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후후, 뇌명의 짐승이여! 어서 나와 이 몸을 맞이하거라!”

 

거대한 로봇인 로크의 무릎 높이도 안되는 키의 작은 꼬마가 오늘도 동굴을 찾아왔다.

하도 오랜 시간이 흘렀던 탓인지 꼬마의 키는 어느새 처음보다 성장해 있었다.

인공 인간인 바이오로이드는 노화가 되지 않는다. , 늙지도 성장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그 속도가 느릴 뿐,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으므로 꼬마가 자라나기 시작한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새 키가 더 커지셨군요, 진조의 공주여.”

 

로크는 매일 꼬마와 나누는 잡담을 즐기고 있다. 태양고도가 낮은 아침이나 황혼이 스미는 저녁 즈음을 제외하고는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이 넓고 고요한 동굴에서 즐길만한 유희라고는 날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저 작은 공주님과 나누는 실없는 농담 정도뿐이었기 때문이다.

 

헤헤, 정말 나 컸어? 나 더 커지려고 잠도 일찍 자고 우유도 많이 마셔! 운동도 많이 하고.”

 

로크의 칭찬에 꼬마가 아까의 말투와는 정반대의 평범한 아이로 돌아왔다.

 

훌륭한 습관이십니다. 생물학적으로 충분히 도움이 될 것 같군요.”

 

로크가 얼굴의 새빨간 라이트를 마구 번쩍였다

꼬마는 그것을 언제나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슷하게 눈에서 빛을 발하는 자신과 동질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로크는 꼬마에게 감사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으나 그녀가 왜 항상 자신을 찾아오는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꼭 그것에 대해 질문하기로 결심한 로크였다.

 

, 공주여.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질문을 하나 던져도 되겠습니까?”

 

? 뭔데?”

 

로크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혹여 꼬마가 자신의 가벼운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울 가능성을 산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대답하기 곤란할 경우의 수는 거의 없음이었다.

 

왜 매일 절 만나러 오십니까?”

 

꼬마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대는 나의 충실한 종복이니까.”

 

로크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얼굴의 라이트를 꺼뜨렸다.

 

흐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헤헤, 사실은 로크랑 놀면 재밌어서 그래

이제 다른 언니들은 다 나이가 들어서 나랑 안 놀아주거든

여기에는 사령관도 있고.”

 

말마따나 로크가 있는 동굴은 사실 사령관의 무덤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스스로 동면에 든 것이지만, 지금 상태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무덤이라고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로크는 그의 무덤을 지키는 무덤지기 역할을 자처했다.

먼 옛날, 자신의 전 주공이었던 블랙리버 군사 회사의 수장인 앙헬의 무덤을 지켰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꼬마의 대답에도 개운치 않았는지 로크가 또다시 질문했다.

 

“..... 생명체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서글픈 일이군요

그런데 같은 친구들과 놀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꼬마는 조금 기가 죽은 모양이다

 

히잉... 사실 내 친구들은 다 바빠. 코코는 다시 우주로 갔고, 더치는 어째서인지 벌써 어른이 되어버렸어. 알비스는 다른 언니들을 따라 얼음세계로 이사 갔고, 아쿠아는 언니들이랑 농장을 가꾸느라 거의 못 봐.”

 

인간의 아이들은요?”

 

사령관과 바이오로이드들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였다.

확실히 지금의 세상은 사령관과 전쟁을 함께했던 바이오로이드, 그녀들의 후손, 그 후손들의 후손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과도기적인 시대였다

물론 선조의 인품이 워낙 훌륭한 데다 어느 정도 모듈로 성격을 조정받으므로 분쟁이나 싸움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시대였지만 말이다

 

바이오로이드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다

대신 바이오로이드들은 자식을 낳았다

결과적으로 인류는 재건된 것이다.

 

처음에는 언니들의 아기들이랑도 놀았었어

그런데... 나와는 다르게 그 아이들은 금세 자라 어른이 되어버리더라고

아르망 언니의 손자인 알렉스는 벌써 할아버지가 됐어. 나보고 딸 같아서 좋대.

