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오빠가 시킨 거 다 했어! 물도 다 길어놨고 양초도 다 채워놨어! 이제 약속대로 전설 이야기 해주는거지?”


“이요올, 꼬맹이 다시 봤어. 근데 이 오빠가 논문 마무리 작업 때문에 좀 바쁘거든? 물 길어논걸로 양치랑 세수하고 있어봐. 마무리 하고 곧 갈게”


희희낙락하며 뛰어나가는 꼬맹이를 보며 청년은 다시금 종이에 머리를 쳐박았다. 최소한 내일 밤까지 논문 개요를 완성하지 못한다면 학장님이 수녀님과 몽크들의 신 아자젤의 이름으로 그녀를 갈아마실 것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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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매일 오는 기회가 아니야. 이 신학 전공 대학원생, 아니 지금은 음유시인으로서. 이런 고급 인력이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해 생생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흔하지 않다고? 그럼 어디서 부터 이야기를 해볼까. 응? 처음부터 들려 달라고? 그래, 그럼 오직 금속과 불꽃만이 가득하던 암흑의 세계부터 시작할까?


이 세계는 말이야, 이런 초록빛 수풀과 푸른 빛 강물이 흐르기 전엔 금속과 불꽃만이 가득한 세계였어. 먼지와 불길만이 가득한 세계는 철로 된 악마들이 지배했었어. 인간과 엘프, 그리고 오크들은 그들을 두려워하며, 또한 경멸의 의미로 철충이라 불렀지. 네 허리까지만 오는 작은 녀석부터 저 거대한 소울시티 기념관보다 큰 녀석까지 철의 악마들은 크기와 모양이 다양했지만, 공통점이 있었어. 온 몸을 빈틈없어 검은 철로 감쌌고, 어둠 속에서도 붉게 빛나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 상상해봐. 어두운 밤중에 화장실을 가는데, 갑자기 수풀 속에서 붉은 빛이 번뜩하고 빛나더니 검은 괴물이 불꽃을 확!!!!


어... 많이 놀랐어? 미안, 미안. 아무튼 이야기 계속 한다? 아무튼 그 지옥의 악마들은 세계를 지배하면서 세 종족들을 전부 죽이려고 했었대. 근데 여기에도 참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어. 세 종족이 힘을 합쳐서 대항했다면 그 악마들을 물리칠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세 종족은 이미 서로를 미워하며 싸우고 있는 중이었어. 인간은 오크들을 전부 잡아다가 봉인해 버렸고, 엘프는 보이는 족족 잡아다가 노예로 썼다고 해. 우리나라에서 노예들 전부 해방한 이유가 이 잘못을 되풀이 하지 말기 위해서야. 이야기가 좀 샜는데, 아무튼 그런 이유로 세 종족과 악마들의 전쟁은 세 종족의 패배로 끝났어.


전쟁에 패배한 세 종족은 멸망의 위기에 몰렸어. 오크들은 악마를 피해 저 추운 북쪽 지방이나 지하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고, 엘프들은 자신들의 숲과 마천루 사이로 숨어들었지. 마천루가 뭐냐고? 멸망 전 세 종족들이 살던 큰 집이야. 집 위에 집이 있고 그렇게 수십개의 집을 위 아래로 겹쳐놓은 귀족들의 궁전이래. 아무튼 뭐 그렇게 오크와 엘프들은 잘 숨어서 명맥을 이어갔대.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지. 악마들은 세 종족 중 인간들을 제일 증오했다고 해. 인간이 다른 주 종족에게 저지른 죄에 대한 지옥의 왕의 처벌인걸까? 악마들은 인간을 불꽃으로 태우는 것으론 모자랐는지 저지른 죄악만큼의 영혼을 빼앗아 갔고, 인간들은 이를 ‘휩노스의 저주’라 불렀어. 그렇게 저주를 받은 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지. 저주와 불꽃에 의해 인간 종족은 멸망했어. 


하지만 여기서부터 신나는 이야기가 시작된다구. 인류의 아버지, 세 종족의 구원자. 홀리 어스의 지배자, 살아서 신이 된 자, 악마의 영혼을 삼킨 자, 심연 속 촉수를 끊어낸 자, 여신의 남편. 위대한 ‘베르메스 페룸 1세’가 이쯤 등장하지.


베르메스 페룸은 생전 자신의 이런 칭호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대. 진정한 영웅에게 화려한 수식어 따위는 필요 없는 법이야. 암, 그렇고 말고. 그 분은 자신을 “사령관”이란 호칭으로 부르라고 했다고 해. 저 복잡한 수식어를 다 붙이기 귀찮으니까 나도 그냥 사령관이라고 부른다. 


사령관이 이야기에 등장하려면 좀 더 이전으로 돌아가야 돼. 우선 대지모신이자 엘프여신들의 대장이신 라비아타님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순 없지. 근데 너도 학교에서 라비아타 설화정도는 배우지 않나? 에이 설마, 우리 아이셔국 수호신인 라비아타 설화를 초교 4학년 때까지 안 배운다고? 공교육 망했네. 잘 들어, 이거 언젠가는 무조건 배우는 거니까 듣고 잊어버리지 말고.


라비아타는 신이 세 종족을 창조하실 때 최초로 빚어진 엘프야. 그 아름다운 외모에 반한 신은 그녀를 본으로 새 종족을 창조하셨고, 그렇게 엘프 종족이 탄생했지. 뭐? 지난번에 신전가서 본 조각상은 해괴망측하고 뚱뚱했다고? 야, 그런 말 함부로 하면 돌맞어 임마. 아이고, 그거 설명하려면 좀 복잡해지는데.


이왕 이야기 하는거 설명을 좀 하자면, 음. 라비아타님이 엘프들의 큰 여신인 동시에 대지모신으로도 숭배 받는 거 알지? 오베로니아 레아 같은 농업(과 폭풍우)의 여신께 바라는 게 뭐냐. 농사 잘 되서 밀이랑 보리 많이 수확하게 해주세요, 하는 거잖아. 배부르게 많이 먹게 해달라는 거고. 그렇게 배부르게 많이 먹고 살찌고 싶은 그런 소망이 여신님의 조각상을 만들 때 반영이 되는거야. 근데 라비아타님은 여신들 중 대빵이잖아? 그래서 몸매를 더 풍만하게 반영해서 조각하는 거야. 실제로 옆나라 만신전의 라비아타님은 보통의 평범한 몸매로 조각되어 있어. 우리나라에선 라비아타님의 신격이 제일 높으니까 좀 과장된 표현을 하는 거고. 알겠어? 해괴망측하지 않은거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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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려?”


“으응. 오빠 나 잘래. 내일 이어서 들려줘야해?”


“그래, 잘 자. 낼 보자”


조용히 동생의 이불을 덮어준 청년은 양초를 훅 불어 끄고 조심스레 방문을 닫고 나갔다. 어린 동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다 보니 뭔가 머릿속이 맑게 정리되는 느낌이다. 이대로라면 동이 트기 전까지는 초안을 작정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한 청년은 다시금 펜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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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 수천년이 지나고 다시금 문명이 멸망한다면?

멸망한 문명이 다시금 피어나고 과거의 유산들이 마법이라는 형태로 전해진다면?

과거의 기록이 신화로 전해진다면? 이란 주제로 글 쓰면 재밌을거 같지 않음?

근데 대회 글 단편으로 끝내야됨? 단편으로 끝내야 되면 후편 안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