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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Day 1. PM 12:20

 

 꿈을 꾸었다.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던 평범한 일상. 매일 같이 이어지던 출근과 퇴근, 심심하면 찾아오는 친구들과 이어지는 별 의미도 없이 이어지는 잡담과 신세 한탄, 가끔 생각나서 거는 부모님의 안부 전화, 꿀맛 같던 휴무 때에는 맥주와 치킨을 사와 컴퓨터 앞에 앉아 유튜브나 보던 그런 나날. 그런 나날이 계속되는 와중에 하늘에서 커다란 검은 동공이 열리고 그 안에서 철충이라 불리던 게임 속 괴물들이 튀어나와 나의 일상을 모두 부수는, 그런 허무맹랑한 꿈을 꾸었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한 명씩 무자비한 포화에 온몸이 갈갈이 찢겨나가도, 회사 건물이 그들의 포격에 반으로 쪼개지어 부수어져 회사 동료들이 깨진 유리창 조각에 썰려 나가도, 부모님이 연결체들의 입자포에 의해 상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다리만 남아도.

 

 난 그저 벌벌 떨며 나를 내려다보는 무수한 시뻘건 안광을 내뿜는 그들의 눈동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족히 빌딩 10층 건물만 한 거대한 연결체가 양팔에 달린 거대한 검을 교차해 내 몸을 십자로 갈라버렸을 때, 내 두 눈에는 사지가 분해된 나의 몸과 허공에 휘날리는 나의 양팔과 다리, 그리고 내 목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순간 나는 목에서 따끔한 통증을 느끼고 그 끔찍한 꿈에서 깨어났다.

 

“-간님, 인간님!”

 

 목에서 따끔한 고통이 느껴지고 서서히 정신이 깨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귀에 대고 무언가를 열심히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난 순간 아직도 꿈을 꾸는 줄로만 알았다. 혼자 사는 우리 집에 저런 미성의 여자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잖아.

 

“-탄챠, 그거 효과가 있는 거 맞긴 해? 아무런 반응도 없잖아.”

 

“-지만 겨우 찾은 인간님을 이대로 두실 순 없..보리야?”

 

 처음 들린 상냥한 목소리와 다른 여자의 퉁명한 목소리가 들리고 갑자기 내 몸 위에 무언가 올라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야..대체 누가 남의 집에서..’

 

헥-헥-

 

‘...?’

 

“꺅! 보리야! 인간님 위에서 그러는 거 아니야!”

 

 뭐야, 이게 뭔 느낌이야. 뭔가가 내 얼굴을 마구 핥고 있는데? 얼굴이 정체불명의 무언가에 의해 침범벅이 되는 걸 느끼고 나서야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얼굴의 반절이 침범벅이 되고 나서야 눈이 간신히 떠지기 시작했다. 팔을 움직여 이 정체불명의 혓바닥을 치우려고 해봐도 온몸이 마비된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아..”

 

 목도 마치 며칠 동안 물을 먹지 못한 것 같이 말라비틀어져 있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자는 사이에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지. 혹시 가스가 폭발해서 대형 화재라도 일어났나? 그래서 온몸이 삐그덕 거리는 건가? 가스를 마셔서 목이 말라붙은 건가?

 

“콘스탄챠! 이 인간 깨어난 거 같은데?”

 

“아! 잠시만요. 물을 부어드릴게요.”

 

 옆에서 떠들던 여성들의 목소리에 간신히 입만 열자 누군가 내 몸을 들어 일으켜 세워 천천히 입에 물을 넣어주었다. 메말라 붙어 있던 입과 목구멍에 물이 채워지자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좀 살겠다 싶었더니 옆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 여성이 말을 걸었다.

 

“인간님, 눈이 떠지시나요?”

 

 그 목소리에 난 천근만근 같은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눈을 떴다.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 사이로 헥헥 거리며 혀를 내미는 누렁이가 보였다.

 

“...개?”

 

 설마 이 개가 말을 한 건가? 뭐지? 아직 꿈속인가? 몸이 어떻게 되었는지보다 지금 눈앞에서 말하는 개 때문에 머리에 물음표가 한가득 차올랐다.

