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모음 링크 


----------------------------------------------------------------------------------------------------------------------------

 

16) Day 2. AM 07:00

 

 

 ‘사령관’은 천재(天才)다. 하지만 ‘나’는 범재(凡才)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인님, 출격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귀에 꽂은 이어폰 너머로 콘스탄챠의 힘이 들어간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익숙지 않은 침대와 베개에 누워 잠이 든 것 때문일까, 아니면 이질감이 드는 주인공의 몸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무작정 눈앞에 닥친 새로운 환경 때문일까. 전날 밤 숙면에 들지 못해 정신도 몸도 피곤했다.

 

 억지로 뒤척이다 잠이 들고 눈을 떴을 때 나를 반기는 것은 익숙하지 못한 천장이었다. 차라리 잠이 들고 일어났을 때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응, 콘스탄챠. 잠시만 기다려.”

 

 나는 힘든 기색을 숨기고 이어폰 너머로 내 명령을 기다리는 콘스탄챠에게 대답했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나를 반겨준 이는 콘스탄챠와 블랙 리리스였다.

 

“주인님, 간밤에 푹 주무셨나요?”

 

 콘스탄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방문 앞에서 나를 반겨주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그녀는 옷을 정돈하게 차려입은 채 내 앞에 서 있었다.

 

“응, 콘스탄챠. 침대가 무지 푹신하더라.”

 

 어떻게든 좋은 대답을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거짓말이 입에서 먼저 나왔다. 콘스탄챠는 입가에 손을 올리며 쿡쿡 웃어주었다. 콘스탄챠의 곁에 서 있던 블랙 리리스도 그녀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내 시야로 들어왔다.

 

“주인님, 아침 식사는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콘스탄챠와 같았지만 시꺼먼 무언가가 느껴졌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미녀들이 나를 아침 댓바람부터 챙겨주는 상황은 꿈에서도 꾸지 못했다.

 

“간단한 걸로 준비해줬으면 하는데..”

 

“사령관, 아침부터 여유만만이네.”

 

 왼쪽 편 복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갑게 깔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쫓아 고개를 방문 밖으로 내미니 왼쪽 복도에서 또각또각 하이휠 소리를 내며 우아하게 걸어오는 철혈의 레오나가 보였다.

 

“아직 이 함의 주인이라는 자각을 가지지 못했나 봐?”

 

 철혈의 레오나는 그 이명답게 차갑기 그지없는 두 회색빛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솔직하게 그 눈빛에 쫄았었다.

 

“당신,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라고 주인님께 무례한 언동은 하지 말아주시죠.”

 

 내 앞에 서 있던 블랙 리리스가 호박빛 눈동자에 쌍심지를 돋구며 철혈의 레오나를 받아쳤다. 움츠러들어도 모자를 살기였으나 철혈의 레오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의 금발을 뒤로 넘기며 흥하고 맞받아쳤다.

 

“메이드들이 주인보다 더 극성이네. 그것보다 사령관, 급한 일이야.”

 

 철혈의 레오나는 팔짱을 낀 채 블랙 리리스와 콘스탄챠를 무시한 채 나에게 말을 걸었다.

 

“급한 일이라니?”

 

“인근 지역에서 구조신호가 들어왔어. 당장 출격을 준비해야 해.”

 

 나의 의견 따윈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이미 결정된 사안처럼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나의 심정을 대변하듯 콘스탄챠가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철혈의 레오나 지휘관님, 아직 주인님을 기침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이세요. 이 상태에서 전술지휘를 바라시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또 아직 함내의 바이오로이드분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시고요.”

 

 콘스탄챠의 말에 철혈의 레오나가 고개를 까닥였다.

 

“아직 이 함의 바이오로이드들을 모른다고? 그런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안 거야?”

 

 그러고 보니 어제 너무 반가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변명할 방도가 필요했다. 콘스탄챠와 블랙 리리스 역시 빤히 쳐다보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아하하하, 그..그게, 어! 어..미스 포츈, 미스 포츈이 이야기해줬어! 응!”

