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번 유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함장실을 통하는 복도에 선명하게 들렸다.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여뜨린 한 바이오로이드가 함장실의 문 앞에 서성였다. 조금씩 새어나오는 입김을 왼손으로 가린 채 다시 한번 함장실의 유리문을 똑똑 두드린다. 희미하게 남은 얼룩이 천천히 사라진다.


평소 같으면 바이오로이드가 들어서는 순간 열릴 문은 그 날 움직이지 않았다. 전력 공급이 끊긴 것마냥 어두컴컴한 함장실의 내부가 훤히 비치는 문을 나이트앤젤이 다시 한 번 힘겹게 오른손으로 두드렸다. 그녀가 문을 두드리는 모습은 매우 부드러웠지만, 유리가 깨어지지 않을 정도로의 힘이 손아귀에 꽉 쥐어져 있었다.


누군가 보면 언뜻 미친 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함장실은 지금 빈 방이 아니란 것을. 자신이 만나고 싶어하는 사령관이 저 안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안에 계신거 다 압니다. 사령관."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복도의 공기를 한층 더 무겁게 만들었다.


"제가 왜 온지도 알고 계실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대로 피하실 건가요? 피하신다고 끝나실 거 같나요?"


말을 마친 그녀가 한번 더 유리문을 두드릴려는 순간,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함장실에 천천히 들어서기 시작했다.






함장실은 은은한 불빛을 내는 전등으로 아련한 빛을 채워가고 있었다. 조용히 흘러나오는 멸망 전의 클래식을 벗 삼아 사령관은 조용히 술을 기울이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이트앤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함장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흐름을 깨는 발소리를 내며 그의 책상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야. 나이트앤젤."


사령관은 등을 돌린채 의자에 기대며 조용히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 5번이라고 했던가...나이트앤젤 네가 탐색 중에 발견해서 내게 들어보라며 가져다 준건데 말이야."


"사령관."


그의 말을 끊은 나이트앤젤.


"오르카 호의 모든 대원이, 모든 지휘관들이 반지를 받았습니다. 자기 차례가 오지 않을거라고 자신을 질책하던 레이시까지 전부요."


좋은 소식을 전하는 나이트앤젤의 표정은 오히려 비장해보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비난이 서려 있었다.


"좋은 일 아냐? 나이트앤젤. 모두가 원하는대로 전부 반지를 받은거니까."


"아니요."


너털웃음을 지으며 와인을 한모금 삼키는 사령관에게 나이트앤젤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아시잖아요. 모든 대원이 받았습니다. 한 사람만 빼고요."


"그렇지. 멸망의 메이."


사령관은 관심 밖이라는 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렇네. 메이에게 반지를 주지 않았지...내가 잊고 있었네?"


"사령관."


장난끼 섞인 목소리로 깜빡했다는듯 이마를 살짝 치는 사령관을, 나이트앤젤은 냉기 서린 목소리로 다그치듯 이야기했다.


"실피드와 지니아에게 반지를 끼워주는걸 보면서 메이 대장은 자신은 언제 차례가 오냐며 성대하게 열어주는거 아니냔 기대까지 품었었죠."


나이트앤젤이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메이 대장이 반지를 받는 일은 없었어요. 장기출장까지 간 요안나도 돌아오자마자 반지를 받았고 그렇게 구박받던 코코 양도 결국 반지를 받았는데 말이에요."


"그런 메이 대장에게 사령관이 준거라곤 엉망으로 만든 조화 다발 뿐이었잖아요? 안 그래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점점 이성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기다렸었어요. 메이 대장은. 그래도 언젠가 반지를 줄거라고. 사령관이 나타나서 화려한 무대로 자길 놀래키면서 반지를 줄거라고. 마지막에 반지를 받는 건 다름아닌 자신이라면서요."


사령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령관은, 당신은..."


말을 잇던 나이트앤젤의 눈가에 작은 눈물방울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슬픔도 기쁨도 아닌, 그저 이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한 분노가 담긴 눈물이.


"당신은 마지막에 메이 대장에게 반지를 주고 1시간 뒤에 그대로 뺏어갔었단 말이죠."


"그게 뭐 어쨌단 거지?"


"어쨌냐고요? 네?"


"메이 대장은 처음엔 장난이냐며 당황해했어요. 그러더니 한시간, 두시간이 지나도 반지를 돌려받지 못하자 안절부절하지 못했어요. 그리고선 깨달았어요. 사령관한텐 메이 대장은 그저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다고. 그저 힘들게 몸을 이끌고 나가서 언제 터질지 모를 장치를 타고 주변 애들에게 출력이나 올려주는 기둥밖에 안되는 존재란걸요."


그녀의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메이 대장이 얼마나 죽고 싶은지 당신은 알아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바이오로이드들이 반지를 받고 당신이랑 똑같은 사람으로 대우를 받는데, 그 수많은 오르카호 대원들 가운데서 오직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바이오로이드가 자기 자신이란걸 자각한 메이 대장이 말이에요."