 

“인간님! 정신을 차리셨군요. 이 아이는 보리라고 해요.”

 

“...아.”

 

 그때 누군가가 아마 날 일으켜 세운 여성이라고 추정되는 인물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갈색빛이 도는 머리카락 위에 프릴을 단 머리띠를 하고 지적이게 보이는 둥근테 안경 너머로 날 바라보는 커다란 녹색의 두 눈동자. 다른 세상에서 찾아온 여인처럼 내가 알고 있는 미녀들의 외모와는 한참은 동떨어진 엄청난 미모를 가진 여성이 살포시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반갑습니다. 인간님. 전 가정경비용 바이오로이드 콘스탄챠라고 해요.”

 

“...?”

 

 그녀의 따듯한 음성에서 나온 말 한마디 때문에 또다시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찬다. 지금 내 귀가 이상해진 건가? 아니면 누가 나한테 장난을 치는 건가? 뭐지? 몰래카메라? 뭐 그런 종류야?

 

‘씨발? 이게 대체 뭔 장난이지?’

 

 누군가가 나한테 거는 몰래카메라의 일종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분명..내가 하던 ‘라스트 오리진’이라는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에 이런 외모에 이름을 가진 캐릭터가 있었다. 생긴 외모가 마치 현실에 튀어나온 것 같이 완전히 똑같은 것 같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집에서 자는 사람을 데려다 무슨 짓인가 이게.

 

“저...인간님? 혹시 어디 이상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콘스탄챠, 그 인간 기억이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 완전히 뇌가 포맷되어서 말도 못하는 거 아냐?”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따라 눈동자를 굴리자 금색의 단발머리를 휘날리는 볼살이 통통한 외모를 가진 여성이 보였다. 딱 보아도 얼굴에 나 불만 있어요라고 써놓은 듯한 표정을 짓는 금발의 여성을 보자 자연스럽게 입에서 말이 나왔다.

 

“..그리폰?”

 

“어? 너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아?! 뭐야! 기억이 없을 거라며!”

 

 몸에 쫙 달라붙은 파란색 슈트에 양손에 미사일이 달린 핸들을 쥐고 이마에는 고글을 달고..와 이거 되게 정성 들인 몰래카메라 아냐. 내가 자기 모델명을 부르자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한 그리폰이 내 옆에 있는 콘스탄챠 코스프레를 한 아가씨한테 따졌다. 난 고개를 돌려 다시 그 아가씨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인간님? 혹시 기억이 있으신 건가요?”

 

 걱정스레 날 바라보는 그 아가씨를 보고 있자 이 상황이 몰래카메라라고 하더라고 용서할 자신이 들었다. 매번 커뮤니티에서 ㅈ경이라고 놀렸는데 실제로 보니 진짜 이쁘네. 콘스탄챠한테 사과해라 과거의 나.

 

‘근데 어깨가 왜 이렇게 푹신한 거야’

 

“..카흑!”

 

“꺅! 이 인간 침 뱉었어! 더러워! 불결해!”

 

 어깨에서 밀려오는 따스함에 고갤 돌리니 그 아가씨의 고딕 메이드풍 의상과 밑창이 뚫려있어 훤히 드러난 가슴 밑쪽에 파묻혀 있는 내 오른팔을 보고 난 크게 기침을 하였다. 그러자 그리폰 코스프레를 한 여성은 소리를 꽥 질렀고 콘스탄챠 코스프레를 한 아가씨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나에게서 떨어졌다.

 

‘이거..고소 당하는거..아니지?’

 

 벌써 이미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무마시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요동치고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머리가 지금 이 상황이 무슨 개판인가 싶어 아예 열이 나는 것만 같았다. 시선 처리를 어디로 할지를 몰라 고개를 돌리자 그때 내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대체 어디야?’

 

 분명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온 주변이 녹색의 우거진 숲 한 가운데였다. 아니 숲이라기보다는 드문드문 무너진 건물들이 자라난 넝쿨 줄기에 얼기설기 얽혀 마치 도시가 녹지화된 것 같은 환경이었다.