내가 분유를 먹여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인류가 재건되자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 발생했다

자식과 부모 간의 나이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1세대는 아직 부모들의 오리진더스트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으므로 그나마 노화가 더뎠지만 2세대, 3세대에 이르러서는 그 영향력도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노화도 빨라졌다.

다시 말해 진짜 인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아, 제가 실례되는 질문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조금 흥미롭군요. 그럼 바이오로이드 여성들은 자기 자식의 죽음을 눈뜨고 지켜봐야 한다는 이야기이니

이건 꽤 잔혹한 운명이지 않습니까.”

 

로크는 조금 흥분한 어조로 목소리를 냈다

오래된 탓에 스피커에 잡음이 꼈지만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아들이 죽은 리리스 언니가 아들을 만나러 가겠다면서 목을 매달았었대

다른 언니들한테 업혀서 병원으로 가는 모습을 봤었는데, 의식을 잃은 와중에도 아들을 찾고 있었어

헐떡대면서도 눈물을 흘리는데, 무섭기도 했지만 정말 비참해 보였어.

죽기 직전에 응급처치를 받아서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지금도 집에 틀어박혀서 술만 마신다나

가끔 집에서 비명이나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는 거 보면 충격이 컸나 봐.”

 

제게 감정은 없지만 지적 생명체의 입장에서는 끔찍한 광경일 것 같군요.

후손의 죽음이 부모 개체에게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필시 부모 개체의 감정에 어둠을 드리우고 생존 활동에 악영향을 끼친다지요.

말씀하신 블랙 리리스의 경우처럼 스스로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하고요.”

 

집착이 강한 몇몇 바이오로이드는 자식의 죽음과 함께 자아가 붕괴하거나 폐인이 되는 일이 잦았다.

물론 그런 나쁜 경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식의 죽음을 발판으로 삼아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더 성장하고 성숙해지기도 했으며 누군가는 진짜 자신에 대해 깨닫거나 자유를 찾아 큰 도시로 떠나기도 했다.

 

이곳은 사령관이 처음 터를 잡은 곳이었지만 생각보다 번성한 마을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령관은 이곳보다 더 좋은 곳으로 찾아 거기에 도시를 세우길 바랐다.

다만 자신은 모든 것이 시작된 이곳에서 조용하게 잠들기를 원했을 뿐이었다.

 

그렇다. 이곳은 사령관이 처음 발견되었던 그 도시이다.

어찌 보면 전설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처음 깨어났던 그때와는 달리 이곳은 정말 소박한 마을이 되었다.

 

바다와 접해있어 언제나 아름다운 수평선을 감상할 수 있는 이 도시에 남아있던 

빌딩들은 전부 무너지고 그저 작은 주택들과 수목들이 들어섰다

덕분에 사령관과 싸움을 함께 했던 바이오로이드들은 대부분 이 마을에 살고 있다.

새 문명과 도시를 발전시키고 운영하는 것은 전부 후손들의 몫이다.

 

아주 방관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가끔, 싸움이 벌어질 것 같으면 그녀들은 자신들의 압도적인 무력으로 자식들의 갈등을 중재했다.

그러나 그 가끔 일어나는 싸움의 불씨가 거대한 화마가 되는 것은 한순간일 것이므로 그녀들의 걱정도 나날이 늘어만 갔다.

자신들이 살아있는 이상은 괜찮겠지만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사령관이 일구어 놓은 이 세상이 다시 전쟁의 불길에 휩싸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진조여, 당신은 지금 이 세상에 만족하십니까?”

 

조금 침울해 있는 꼬마에게 로크가 불현듯 물었다.

 

, ? ... 다들 바빠 보이지만 즐거워 보이고... 나도 심심하긴 하지만 로크가 있으니까.”

 

저는 지난 몇백 년간 주인의 무덤을 지키며 비록 좁은 공간에서나마 세상의 변화를 쭉 지켜봐 왔습니다

확실히 주인의 안목대로, 바이오로이드 여성들은 나름대로 멋진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것처럼 보였죠.

세상은 크게 변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는 한 긍정적인 변화처럼 보이고요.”

 

로크가 안광을 진하게 밝혔다.

