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사령관 프롤로그 - 삼류 희극


악마 사령관 1화 - 말라비틀어진


악마 사령관 2화 - 신기루(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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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 Nahum

 

 사령관은 두 소녀가 반쯤 넋이 나간 모습을 보았다딱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에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신기한 모습을 보여줘서 주의를 끌다니대악마가 아니라 길거리 삼류 마술사나 할 짓이었다하물며 그는 말재간으로 이름 높은 군주거늘

 

 하지만 이것도 대화와 설득의 한 방안이다저 아이들에게는 이것이 제일 확실한 방법이었으니 악마의 긍지는 잠시 내려놓기로 하자사령관은 잡념을 털어내고 말을 걸었다

 

왔구나.”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린 닥터와 아르망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사령관은 그들이 그러면서도 당혹감을 다 감추지 못한 것을 여실히 느꼈다

 

부르셨습니까사령관님.”

 

그래앉을래?”

 

 사령관은 다가오는 둘을 가만히 응시했다이내 그의 입가에 씁쓸함이 감돌았다다른 아이들을 보고 짐작은 했지만이 둘은 특히 심각한 내면을 가졌다좀 달리 말하자면 죽어가고 있었다비유적인 표현인가

 

 닥터에게 끈적한 고독과 우울의 그림자가 달라붙어 있었다기억을 지워버린 자리마다 텅 비어 있었지만그 허무한 하얀색이 그녀의 마음을 오히려 난도질했다아르망은 거꾸로 빈 자리가 없이 가득한 슬픔과 죄책감에 타오르는 채였다그녀의 부서진 정신을 봉합하는 건 가까웠던 자매와의 추억그리고 그녀의 유언이라는 한 줄기 지푸라기였다

 

 그 모든 것이 둘의 영혼을 육체에서 발라내고 있었다죽어간다는 것은 비유 따위가 아니었다

 

빛이 조금 밝은가 보네불편한 것 같은데.”

 

 사령관은 그렇게 말하며 허공에 눈짓했다깨진 전등을 대신하고 있던 태양빛 광륜이 사그라들어 가을 햇살 정도로 바뀌었다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별말씀을.”

 

 원래라면 보이지 않을 태도에 닥터와 아르망의 눈에 깃든 의심이 더 깊어졌다. 사령관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먼저 대화를 시작할 계획이 아니었다. 검붉은 뱀의 눈동자가 갈색, 하늘색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고 마주하길 1분 정도, 마침내 거북해진 아르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사령관님? 본대는 현재 무사히 귀환하고 있습니다만.”

 

 사령관은 이러고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 아르망에게 혀를 차는 대신 그녀에게 맞추어 주기로 했다

 

그냥, 어쩌다 거울을 보니까 뭔가가 참 희한해진 것 같아서.”

 

희한하다고 하시면?”

 

골격이 갑자기 모습을 바꾸었다거나, 좀 어려졌다거나, 뇌파가 뭔가의 조종을 따라가는 것 같다거나? 이게 원래 인간한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나?”

 

 자신들이 놀란 부분을 정확하게 찌르는 그의 말에 닥터와 아르망의 표정이 살짝 질렸다. 잠시 그녀들과 눈을 맞추던 사령관은 무언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참 이상하지?”

 

사령관님? 그건 - ”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을 해치지 못하는 건 정신 제약 때문이야. 아무리 인간 같지 않더라도 뇌파가 그렇다면 말이야. 그건 모습이 인간이라도 뇌파가 인간의 것이 아니라면 해칠 수 있다는 말이겠지.”

 

 사령관이 책상에 올린 물건은 장전된 스틸라인 제식 플라즈마 피스톨이었다. 둘은 그를 쳐다보았다. 아까보다 뇌파에 덧칠한 선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닥터조차, 인간이라는 걸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총을 쏠 수 있다

 

 그들과 피스톨을 바라보던 사령관이 명령했다

 

닥터, 총을 들어라. 명령이다.”

 

 갑작스러운 명령에 놀랐던 닥터는 명령권이 강제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시 놀라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럼에도 사령관은 당황하거나 분노한 기색이 아니라 그냥 담담한 그대로였다

 

 대신 아르망이 권총을 잡았다

 

아르망 언니!?”

 

 놀란 닥터가 소리쳤지만, 아르망은 총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것은 정확하게 사령관의 미간을 겨누고 있었다

 

.”

 

 총구가 자신을 향하는 동안에도 사령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르망은 그 모습에 진작 계산을 끝냈지만, 아직 고민되는지 손가락 끝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사령관은 그런 그녀에게 망설임을 없앨 한 마디를 더해 주었다

 

아르망, 오르카 호에서 네 중요도는 어느 정도야?”

