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긴 세월, 칸은 케시크라는 이름을 가졌을 때 부터 많은 전투를 거쳐왔다.

대부분의 적들은 칸의 리볼버 캐논 앞에 힘없이 스러져 갔으나, 

때로 마주 하는 강력한 적들은 목숨의 댓가로 그녀의 신체 일부를 가져가기도 했다. 

그것은 그녀의 손가락이 되기도했고 오른팔이 되기도 했다.


멸망 전 인간들의 기술은 그런 칸의 상처를 허무하리만치 쉽게 회복시켜 주었다.

어떠한 상처라도 작은 나노머신만 주사하면 마치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 것 처럼 치료되었고, 그녀는 늘 그것을 마법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칸은 팔이 떨어진 것 정도로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게된 자신을 발견했다.


시간이 흐르고, 지금의 사령관과 같이 싸우게 되었을 때도 그녀의 처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 인간인 사령관은 유능했지만 그렇다고 칸이 부상을 입는 것 까지 막지는 못했다. 

잘린 팔을 들고 돌아온 자신을 붙잡고 우는 사령관을 그녀는 덤덤히 웃으며 달래곤 했다. 

그녀는 사령관을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가 아는 전쟁이란 원래 그런 것 이었으니까.


그보다 더 시간이 흘렀다. 

끝이 보이지 않던 철의 군대는 종말을 고했고 별의 아이들은 모두 우주 어딘가의 고향으로 떠나버렸다. 

당장 내일부터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칸은 당황했다. 


이젠 뭘 해야 하지?  


성실한 군인인 그녀는 느긋하게 낮잠을 자거나 시시한 영화를 보며 시간을 때우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주어진 시간들은 그녀에게 혼란을 줄 뿐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워울프의 조언에 따라 볕이 잘 드는  창가 아래에 누워있기로 했다. 

흔들의자에 기대어 앉아 몸을 늘어뜨리자, 반쯤 열린 창가로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어왔다. 

정오의 특유의 나른함을 느낀 칸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칸의 귓가에 포격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천천히 가라앉던 칸의 정신을 순식간에 현실로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눈을 부릅뜬 칸은 주변을 황급히 돌아보았다.


방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칸이 기대어 있는 창가 아래로 한낮의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고, 

간혹 목장에서 키우는 동물들의 울음소리만이 한가로이 들릴 뿐이었다. 

그래도 칸은 긴장을 풀지 않고 사방을 경계하며, 머리맡에 두었던 리볼버 캐논을 집어들었다.


“..잘못 들었나.”


한참이 지나고, 포격 소리가 자신의 환상이였다는 것을 깨달은 칸의 몸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긴장이 풀리자 근육이 이완되며 묘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그 감각은 통증이라기엔 약했고, 간지럽다기엔 조금 아픈 느낌이었다.

칸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그 기묘한 감각을 없애려 손끝을 긁었다. 

강박적으로 손가락 끝을 갉아내던 칸은 무언가를 깨닫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곳은 언젠가 칸이 폭격으로 손가락을 잃었던 자리였다.






2



그날 이후, 칸의 머릿속에 때때로 포격소리나 기관총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대원들과 시시한 대화를 주고받을 때도 그것은 예고없이 찾아왔다.

그럴때마다 칸은 팔을 들어 가려운 곳을 긁었으나 벌레가 기는 듯한 찜찜한 기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전쟁의 기억을 양분삼아 자라난 가려움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칸을 괴롭혔다. 

그것이 살갗을 예리한 칼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으로 변하는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살살 긁는 것은 파내듯 할퀴는 것으로 바뀌었고, 칸의 팔뚝이 얕고 깊은 상처들로 덮이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붉고 긴 상처들은 그녀의 팔에 새겨진 호드의 문신 마저 덮게 되었다.


그때부터 칸은 자신을 바라보는 대원들의 눈빛에 걱정이 더해진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서랍속에 고이 보관해 두었던 구급상자를 꺼내야만 했다.


“읏..”


달빛도 비추지 않는 새카만 밤, 칸은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능숙한 솜씨로 붕대를 감았다. 

수복 머신을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이런 일로 사령관을 걱정시키기는 싫었다.

그녀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그는 칸의 작은 상처에도 한참을 눈물지었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후..”


떨리는 손으로 붕대를 매듭지은 칸은 자신의 두 팔을 돌아보았다. 

낡은 천조각으로는 손톱자국과 피딱지가 가득한 팔을 감출 수 있었으나, 

그 위로 스미는 핏물까지는 어찌 할 수 없었다. 

