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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https://arca.live/b/lastorigin/20022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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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범!”

내겐 여동생이 없다.

“오라범! 잠깐만!”

하지만 내게는 여동생보다 사랑스러운 닥터가 있다. 어떻게 닥터에 대한 내 인상이 만능 공돌이에서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런 아이들이 많긴 하지만,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었는지는 지금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길 것 같다. 어쩌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무슨 일인데?”

“지금 바빠?”

닥터는 닥터답지 못하게 꽤나 흥분한 모습이었다. 예전처럼 욕정을 품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닥터가 어느새 어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연례 연말 행사를 할 셈인가. 다행인점은 지난번의 문제를 보완한 것인지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에 말한 문제점은 해결한 걸까. 아니면 그 일을 말하려는 것일까. 나는 일단 닥터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척 말했다.

“글쎄다. 최후의 인류이자 바이오로이드의 지휘관으로서 철충들과의 전투를 지휘해야 하고, 오르카호를 관리해야 하고 각 부대장들이 올린 보고서를 검토해야 하고 제조실에 가서 오늘이야말로 새로운 아이가 나왔는지를 확인해야 하고 기타 등등을 빼면 딱히 바쁘진 않네. 응, 하나도 안바쁜 거 같아. 그래서 무슨 일인데?”

사실 하나도 바쁘지 않았다. 지휘는 자동전투였고 관리할 것은 없었고 부대장들에게는 알아서 하라고 했고 제조소에서 제조를 돌릴 자원은 사실 없었다. 그리고 기타등등은 더 이상 할만한 일이 없어서 적당히 붙인 말이었다.

“하나도 안 바쁘면 지금 꼭 봐야 할 것이 있어. 나 아무래도 특이점을 넘어선 거 같아.”

닥터는 자신을 소개할 때 자신이 7명이 된다면 특이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블랙홀이라도 통과한 거야? 뭔데. 한번 말해봐.”

내 말에 닥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서는 말하기 힘든 거야. 근데 이건 진짜 대단한 거야. 오라범이 본다면 입이 떡 벌어질 거야. 혹시 몰라서 턱이 빠졌을 때의 응급조치도 알아뒀으니 걱정은 안해도 돼. 내 연구실로 따라와봐.”

닥터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것들을 생각하면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되었다. 왜, 있지 않는가. 영화에서 보면 과학자가 만들어낸 무언가가 세계를 멸망시킨 것 말이다. 아, 이미 일어난 일인가. 인류가 다시 멸망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안심을 하며 닥터를 따라갔다.


“짜잔!”

닥터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기계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게 뭐야? 프라모델?”

그것은 놀이공원에서 볼법한 의자가 달린 작은 차량이었다. 아니, 바퀴는 없었다. 이상한 모양의 의자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무언가의 뒤에는 스위치가 달려있었다. 스위치를 본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누르려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누르려는 순간 닥터가 외쳤다.

“아, 오라범! 그거 누르면 안돼!”

그 외침에 나는 주춤했다. 버튼에 대한 욕망을 겨우 억누르며 나는 그 욕망을 기계를 만지는 것으로 대신했다.

“금속재질인거 보면 프라모델은 아닌데. 다이캐스트?”

“오라범은 요즘 유행하는게 3D 프린팅인거 몰라? 설마 내가 이거 하나 만들겠다고 금형까지 짜겠어?”

그것도 그랬다. 아니, 3D 프린팅의 유행은 이미 200년전에 끝난 것 같다만. 왜 알고 있는지는 묻지 마라.

“크흠,”

닥터는 귀여운 목소리로 목을 가다듬었다.

“이건 바로 타차원아공간순항기라는 거야.”

“그게 뭐야.”

적당히 붙인 이름이겠지. 나는 다시금 버튼을 누르려는 욕망에 지며 말했다.

“아, 누르진 말라니까. 쉽게 말하자면 타 차원으로 이동해 그곳을 아공간으로 구축,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는 장치야.”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인데.”

하나도 모르는 말이었다. 아니 단어 하나하나 분해하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단어들이 문장을 이루자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문장이 되었다. 아니 애초에 저런 문장이 성립할 수 있는 거야? 왜 오르카호에는 언어에 능한 아이가 없는 거지. 과거 인류는 너무 문과에 박한 것 같았다.

“오라범은 왤케 바보 같….”

‘뿅’

싸구려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효과음이 나타났다. 그리고 테이블에는…

“으아악!”

닥터가 보여준 기계와 똑같은 기계가 하나더 올라가 있었다. 뭐지? 귀신인가? 아니면 팬텀이 장난친건가?

“팬텀? 너야? 닥터에게 참치를 받고 날 골리려는 거야?”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팬텀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있어도 보일 리가 없지. 대신 내가 본 것은 나를 비웃는 닥터였다.

“오라범, 정말 바보네. 이게 타차원아공간순항기가 하는 일이야. 지금 일어난 일은 이 타차원아공간순항기가 과거로 이동해 이곳에 나타난 거야.”

“그러니까, 이 기계가 시간을 이동한다고?”

“단순하게 말하면 그렇긴 한데, 실제 기전은 말야, 우리 같은 3차원의 존재는 4차원의 시간축에 개입할 수 없잖아? 하지만 이 기계는 5차원의 축으로 우리를 이동시켜서 4차원의 시간축을 마음껏 이동하게 해주는 거야. 하지만 5차원은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5차원을 3차원으로 차원강하를 시켜서 우리가 5차원축에서 4차원의 시간축을 인지하고 마음껏 이동하게 해주는 거지. 그래. 네글자로 말하면 타임머신이야.”

