 순 없어."


다짐을 정한 그는 마침내 글을 이어 쓰기 시작했다.


미리 생각해 둔 것도 없이 떠오르는 대로 그 자리에서 적다보니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나 사건을 마무리할 때까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어쩐지 쏟아지려는 졸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꿈에서 벗어난다는 사건을 모두 써 냈다.


그리고 그가 타이핑을 모두 끝내고 마침표를 찍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 * *




아찔한 느낌과 함께 눈이 번쩍 뜨였다. 오르카호의 사령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얼른 두리번거렸다. 테이블에 같이 둘러 앉은 페로와 하치코는 엎드리거나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잠들어 있었다.


얼떨떨해 있는데 문득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참 이상한 악몽이었어요."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니 리리스가 다소곳이 서 있었다. 저택에서와 달리 뱀의 하반신이 아니라 원래의 아름다운 몸매 그대로였다.


그녀의 모습을 보자 사령관은 이제서야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돌아왔구나……."


"다행이에요. 후후."


리리스는 웃으며 곁에 앉았다. 같이 앉아 있던 페로와 하치코는 아직도 꿈나라 속이었지만, 리리스가 흔들어 깨우자 다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헛. 주인님? 어떻게 된 일인지. 그 꿈은……."


"주인님- 하치코는 진짜 강아지 요괴가 된 꿈을 꿨어요-" 하치코가 눈을 비비며 울상을 지었다.


다들 같은 꿈을 꾼 것을 보니 역시 단순한 꿈은 아닌 모양이었다.


정말 영문 모를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완전히 안심이 된 사령관은 웃으면서 페로와 하치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리스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역시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랬다.


그의 앞엔 식은 차와 함께 검은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분명히 정신을 잃기 직전에 살펴보았던 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때문에, 사령관은 내막을 아는 리리스와 페로와 함께 검은 책을 처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책을 소각로에 넣어도 타지 않고 멀쩡한 바람에, 의논한 결과 바다로 떠나 보내기로 하였다. 리리스가 이 책을 바닷가에서 주워 왔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사령관은 검은 책을 직접 바다 속으로 떨어뜨렸다.


부디 안녕히 가시길. 그들은 신물을 대하듯이 축원을 올리며 책을 떠나 보냈다.


그러고 나서 잠시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데, 사령관이 문득 돌아보았다.


"그런데 리리스 너는 왜 뱀처럼 변했던 걸까? 다른 애들도 이상하게 변했고."


"글쎄요. 저도 생각해 봤는데…… 주인님께서 평소 생각하시던 게 반영되어서 모두들 그렇게 바뀐 게 아닐까 싶은데요."


사령관은 말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책은, 주인님의 무의식과 욕망을 꿈으로 보여 주는 힘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저택에서 노는 나날이 반복된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 아닐지."


거기까지 말한 리리스는 문득 입을 부풀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인님도 참, 저를 뱀처럼 생각하셨다니. 너무하세요."


"아니, 그게."


사령관은 머리를 긁었다. 사실은 너희가 평소 생각하던 자신들의 모습대로 변한 게 아니냐 말하고 싶었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마음 속으로만 담아 두었다.


"흥. 리리스 삐졌어요. ……주인님께서 다른 애들을 눈요괴나 뱀파이어로 보셨다고 다 퍼뜨릴 거예요."


리리스는 팔짱을 끼고는 짐짓 토라진 체했다. 사령관은 그녀를 공주님처럼 들처업고 달래느라 애썼다. 물론 그녀도 진심으로 화난 것이 아닌지라, 저녁을 함께 하자는 말에 금방 풀어졌다.


그런데 그가 혼자 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손가락에 이상한 것이 묻어 있었다.


무심코 들여다보니, 오색 빛으로 영롱이는 비늘이었다.


"……."


리리스를 들어안을 때 묻어 났던 걸까. 그는 비늘을 엄지와 검지로 문질렀다. 언젠가 직접 만졌던 뱀 비늘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가 저택에서 뱀녀처럼 변했던 것은, 단순히 그의 무의식 때문만이었을까?


하지만 그 뒤로 리리스가 뱀처럼 변하는 일은 두번 다시 없었다.


검은 책 또한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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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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