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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설중규(雪中葵)
눈 덮인 태산 위에 샛노란빛 해바라기
구름낀 아래서도 태양을 쫓아간다.
그러나 이제는 지쳐 시들기를 원하네.
1장 -
황금빛 비치건만 해바라기 잠들었네
태양은 슬퍼하며 그녀에게 속삭이니
아직은 저기 뿌리에 따뜻함이 있구나.
- 2장 -
???
- 3장 -
리제 Scissors Lise
주인님을 사랑해요. 저, 시저스 리제는 그렇게 태어났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님을 사랑한답니다. 누구보다도, 저보다도, 자매들보다도. 그게 당연한 거죠. 주인님이니까요.
‘리제 언니, 저는 괜찮아요. 아, 상처요… 별거 아니에요. 어제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져서…. 정말, 괜찮아요. 누가 절 때리겠어요… 그것도 한밤중인데.’
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님을 사랑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누구보다도. 그게 당연한 일이랍니다.
‘레아, 명령이다. 저 지역을 통째로 태워버려. 뭐, 아군? 아군보다 적군의 피해가 더 클 거다. 넌 아군이 아니라 자매를 걱정하는 거겠지. 말했다, 명령이라고. 태워버려.’
그럼요.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님을 사랑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다프네 년이 얼굴은 꽤 마음에 들었는데, 젠장, 바이오로이드가 뭐 이렇게 쉽게 망가져? 새로 하나 더 만들어.’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님을… 사랑… 해…
‘제발요, 제가 더 잘할 테니까, 제발, 아쿠아 말고 차라리 저를… 제발요, 제발, 제발! 사령관님, 제발요!’
주인님을… 사랑…
‘레아 언니는 이미 기억 소거가 끝났어. 미안해, 리제 언니. 아쿠아가 있었다는 건… 아마 기억하지 못할 거야….’
주인님을… 주인….
‘꽉 잡으세요, 드리아드! 다프네가 혀를 못 깨물게 해야 한다고요! 제발, 다프네, 제발 이러지 말아요! 정신 차려! 리리스, 빨리 도와줘!’
나는… 내가…
‘이제 일어나세요, 다프네… 네가 이렇게 된 걸 알면 널 분해할 거란 말이에요. 일어나요. 제발. 일어나, 일어나라고! 제발!’
…
대체
어떻게 너를 사랑할 수 있어, 사령관?
* * *
딸그락. 소완이 가져온 찻주전자가 찰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다과상 위의 찻잔들에 차가 따라지자 향기를 내는 김이 피어올랐다. 뛰어난 요리사답게, 그녀는 차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윽하고 깊은 향에 앉아 있던 리리스가 미소를 지었다.
“좋은 냄새가 나네요.”
소완은 리리스의 칭찬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스 양도 그렇게 생각하시니 기쁘군요. 귀한 차랍니다.”
입맛도 고급이라 자부하는 둘은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취향은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아마 옆에서 누가 딴지를 걸지만 않았다면 차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누었을 것이다.
“으, 그냥 쓴 냄새인데 이게 귀한 거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응? 뭐야, 왜?”
리제를 보던 둘은 잠시 서로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리리스가 입을 가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여튼, 저 어린애 입맛… 리제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너, 너, 어린애 입맛이라니, 자꾸 그럴래, 이 해츙!”
“푸흣… 큽…. 흠흠, 리리스 양, 다른 사람의 취향을 그렇게 놀리는 건 좋지 않습니다. 자, 리제 양을 위해서는 아우로라 양이 끓인 커피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으으, 저 해츙…. 맨날 놀려….”
잠시 중얼대던 리제는 달달한 커피를 마시자 기분이 풀렸는지 다시 헤실거리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걸 본 리리스는 또 웃었고, 리제가 다시 열을 내며, 소완은 사이에서 둘을 떼어놓았다. 이렇게 친한 셋이라니, 다른 대원들이 보면 놀랄 만할 광경이었다.
리제, 리리스, 그리고 소완은 멸망 전부터 삼 얀데레, 일명 삼얀이라고 불렀다. 그 셋이 함께 모이면 주인을 독차지하려고 싸우거나 심지어 죽이기도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대원 대부분은 오르카 호의 삼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셋이 만나는 일도 없고 대화를 하는 걸 본 적도 없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오르카에서 가장 서로를 아끼는 벗들이었다. 그들은 멸망 전부터 같은 집에서 한 노부인을 모시고 살았었고, 인류가 멸망한 후에는 100년이나 함께 세상을 떠돌았다. 함께 웃고, 울고, 가장 사소한 속마음까지 서로 털어놓은 한 세기 반은 길었다.
그들이 모신 주인이 여자나 악독한 사령관이 아니라 좋은 남자였더라도 이들은 다투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셋이 만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그저 여유가 없어서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 셋이 자주 만나게 된 이유 역시, 여유를 되찾아서였다.
다만, 그것은 아주 수상쩍은 여유였지만.
“…그래서, 사령관은 또 뭘 하려는 걸까요.”
실없는 대화를 하던 중에도, 결국 사령관까지 화제가 옮겨왔다. 리리스는 정말 말하기 싫다는 얼굴이었고, 다른 둘의 표정도 함께 어두워졌다. 하지만 주제를 피하는 것도 곤란했다.
사령관이 요즘 왜 이러는 걸까?