 

“네? 주인님, 하지만 그녀는..”

 

“으응, 콘스탄챠. 따..따로 이야기를 해주더라. 이 함에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가 타고 있다고.”

 

“그렇지만 주인님, 그건..”

 

“...흐응, 뭐 됐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지.”

 

 내 어눌한 대답에 철혈의 레오나는 의심을 완전히 떨치지는 않은 모양새였다. 콘스탄챠와 블랙 리리스 역시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당황스러움이 섞여 있었지만 나는 그걸 애써 피했다.

 

“그..그것보다 구조신호라니?”

 

 황급히 대화 주제를 바꾸려고 그녀가 내뱉었던 말을 되물었다. 철혈의 레오나는 등을 돌리며 시선을 나에게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숙녀에게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다니, 감점이야. 사령관.”

 

“...” 

 

“앞에 한 말 그대로야. 인근 지역에서 구조신호가 잡혔어. 이제 당신이 나설 차례야.”

 

“...응.”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하이휠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등을 방문 입구에 기대었다.

 

‘내가..과연 할 수 있을까.’

 

 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콘스탄챠와 블랙 리리스에게 억지 미소를 지어주고는 난 복잡한 마음으로 콘스탄챠의 안내를 받아 그녀가 지나간 복도를 따라 함교로 나섰다.

 

“주인님, 이 앞이 함교에요.”

 

 콘스탄챠가 이끌고 온 곳에는 대형 도어가 자리를 잡은 곳이었다. 한눈에 봐도 두께가 엄청날 것만 같은 문 앞에 서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콘스탄챠는 나에게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주인님, 저는 지금부터 출격 포드로 향하겠습니다.”

 

“...너도 출격하는 거야?”

 

“네, 주인님. 지금은 전투 가능 인원이 몇 없기에, 저 역시 나설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려 왼편에 있는 블랙 리리스를 바라보았다. 콘스탄챠가 나설 상황 정도라면 블랙 리리스 역시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빤히 자신을 쳐다보자 블랙 리리스는 양볼을 부풀렸다.

 

“주인님, 아무리 오르카 1호에 탑승하셨다고 하더라도 주인님의 경호는 제 담당이에요!”

 

“후훗, 그녀의 말이 맞아요. 주인님. 언제 어디라도 주인님이 위험해지실 수 있으니 블랙 리리스양은 항상 주인님 곁에 있으셔야 해요.”

 

“..그거 참 고마운 일이네.”

 

 블랙 리리스의 전투능력을 고려하면 그녀도 출격하는 것이 나을 거란 생각도 들었지만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누구라도 자신의 옆에 함께 있어 준다는 사실이 방금 막 홀로 이 세계로 떨어진 나에게는 큰 버팀목이었다.

 

“주인님, 출격 포드는 바로 이 근처니 앞으로의 일은 블랙 리리스양이 설명해줄 거에요.”

 

“응. 콘스탄챠. 그..조심해.”

 

“후훗, 네. 주인님. 알겠어요. 무사히 돌아오도록 노력할게요.”

 

 콘스탄챠는 미소를 지으며 등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다 보고 나서야 나는 다시 거대한 도어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인님, 이게 주인님의 ID 카드에요.”

 

 블랙 리리스는 웃으며 나에게 무언가를 건내 주었다. 마치 사원증과 같이 플라스틱 재질이 느껴지는 케이스 안에 흰 바탕의 카드 위에 무언가 적혀 있었다.

 

-오르카 1호 함장

 

 금박으로 각인이 되어 있는 카드 문구를 읽자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살면서 내가 이런 거대 잠수함의 함장이 될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조차 없었다.

 

“후우..”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도어 개폐장치에 ID 카드를 대었다. 그러자 거대한 도어에서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문이 아무런 소음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2분 늦었네. 자, 사령관. 이 자리가 앞으로 당신의 자리야.”

 

 열린 문 너머의 함교에는 어느새 방금 만난 철혈의 레오나가 커다란 철제 의자 옆에 서 있었다. 방금 걸음을 옮긴 곳이 여기였구나 싶었다.