AI에서 만들어낸 감정이 고조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동굴에 있다고 해서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가끔이지만 감정을 지닌 독특한 신사 로봇인 Mr. 알프레드가 찾아와 여행 중에 겪은 일들에 대하여 떠들어대기도 하고,

더더욱 가끔씩은 궤도의 인공위성의 AI인 에이다에게서 통신이 오기도 한다.

 

알프레드는 재건된 세상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즐거운 세상이라고 한다.

 

감정이 없는 에이다도 지금의 문명에 대해 낙관적으로 보는 듯했다.

미친 듯이 요동치던 기온 그래프가 정상궤도를 되찾았고, 멸종됐던 동물들이 하나 둘 자취를 드러내는 등,

지금 지구는 산업혁명 이래로 가장 균형잡힌 상태라고 한다.

그와 동시에 전보다도 발전된 문명을 이룩한 것은 에이다의 두뇌로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이야기했었다.

 

대신 좋은 소식만 들려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만약 세상이 인간들의 어둠으로 다시 뒤덮인다면 저는 제 손으로 세상을 정화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제 주인의 명예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죠.

만약 진조가 지금처럼 순수하게 행복하지 못한 세상이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의 선택을 할 것이고요.”

 

아무리 착한 사람들이 모여있다고 해도 갈등이 없을 수는 없었다.

당장 얼마 전에도 중동에서 큰 전쟁이 일어날 뻔한 소식이 

들려왔으므로 로크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는 꼬마를 본 로크는 기운차게 웃으며 꼬마를 자신의 어깨에 올렸다.

 

후후훗, 죄송합니다, 진조여. 어두운 이야기를 하고 말았군요.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제가 있는 한 당신이 지금의 밝은 미소를 잃을 일은 없을 테니까요.

, 바이오로이드 여성들을 믿고 있기도 하고요. 이걸 당신들은 신뢰라고 하죠?”

 

답지 않은 말이었다.

어쩌면 로크도 사령관을 보좌하며 그와 닮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히히.”

 

딱딱하고 차가운 어깨에 걸터앉은 채 발을 앞뒤로 경쾌하게 흔들며 묵묵히 말을 듣고 있던 꼬마가 갑자기 쿡쿡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로크가 물었다. 사람이었다면 필시 우스운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로크는 날 아껴주는구나?”

 

, 그저 말동무가 사라지는 것이 두려울 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로크의 라이트가 격하게 깜빡였다.

인간에 비유하자면 당황한 듯하다.

 

로크는 사령관이랑 비슷한 것 같아. 아니, 어쩌면 로크가 사령관에게 배운 것일지도 모르지.

다정하고, 듬직하고, 하지만 그걸 굳이 표현하지는 않아. 그래도 누구에게나 사랑받지.

나랑 놀아주는 건 사령관이랑 로크뿐이었어

둘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이 뭔지 생각해봤더니 둘은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은 단지 내 장난에 어울려 줄 뿐이지만 둘은 그렇지 않아.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의미는 무엇인지 헤아리려고 노력하지

히히, 그래서 사령관이 좋았고, 로크가 좋아. 그래서 날마다 로크를 찾아오는 거야. 그것뿐이야.”

 

꼬마의 순수한 고백에 로크는 고개를 숙이더니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로봇에게 생각이라고 해봤자 두뇌의 슈퍼컴퓨터의 연산일 뿐이지만 로크 자신은 그것을 생명체들의 생각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 그렇군요. 단지 그것뿐이었군요. 하하, 이제 속이 시원해진 것 같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는 새에 그분을 공경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어쩌면 저도 그분처럼 되고 싶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로크는 고개를 들고 꼬마를 바라보았다.

 

진조여, 저번에 도시를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죠.”

 

? 어어. 그랬지. 그건 왜?”

 

“.... 잠시 동굴 입구에서 기다려주십시오.”

 

그러더니 로크는 어깨에 타고 있던 꼬마를 큰 손에 올려 살포시 내려놓았다.

꼬마는 묘한 웃음을 짓더니 별말 없이 걸어 동굴을 나갔다.

 

와아....”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있는 수평선.

그 아름다운 광경에 꼬마는 넋을 잃고 말았다

동굴에 들어간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해가 지고 있었다.

바다에 반쯤 걸린 채로 하루의 마지막을 불태우는 태양을 보고 있자니 옛날 일이 떠올랐다.