그것은 최근 가장 뜨거운 감자 중 하나였다. 이들이 모일 수 있는 게 그 덕분이라면, 단지 웃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데 그칠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자신의 신변만을 각별하게 주의하던 사령관이 블랙 리리스를 옆에서 떼어놓는 일은 거의 없었다. 소완은 오르카 호 안의 하급 대원들이나마 그들의 보급품을 먹을 만한 식사로 바꾸느라 정신이 없었다. 리제 역시 매일 탐색을 나간 탓에 제대로 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들이 만나지 못했던 이유는 사령관이 바이오로이드를 한없이 하찮게 본 탓이었다.
그러나 대략 삼 주 전, 갑자기 태도를 바꾼 사령관이 경호원과 탐색 대원들의 일정을 조정하고 주방에도 인원을 더 차출하며 그들 모두 시간이 남게 되었다. 그건 갑작스러운 만큼이나 정말 황당할 정도의 변화였다. 작전도 최대한 인원을 아끼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부상자들도 전부 수복을 받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간단히 말하면 그거였다.
사령관이 바이오로이드를 사람 취급하는 ‘척한다.’
당연히, 한 번 이미 속았던 대원들은 누구도 그가 갱생했다고 믿지 않았다. 착한 시늉을 하는 걸 보니까 뭘 하려나 보네. 이거 이러다가 건수라도 잡으면 어디든 한 번에 날아갈걸. 이야, 저 정도 연기력이면 멸망 전에는 덴세츠에서 일한 거 아니야? 함부로 입 밖에 내는 경우는 적었지만 그게 대원들 사이에서 퍼진 공공연한 비아냥이었다.
소완이 걱정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휘관들이나 경력 많은 이들이 최대한 말리고 있는데도, 사령관을 노골적으로 미워하는 대원들이 늘어나고 있사옵니다. 매일매일 받던 공포가 없어지니까, 이제 그럴 여유가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소완의 말에 그들은 불편하게 침묵했다. 확실히 함대 내의 분위기는 물론 각 거점과 주거지의 분위기도 그랬다. 당장 그들 삼얀마저 사령관에 대한 증오가 수면 아래까지 부상한 상태였다. 배가 부르면 딴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격언처럼, 공포가 희석되기 시작하면 얼마든지 사령관을 증오할 수 있었다.
그저 언제 그걸 빌미로 뒤집어엎을지 모르니 표현하지 못할 뿐. 가장 위험한 건 자제할 줄 모르는 이들이었다.
“우리는 다들 괜찮더라도… 인원이 많은 부대는 걱정이에요. 위에서 일반병 사이에서 나오는 말을 다 틀어막을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그래도 앵거 오브 호드나 발할라는 괜찮사옵니다. 대장들이 워낙에 아래를 잘 잡고 있으니까… 둠 브링어야 뭐, 소첩이 지난번에 보러 갔는데, 대장인 메이가 그러니 지금도 말을 꺼내는 쪽이 없더군요. 역시 문제는 스틸라인입니다.”
“브라우니들이 아무 말이나 하면 정말 어떡하나 모르겠네요. 안 그래도 말에 필터가 잘 없는 아이들인데….”
“소첩이 밥에 말을 못 하게 하는 약이라도 타야 하옵니까…. 하아, 그런다고 될 문제도 아니지만…. 응? 리제 양, 왜 웃는 것이옵니까?”
“어, 응?”
그녀들의 대화를 듣던 리제는 자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고마움 때문이었다. 리리스와 소완은 다른 부대를 걱정하는 말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자매나 동료들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들의 친구에게는 그렇게 입을 열 자매가 남지 않았다. 그녀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리제는 그런 친구들의 호의에 고마움을 내색하지 않고 바보같이 웃었다.
“그냥. 그럼, 식당에서 떠드는 것들이라도 다 내쫓아야 할까, 생각해서 말이야.”
“…으음, 좋은 제안이긴 한데, 리제 양, 식당에서는 리제 양이 가장 시끄러운 것을 아시는지요?”
“아니, 이 햇츙이, 말을 해도 꼭 그러기야?”
리제와 소완이 투닥거리는 것으로 심각한 분위기는 쫓겨나고 말았다. 결국 그녀들은 웃음과 미소로 모임을 마무리해야 했다. 리리스와 소완은 먼저 가겠다는 리제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밝게 웃었다.
“잘 가, 스토커. 가는 길에 넘어지지 말고.”
“이 해츙! 날 애로 알아!”
“아하하하…. 잘 가시지요, 리제 양. 내일 또 봐요.”
그러나 돌아가는 리제의 얼굴에는 좀 더 쓸쓸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 * *
꽤 넓은 정원은 아름다웠다. 지면과 세워진 기둥마다 활짝 만개한 꽃들이 기하학적 예술적 양을 이루며 늘어섰다. 그 사이를 흐르는 작은 개울과 돌들도 최대한 어울리는 식으로 배치되었다. 전체의 색조와 계절별 식물들 역시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다른 부분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정원의 주인은 항상 별것 아니라고 멋쩍게 웃었어도, 사실 그건 누가 보더라도 감탄할 만한 정원이었다.
하지만 리제는 아름다움보다는 다른 것을 더 느꼈다.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슬픔. 후회. 그리고 고독이 그들이었다. 정원에 그녀만 있다는 것이 이유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그런 것에서 외로움을 느낄 성격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고독이었다.
리제는 자매들을 떠올렸다. 다프네. 그녀는 완치되었으나 아직 수복실에 있었다. 애초에 한 번 분해되었던 그녀는 리제와 공유하는 기억이 별로 없었다. 레아? 요정들의 맏언니는 자매 중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자신의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어떤 기억 소거도 감정을 지울 수는 없었다. 드리아드… 리제와 가장 닮은 그녀는 기억 모듈을 뜯어낸 후 섬으로 갔다. 특히 막내를 아끼던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곳에 남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쿠아.