 

“저..그 철혈의 레오나..양?”

 

그녀가 걸음을 옮긴 이유가 분명 출격을 준비하려고 간 줄 알았다. 이렇게 금세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라 당황스러움이 말 속에 새어 나왔다. 나의 어눌한 부름에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사령관, 난 사령관이 좀 더 정진했으면 좋겠어.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도 그렇게 어려우면 어떡해?”

 

“그치만..”

 

“그치만이고 뭐고, 다른 애들한테는 그런 모습 보이지 마. 격 떨어진 모습을 자꾸 보이면 그녀들도 사령관을 믿기 어려워할 거야.”

 

 숨을 쉴 틈도 없이 가슴을 때리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나는 크게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 뒤에 서 있던 블랙 리리스가 격노가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철혈의 레오나, 당신이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라고 해서 주인님께 무례하게 구는 것이 허용될 거라 생각을 한다면 큰 오산이에요.”

 

“어머, 그런 말을 했었나? 난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블랙 리리스의 날 선 말에도 철혈의 레오나는 오른손으로 가지런히 정리한 머리카락을 만지며 시치미를 뚝 떼었다. 등 뒤에서 블랙 리리스의 서늘한 한기가 느껴지자 나는 황급히 그 철제 의자 자리로 가 앉았다. 블랙 리리스는 내가 서둘러 자리에 앉자 마지못해 나를 따라와 옆에 섰다.

 

“여기가 함교..”

 

 자리에 앉으니 그때야 이 자리 앞에 펼쳐진 넓디넓은 풍경이 두 눈에 확 들어왔다. 전면에는 천장부터 아래까지 쭉 이어진 창이 밖을 비추었고 내가 앉은 자리를 중심으로 조작패널과 좌석이 놓여 있는 반원 형태의 공간이 내 앞에 펼쳐졌다.

 

‘매번 보는 로비창..’

 

 항상 힘겹게 기나긴 로딩창을 이겨내고 화면을 가득 채웠던 오르카함의 로비화면이 눈앞에 펼쳐져 그 웅장함에 오히려 기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잠깐, 여기가 로비라는 건..’

 

 문득 든 생각에 나는 고갤 돌려 오른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꼿꼿이 허리를 세운 철혈의 레오나가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사령관.”

 

“어..어, 아냐. 그 혹시..철혈의 레오나는 출격 안 해?”

 

 내 물음에 철혈의 레오나는 잠깐 권총을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포즈를 취했다. 아, 저 행동마저 화면 너머로 본 적이 있다. 그녀가 부관이구나. 나는 그렇게 직감했다. 생각을 마친 듯 철혈의 레오나는 시선을 나에게 돌리며 말했다.

 

“우선 사령관의 적성부터 보고 나서 결정할게.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내 등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렇지. 응.”

 

 정석적인 대답이라면 정석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새삼 그녀의 말을 통해 실감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이제야 이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 자리인지, 다시 생각했다.

 

“자, 사령관. 당신의 메이드와 다른 이들이 당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이걸 쓰도록 해.”

 

 철혈의 레오나는 무언가를 내 시야 오른편으로 밀어 넣었다. 얼떨결에 그걸 받아 손에 들고 유심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건..”

 

“그건 HMD라는 물건이랍니다. 주인님.”

 

 내 왼편에서 블랙 리리스가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내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마치 내가 살던 곳의 VR기기가 좀 더 커지고 투박한 모양을 갖춘 이 물건이 매번 로딩창에서 보던 HMD라니, 새삼 만져보니 생각보다 무겁고 거친 느낌이었다.

 

“이걸 쓰시면 저희의 시야 공유 및 작전 명령, 행동 명령까지 모두 원활히 하실 수 있답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왼편에 서 있는 블랙 리리스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두 눈과 입가를 싱긋이 올린 채 내 손에서 HMD를 가져가 내 머리에 씌워주었다.

 

“자, 주인님. 이제부터 저희와 동기화를 시작할 거랍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당장은 주인님은 저희를 서포트만 해주셔도 된답니다.”