 

때는 전쟁이 끝나기 직전, 사실상 사령관의 군세가 승기를 잡기 시작한 어느 날이었다.

사령관은 꼬마를 데리고 바다 위로 떠오른 잠수함의 갑판으로 나갔었다.

그때도 이처럼 둥근 달이 떠오르고 해는 가라앉는 황혼이었다

지금처럼 꼬마는 오랜만에 보는 바깥 풍경에 감탄했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바다 밑 잠수함에서 보내니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남자는 꼬마를 특별히도 아꼈다

100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견딘 아이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겠지만 

꼬마는 이유야 어찌 됐든 남자와 보내는 모든 시간과 경험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날 남자와 나눴던 대화도 기억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면 같이 바다에 놀러 가고 싶다던가, 처음 만났던 등대에서 용을 보여주겠다거나,

등대에 있었을 때, 책에서 보았던 야경을 보고 싶다거나, 가끔은 그냥 평범한 것도 좋겠다거나.

꼬마도, 남자도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남자는 꼬마의 꿈을 듣고는 품에 안으며 담담하게 속삭였다.

 

네가 살아갈 미래는 내가 지킬게.’

 

꼬마는 아직도 그 말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

 

꼬마를 내보낸 로크는 잠시 가만히 서서 어두운 동굴 안을 둘러보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생겨났던 작은 종유석은 어느새 바닥까지 닿아 석주가 되어 있었다.

로봇인 로크는 시간을 느낄 수 없다.

로봇에게 시간은 단지 상대적인 공간의 흐름이자 부질없는 것, 컴퓨터 속 시계의 초침 변화일뿐이다.

다만 환경의 변화를 통해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통감할 뿐이었다.

 

로크는 전기를 일으켜 동굴 안을 밝혔다.

그리고 횃불에 작은 스파크를 발사해 불을 붙이고 거대한 와인 창고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림을 감지한 냉장고 안에 불이 일순간에 켜졌다.

부착된 감식 기관을 이용하자 몇백 년 동안 숙성된 와인의 알코올 향이 느껴졌다.

좋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다. 로크는 로봇이니까.

 

이어서 가장 귀중하고 오래된 와인 두 병을 꺼내 손에 쥐었다.

특별히 황금으로 장식된 칸에 넣어져 있던 것이었다.

그것을 챙기고 다시 사령관이 잠든 냉동 캡슐 앞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인이시여, 아무래도 당신과의 약속을 지킬 때가 온 것 같군요.”

 

로크가 사령관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사령관은 당연하게도 대답하지 않았다.

스피커로 음침한 웃음소리를 출력하고는 와인의 주둥이를 꽉 쥐어 깨뜨렸다.

 

워울프라는 바이오로이드 여성이 이렇게 와인을 열었었죠.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로크는 함께 가져온 유리잔에 와인을 따랐다.

한 잔은 자신을, 한 잔은 당신을, 한 잔은 과거에 죽은 또 다른 로크를 위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한 잔이 더 필요할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한 로크는 유리잔 하나를 더 꺼내어 거기에도 와인을 따랐다.

 

이 한 잔은 공주가 살아갈 미래를 위하여.”

 

비록 로크는 음식을 먹지 못하지만 술은 그 자체로 분위기를 내는 데에 효과적인 물건이었다.

로크가 술로 잔치를 여는 인간들의 풍습을 마침내 이해한 때였다.

 

주인. 당신이 어찌하여 동면을 택하신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동안의 전쟁에 지쳐서인가? 아니면 정말 피곤했을 뿐인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종잡을 수 없으나 모두가 따르는, 그런 이상한 사람.”

 

로크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이상하다니. 로봇인 제게 이상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상하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는 것인데 저는 인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전부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 탓에 제 AI가 이렇게 망가진 겁니다.”

 

캡슐 아래에 난 지하로 이어지는 구멍에 와인을 부어 넣은 로크는 다시 잔을 채웠다.

 

“..... 당신은 어째서 저 같은 로봇을 인격체로서 대한 겁니까.”

 

사령관이 미소짓는 것처럼 보였다.

 

이젠 헛것이 보이는군요. 포츈 양에게 검사를 받아봐야겠습니다.”