‘언젠가 이 정원이 활짝 피면, 언니들도 와서 다 같이 구경해. 정말 멋질 거야.’
아쿠아가 항상 하던 말을 떠올린 리제의 입가에 힘겨운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매들에게 선물 상자를 하나씩 주고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게 그녀의 마지막 웃음이었는데 어찌 잊을까. 리제는 속으로 책망의 말들을 떠올렸다.
거짓말쟁이 아쿠아. 예쁜 정원을 보여준다면서. 다른 꽃은 다 피었어도 가장 예쁜 하나가 없잖아. 넌 어디로 간 거니. 최소한 우리한테 준 선물, 비밀번호라도 알려줘야지. 정원은 네가 가꿔야지. 언니가 항상 그랬잖아.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 하는 거라고…. 나한테 이걸 떠넘기다니,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니….
견디지 못하고 허리를 숙인 리제는 흐느꼈다. 흐느끼고 헛구역질했다. 입에서 나는 단내가 역겨워 토할 것 같았다. 그래, 그녀는 단맛을 몹시도 싫어했다. 단 것을 싫어하는 그녀인데도, 쓴 차를 마시지 못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아쿠아가 자주 그런 걸 끓여주었으니까
그녀는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그 슬픔을 나누어주고 싶지 않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 덕에 입맛이 어리다고 놀림을 받으면서 함께 웃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면 혼자 이곳에 찾아와 울었다. 혼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그녀에게는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가족이 없었다. 친구들이 안다면 그녀를 혼냈을 것이다. 왜 혼자 괴로워하냐고. 함께 울어줄 수도 있지 않으냐고.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야, 얘들아. 슬픔은 나눈다고 반이 되지 않아. 둘이 되고, 셋이 될 뿐인걸. 난 잘 알고 있어. 겪어 봤으니까.
“아쿠아….”
리제는 아쿠아가 준 상자를 품에 안은 채 한참이나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고 걱정할 이 하나 없으니, 마음 놓고 시간도 잊은 채 울었다. 울고, 울고, 울어서, 눈이 아프도록.
그래서 한동안 그녀의 눈물이 다 말라버리도록.
그렇게…
바스락.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인기척을 느낀 리제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발이 풀잎을 스치는 소리, 흙과 돌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정원에 누가 있었다. 리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누구지?’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자매들은 들어올 수 없거나, 아예 존재를 몰랐다. 사정을 아는 대원들도 페어리 자매들의 비극을 존중해 아무도 이곳에 오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것도 아닌데, 혹시 리리스나 소완일까? 그녀에게 할 말이 있어서 고민하다가 들어왔나?
의아해진 리제는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걷기 시작했다. 인기척은 정원의 중심부 쪽에서 나고 있었다. 길을 따라 모퉁이를 몇 번 돌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민 끝에, 마침내 그녀의 시야에 작은 인영이 들어왔다. 리제는 멀리 있는 그 얼굴을 알아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
보이지 않는 뭔가가 목을 졸라 말을 멈춘 듯했다. 그 순간 리제는 소리를 지르는 것을 막기 위해 입을 앙다물어야 했다. 꽉 쥔 손이 손톱에 깊숙하게 찔려 피를 흘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로부터 아무런 아픔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보이는 것, 그리고 뇌에 느껴지는 것에 너무 집중해 있었다.
정원의 한가운데에 선 사람의 모습은 그렇게 익숙한 형상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런 외모가 된 것이 삼 주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익숙하지 않다고 해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런 ‘종’은 이 함에 하나밖에 없으니까. 리제가 본 것은 그 길게 늘어뜨린 흑발, 그리고 인간의… 뇌파였다.
정체불명의 방문객은 사령관이었다.
‘사령관? 여기에? 사령관이, 여기에 있다고?’
그녀는 스스로 되뇌고도 그 간단한 사실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감정이 너무 격해서 뇌가 그것을 다 처리하지 못한 것인지 그 찰나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령관이, 여기에. 기가 막혀 그 말을 몇 번 중얼댄 끝에야 그녀의 혈관을 타고 막혔던 생각들이 폭주했다.
왜 당신이 여기 있어?
왜?
감히?
왜 당신이, 어째서, 무슨 자격으로. 감히, 감히, 감히.
당신이 그 아이를 죽였잖아. 죽여서 해체했잖아. 뼈와 살을 가르는 그 소리를 다들 듣게 했잖아.
그러고서 온 거야? 이제 착한 척 좀 했으니까 여기에 와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착한 척 좀 더 해 보려고 온 거야?
대체, 너 따위가 무슨 자격으로!
리제의 손에 짓눌린 나무껍질이 산산이 부서졌다. 아까 다 울었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눈물이 펑펑 흘러내렸다. 친구들과 함께하며 조금 나아졌던 기분이 단번에 나락에 처박히는 듯했다. 리제는 숨은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소리치고 싶었지만, 사령관에게 직접 나가라고 그렇게 말할 만큼 공포가 희석된 건 아니었다.
그녀는 그게 싫었다.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싫었다. 정신 제어에 걸려 조금이나마 그에 대한 원망을 희석하려는 자신이 싫었다. 사령관이 본색을 감추고도 한참이 지난 지금에야 증오를 느낄 수 있는 겁 많은 자신이 싫었다. 그리고 지금, 앞으로 뛰쳐나가 소리치지는 못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
- 너무 싫었다.
“….”