 

 눈을 휘둥그레 떴던 아르망은 결심했는지 이를 꽉 악물었다. 그리고 피스톨을 쏘았다. 시퍼런 초고열 탄환이 대기를 방전하며 날아갔다. 이 거리라면 강화된 육체, 아니, 바이오로이드라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파지직

 

 탄환은 어디선가 튀어나온 검은색 막에 허무하게 사그라졌다.? 아니, 아니었다. 그건 막이 아니었다.


 깃털로 덮인 거대하고 검은 날개가 사령관의 정복 등을 찢고 튀어나와 있었다. 플라즈마 탄환은 그것의 깃털 하나도 상하게 하지 못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이런 종류의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아르망의 안색이 아까보다 더 창백해졌다. 닥터는 아예 자리를 박차 의자를 넘어뜨리고 말았다. 어느샌가 날개를 감추고 원래의 인간 뇌파를 전면에 내세운 사령관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고약한 장난을 해서 미안해. 하지만 이게 좀 더… 확실할 것 같았거든.”

 

 아르망은 뻣뻣하게 총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탁자에 닿는 순간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모든 흔적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사령관의 번뜩이는 붉은 뱀 눈동자가 그것이 현실이었음을 상기하고 있었다

 

. 아주 확실했습니다. 이런 건 생각도 못 했지만.”

 

, 이게 대체 무슨. 언니?”

 

 상당히 여러 가지를 묻는 닥터의 물음에 아르망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해 주었다

 

처음부터 뇌파의 위에 뭔가 덧씌워진 것 같아서,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지만 확신이 없었는데… 권총을 꺼내신 시점에서 거의 확실해졌습니다.”

 

무슨 말이야?”

 

 아르망은 자신과 닥터를 번갈아 보았다

 

원래의 사령관님이라면 저나 닥터 양 같은 고급 모델로 이런 무의미한 일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일종의 테스트인가 했지만, 뇌파를 조작할 수 없다는 점은 둘째치고 그런 테스트를 시키기에는 저나 닥터 양의 중요도가 너무 높죠. 하물며 저는 기억 소거도 할 수 없어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는데. 제 중요도를 물어보신 것도 그래서입니다.”

 

예상했던 대로 대단하네, 아르망.”

 

 사령관의 찬사에도 아르망은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원래의 사령관… 은 어디로?”

 

 사령관은 옅게 웃었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 너희 둘 중 아무나 그걸 물어보기를 바랐는데.”

 

놀라긴 했지만, 그게 뭔가 사령관의 술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복잡한 방법도 생각해 놔야 했던 거고 말이야… , 그럼 우선 두 번째 질문부터 대답할까, 일단 육체는 살아있어. 바로 여기.”

 

 사령관은 자신의 몸을 가리켜 보았다. 닥터와 아르망은 거기에서 느껴지는 원래의 뇌파에 수긍하는 듯했다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지. 그 영혼이 지옥으로 끌려갔으니까.”

 

 비상식적인 대답에 아르망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신봉하는 과학에 대치되는 말에 닥터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속마음을 읽은 사령관은 그에 대답해 주었다

 

, 그 부분은 굳이 믿지 않아도 좋아. 중요한 건 놈이 지금 이 세상에 더는 없다는 부분이지, 거기가 지옥인지 아닌지는 별 게 아니니까.”

 

 다시 한번 검붉은 선이 솟아 인간의 뇌파를 죽여버렸다. 일직선, 뇌사 상태의 뇌파가 죽 이어졌다. 그러고도 사령관은 멀쩡히 말하고 있었다

 

그럼 첫 번째 질문으로 갈게. 닥터 네게 합리적인 대답은 다른 인간의 인격 정보, 반역한 철충 또는 AI겠지. 사실 근본적으로 그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아. 그들과 나의 공통점이 많으니까.”

 

 사령관은 거기에서 말을 쉬었다. 여기까지만 들을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닥터는 그렇게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묻고 말았다

 

그게 전부 아니라면 대체 뭐죠?”

 

그 대답을 들으려면 첫 번째를 수긍해야 할 텐데?”

 

수긍하도록 노력은 해 볼게요.”

 

 사령관은 다시 날개를 펼쳤다. 이번에는 뒤틀린 두 쌍의 뿔과 두 쌍의 날개가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에는 불꽃이 타고 있고, 가장자리마다 어두운 광휘가 휘감겨 있었다. 닥터는 지옥견의 이빨과 갈기를 드리운 그의 모습에 딸꾹질하고 말았다

 

신께서 우리와 우리의 형제들을 만드실 때 검고 흰 날개들을 드리우게 하셨지. 선인들을 이끌어 훌륭한 삶의 보답을 내리던 흰 날개는 천사라고 불렸다. 우리는 검은 날개를 펴고 죄인들을 붙잡아 불구덩이에 던지기에, 모든 문명에서 이렇게 부르더라고.”