 

‘몰래..카메라 맞지 이거?’

 

 분명 두 눈에는 우거진 녹읍이 들어오고 내 뺨을 간질이는 작은 바람에 향긋한 풀 내음이 코를 간질였다. 이 모든 감각이 이게 현실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지만 바뀌어도 너무 바뀐 내 주변 상황을 뇌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VR..아냐, 아직 VR로는 이렇게 오감을 자극하는 건 보지 못했어.’

 

 그럼 누가 최신 VR기술을 나에게 실험하고 있는 거 아닐까, 마치 예전에 읽은 일본 라이트노벨처럼? 그럼 누가 무슨 목적으로 날 가지고 실험한다 말인가. 온갖 의문이 머릿속을 헤집고 난 아무런 말도 못하고 한참이고 주변을 응시했다.

 

“인간? 인간? 아이씨, 이 인간 정말 멀쩡한 거 맞아? 완전 꽝인거 같은데.”

 

“그리폰, 그런 말을 인간님한테 하면 못써. 어떻게 찾아낸 인간님인데..”

 

“이래서 지휘나 할 수 있겠어? 말은커녕 정신건강부터 체크를 해야 할 거 같은데?”

 

“그리폰!..저 인간님?”

 

 둘이 떠드는 소리가 멈추고 콘스탄챠 코스프레..아니 이제 모르겠다. 콘스탄챠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다시 봐도 파격적인 패션이었다. 누구 아이디어인지 저렇게 큰 가슴에 밑창을 저래 잘라두다니..난 시선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모르다가 그냥 그 여성과 눈을 맞추고 쳐다보았다.

 

“...어, 그..무슨 일이십니까?”

 

 아직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묻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한참을 응시하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인간님께서는 제게 존댓말을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흰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아뇨, 말실수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끊고 내 생각을 답했다. 만약 이게 진짜 몰래카메라라고 한다면 나중에 꼬투리를 잡혀 이도저도 안될 것이다. 방송국에서는 연신 떠들어 댈 것이고 인터넷에는 온갖 박제를 다 당하겠지. 내가 단호히 말하자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내게 침착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인간님의 의지를 존중할게요. 다시 한번 제 소개를 할게요. 전 콘스탄챠 S2, 여기 이 아가씨는 인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폰이라 해요.”

 

“흥, 인간 딱 잘라 말해둘게. 난 인간이랑 친해지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가까이 오지마. 알겠어?”

 

“...말은 저렇게 해도 착한 아이니까 미워하지는 말아주세요,”

 

 그리폰은 여전히 날 아니꼽게 보며 흥! 하고 고갤 돌렸고 콘스탄챠 곤란한 웃으면서 땀을 삐질 흘렸다. 아 설정 한 번 기가 막히게 잘 잡았네. 라고 생각할 때쯤 콘스탄챠가 나에게 작은 기계 하나를 주었다.

 

“묻고 싶으신 것이 많으시겠지만 먼저 사령관 등록부터 하시면 저희가 답해 드릴 수 있어요. 여기 빈칸에 성함을 적어주시겠어요?”

 

“...네,”

 

 나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같이 받은 펜슬로 단말기에 내 이름을 적어갔다. 이 정도로 공들인 몰래카메라라면 어느 정도는 협조해줘야겠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이름을 쓰고 확인을 누르자마자 콘스탄챠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폈다.

 

“데이터베이스에 사령관님으로 등록이 완료되셨어요!”

 

“...사령관이요? 저기..”

 

“이제부터 제가 하시는 말씀을 들어주세요. 우선 이곳은 아직 철충들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먼저 본부로 이동하시고 자세한 설명을 해드릴게요.”

 

“...철충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단어가 내 정신을 멍하게 만들었다. 설마 철충까지 구현하겠다는 건가? 아무리 나라도 진짜로 가짜 철충을 들고 오면 웃을 거 같은데. 그러나 내 물음에 콘스탄챠는 비장한 얼굴로 답하였다.