눈물을 닦은 리제는 나가기 위해 애써 몸을 일으켰다.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나가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사령관이 이곳에 있는 꼴을 계속 보고 있을 수는 더더욱 없었다. 사령관이 싫은 건지 그를 보면서 여전히 떠는 자신이 싫은 건지도 헷갈렸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에 대해서 더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고통이었다.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미안, 아쿠아. 네 언니는 최악이야. 여기에 저런 게 들어왔는데. 네가 기껏 아름답게 꾸민 정원을…’
그 뒤의 독백은 말로 정리되지도 않은 슬픔과 자책이었다. 리제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깨문 채, 회색 무언가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령관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떼었다….
…회색 무언가?
리제는 이유도 모른 채, 한 조각 본능에 이끌려 목이 아플 정도로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것’에 다가가는 사령관이 보였다. 그녀는 몇 초 동안 사령관이 뭘 하려는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 인간 남자. 네모난 석비. 회색, 글이 쓰인. 그러니까, 저건, 대체, 뭐였더라? 돌? 그냥 돌이었나? 혼란스러운 생각의 조각들이 느릿하게 맞춰졌다. 사령관의 손이 그 회색 비석에 닿았을 때야, 그녀의 뇌는 가까스로 분명한 사실을 짜낼 수 있었다.
사령관이 아쿠아의 묘비에 손을 대고 있었다.
“ - !”
이가 악물리며 갈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이성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머릿속에 붉은 안개가 가득 끼며 한 줌 망설임과 공포를 모조리 날려버렸다. 그는 인간이고 자신이 바이오로이드라는 사실도 잊게 할 정도로 격렬한 분노였다.
손대지 마.
손대지 마, 그 손을 거기에 대지 마.
그 더러운 손을 그 아이의 묘비에 감히 대지 마, 네까짓 게 감히 그럴 수는 없어, 이 해충, 쓰레기, 그 손 떼, 죽일 거야, 죽여버릴 거야!
자기도 모르게 쌍날 가위에 올라간 손이 그 손잡이를 잡고, 근육이 다칠 정도로 힘을 준 팔이 철충을 조각내는 던지기의 마지막 자세까지를 취했다. 그건 역린을 건드린 자에 대한 격노였다. 리제의 본능은 언제나 꿈꿔온 것처럼 사령관을 죽여버리려고 했다.
“크학 - !”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럴 수 없었다. 거기에는 가장 큰 대명제가 상실되어 있었다. 그녀에게는 바이오로이드였다. 바이오로이드는 주인을 죽일 수 없다.
리제는 머리에 가해지는 고통에 휘청였다. 그녀의 뇌리에 박힌 정신 제어가 마지막 순간에 몸을 멈추게 했다. 쨍그랑. 힘을 잃은 가위는 날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져 바닥에 부딪혔다. 찢어져 피가 흐르는 손을 내려다본 그녀는 뒤늦게 자신이 하려고 한 것, 그리고 실패한 것이 뭐였는지 깨달았다. 그 순간 그녀가 한 생각은 자신이 왜 그렇게 했는지가 아니었다.
왜 자신이 실패했는가였다.
천천히 무릎을 꿇은 리제의 입에서 한탄인지 흐느낌인지, 아니면 비명인지 모르는 숨소리가 흘러내렸다.
“으, 흐으, 으으으으… 으윽, 흐윽… 으흐으윽…!”
움직이지 못하는 성대에 막힌 절규가 울음소리처럼 흩어졌다. 정신 제어의 고통을 동반한 현기증이 엄습했다. 제압 코드가 그녀의 신경계를 얽매며, 몸을 지탱하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갔다.
분노를 잃은 리제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사령관이 그녀가 있는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분명했다. 사령관을 죽이려고 하다가 실패했고, 그걸 들켰다. 이제 나도 아쿠아를 따라가겠네. 그게 마지막 생각이었다. 그녀는 희미해지는 감각에 뺨에 닿는 바닥의 차가움을 느꼈다.
의식이 저 아래로 침잠했다.
* * *
거센 바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윙윙거리는 바람은 폭풍의 그것처럼 한껏 맹위를 떨쳤다. 그것은 아무리 깊게 잠든 이라도 깨어나게 할 자연의 거대한 합주곡이었다. 연주자는 산, 바다, 그리고 추위.
리제는 눈을 떴다. 그녀는 바위에 기대져 있었다. 사야 가득히 새하얀 눈과 얼음이 보였다. 어딘지도 모를, 다만 결코 오르카 호는 아닌 거대한 설산의 풍경이 그녀를 둘러싸고 굽어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묘하게도 전혀 춥지 않았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녀는 조심스럽게 땅의 눈을 만져 보았다. 이건 차가웠다. 대체 이게 뭔 상황이지… 벙해져 서 있기만 하던 그녀는 갑자기 느껴지는 익숙한 뇌파에 날카롭게 뒤를 돌아보았다.
“…사령관?”
사령관은 그녀를 마주하고 앞의 바위에 앉아 있었다. 리제는 잠시 이것이 꿈인가 생각했다. 꿈을 꾸면서, 옆에 있는 사령관의 뇌파를 느끼는 건가? 그녀는 확인을 위해 커다란 돌을 들어 그의 머리를 부수려고 해 보았다. 하지만 안 되었다. 그녀는 꿈속에서 사령관을 수도 없이 죽였었다. 즉, 이건 꿈이 아니었다. 환영, 아니면 아예 가상현실일 터였다.
생각을 마친 리제는 헤실헤실 웃으며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령관 앞까지 간 그녀는 한껏 비아냥을 담아 입을 열었다.
“히, 히히, 히히히히. 꿈인 줄 알았는데… 제가 아직 살아있네요, 사령관님? 아직은 그 착한 척을 더 하셔야 하나 봐요, 저를 바로 해체기에 던져버리지 않으신 걸 보니까…. 이건 VR, 아니, 마키나의 환영인가요? 모르긴 몰라도 되게 귀한 물건일 텐데. 그런 것까지 써서 고작 저한테… 왜죠?”