 

 사령관의 뱀눈이 광채를 보였다

 

악마라고.”

 

 * * *

 

 사령관이 이야기하는 내내, 닥터와 아르망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인류 멸망, 이어진 군주들의 회합. 마지막 인간의 발견. 그가 예상 밖의 악인이었던 것. 그리고 수습을 위한 회의(조금 위엄 넘치는 각색을 포함한)와 그의 강림. 그것은 누가 말했더라도 정신병자 취급을 받기에 충분했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사령관은 과거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악마 군주였다.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제약될지언정, 그것만으로도 그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었다. 그들은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걸 납득하게 되는 극도의 모순에 빠져 있었다

 

 마침내 이야기가 끝났을 때, 닥터와 아르망은 각자 자신들의 생각에 빠져 대꾸는커녕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했다. 사령관은 끈기 있게 그들이 고민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아르망이었다

 

만약 그 모든 게 사실이라면, 아니, 가정하는 것도 의미가 없군요. 그냥 묻겠습니다. 저희에게 뭘 바라시는 거죠.”

 

 사령관은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생소한 질문이었다. 악마로서 그가 들은 질문은 9할 9푼 9리가 당신에게 뭘 요구할 수 있느냐는 것뿐이었다. 그는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없어. 아무것도.”

 

하지만 당신… 악마… 님은, 인류 문명의 재건을 위해서 여기 있는 게 아닌가요.”

 

 사령관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인류 문명의 재건을 원하는 것은 맞아. 하지만 그건 우리가 인간의 밝은 면을 찬미했기 때문이지. 너희를 희생해서 멸망 전의 타락을 돌이키는 것이라면 인간의 역사는 차라리 묻혀있는 것이 나아.”

 

우리가 정말 돌이키려는 건 너희가 인간인 세상, 너희가 원하는 세상이야.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것을 묻지 말고 너희가 바라는 것을 말해.”

 

 닥터와 아르망은 사령관의 말에 뭐라 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사령관은 그들을 이해했다. 태어난 이래 아무도 그들을 인간으로 보며 바라는 것을 묻지 않았을 것이다. 웃을 수 없는 아이러니였다. 그들을 세상에 있게 한 부모들은 인정하지 않고, 지옥에서 망자들을 고문하는 악마가 인정하는 천부권이라니

 

 아르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만약 저희가 더는 하기 싫다고 한다면, 너무 지쳐서 더는 못 하겠다고 말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사령관은 쓴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슬픈 질문이었다

 

너 스스로가 원하는 바를 말하는구나.”

 

 눈을 크게 떴던 아르망은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대답했다

 

말했잖아. 우리는 단지 너희를 돕고 함께 걷기를 원할 뿐이라고. 그게 너희의 선택이라면, 존중할 거야.”

 

죽여주시겠다는 건가요.”

 

그건 너희에게 너무한 처사인데.”

 

 사령관은 그렇게 말하며 태양빛 헤일로에서 빛살 한 줄기를 뽑아냈다. 빛이 녹아내리고 형태를 이루어 황금의 열쇠가 되었다. 그는 열쇠를 돌리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살아가는 이들은 다들 지옥을 생각해… 가까이 있으니까. 하지만 천국을 믿는 사람은 드물어. 너무나 멀고 꿈과 같은 이야기니까.”

 

 하지만 천국은 분명 존재한다. 그는 천국의 존재를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는 이들 중 하나였고, 뭇 필멸자들을 그리로 보낼 수도 있었다

 

이 세상에 더는 남고 싶지 않다면 내가 직접 천사에게 인도하지. 너희는 깨끗한 영혼이고, 살아있는 때에도 천국에 오를 수 있어.”

 

천국이라고요?”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닥터, 너는 무수한 세상의 학자와 기술자들을 만날 거야. 그 사람들도 선했으니 너를 사랑해 줄 테고 너도 그들을 좋아할 수 있겠지. 아르망, 샬럿이 멸망 전에 너희가 잃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있어. 너를 기꺼이 반길 테니 그곳에서 누리지 못했던 평안을 얻게 될 거야. 너희의 수명이 다하고 때가 되어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꿈이나 환상 따위가 아니라 진정한 낙원에서.”