 

“네, 주인님. 지금 저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철충들을 회피해왔기 때문에 아마 철충들이 인간님의 뇌파를 읽는다면 순식간에 몰려들 거에요. 그러니 먼저 이곳을..”

 

컹-컹-!

 

 그녀가 자못 비장한 어투로 대답하는 사이 갑자기 내 다리 사이에서 웅크리고 있던 보리라는 누렁이가 벌떡 일어나 건물 한쪽을 향해 짖기 시작했다. 이제야 눈치를 챘는데 이 누렁이도 목에 목줄마냥 기계를 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나를 두고 그리폰이 콘스탄챠를 향해 외쳤다.

 

“동쪽 통로 방향 500미터 이내에 철충 다수 포착! 콘스탄챠! ”

 

“응. 먼저 주인님을 안전한 곳으로..”

 

“이제 인간도 있잖아! 도망칠 필요가 어딨어! 인간! 얼른 파괴명령을 내려줘!”

 

“..예?”

 

 둘의 이야기를 듣다 나에게 파괴명령을 내려달라며 째려보는 그리폰을 보고 나는 얼빠진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이 두 여성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진짜 철충 모형을 등장 시킬려고?

 

“예는 무슨 예야! 빨리 파괴명령을 내려달라고!”

 

“사령관님! 많이 당황하신 건 아시겠지만 어서 대피를..!”

 

 그리폰은 날 보며 답답하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굴렀고 콘스탄챠는 날 일으켜 세워 어디론가 피신을 시키려고 애썼다. 난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어어 거리다가 시선을 보리가 계속 짖는 방향을 쭉 따라가 보았다.

 

“..아?”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무너진 건물 복도 끝에는 햇빛을 등지고 검은 물체가 시뻘건 자줏빛 안광을 내뿜으며 서 있었다. 둥근 몸체에 조류와 같이 역관절 형태의 두 다리가 보였다. 그리고

 

기이잉-

 

투두두두두-!!

 

“젠장! 콘스탄챠 숙여!”

 

 엄청난 격발 소리와 함께 둥근 물체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폰은 고개를 돌려 그 물체의 머리 위를 향해 양손에 들고 있던 미사일을 날렸고 콘스탄챠는 날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져 내 머리를 감싸 안았다.

 

콰-광

 

“좋았어! 입구는 봉쇄했어! 이제 다른 통로로 대피를-”

 

 보이지 않는 시야 너머로 큰 폭음과 함께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내 귀청을 찢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콘스탄챠의 풍만한 가슴에 파묻혀 부끄럽기보다 지금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혼란스러움이 더해만 갈 때 오른쪽 뺨에서 따끔한 고통과 함께 따뜻한 무언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어?’

 

“주인님! 뺨에 상처가..!”

 

 무의식적으로 그 따뜻한 것을 쓱 만져보니 뭔가 질척한 감각이 느껴졌다. 날 끌어안은 콘스탄챠를 왼손으로 강하게 밀어내며 오른손을 보니 내 오른손은 시뻘건 마치 빨간 수채화 물감을 색칠해놓은 것처럼 내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우...우아아악!!”

 

‘피? 진짜 피야 이거? 잠깐만 이렇게까지 몰래카메라를 할 리가 없잖아? 방금 날아온 거 그거 진짜 총알이라는 거야?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진짜 철충? 진짜 총알?’

 

 이제는 생각이란 걸 할 수 없었다. 아니 생각이란 걸 하기 전에 이미 뇌가 멈추어버린 듯 아무런 말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모든 환경이 뒤바뀌고 내 눈앞에 닥친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고 싶었다. 두 눈이 흔들리고 이빨이 딱딱거리며 부딪치고 온몸이 사시나무가 떨리는 듯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현실을 애써 부정하다 뺨에서 흐르던 피가 무언가 막힌 듯이 아래로 흐르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님! 어서 대피를..”

 

“-인간! 멍청히 있지 말고 얼른 명령을..”

 

두 여성의 말이 들리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난 덜덜 떨리는 오른손으로 내 목의 오른쪽을 쓰다듬어 보았다. 아, 느껴졌다. 이 무기질적인 무언가가. 이건-

 

“비켜! 비키라고!”