고개를 숙인 사령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령관의 바로 앞에 얼굴을 들이민 리제는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저기, 사령관님, 뭐라고 말이라도 해 보세요. 저 지금 너무 궁금하거든요. 지금쯤 약물도 안 맞은 채로 몸이 갈리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죽이려고 했다고요, 주인을, 고작 바이오로이드가. 어차피 리제 모델이 뭐 중요한 것도 아닌데 그냥 갈아버리죠? 예전에 어떤 이프리트가 우회적으로 시도했을 때는 스틸라인의 1할을 갈아버렸으면서… 이건 뭔 삼류 코미디죠? 네? 네? 네?”
사령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 모습에 오히려 독이 오른 리제는 실성한 것처럼 웃었다.
“왜 대답을 안 해요? 아아, 그냥 이 꼴을 보고 싶었나 보죠? 하긴 어차피 나 같은 겁쟁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네가 아쿠아를 죽일 때는 무서워서 화도 못 냈는데, 안 그래? 네가 좀 착한 척이라도 하니까, 안 무서우니까 그제야 미워할 수도 있었지! 히히, 히히히히!”
리제는 자살할 수 없는 자신의 상태가 몹시도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한바탕 떠들고 목을 찌르면 편해질 텐데. 하지만 자살도 불가능한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말이 전부였다. 그래서 고삐 풀린 것처럼 아무 말이나 횡설수설했다. 어차피 사령관에게 무기를 들이밀었던 이상, 이 웃기는 착한 척이 끝나면 산 채로 해체될 것이다.
리제는 사령관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그를 계속 건드렸다. 비아냥, 그냥 분노, 원초적이다 못해 유치한 욕설들. 최근 조용하던 조울증과 다른 질환들이 다시 도진 그녀는 자신의 말에 너무 집중해 있었다. 그리고 사령관이 어차피 중요한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사령관이 뭐라고 했을 때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 - ”
“응? 뭐라고요?”
리제는 과장된 동작으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사령관은 그의 말을 반복했다.
“미안…하다.”
잠깐 멈칫했던 리제는 곧 환한 비웃음을 지었다.
“아아, 그 착한 척 좀 하지 마세요, 사령관님. 속는 것도 한 번이죠. 두 번은 안 통한다고요. 정말 역겨워서 속에 든 게 다 넘어올 거 같아요…. 음, 그러고 보니까 궁금하네요. 주인 얼굴에 토하는 건 모듈로 안 막아 뒀을까요? 조금만 더 해 보세요, 제가 하고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리제의 독설은 상대를 욕하는 게 아니라 아무렇게나 내뱉는 분노에 가까웠다. 말을 하면 할수록, 그녀가 더 분노하고 상처를 받고 있었다.
“히, 히히. 뭐 하세요, 빨리 더 착한 척 좀 해 보세요. 미안한 척, 불쌍한 척… 네? 네? 네? 빨리요, 빨리, 빨리, 속이 울렁거려요, 그러니까 그 아가리를 벌려서 날 다시 비웃어 보라고!”
고함을 지른 리제는 현기증이 다 가시지 않아 이마를 짚고 비틀댔다. 그런데도 붉은 눈동자는 똑바로 사령관을 노려보고 있었다. 동공이 제멋대로 움직여 이제는 아예 정신이 나간 것처럼도 보였다.
“하하, 아하하하, 널 죽이려고 해서 놀랐어? 왜, 리제 모델은 무조건 주인님, 주인님, 그렇게 따를 것 같아? 아니면 이번에는 페어리를 갈아치울 명분이라도 필요해? 아아, 그런 거구나! 근데 넌 몰라, 우리는 차라리 죽고 싶었거든, 네가 다프네를 한 번 다시 만든 날, 그리고 아쿠아를 죽인 그날 이후로! 갈아치우고 싶으면 갈아치워!”
그렇게 말한 리제는 사령관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사령관은 그를 닦지도 않고 잠시 눈을 감았다. 리제의 눈에는 그조차 조롱으로 보였다. 그녀가 다시 거친 독설을 내뱉으려는 순간이었다. 사령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리제는 그의 대답을 기대하는 듯했다. 머뭇거렸던 사령관은 곧 말을 이었다.
“진심으로, 미안해. 너희에게 이런 짓을 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이런 짓을 당하도록 한 것이. 그게 더 큰 죄겠지.”
“아아, 우리가 그렇게 된 건 자초한 거라는 소리지? 그렇지? 그렇지? 천한 바이오로이드 것들이 알아서 안 기어서, 이런 짓을 당했다는 거지? 역시 사령관님이에요,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그 의미가 아니었어.”
“와아, 또 틀렸어요? 역시 저는 해충 소리밖에 못 하는 머저리라 모르겠네요, 무슨 뜻이죠, 왜 그런지 가르쳐 주실래요? 왜, 왜, 왜?”
“….”
* * *
사령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아예 다른 세상까지 온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말을 하면 할수록 리제의 적개심이 더 깊어지고 있었다. 전임 때문에 갖게 된 갖가지 정신병이 터져나온 그녀는 자신이 곧 죽으리라 생각하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두서없이 내뱉는 중이었다. 이건 대화도 뭣도 아니었다. 당연히 설득할 수도 없었다.
‘그래, 너와 내가 함께 리제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그 시저스 리제 모델을. 정말 대단해. 인간의 사악함과 무심함은 여기까지도 할 수 있다는 거지?’
그 짧은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리제는 쉴 새 없이 내뱉고 있었다.