마지막 6글자만 알아들었다. 여튼 시간을 이동하게 하는 기계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거로 이동했다는 건 미래에서 누군가가 보냈다는 거잖아. 그게 누군데?”

“바로 나야.”

닥터는 타차원 뭐시기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기계는 조금전 들렸던 싸구려 효과음을 내며 사라졌다.

“조금전에 나타난 이 타차원아공간순항기가 지금 내가 과거로 보낸 타차원아공간순항기야.”

“그럼 정말로 과거와 미래로 이동할 수 있다는 거야? 그게 닥터, 너가 발명한 거야?”

“흐흥. 대단하지?”

대단이고 뭐고 닥터의 말이 맞다면 이 전쟁은 우리의 승리였다. 지금 오르카 부대를 이끌고 과거로 가서 초기 철충을 물리친다면 이 세상은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오라범, 지금 우리 다같이 과거로 가서 철충을 물리치자는 생각을 했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을 멈

“오라범은 내 생각대로네. 지금 아무 생각도 안하지?”

춰봐야 의미가 없었다.

“물론 그럴 순 있어. 이 타차원아공…”

“잠깐, 그 이름 쉽게 말할 순 없을까? 타차원… 그 뭐시기는 너무 길잖아. 좀 더 간략하게 말하는 편이 상품성으로 더 나을 거 같아.”

팔진 않습니다.

“하지만 난 타임머신이라는 말이 싫어. 시간 기계가 뭐야. 이 장치는 시간을 이용하지도, 시간으로 움직이는 게 아냐. 그저 시간축을 이동하게 해주는 것뿐이거든. 애초에 왜 타임머신이라는 단순한 이름이 정착된 거야? 그러니 오라범도 이 단어에 익숙해져야해. 타차원아공간순항기.”

타차원아공간순항기. 아마 다시는 안부를 것이었다. 그냥 저 기계라고 말해야지.

“아무튼 이 타차원아공간순항기로 과거를 바꾸는 일은 해서는 안돼. 할아버지 할머니 오이디푸스 패러독스 콤플렉스 아무튼 안돼.”

“미지의 힘이 그걸 막는 거야?”

시간여행물의 클리셰중 하나였다. 과거를 바꾸려 노력해도 결국 바뀌지 않는다. 물론 클라이막스에서는 여차여차해서 바꾸는게 클리셰지만.

“그건 아냐. 좀 단순한 이유인데, 검증이 안되었어. 만일 과거로 가서 과거가 바뀌어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없다면? 철충을 과거에서 이기면 멸망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우리는 이 자리에 없고 이 타차원아공간순항기가 만들어질 리도 없잖아. 그러면 과거는 어떻게 바뀐 건데? 아무리 이 닥터라도 그건 알 수 없어. 그러니 하면 안되는 거야.”

“그럼 이 기계는 어디에 쓸 수 있는 건데? 그러면 그냥 장난감이잖아.”

“미래로 갈 거야.”

닥터는 웃으며 어디론가로 달려갔다. 연구실 한켠에는 천으로 덮인 무언가가 있었다.

“클리셰적이지만 조금전 본 건 테스트용 프로토타입이야. 진짜 타차원아공간순항기는 바로 이거야!”

닥터는 천을 걷으며 외쳤다. 은색의 기계가, 테이블에 놓인 것의 확대판이 그곳에 있었다. 의자는 두개가 있어 닥터와 내가 앉으면 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닥터는 자리에 앉았다.

“오라범! 여기 앉아!”

“하지만…”

“미래로 갔다가 조금 뒤에 도착하면 아무도 모를 거야! 우리는 미래로 가서 오라범이 어떤 일을 했는가 살짝 보고 오는 거야. 어때?”

미래를 본다. 공략을 본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 좋았다. 내가 어떤 미래를 만들지 알고 싶었다. 미래는 가만히 있는다고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건 가만히 앉아서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이런 기회가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닥터의 옆에 앉았다.

“그래서 언제로 갈 건데?”

“1년 뒤? 10년 뒤?”

언제 이 세상에 평화가 올 것인가. 내가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최대치를 넣으면 되는 것 아닐까?

“150년뒤는 어때? 미래로 갈 거 확실하게 미래로 가는 거야. 혹시 알아? 내 위인전이 있어서 그거 보면 쉽게 공략을 할 수 있을 지도 몰라.”

“조금 시간 역설을 건드는 느낌이지만 뭐, 별일 있겠어? 그럼 간다! 150년 뒤의 미래로!”

다이얼을 조작한 닥터는 레버를 힘껏 당겼다. 시야가 왜곡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5차원의 풍경인가. 입에서는 묘한 맛이 들기 시작했다.

“닥터! 이거 괜찮은 거야? 사람이 타도 되는 거야?”

“아, 맞다, 오라범!”

“뭔데!”

“이거 임상 테스트 안했어!”

“뭐?”

내 외침은 미래와 과거와 현재로 울려퍼졌다. 나는 미래의 맛과 미래의 냄새와 미래의 소리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뜨면 제발 평화로운 미래가 나를 기다리길. 그렇게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