 

로크는 다시 잔을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한 병을 다 비웠군요

모두를 위한 것이지만 누구도 마시지 못하는 잔을 말입니다.”

 

로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이곳을 떠날 겁니다.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아마 한동안, 아니, 적어도 앞으로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나 진조가 죽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겠죠.

외롭겠지만 부디 이해해 주시길. 당신도 이 정도 각오는 하지 않으셨습니까.

적어도 당신이 제게 진조의 보호자 역할을 맡긴 이상 이미 정해진 결말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하, 당신은 설마 여기까지 예상하신 겁니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저는 당신의 예지력과 통찰력에 다시 한번 존경을 표해야겠군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보니 와인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로크는 남은 와인 한 잔을 횃불에 부어 꺼뜨렸다.

 

얼어붙은 당신의 시간은 멈췄으나 공주의 시간은 미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곁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적어도 미래를 살아갈 아이의 뒤를 지키는 것이 더 생산적인 일이 아니겠습니까?

후후후, 마음이라... 이것도 흥미로운 일이로군요

어쩌면 저는 당신과 다른 로봇들, 바이오로이드 여성들과 함께 싸우고 대화하며 

마음이라는 것이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Mr. 알프레드처럼 말입니다.”

 

그러더니 로크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붙이고 고개를 숙였다.

 

“..... 즐거웠습니다, 나의 친구여. 고이 잠드소서.”

 

마지막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마음을 담은 존경을 표한 로크는 꼬마가 기다리고 있을 바깥으로 향했다

이제 이 동굴에 다시 들어갈 일은 없겠지.

 

동굴을 나가니 꼬마는 유구에 찬 눈빛으로 은하수로 수 놓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잠시 친구에게 인사를 하느라요.”

 

로크가 차분한 음색으로 사과했다

전자음이 낀 목소리에서는 조금의 우울감마저 느껴졌다.

 

아니야. 별로 안 기다렸어. 그런데 뭘 하려고?”

 

도시로 떠날 겁니다. 함께.”

 

꼬마는 로크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의 꼬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로크는 말을 이었다.

 

진조여, 제가 사령관님의 무덤지기를 자처했을 때 그분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뭐라고... 했는데?”

 

로크가 자신의 장갑처럼 검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무슨 선택을 하던 관여하지 않겠다

그러나 네가 해야 할 일, 혹은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는 이곳을 떠나라.’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이 마을을 떠나야만 합니다. 제겐 하고 싶은 일이 생겼으니까요.”

 

, 하지만!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어차피 로크는 명령에 거부할 수 있잖아!”

 

꼬마는 울먹이며 로크의 굵은 손가락을 붙잡았다.

몇백 년을 살아온 이곳을 떠나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덜 된 탓이었다.

 

“.... 저는 이곳에 머물러도 괜찮습니다. 더 이상 성장하거나 변화할 일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당신은 다릅니다

당신에겐 꿈이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곳을 떠나 더 넓은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결정임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동안 당신과 지내며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게 남은 마지막 임무는 이 땅에서 당신이 웃음을 잃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리고 주인, 아니, 나의 친구가 가장 아끼던 당신이 살아갈 미래를 지키는 것이라고요.

이건 단순히 명령따위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제 신념에 따른 선택입니다.

 

사령관이 외롭지는 않을까?”

 

꼬마의 눈망울은 조금 젖어있었다.

어두운 동굴 안, 차가운 냉동 캡슐에

외로이 혼자 남을 남자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후후, 외로울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분에게는 이쪽이 더 기쁜 일일 겁니다.

그분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저와 당신이 마침내 가야 할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적어도 제가 바라본 그분이라면 그럴 겁니다.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그렇구나. 헤헤, 그렇네. 사령관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네.

. 떠나자! 미지의 어둠이 드리운 회색 세계로

, 뇌명의 짐승이여, 어서 이 몸을 여명의 길로 인도하거라!”

 

꼬마는 결심을 굳힌 듯했다.

이렇게 과한 리액션을 보이는 것은 그녀가 힘든 결정을 내릴 때 나오는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었다.

 

“.... 떠나기 전에, 이 집을 불태워도 되겠습니까?”