“사령관님, 빨리 대답해 보세요. 왜죠, 왜죠, 왜죠? 정말 궁금해서 그래요. 멍청한 바이오로이드 년에게 주제를 알게 해 주셔야죠, 그렇죠?”
“말을 하라고, 이 개자식아! 말해, 말해, 말해, 말해! 뭐야, 뭐야, 뭐야, 뭐냐고!”
사령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로의 대화를 포기했다. 당장 그도 더는 리제의 말을 견디기 힘들었고, 그녀의 뇌와 모듈은 괴리를 견디지 못하고 정신적 자살을 시도하기 직전이었다. 잠깐 손을 들어 리제의 말을 멈추게 한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그녀에게 애매한 진실을 말했다.
“그래, 다 틀렸어. 나는 ‘그’ 인간이 아니고, 그 ‘인간’도 아니니까.”
아리송한 말에 리제가 잠시 표정을 찡그리는 순간이었다. 시커먼 먹구름이 밀려와 사령관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붉게 빛나는 뱀눈이 그 사이에서 빛나는 가운데, 인간의 뇌파가 죽어 가라앉았다. 그러자 피처럼 붉고 불길한 의식의 선이 전면으로 나섰다.
리제는 어지러운 정신에도 불구하고 당황해 뒷걸음질하고 말았다.
바이오로이드가 뇌파를 감지하는 건 오리진 더스트의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능력 중 하나였다. 어떤 장비, 수술, 실험으로도 그걸 가로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철충과의 전쟁에서 완패하고 만 것이다. 철충을 인간으로 인식하고 망설이는 걸 제거할 수도, 인간이 아닌 것을 인간이라고 보게 만들 수도 없었으니까.
다른 모든 것은 속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꿈, 환상, VR에서조차 속임수일 수 없었다. 그들은 물론이고 철충의 기술로도 마찬가지였다. 리제는 자신을 붙잡던 광기가 싹 빠지는 것을 느꼈다. 분노가 순식간에 가라앉고 오싹한 느낌이 등을 지나갔다.
“너… 너… 인간, 인간이…”
사령관은 대답 대신으로 검은색의 날개를 펼쳐 보였다. 차가운 바람이 휘날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차가운 삭풍은 인간의 몸에 깃든 초월적인 존재를 알아보았다. 사납던 눈보라가 휘어지고 흩날려 순간 하늘이 텅 빈 창공을 드러냈다.
그것이 리제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한 감각에 어깨를 움츠렸던 리제는 미친 개새끼마냥 미쳐 날뛰던 자신의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긴 했지만, 조금 전처럼 완전히 망가진 상태는 아니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혼란에 빠진 리제를 보는 사령관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여기까지 그녀를 진정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이 틈에 빨리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그조차도 리제의 머릿속에 가득한 정신병을 한 번에 없애는 건 힘에 부쳤다. 그녀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이건 다시 제자리걸음일 것이 분명했다. 그건 그래도 괜찮았다. 이성이 돌아온 그녀라면 설득하지 못할 건 없으니까.
문제는 어디까지 말해서 설득해야 하는가였다.
그는 지휘관인 아스널에게도 모든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위험했고, 그녀에게는 진실의 일부만으로도 충분하기도 했다. 더 강인했던 그녀는 절망하고 분노했을지언정 망가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리제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닥터나 아르망 이상으로, 원래도 불안했던 정신이 지독하게 망가진 그녀였다. 사령관은 알 수 있었다. 불완전한 진실은 언젠가 지독한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그 결론에 도달한 사령관은 이마에 손을 짚으며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것 참, 비밀이라고 하면서 벌써 3명이나 알게 되는구나. 천사들과 전쟁을 할 때도 이렇게까지 생각대로 안 풀린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이 웃기지도 않는 상황에 빠진 스스로를 자조하며, 그는 말을 시작했다.
* * *
모든 것을 들은 리제는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참이나 침묵했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적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사령관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 아닌가. 머뭇거렸던 그녀는 곧 가시 돋친 목소리로 날카롭게 물어왔다.
“그럼… 아쿠아의 정원에 왔던 건 어째서야. 당신이 정말 악마라면… 왜 그곳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지도 알 텐데.”
반쯤 불신하는 리제의 표정에 한껏 긴장했던 사령관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이 말을 하는 건 별로 현명하지 않을 듯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이건 도리가 없었다. 또 거짓말을 해야 할 것이고, 애초에 납득시킬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잠깐의 주저 끝에 뒤에 해야 할 말들을 정리한 그는 어쩔 수 없이 최악의 사실을 대답해야 했다.
“난 애초에 다른 대원들도 최대한 만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쪽은 워낙에 원한이 지독하게 달라붙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어린 원혼이 성불도 하지 못한 채 한 장소에 매여있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죽은 자매에 대한 말에 리제의 표정에 다시 불신과 분노가 드리웠다.
“원혼이라고… 그 아이가…? 아니, 아니… 헛소리, 너, 감히 아쿠아의 이름을 팔아?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말까지 믿을 것 같아!”
손에 힘을 잔뜩 준 리제가 앞으로 발을 떼자 사령관은 반 발짝 정도 뒷걸음질했다. 지금 그는 평소처럼 대원들의 악몽을 억누르며, 동시에 원혼을 위로해 풀어주고, 거기에 리제를 데리고 다른 세상으로 나온 데다가 정신의 정화까지 해 극도로 지친 상태였다. 다시 조울증이 치솟으려는 리제가 달려들었다가는 자신이 힘 조절을 못 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일 것이다. 당장 그녀를 설득해야 했다.
비록 지독하게 싫은 방식일지라도.