 

 나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날 잡으려던 콘스탄챠가 멈칫했고 날 째려보던 그리폰의 두 눈에는 당황스러움이 묻어나왔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나에겐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건물의 움푹 파인 곳에서 햇빛을 반사하는 물웅덩이를 보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두 다리를 억지로 끌며 다가갔다. 그리고 물웅덩이에 반사되는 내 얼굴을 마주하고 말았다.

 

‘아...아아아아..!!’

 

 거기엔 ‘내’가 없었다. 동양인 특유의 흑발 흑안의 평범한 외모는 온데간데없고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과 처음 보는 말끔한 외모의 남자가 물웅덩이에 비추어졌다. 그것은 분명 내가 아니었지만 그게 ‘나’였다. 얼굴의 오른쪽 아래에는 무기질의 빛을 띠는 무언가가 있었고 나는 그것이 무언지 안다. 모든 의혹이 그리고 생각이 퍼즐을 맞추듯 머리에서 맞추어져 나는 끝내 부정하던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 ‘내’가 누구인지를.

 

“주인님! 우선 대피하셔야 해요! 철충들이 곧 들이닥칠 거에요!”

 

“인간! 멍청히 있지 말고 얼른 명령을 하란 말야! 이대로는 다 죽는다고!”

 

내 옆으로 뛰어와 나를 붙잡고 억지로 물웅덩이에서 떼어낸 그 여성은 날 ‘주인님’이라 불렀다. 신경질적으로 날 째려보며 뒤따라 오는 여성은 날 ‘인간’이라 불렀다. 내 다리에서 끼잉끼잉 거리는 누렁이는 ‘보리’라 불렸다. 내가 닥친 현실을 직시하고 그녀들이 누구인지 받아들였을 때 느낀 감정은 새로운 세계로 왔다는 기대감도 그녀들을 현실에서 만났다는 반가움이 아닌 ‘공포’였다. 내가 꾼 꿈에서 만난 최악의 적들이, 지금 나를 죽이러-

 

“-주인님? 주인님! 정신 차리세요!”

 

“뭐..뭐야? 인간 죽은 거야?! 정신 차려!”

 

 내게 닥친 현실에 대한 공포로 인해 난 정신을 잃고 말았다.

 

10) Day 1. PM 12:48

 

“코..콘스탄챠?! 이 인간 죽은 거 아니지?”

 

 그리폰은 갑자기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푹하고 쓰러진 인간을 보고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얼빠진 것처럼 행동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떤 고생을 하고 찾은 인간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잃는다면 두 번째 기회가 언제 찾아올지 몰랐다.

 

 콘스탄챠는 곧바로 사령관을 눕히고 숨소리와 심장 박동을 체크를 하고선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님이 돌아가신 건 아니야. 다만 큰 충격으로 인해 기절하신 듯해.”

 

“그..그래!? 정말 깜짝 놀라게 하고 있어!”

 

 그리폰만큼이나 콘스탄챠 역시 크게 당황했으나 그걸 표출하지 않았다. 어떻게 찾은 ‘주인님’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잃는다 말인가. 다행히 오른쪽 뺨에 난 상처 이외에는 큰 외상이 없어 보였다. 콘스탄챠는 자신의 간이배낭에서 약과 반창고를 꺼내 그의 상처를 매만졌다. 보리 역시 사령관의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낑낑거리며 빙빙 돌아다녔고 그리폰은 계속해서 철충들이 들어 올 만한 통로들을 둘러 보았다.

 

“우선 주인님을 모시고 이곳을 탈출하자. 블랙 리리스님 분대에는 구조 요청을 해두었으니까 곧바로 합류하실 수 있을 거야.”

 

“켁! 그 여자 아직 살아 있었어?”

 

 그리폰은 블랙 리리스라는 이름을 듣자 곧바로 싫은 내색을 얼굴에 띄웠다. 그것도 그럴 것이 매번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가운 얼굴로만 대원들을 상대하는 데다가 붙임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한마디로 자신과는 다른 밥맛없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블랙 리리스님도 오르카호 총괄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계시니까 아마 주인님이 등록되시는 타이밍에 위치를 파악해서 곧바로 합류 지점으로 이동 중이실 거야.”