농담으로라도 보기 좋다고 할 수 없는 그 모습에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래도 칸은 보기 흉한 상처가 가려진 것을 위안삼기로 했다.




3




완전히 뭍으로 올라온 오르카 호의 복도에서는 퀘퀘한 물냄새 대신 햇빛에 잘 말린 이불 냄새가 났다.


그래서 오르카 호에 살고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은 복도를 따라 걷거나, 

오르카 호 밖으로 산책 나가는 것을 꽤나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니 복도를 걷던 칸이 탈론페더를 마주친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앗! 칸 대장님!”


바쁘게 패널을 조작하던 페더는 멀리서 칸을 발견하고는 펄쩍 뛰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붉게 상기 되었던 페더의 얼굴은 칸을 마주하자마자 순식간에 엘리트 참모의 그것으로 변했다. 


“아, 잠시 산책을 하고 있었다.”


칸은 날듯이 달려오는 페더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방 안에 홀로 있자니 미칠 것 같아 나왔다.’ 는 속마음이 나와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페더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칸의 옷자락을 잡아 끌었다. 


“아이참, 칸 대장님! 한참 찾고 있었는데! 어서 가요!”


“음? 나를...?”


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페더를 마주 보았다. 

전쟁 전이나 후나, 부대원들이 그녀를 먼저 찾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드물다고 해서 그걸 거절할 명분도 없었기에 

칸은 순순히 페더의 손에 이끌려 오르카 호의 복도를 걸어가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곳은 칸에게도 익숙한 곳이였다. 

언젠가 호드의 숙소로 사용하던 방문 앞에서 멈춘 페더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대장님!’ 

이라는 말만 남기고 방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저 아이는 전쟁 전이나 후나, 마이페이스인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구나.

엉겁결에 어두운 복도에 홀로 남게 된 칸은 그렇게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분, 그리고 십분이 지났다. 하지만 금방 돌아온다던 페더는 돌아오지 않았다. 

문득 칸은 불안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식은땀에 맺혔다.

물론 철충이 사라진 이 땅에 남은 위험요소는 없었다.

그것은 근거 없는 불안감이었다. 그러나 칸은 조용히 방 문앞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러니까...준..를..”


“...빨리..오면...게 해!”


닫힌 문 사이로 페더와 누군가가 다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꺼운 문 탓에 말소리가 끊겨 들렸기 때문에 칸은 문에 귀를 가까이 대었다. 


“꺄아아악!!!”


“........!!!”


페더의 비명소리를 들은 칸의 몸이 그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쾅 소리와 함께 부수듯 문을 연 칸은 핏발선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 이곳저곳에 걸린 풍선,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벽지를 본 칸의 눈이 커졌다.

쿽카멜과 탈론페더가 들고 있는 플랜카드에는 ‘칸 대장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라는 글씨가 삐뚜름하게 쓰여 있었다. 


“이게..무슨..”


“꺅?! 칸 대장님?”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칸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당황한 페더의 손에 엉거주춤 들려있던 폭죽이 펑 하고 터졌다.


“...!”


가까이서 터지는 폭죽 소리는 포격소리와 꽤 닮아 있었고, 그것은 칸의 트라우마를 깨우기에 충분할 정도로 큰 소리였다.

비명도 없이 쓰러진 칸은 양 손으로 머리를 잡고 움찔거렸다. 


사라졌던 팔다리의 아픔, 옛 동료들의 얼굴 같은 것들이 칸의 기억 깊은 곳에서 융기해 그녀의 머릿속을 마구 헤집었다. 

바늘로 후벼파는 듯한 날카로운 고통에 칸은 손을 벌벌 떨며 얼굴을 긁었다.

감긴 눈 사이로 피눈물이 비어져 나왔고, 뒤집힌 손톱이 그녀의 얼굴에 붉은 선을 만들었다.


“아아아악!!!”


머릿속에서 끝없이 울리는 폭발음을 지우려 칸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칸은 전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라 탁해진 하늘과 피로 물든 붉은 땅 위에서 칸은 절규했다.







2편 링크 - 

https://arca.live/b/lastorigin/20204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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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조절 실패로 내일 2편 올리거나 묶어서 다시 올릴듯..

더 안 늘어트리고 2편에서 끝낼 거야.

사실 해피엔딩으로 할지 세드엔딩으로 할지 고민중이라 조금 오래 걸린것 같다.

글/엔딩관련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이야.


늘 봐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