"방에서 나오질 않아요. 대원들이 문을 두드리고 소리쳐도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는다고요. 죽진 않았어요. 아니, 차라리 유전자 씨앗으로 돌아가는게 훨씬 나을 정도였어요. 그냥 살아있는 시체에요. 아무 말도 못하고 있고 그저 숨 쉬고 눈만 껌뻑거리는 존재라고요."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더는 분노를 토해낼 목소리가 울음기에 섞여 들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녀의 앞을 가렸다.


나이트앤젤은 자신의 주인이자 남편인 사령관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무기로 당장이라도 그를 찢어발기고 싶었다. 그 조각을 기워 오르카호의 잠수함 앞머리에 진열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령관을 죽일 수 없었다. 우연이 아닌 이상 바이오로이드는 자신의 주인을 고의적으로 해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멸망 후 최후의 인간인 사령관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그녀는 사령관에게 복수할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은은한 빛을 받아 빛나는 반지를 그에게 보란듯이 확 빼고서는 발치 앞으로 집어 던졌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반지는 또르르 굴러가더니 사령관의 구두 앞에 튕겨져 멈추었다.


"사령관. 바이오로이드는 사람을 해칠 수 없어요."


나이트앤젤이 힘겹게, 그러나 무거운 목소리로 그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적어도 사령관 당신에게 이런 식으로 제 감정을 표현 할 수 있겠죠. 그렇지 않아요?"


"나이트앤젤."


"메이 대장이 받은 고통과 아픔에 비하면 이건 아무렇지도 않겠죠? 적어도 인간인 당신에겐 말이에요."


사령관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나이트앤젤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이트앤젤."


그녀를 부르는 사령관의 목소리.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억양에 그녀가 소스라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헝클어진 곱슬머리와 제대로 면도하지 않은 수염 사이로 그녀를 바라보는 사령관의 눈빛.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그 눈빛.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사랑해주고 있단 증거를 남기는 그 눈빛.


아니다. 전혀 아니다.


그 눈빛은 멸망 전의 인간을 방불케하는 악마의 눈빛이었다.


"우리, 결혼했었지?"


"네...네..."


사령관의 낮은 목소리에 나이트앤젤은 저도 모르게 아무 말도 못한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할 그의 목소리가 나이트앤젤의 등 너머로 엄습해왔다.


그는 피식 웃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이트앤젤. 예전에 날 사랑한다고 했었지? 이런 자기도 받아줄줄 몰랐다면서 말이야. 그때 정말 좋았는데-"


"네...그...그랬었지만..."


"왜 그래? 나이트앤젤."


어쩔줄을 몰라하며 식은 땀을 흘리던 그녀에게, 사령관은 장난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 반지는 소중히 해야지? 바닥에 함부로 내팽겨치는거 아니야. 이거 마련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파티마한테 사정사정해가면서 교환해온 귀한 반지라고?"


"...하지만...하지만..."


"정 그렇다면 내가 주워서 끼워줄 수도 있는데, 이왕이면 결혼한 남편이 끼워주는게 어떨-"


"제...제가 끼울게요."


나이트앤젤은 허겁지겁 사령관의 발치로 달려오더니,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자신이 바닥으로 내팽겨친 반지를 주워 들었다. 꽉 악문 입가에서 조금씩 새어나온 피가 그녀의 혀를 아리게 만든다.


그녀는 더 이상 사령관의 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받아들인 그 남자의 반지를 거절하고 싶었다. 자신의 상관인 메이를 상처 입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너게 만든 이 남자를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얕궂게도 그녀는 자신의 상관이 가진 모듈을 가지지 않았다.



사령관은 나이트앤젤에게, 자신이 손수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던 반지를 들고 자신에게 가까이 오라고 이야기했다. 한참을 죽일듯이 노려보던 나이트앤젤이었지만, 멸망 후 살아남은 최후의 인간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떨리는 다리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모습을 사령관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쳐다본다.


"...고맙습니다...사령관..."


나이트앤젤의 감사를 그러나 사령관은 만족스럽지 않다는듯 가늘게 눈을 뜬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숨을 쉬던 그가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잊은 건 없니? 나이트앤젤."


잊은 것. 그 한마디에 나이트앤젤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하지만 마음 속 있는 그대로의 표정을 드러낼 순 없었다. '인간'인 사령관의 명령은 절대불복종이었다. 그는 나이트앤젤에게 명령했다. 웃으라고 말이다.


으스러질듯 어깨와 팔을 움직이며 힘겹게 고개를 든 나이트앤젤이 그를 향해 시선을 바라보았다. 차마 보는 사람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힘겹게 미소를 짓는 나이트앤젤이, 피가 가득 베인 입술을 움직이며 그에게 속삭였다.


"...사랑...사랑해요...사령관."


그 한마디를 남긴 나이트앤젤이 기여코 눈물을 터트리며 사령관의 팔을 꽉 쥐어잡았다. 그는 흡족해하며 천천히, 부드러운 손짓으로 나이트앤젤을 끌어안고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사령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이트앤젤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이오로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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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 줬다 뺏는게 유행인거 같아서 하나 써서 올려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