 

 콘스탄챠는 기절해 누워있는 사령관의 얼굴을 한 번 쓰다듬고 그를 들어 등에 업었다. 생각외로 무겁지 않은 가벼운 몸이었다. 그녀 역시 블랙 리리스에게 묘한 거리감을 느꼈지만 딱 한 가지만은 확신하고 있다. 그녀 역시 자신처럼 모실 주인님을 찾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여기에 주인님이 있으니 그녀는 금세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는 걸.

 

“자, 그리폰. 우선 주인님을 합류지점까지 안전하게 데려가자. 이렇게 되셨지만 우리가 지켜야 하는 분이라는 건 변함이 없어.”

 

“하..정말 산 넘어 산이라더니. 이거 찾을 때보다 더 힘든 거 알지?”

 

“그래도 우리에게는 이 분만이 희망이니까. 이 분만 건재하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철충과 싸울 수 있어. 그리고 인류도 재건할 수 있을 거야.”

 

왕-왕-!

 

“그래, 보리야. 조금만 더 힘내자!”

 

“에이씨..이 빚은 라비아타 통령한테서 꼭 받아낼 거야! 그것도 배로!”

 

“후훗, 그래. 나도 언니한테 잘 말씀을 드려볼게.”

 

 그렇게 둘하고 한 마리는 쓰러진 인간 한 명을 업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건물 근처에는 역시나 인간의 뇌파를 탐지하고 여러 철충들이 즐비해 있는 것을 일일이 피해서 움직였다. 최대한 건물 사이 사이로 다니며 철충들의 레이더망을 피해 조심히 움직였으나 도시를 빠져나올 때 나이트 칙 하나가 자신들을 발견하고 격발하기 시작했다.

 

투두두두두-!

 

“에이씨! 콘스탄챠! 넌 얼른 인간을 데리고 대피하도록 해!”

 

“그리폰!”

 

 그리폰은 콘스탄챠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내던지며 미사일 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콘스탄챠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어보았으나 이내 손을 거두고 숲속을 향해 내달렸다.

 

“나 여기 있다! 이 썩을 철충 녀석들아!”

 

 나이트 칙 한 기가 그녀의 미사일을 정통으로 맞고 비틀거리자 그리폰은 다시 미사일을 날려 철충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건물 사이에서 튀어나온 나이트 칙 실더가 그 공격을 막아내어 그녀의 미사일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젠장! 왠지 오늘 운수가 좋더라니!”

 

 그리폰은 안되겠다는 듯이 혀를 한 번 차고서는 제트팩을 기동해 하늘로 날아올라 철충들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물론 철충들에게 직격타를 먹이기에는 아직 명령이 없어 불가능하지만 철충들 인근의 폐건물의 기둥들을 무너뜨려 그들의 움직임을 막는 정도는 ‘보호’ 명목하에 가능했다.

 

쿠-구궁

 

‘이걸로 시간은 조금 벌었어! 확실히 보호라는 명제가 생기니까 쏘는 것 정도는 편하네!'

 

 그리폰은 금세 우쭐해지며 무너진 폐건물 잔해에 깔려 허둥대는 나이트 칙 실더와 나이트 칙을 내버려 두고 등을 돌려 숲속으로 달아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속에서 재빠르게 달리고 있는 콘스탄챠를 발견하고 제트팩 기동을 끄고 그 옆에 착지하자 보리가 반가운 듯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꺅! 핥지마! 간지럽잖아!”

 

 그리폰은 꺅꺅 웃으며 보리를 안아 콘스탄챠와 같이 달렸고 콘스탄챠 역시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리폰.”

 

“헷! 나한테 걸리면 그런 놈들쯤이야! 이제 얼마든지 덤비라고!”

 

“후후. 그리폰도 주인님을 발견해서 기쁘구나?”

 

“무..무슨! 그런 인간이 없어도 난 잘 싸우거든?!”