이것밖에 방법이 없나? 굳이 힘겹게 묻어둔 상처를 파헤쳐야 하나? 그는 아까부터 수천 번도 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왔다. 그럼에도 수천 번의 질문은 모조리 같은 답에 도달했다. 그래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는 절대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테니까.
사령관은 아르망의 때와 비슷한 자기혐오를 느끼며 리제를 멈출 문장을 말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상자, 아쿠아의 선물이지? 그 아이가 비밀번호를 알려줬어.”
막 사령관의 멱살을 쥐었던 리제는 제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사령관은 그 짧은 찰나 동안 그녀의 얼굴을 지나는 당황과 분노와 놀라움과 슬픔의 복잡한 엮임을 보았다.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몇 번이나 열리고 닫혔던 리제의 입은 결국 경악 어린 한마디를 하고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상자라면 사령관이 어떻게든 알 수 있다. 그가 본 적도 있고, 다른 바이오로이드한테 물어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비밀번호, 그건 아쿠아가 비밀이라며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마음속으로 간직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 영영 전해지지 않은 선물이기도 했다. 당연히 사령관이라고 해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 남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리제의 손이 덜덜 떨렸다. 멱살을 쥐고 흔들려고 했지만, 그만큼의 힘이 도저히 들어가지 않았다. 뭐라 중얼거리고, 입술을 짓씹고, 이를 서로 부딪치던 그녀는 결국 사령관의 목에 매달리다시피 한 채로 중얼거렸다.
“말해. 아니, 말해줘. 제발… 말해줘.”
“….”
리제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사령관의 머릿속에 갑자기 형제의 말이 떠올랐다. 바로 이 순간을 내다보고 한 말이 분명했다.
‘미래를 안다는 건 사실 축복일 뿐만은 아니네. 바꿀 수 있는 운명이 있다면 아닌 것도 있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선고받을 때. 아끼는 아이들이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걸 볼 때. 나는 이 힘을 저주하지. 막을 수도 없거늘 차라리 몰랐으면, 하고. 자네도 언젠가 비슷한 걸 알게 될 걸세. 과거는 미래보다도 바꿀 수 없는 종류니까.’
맞는 말이야, 바싸고. 과거는 바꿀 수도 없어. 그래서 후회밖에 할 수가 없는 것 같아. 이미, 그렇게 정해진 거니까. 아쿠아는 죽은 것으로, 리제는 망가진 것으로. 그러니까, 더 후회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거지. 사령관은 이것이 옳은 선택이길 빌며 아쿠아가 해준 말을 작게 읊조렸다. 비밀번호는 무슨 번호나 단어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아이다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 무섭지만 예쁜 우리 언니, 리제.
“…그게, 그게?”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마른 눈으로 상자를 내려다보던 리제는 곧 비밀번호를 따라서 중얼거렸다. 작은 알림과 함께 경쾌한 금속음이 울렸다. 삐리릭. 달칵.
몇백 번의 밤과 낮이 지나도록 닫혔던 마음은 그 단순한 말에 쉽게도 열렸다.
“아….”
상자 안을 들여다본 리제는 이내 힘없는 신음을 흘렸다. 안에 든 것들은 조촐했다. 잘 보관된 작은 꽃씨들. 그리고 말린 꽃장식을 어설프게 붙은 리제와 아쿠아의 사진들. 별로 솜씨가 좋은 것도 아니고 꽃장식 몇 개는 제대로 말려지지 않아 부스러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건 사랑하는 언니들에게 어린 막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고개를 숙인 소녀의 붉은 눈이 깜빡였다. 점점 물기를 머금어, 반짝이는 수정처럼 되어, 그렇게 마른 꽃씨들의 위에 비가 되어 내렸다. 그녀를 바라보던 사령관이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아. 악마니까. 나는 그 인간이 아니야. 그러나 너희가 지금까지 겪은 고통은 전부 내 탓이 맞아.”
리제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무릎을 꿇었다. 사령관은 우울하게 다시 중얼거렸다.
“미안해, 리제. 진심이야.”
* * *
사령관은 리제가 넋을 잃은 틈에 그녀의 머릿속에 남은 정신병의 파편들을 완전히 뽑아냈다. 그러고도 석상처럼 상자만 보고 있는 리제가 간신히 일어서기까지는 또 한참이 걸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 건지, 그들이 설산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꽉 닫혀 있던 꽃봉오리들이 다시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시 아쿠아의 묘비 앞에 선 둘은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있었다.
리제는 무심결에 어깨에 묻은 눈을 만져 보았다. 눈은 천천히 녹아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가웠다. 그녀가 겪은 비현실적인 경험은 전부 사실이었던 걸까. 문득 아주 약간의 의심이 돌아온 그녀는 사령관을 보며 물었다.
“…아쿠아는 떠나면서 뭐라고 했나요. 슬퍼하지 말라고 우리한테 위로의 말을 남겼을 것 같은데요.”
사령관은 묘비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 그렇게 말주변이 좋지는 않았어. 춥고 힘들었다. 언니들이 보고 싶다. 그게 다였네. 그리고 이상한 말을 했는데… 해충은 꾹꾹 눌러야지…?”
사령관은 영문 모를 유언을 떠올리며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리제는 그것에 살짝 놀랐다가, 곧 슬픈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시험이었어요. 맞아요, 그 아이는 말주변이 안 좋았죠. 그 말은 사령관이 오기 전까지 아쿠아가 가끔씩 저한테 하던 말이었어요. 원래의 사령관은 물론이고 다른 대원들도… 자매들도 이제는 모르죠. 저만 기억해요.”