 

“그녀의 말이 맞아, 사령관. 지금 당장에는 그 물건에 익숙해져야겠지.”

 

 HMD가 내 머리에 씌워지고 시야가 모두 검게 물들었다. 아직 작동하지 않은 상태여서 그런 걸까, 무겁고 차가운 기계의 감촉이 양 귀 위로 내 머리를 눌렀다.

 

“자, 사령관. 당신의 차례야.”

 

기-잉

 

 철혈의 레오나의 말과 동시에 눈앞에 거대한 스크린이 펼쳐졌다. 시야를 꽉 채우는 블루 스크린에 깜짝 놀라는 동시에 블루 스크린의 가운데에 어떤 문구가 떠올랐다.

 

-HMD Connection in Progress..0%

 

 푸른 색 바탕에 흰색의 로고가 두 눈에 들어왔다. 그 문구를 보자 불안감이 조금 거두어져 가며 가슴 속에서 격앙이 그 빈자리를 메꾸었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지, 내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된 그런 기분이, 점점 불안감을 쓸고 지나갔다.

 

-HMD Connection in Progress..25%

 

 그래, 모든 일은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법이야. 이거라면 게임 속에서 수백 번도 더 본 장면이야. 이 몸도 주인공의 몸이고. 나는 할 수 있어. 전혀 다른 환경, 처음 보는 이들,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그런 곳. 나는 점차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HMD Connection in Progress..50%

 

 시작부터 철혈의 레오나에 블랙 리리스라니. 게임보다 스타트는 좋잖아. 아직 다른 애들은 만나보지 못했지만 분명 한 명씩 만나보면 어떻게든 해갈 수 있을 거야.

 

-HMD Connection in Progress..75%

 

 지금 이 몸은 주인공의 몸이야. 내가 주인공은 아니지만 이 세계에서 반드시 할 수 있는 무언가가, 꼭 있을 거야. 새삼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생이 눈 앞에 펼쳐질 거라 생각을 하니 격앙을 넘어서는 흥분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했던가, 마치 시험 하루 전날 교과서 한 번 다 읽고 시험을 잘 칠 수 있을 거라는 그런 기분이 내 온몸을 감쌌다.

 

-HMD Connection in Progress..100%

 

 로딩 문구가 100%를 채우고 화면이 갑작스레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머리 안으로 다양한 음색의 목소리가 뇌를 울리듯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응? 이건 뭐야, 기분 나빠!

 

-하하! 이게 HMD 링크인가, 기분이 묘하군.

 

-그리폰, 그렇게 혼란스러워 하지 않아도 돼. 이제부터 주인님이 우리 시야를 빌려 가시려는 거니까.

 

-네리는 준비 완료! 언제든 출격 명령만 내려줘! 사령관님!

 

-레프리콘 219, 괜찮습니까?

 

-예, 괜찮습니다. 노움 병장님. 잠깐 어지러워서 그만.

 

 짜증이 섞인 그리폰의 목소리, 요안나의 굳센 목소리, 콘스탄챠의 부드러운 목소리, 스스로 네리라 말하는 당찬 네레이드, 중저음의 노움과 어딘가 힘이 빠진 레프리콘의 목소리. 여러 색의 음성이 귀를 거치지 않고 뇌로 직접 들려왔다. 그 순간, 어딘가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윽-!”

 

“주인님?!”

 

 갑자기 뇌를 찌르는 듯한 고통에 나는 몸을 숙였다. 두 눈을 질끈 감아도 다양한 목소리들이 귀를 거치지 않고 뇌에 직접 전달되는 것만 같은 느낌에 무심코 HMD를 내던져 버리고 싶었다.

 

“..사령관?”

 

 양옆에서 블랙 리리스와 철혈의 레오나의 걱정이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오른손을 들어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왼손으로 고개를 갑자기 숙인 탓에 살짝 삐뚤어진 HMD를 다시 고정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해지는 거야. 익숙해져야만 해.’