 

하지만 저는 - ”

 

 사령관은 뭔가 말하려던 아르망을 가로막았다.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고 이해도 했다. 하지만 아르망이 죄책감과 의무감에 눌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물론 너희는 자신들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말하겠지. 그래, 너희는 낙원도 거부할 수 있어. 그리고 네가 지금 원하는 건 지옥행일 테고, 어쩌면 그조차 없이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지. 그러나 제발, 부탁하건대, 먼저 내 말을 들은 후에 결정해 줘.”

 

알겠습니다.”

 

고마워.”

 

 말을 시작하던 사령관은 문득 속으로 실소했다. 지금껏 그가 악마의 혀를 놀린 것은 죄인을 지옥으로 끌어내리거나 방황하는 자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말한 적은… 한 번뿐이었던가

 

 그리고 이렇게까지 진심을 담아 말한 것도 한 번뿐이었던가

 

내가 억겁 동안 세상을 보며 깨달은 바가 있다.”

 

 사령관은 담담하게 읊조렸다

 

희생이라는 건, 슬픔과 자책을 남은 이들에게 넘기는 행위이다.”

 

속죄라는 건,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행위이고.”

 

 희생한 영웅의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그것이 무색하게 평생 괴로움을 안고 간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유언을 듣고도 끝내 고통스럽게 사는 이들처럼

 

죽은 자들은 남아서 일어나는 일을 보지 않지. 그들은 그것을 바라지도 않지.”

 

그리고 남아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 건 살아있는 이들이지.”

 

 사령관은 둘의 마음속 텅 빈 구멍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알고 있을 거야. 너희가 죄책감을 가지는 죽은 아이들은 너희 스스로 마음을 쥐어뜯길 원하지 않았지. 오히려, 너희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랄 뿐이야.”

 

 뭇 선하고 상냥한 이들이 자신이 떠나고 남은 이들에게 바라듯이

 

나는 그들의 뜻을 거절하고 스스로를 죽이는 것도, 그들이 본다면 제발 그만하라고 울 행위를 반복하는 것도.”

 

 본인은 그것에 속죄란 이름을 붙이지만, 정작 죽은 자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그러니 자신만을 위한 속죄일 뿐이다

 

모두 옳은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 소녀는 침묵했다. 사령관은 다시 둘의 내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설득을 이어갔다

 

그들을 추모해도 좋아. 기억해도 좋고, 사진을 보며 슬퍼해도 좋겠지. 모든 슬픔이 나쁜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것에 파묻혀 스스로를 녹슬게 하지는 말아라.”

 

너희는 그들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나 그렇다면, 너희는 그들에게 빌린 삶을 헛되고 고통스럽게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정녕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사령관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아르망. 너는 샬럿이 네게 남겼던 유언을 항상 의심하면서도 거기에 매달려 살아왔지. 빌린 삶을 살아온 셈이야. 네가 따라갈 불빛이 그것밖에 없어서.”

 

이제 말해주마. 그건 반은 진실이지만 반은 전임의 명령에 따른 거짓이었다. 놈은 너를 붙잡아둘 족쇄로 써서 그녀의 뜻을 모욕했지.”

 

이제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게. 그녀가 정말로 말하려던 건 이것이었어.”

 

 아르망과 닥터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사령관은 들고 있던 금빛 열쇠를 허공에 꽂아 돌렸다. 세상 모든 과거의 비밀을 보관한 군주의 함 중 하나, 죽어가는 이들의 오르골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 수많은 목소리가 있었다

 

 괜찮아요아무 일도 없었던 거예요괜찮아

 

 당신들의 탓이 아니야.

 

 너무 울지 마세요우리가 더 슬퍼지는걸요

 

 미안합니다죄책감을 떠넘겨서

 

 당신들의 상처를 아파하세요그럴 자격이 있어요

 

 자책하지 않아도 돼요아무도 당신들을 원망하지 않아요

 

 아무도 당신들을 원망하지 않아요

 

 용서의 목소리들을 듣고 하얗게 질린 아르망은 필사적으로, 마치 그들을 부정하려는 듯 그 수많은 목소리 사이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하나를 찾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없었다. 단 하나의 음성 단 한 명의 대원도 그녀를 증오하지 않았다. 그저 애달프게 그녀를 껴안아 주기만 했다.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받은 삶을 무가치하게 던져버리지 마세요

 

 그렇게 하나씩 모든 마음이 떠나가고, 함의 가장 아래에 있던 금빛 목소리가 마침내 드러났다. 그녀의 동료, 약간은 바보 같은 친구, 그녀가 지금까지 고통을 무릅쓰고 버티던 이유

 

 아르망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것을 보았다. 그녀의 뺨을 어루만진 금빛 목소리가 샬럿의 마지막 진심을 전해 주었다

 

 바보 같은 아르망.