 

 그렇게 얼마나 내달렸는지 합류 포인트 인근에 도착했을 때쯤 이번에는 나이트 칙들이 무더기로 숲속에서 튀어나와 그녀들을 가로막았다.

 

투두두두-!

 

“젠장! 여기서는 제대로 날지도 못한다 말야!”

 

“그리폰! 조금만 참아!”

 

탕-

 

 큰 바위 뒤로 간신히 몸을 숨겼으나 그녀들에게 대항할 수단은 거의 없었다. 콘스탄챠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 라이플로 나무 사이 사이로 보이는 나이트 칙들을 하나씩 저격해 제압하려 해도 나이트 칙들의 숫자가 그녀의 예상보다 더 많았다.

 

‘주인님의 명령만 있었어도..!’

 

 나이트 칙들이 내뿜는 인간의 뇌파는 그녀가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간접적인 방해요소가 되었고 콘스탄챠는 그저 보호를 위한 행동을 할 수 있을 뿐 적극적인 공격자세로 이행하지 못한다는 것이 오늘만큼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탕-

 

‘하다못해 주인님만이라도 블랙 리리스님 분대에 넘겨 드려야 해!’

 

 몇 발 남지 않은 총알을 세며 콘스탄챠는 이를 악물고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주인님을 지킬 방법을 모색했다. 그녀의 옆에서는 보리가 계속해서 컹컹 짖어대었고 그리폰은 빼꼼히 머리를 내밀어 미사일을 쏘려다 나이트 칙의 기관포에 의해 미사일 추진기가 고장 나고 말았다.

 

“하이씨..진짜 지원부대는 언제 오는 거야아아!!”

 

 그리폰의 한이 담긴 비명 소리가 숲속을 메웠다. 이제 더는 방법이 없다. 콘스탄챠는 한없이 오랜 세월을 기다려온 자신의 주인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 몸을 던져 저들을 유인할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콘스탄챠의 단말기에서 차가운 미성이 흘러나왔다.

 

“그렇게까지 지원부대를 찾으시다니. 몸소 여기까지 와 준 보람이 있네요.”

 

“어? 이 목소린..”

 

“리리스씨!”

 

“모두 비키세요. 여긴 제가 정리 할테니.”

 

탕-타타탕-!

 

 강렬한 총격이 나이트 칙 무리들의 후방을 급습했고 나이트 칙들은 재깍 몸을 돌려 그 공격에 반응하려 했으나 나무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등 숲속이라는 공간에 의해 기동에 제약이 발생했다. 그에 비해 양손에 쌍권총을 들고 나무 사이 사이를 뛰어다니며 심지어 나무와 가지를 타는 묘기를 보이는 습격자는 계속해서 권총으로 그들의 코어를 관통시켜 나갔다.

 

탕-! 타탕!

 

 그녀의 총알이 한 발씩 격발될 때마다 나이트 칙의 역관절 형태의 다리와 기관총이 터져나갔고 나이트 칙들은 그녀의 발 빠른 기동을 따라 격발하기 시작했으나 그녀는 그럴 때마다 나무 사이로 숨어 공격을 회피했다. 나무가 기관총에 갈려 나가면 어느새 그녀는 나무 위 가지를 타고 나이트 칙의 코어에 강렬한 한 방을 선사했다. 나이트 칙들이 공중에 떠 있는 그녀를 쏘려고 하면 그녀는 나비와 같이 푸른 방패, 로자 아줄을 키고 그 공격을 막아내며 사뿐히 착지하고 다시 한번 나이트 칙들을 농락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현란한 춤사위를 멍하니 보고 있던 콘스탄챠의 단말기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여기는 노움 1021. 콘스탄챠씨! 무사하십니까?”

 

“노움씨! 네! 저희도, 주인님도 무사하세요!”

 

“주인님이요?! 정말 인간님을 찾으신 건가요?”

 

“맞아! 그러니까 빨리 도와줘! 인간도 우리도 다 죽게 생겼다구!”