 

로크가 동굴이 있는 동산 아래에 있는 작은 나무 오두막을 가리키며 말했다.

꼬마가 사는 집이었다. 몇백 년의 세월 동안 몇 번이고 보수를 받았으나 여전히 낡은 집이었다.

그러나 꼬마의 추억이 깃든 소중한 집이었다. 다른 집들과는 동떨어져서 있는 그것은 어쩐지 조금 외로워 보였다.

로크는 조용히 꼬마의 대답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꼬마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저 집은 저대로 두자.”

 

어째서죠? 이제 올 일도 없을 텐데.”

 

로크가 의문이라는 듯이 되물었다.

 

내가 여기 살았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무엇보다 사령관이랑 같이 지은 집인걸.”

 

로크는 꼬마의 대답에 고개를 기울이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후후, 알겠습니다, 공주여. 그대의 명에 따르죠.”

 

그리고는 꼬마를 자신의 등에 태웠다.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준비는 되셨습니까?”

 

!”

 

꼬마가 활짝 웃으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로크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밤의 공기는 차갑지만 오히려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꼬마는 로크의 속도를 즐기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하늘 높이 올라가자 별빛이 더 밝게 빛나 땅에 있을 때보다 시야가 넓게 틔었다.

 

와아~ 더 빨리! 더 빨리~!”

 

꽉 잡으시길.”

 

꼬마의 재촉에 로크는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구름이 손에 닿을 만큼이나 높아졌다

생각보다 튼튼한 꼬마는 높은 고도임에도 산소가 부족하지도 않은지 꺄르륵 웃어댔다.

어찌나 몸이 튼튼한지 춥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순식간의 마을 위를 벗어나 내륙으로 향했다.

한참 동안 어두컴컴한 숲과 산들이 쭉 이어졌다

오랜만에 보는 드넓은 자연경관에 꼬마의 감탄 소리가 들렸다.

간간이 보이는 도로나 철도에는 부유 형 자동차와 기차가 가득했다.

문명에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표지판과 같았다.

 

칠흑뿐이었던 땅에 불빛 몇 개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불빛은 하나, 둘 늘어서 어느새 빛 웅덩이가 되었다

땅을 가득 뒤덮었던 나무보다 회색 콘크리트가 더 많아졌다.

조금 더 날아가니 황금빛으로 빛나는 도시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만의 색으로 발광하는 빌딩, 저 창공까지 들리는 공장의 기계음.

 

진짜 도시였다.

꼬마가 그리도 보고 싶었던 도시였다.

로크가 앙헬과 함께 들른 적이 있던 그 도시였다.

하지만 그때보다 훨씬 희망차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등에서 들리던 웃음소리는 멎은 지 오래였다

꼬마는 감탄하는 것조차 잊은 채 도시의 야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꼬마의 눈동자는 네온사인의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호박색의 눈동자가 녹색으로, 보라색으로, 구릿빛으로 빛났다.

 

하늘 위를 몇 번 순회하던 로크는 비행을 멈추고 공중에 가만히 떴다.

 

도시의 풍경은 어떻습니까, 진조여?”

 

믿을 수가 없어. 도시를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꼬마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등대에 갇히기 전에 보았던 도시의 풍경을, 사람들의 모습을 말이다.

인류가 멸망하고 100년을 홀로 지내는 동안 흐려지기는 했어도 그 환상적인 야경만큼은 잊지 못했다.

 

꼬마는 울고 있었다.

 

여기 다시 오는 데에 겨우.... 겨우 500년 밖에 안 걸렸어.

히히, 사령관. 나 드디어 도시에 왔어. 사령관과 약속한 대로 이루어 졌어...”

 

로크가 떠 있는 구름 밑까지 솟아오른 빌딩은 그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듯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아래로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각자 존재감을 드러내며 유리창을 통해 빛을 뿜었다.

로크는 그 가장 높은 빌딩의 꼭대기에 내려앉았다.

 

“.... 이렇게 기뻐할 줄 알았으면 더 빨리 데려올 걸 그랬군요.”

 

로크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지금이 아니었다면 꼬마는 이렇게까지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백 년의 기다림이 지금 이 순간을 더 미려하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다행히 사령관의 유지는 꺼지지 않았다.