 

 또 우네요그러지 말아요

 

 저 때문에 불행을 자초하지 말아요

 

 저는 그게 더 마음 아프답니다

 

 정말 저를 위한다면 말이죠

 

 부디 당신도 행복할 길을 선택해 주세요.

 

 아르망은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 * *

 

 닥터는 눈물을 펑펑 쏟는 아르망을 안아주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했다. 아르망은 샬럿이 죽었을 때 울지 않았던 만큼 지금 울고 있었다. 멍청해, 전부 바보들이야, 누가 그렇게 말하라고 했나요, 그냥 미워하면 편할 거 아니에요… 사령관은 울음에 뭉개진 그녀의 말들을 들으며 조용히 오르골을 다시 닫았다

 

 신이시여, 당신의 아들이 감히 그 흉내를 내어 이 가련한 아이들의 죄를 사했습니다. 하지만 자애로우신 아버지께서도 이 아이들을 용서하셨으리라 믿나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만 용납하소서

 

 사령관은 울음을 그치고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리는 아르망에게 손수건을 주었다

 

이제 괜찮아졌구나.”

 

 아르망과 닥터는 눈이 붉어지고 눈물범벅이 되어 참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녀들의 마음은 아까보다 훨씬 온전하게 된 상태였다. 사령관은 이제야 다시 물을 수 있다

 

이제 선택하겠니?”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은 그녀들이 구태여 말을 하게 하는 대신, 둘의 마음에 깊이 공감해 주었다. 느껴졌다

 

 닥터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너무 많은 기억을 잃은 그녀는 부디 좋은 추억을 얻기를 원했다. 아직 아이다운 순수함이었다. 사령관은 그녀의 선택에 한 점 후회조차 남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르망은 너무 오래, 지친 채로 책임감도 의지도 아닌 것에 매달려 왔다. 그녀는 1년 전 샬럿이 죽었을 때 같이 쓰러졌던 것과 같았다. 사령관은 그녀의 뜻 역시 존중했다. 적어도, 자신의 행복을 부정하며 지옥행을 택하지는 않을 테니까

 

잘 선택했어.”

 

 그는 조용히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아 아르망의 오른손에 감아주었다. 소녀의 손등에 흰 깃털의 문양이 나타났다. 이자는 선인일지니, 그를 따뜻이 맞이하라, 우리 족속의 다른 형제들이여

 

생각을 바꿔 줘서 고마워.”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아니… 폐하.”

 

 사령관은 딱딱한 호칭 대신 그녀 특유의 말투를 되찾은 것에 미소를 지었다

 

 아르망은 천천히 일어나서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찬란한 흰빛이 새었다. 문턱에서 발걸음을 멈칫한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더 홀가분하고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르망이 문을 넘어가는 순간, 닥터는 그녀가 지금까지 긍정해본 적이 없는 것을 보았다. 선하여 한평생 고통스럽게 살았던 영혼을 맞이하는 천사들의 날개를, 그들이 무릎 꿇어 예를 표하는 광경을

 

 그대는 가장 위대한 추기경만큼이나 자신의 삶을 책임지며 여기까지 왔습니다이제 오래전 누렸어야 할 복됨을 누리시길

 

 문이 다시 닫혔다. 작은 빛의 조각들이 몇 흩날리다가 그마저 사라졌다. 방 안에는 사령관과 닥터만이 남았다. 한참이나 침묵한 끝에, 문득 닥터가 물었다

 

아르망 언니는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건가요?”

 

글쎄. 그녀는 살아있으니, 그렇게 단정하지는 못하겠네. 언젠가, 어쩌면, 천국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다시 만날지도 모르지. 아닐지도 모르고.”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그 선택은 오롯이 그녀의 것이 되리라.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채. 사령관은 그녀에게 조용한 축복을 남기고, 닥터의 손을 잡은 채 사령관실을 나섰다

 

 신기루처럼 허무하던 그의 손은 분명한 실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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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의 신은 존재하며, 그는 라오챈이다. 


 이번에도 많은 추천과 댓글 고마워! 언제나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이야!


 이번화로 빌드업은 끝남. 다음화부터는 이야기가 총체적으로 진행될 것. 사령관이 개인적으로 위로해주길 바라는 바이오로이드 댓글로 적어주면, 가장 많은 애를 반영하도로고 노력해볼게. 


 전임 지옥행은 쓰고 있음. 곧 0.5 버전으로 올라갈 거야. 


 다시 한번 읽어준 모든 라붕이에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