 

“알겠습니다! 리리스씨를 쫒아 가기에는 저희가 좀 늦어서..하여튼 금세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내 뒤쪽이 아닌 옆쪽으로 우회해서 돌아온 노움과 레프리콘의 합류로 21스쿼드는 무사히 구출되었고 리리스는 혼자서 나이트 칙 12기를 완파하는 쾌거를 이루어 내었다. 교전이 끝난 후 다섯 명의 바이오로이드들은 새근새근 숨을 쉬고 있는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이 분이..저희 사령관님?”

 

“예상했던 것보다 뭐랄까..대담하시다고 해야할까..”

 

 노움과 레프리콘은 그 격전의 와중에도 기절해 있었다는 사령관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고 그리폰은 한껏 콧날을 세우며 그들에게 자신의 무공을 자랑하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블랙 리리스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이제 한숨을 돌리는 콘스탄챠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 분이시던가요. 사령관님은.”

 

 콘스탄챠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블랙 리리스에게 아하하 하며 멋쩍은 듯이 웃으며 그녀에게 답했다.

 

“처음 절 보시더니..존댓말을 하시더라고요. 안하셔도 된다니까..말실수를 하기 싫으시다고..”

 

“바이오로이드에게 존댓말을 하는 인간님이라니..”

 

 노움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그를 다시 내려다보았고 레프리콘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간님들 중에 그런 분도 있구나라며 스스로 납득했다. 블랙 리리스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다시 그를 보았다. 그리고는 흡족하다는 듯이 만면에 미소를 짓고서 자신의 애총 블랙 맘바를 다시 쥐었다.

 

“자 그럼, 저희 ‘주인님’을 안전하게 오르카호까지 모시도록 하죠.”

 

“예? 저희 기지는..”

 

“기지는 옛적에 파괴되었어요. 라비아타 통령이 오르카호를 준비시켰으니 그쪽으로 대피하는게 수순일 거랍니다. 스틸라인의 두 분은 중열을 맡아주시고 나머지 두 분은 주인님을 보호하세요.”

 

“왜 당신이 명령을 해!”

 

“어머, 지금 제일 큰 전력이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후훗, 당신만 괜찮다면 멋대로 앞으로 나가셔도 상관없어요. 물론 저는 주인님만 지킬 거랍니다.”

 

 그리폰이 눈에 쌍심지를 켰으나 블랙 리리스의 말에 분한 듯이 머리 뒤로 깍지끼고 흥!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콘스탄챠는 그 모습을 보고 곤란하다는 듯이 하하 웃으며 다시 자신의 주인님을 등에 업었고 블랙 리리스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은발을 한 번 뒤로 넘기며 비릿한 미소와 함께 자신 있게 말했다.

 

“이제부터 그 누구도 저의 주인님께 손끝 하나 못 대실 거랍니다. 후후.”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행동에 콘스탄챠는 그녀에게서 자신과 같은 동질감을 느꼈다. 그녀 역시 자신이 모실 주인님만을 오매불망 찾아왔으니 그 시간만큼이나 메마른 가슴에 큰 충족감이 그녀를 감싸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그리폰은 저 여자가 드디어 미쳤구나 라며 혀를 쯧쯧거리며 찼고 노움과 레프리콘은 서로를 쳐다보며 우리 이제 어떡하죠 라는 시선을 서로 주고받으며 땀을 삐질 흘렸다.

 

“자! 빠르게 가보도록 하죠! 주인님과 저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손가락으로 숲 저편을 가르키며 당당하게 외치는 모습에 보리마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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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ㅓ! 씨발 1만 3천자! 내 머리카락! 내 손가락! 담편은 이거보다 더 길게 써야한다는 생각에 머리털 숭숭 빠진다 씨..분명 6~7천자로 시작했는데..

사령관은 라붕이라는 설정이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평범한 일상인이라는 점을 더 부각해서 쓸 생각이야. 과거 쓰다가 플룻이 현재 사령관으로 넘어갈 수 있는데 너무 야박하게 굴진 말아주라. 내 필력의 한계야.

읽어줘서 고맙고 피드백이나 오타 보이면 바로 바로 써줘. 자고 일어나서 수정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