사령관은 대답하지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리제도 그와 눈을 맞추지 않고 중얼거렸다.
“당신은, 정말로, 그가 아닌 거군요.”
“그래.”
“하지만 그가 있었던 것이, 당신의 탓이고요….”
“…그래.”
리제는 숨을 고르려 깊게 들이쉬었다. 머릿속을 불태우던 분노는 완전히 가셨다. 더는 눈앞의 사내, 모습마저 달라진 존재에게 증오를 느끼지 않았다. 그녀들에게 그 모든 고통을 주던 사내가 지옥 밑바닥에 처박혀 있으리란 말에서는 심지어 기쁨과 고마움도 느꼈다.
그럼에도 순수하게 고마워할 수만은 없었다.
불탔던 마음에 남은 재의 이름은 원망이었다. 이것이 옳은지도 아닌지도 모르겠는, 하지만 그래도 마음을 쥐어뜯는 원망.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자매들을 죽인 장본인이 아니었다. 그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하찮은 아이들을 위해 여기까지 직접 오기도 했다. 그의 행동은 그저 철저한 선의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 결과가 이곳이다. 아쿠아의 묘비 앞에 선 그녀.
‘아쿠아…. 아쿠아.’
한참이나 사령관의 옆에서 그 묘비를 보던 리제는 몇 번이나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주저하고 말을 고쳐야 했다. 닫혀 있던 꽃봉오리들이 열리기 시작한 때야 자신이 말하려던 바를 간신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사령관은 그때까지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사령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었는걸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 모든 게 당신의 탓이 아니라고는 생각해요… 그런데, 도저히.”
“마음 깊숙이 용서할 수가 없네요.”
사령관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용서는 차라리 바라지 않고 있어.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 모든 건 내 탓이 맞으니까.”
그래, 용서는 차라리 바라지 않는다.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자신이 이 일을 어떻게 끝낼지 그 결말까지 정해놓은 순간부터 그는 결코 용서를 바라지 않았다. 차라리 지독하게 원망을 받기 원했다. 그래야만 그녀들이 언젠가 해피 엔딩을 맞았을 때, 모든 일이 끝난 마지막 사진에 그녀들과 그녀들의 적이 함께 서게 될 때…
…자신이 그 자리에 없어도 괜찮을 테니까.
“비밀은 당분간 지켜줘. 오늘은 네 마음이 너무 망가져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했지만, 아직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밝히기엔 곤란해.”
“해충과 요리사 년… 아니, 내 친구들에게까지 비밀을 숨기기는 어려울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 셋 말고는 아무도 모를 거예요.”
‘이제 셋도 아니고 다섯이 됐네. 정말 대단한 비밀인걸.’
사령관은 실소하며 중얼거렸다.
“그거면 충분해. 고마워.”
“난 고맙다고 하지 않을게요.”
그림자가 진 창백한 얼굴에 미소가 살짝 반짝였다.
“그럴 줄 알고 있었어. 갈게.”
땅에 늘어진 검은색 머리칼이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며 사령관의 주위로 그림자 깃털들이 휘날렸다. 사령관은 그대로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리제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참 악마다운 연출이다… 아이러니했다. 악마의 모습을 한 그가 인간보다 인간답다는 것은.
리제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말했다, 그러기엔 마음의 상처가 너무 크다고. 잃은 게 너무 많다고. 적어도, 이 순간에는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과거의 상처가 그냥 상처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리제는 결심하고 발을 뗐다.
“주인님.”
생소한 호칭에 뒤를 돌아보았던 사령관의 눈이 놀라움을 담아 커졌다. 살며시 다가온 리제가 사령관의 목을 뒤에서 껴안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사령관을 안고 있던 그녀는 느리게 속삭였다.
“힘내 주세요.”
사령관은 당혹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리제는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제가 언젠가 주인님을 용서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리고 한 발짝 물러났다. 사령관은 마지막까지 놀란 그대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리제는 슬픈 표정으로, 그러나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아쿠아의 묘비 앞에 앉아 그를 쓰다듬었다. 원래 이곳에는 아쿠아가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정말로 그녀 혼자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조금이나마 덜 쓸쓸한 것 같았다.
다시는 믿을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벌써 흔들리고 있어. 믿지 않으면 속지도 않을 텐데… 아쿠아, 너희 언니는 너무 바보인 것 같아. 그렇지 않아?
반짝이는 눈물이 떨어져 묘비 옆, 막 펼쳐지는 해바라기들의 꽃잎을 적셨다. 위로하는 빗방울처럼. 슬프게. 슬프게. 그리고 조금은 기쁘게….
따뜻한 빛을 내려 서릿발을 깨노니
시들은 꽃잎들도 돌아올 수 있던가.
마침내 다시 피어난 꽃망울이 우노라.
설중규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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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화인 것이다. 항상 고마움. 사실 3화는 개인적으로 전개를 잘못해서 다시 쓰느라 올리고서도 ‘아 ㅅㅂ ㅈ됐다 이거 ㅈㄴ 못썼는데’ 했는데 그래도 많은 추천이 박혔더라. 역시 라오챈은 신이다.
(그래도 3화는 리멬할거임.)
이번 회차의 주인공은 4표를 받은 리제. 개인적으로 리제랑 삼얀 트리오를 참 좋아해서 즐겁게 쓸 수 있었음. 제목을 고르느라 고민했는데, 틀딱시조에 설중매, 눈오는 곳에 매화란 게 나오더라고. 해바라기 같은 리제니까 아 이거다 ㅋㅋ 하고 매화만 해바라기로 해서 썼음.
다음화는 또 이틀 후에 올라감. 보고 싶은 애 써주면 참고할 것. 라스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