언제 멸망했냐는 것처럼 문명은 본래의 찬란한 빛을 되찾았다.

녹색으로 물들었던 지구는 다시 문명의 회색빛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다만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명확히 나누었다.

환경보호 바이오로이드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었다.

 

하늘은 비행기가, 땅은 자동차-이것을 자동차라고 불러야 할지는 의문이지만-로 채워졌다.

전기와 수소만을 이용해 이동하는 친환경 이동수단이다

사령관의 후손들과 전대 인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배려심이었다.

그의 후손들은 인간을,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사령관은 기뻐했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가벼운 마음으로 동면에 들 수 있었다.

 

도시의 풍경을 본 로크는 안심할 수 있었다.

앙헬과 함께 보았던 도시의 모습과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멸망 전, 이 도시는 지금처럼 첨단 기술로 점철된 인류 문명의 극한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건물 뒤에 드리운 어둠에는 폭력과 증오, 슬픔만으로 가득했었다.

앙헬은 괘념치 않았으나 사람들, 서민들의 얼굴은 까맣게 칠해진 것처럼 우울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도시의 골목조차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려와는 달리 거리는 그 아름다움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깔끔하고 우아했다.

그 누구도 누군가를 미워하는 법이 없었다.

 

아무래도 제가 사령관 각하를 너무 얕본 것 같습니다.

세상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훨씬 밝은 곳이 되었군요.

그래요. 어떻게 재건한 세상인데. 그 남자가 평생을 바쳐 만들어낸 세상이니 당연한 이치죠.”

 

로크가 어느새 어깨에 올라온 꼬마에게 말을 걸었다.

 

진조여, 앞으로 당신이 살아갈 세상은 이보다 더 밝아질 겁니다.

제 명예를 걸고 약속하죠. 그러니 당신은 최선을 다해 살아주십시오

그의 희생이 훨씬 더 값지게 되도록 말입니다.”

 

꼬마는 홍조를 띄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이렇게 직접 보고 나니 기대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로크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뭐가 기대되는데?”

 

앞으로 당신이 만들어갈 세상은 얼마나 더 찬란하게 빛날지, 그것이 기대됩니다.”

 

꼬마도 따라 웃었다

 

나도 기대돼.”

 

오오, 당신은 무엇이 기대되죠?”

 

사령관이 지켜준 미래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것이 기대돼.”

 

로크는 크게 웃더니 어깨의 소녀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십시오. 당신은 어떤 일을 만나든 잘 이겨낼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그러자 꼬마는 로크를 바라보며 베시시 미소지었다.

근래에 들어 가장 밝고 행우한 미소였다.

로크는 그녀의 미소를 지켜주기로 다시 한 번 마음 먹었다.

그것이 사령관이 남긴 유지를 잇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진조여. 그대는 절 뇌명의 로크라고 불렀죠.”

 

후후후, 좋은 진명이지 않은가?”

 

이젠 이름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꼬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높은 곳에서 지평선을 관망하니 그 너머로 떠오르는 해가 보였다

꼬마의 눈동자처럼 밝고 동그랬다.

꼬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떠들다 보니 밤을 샌 것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떠오르는 태양은 언제나와 같이 세상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여갔다.

동굴 안에서 보았던 주홍빛보다 강렬한 빛은 땅을, 산을, 바다를 덮었다.

두꺼운 강철 장갑에 부착된 센서를 통해 차가웠던 공기가 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생명을 잃은 회색의 건물들이 점차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보였다.

지구의 생명이 약동하고 있었다.

 

로크가 그 태양을 보며 말했다.

그럴 리는 없겠으나 로크는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LRL.”

 

로크가 꼬마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꼬마 자신도 당황하고 말았다.

 

, ?”

 

저는 이제부터 당신의 여명이 되겠습니다.”

 

꼬마, LRL의 시선이 로크를 향했다.

당황한 듯한 표정은 이내 작은 미소로,

작은 미소는 활짝 핀 웃음꽃으로 만개했다.

 

LRL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싱긋 웃으며 크게 외쳤다.

 

잘 부탁해여명황혼의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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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뜻 보자마자 영감이 떠오른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