 

 마음속으로 다시 각오를 다졌다. 나는 주인공이야. 그래, 주인공이 되어야 해.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떴다. 그리고 내 앞에 펼쳐진 다양한 스크린들이 눈에 들어왔다.

 

 콘스탄챠를 바라보는 그리폰의 시야. 그리폰을 보는 콘스탄챠의 시야. 그 둘을 보는 요안나의 시야. 힘차게 걷는 듯 좌우로 흔들리는 네레이드의 시야.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레프리콘을 보는 노움의 시야. 걱정스런 눈빛을 띈 노움을 보고 있는 레프리콘의 시야.

 

 순간적으로 두 눈에 들어오는 다수의 시야정보, 머릿속을 웅웅 울리는 음향정보, 갈피를 잃은 두 눈동자, 덜덜 떨리는 두 손. 난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고 결국 비어있는 위 속에서 무언가 올라왔다.

 

“우-에엑!”

 

“주인님!”

 

“사령관?!” 

 

“으웨-엑!”

 

 시큼한 위액이 목구멍을 지나 입안을 메웠다. 수많은 스크린이 동시에 흔들렸고 그들의 놀란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난 끊임없이 위액을 게워냈다. 참아보기 위해 노력을 해도 머리와 가슴을 뒤흔드는 듯한 감각에 결국에 나는 머리에 HMD를 쓴 채 의자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긴급 상황! HMD를 강제 분리하겠습니다!”

 

“여기는 오르카 1호 함교, 철혈의 레오나. 지금 당장 닥터를 함교로 보내!”

 

‘뭐..뭐야..이게.’

 

 블랙 리리스는 내 머리에 씌워진 HMD를 거칠게 벗겨내었다. 그러자 조금씩 울렁거리던 가슴과 머리가 점차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계속 토를 해댄 탓일까,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블랙 리리스는 크게 당황한 얼굴로 내 등을 두드리며 내 안색을 살폈다. 나는 무심코 그녀의 어깨에 힘없이 손을 얹으며 억지로 웃으려 애썼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그걸 애써 블랙 리리스에게 감추기 위해 애써 웃었다.

 

“사령관, 조금 있다가 닥터라는 모델이 찾아올 거야.”

 

 등 뒤에서 철혈의 레오나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렸다. 색색거리는 숨을 고르며 아직 구토로 인해 흔들리는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그녀는 전혀 동요하지 않은 듯 무정한 눈으로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았다.

 

“우선 지금 당장 작전을 실행하는 건 어렵겠네. 출격 대기 인원들은 어떻게 할 거야?”

 

“...대기, 해제.”

 

“좋아, 그대로 명령을 하달할게.”

 

 그녀는 내 대답을 듣고 아무렇지 않게 등을 돌려 함교의 문으로 걸어갔다. 나는 혼미한 정신을 다잡고 혹여나 싶은 마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등을 보고 있자니 블랙 리리스에게 감추려 했던 내 불안을 그대로 그녀에게 토로하고 말았다.

 

“..실망했어?”

 

 내 물음을 들은 철혈의 레오나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채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회색빛 눈동자에는 그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사령관, 실망이라는 건 말이야.”

 

 그녀의 음색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한 발자국 더 문으로 다가가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녀는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앞으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기대하지 않으면 하지도 않아.”

 

 멀어져가는 그녀의 등이 문이 닫히자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두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다시 직감했다.

 

17) Day 2. AM 07:35

 

“오빠, 혹시 몸 상태가 안 좋거나 하는 부분이 있어?”

 

 철혈의 레오나가 함교를 나선 이후 갈색 머리를 정돈하게 땋아 양갈래로 내린 소녀가 함교를 찾아왔다. 사령관은 함교의 의자에 앉은 채 블랙 리리스가 건네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위액의 쓰라림을 억지로 참아내었다.

 

“...아니. 그런 건 없어.”

 

 듣기에도 힘이 빠지는 목소리를 내며 무덤덤하게 그는 닥터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대답에 닥터는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땅에 떨어진 HMD를 들어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으음, 기계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사령관의 곁에 서 있던 블랙 리리스가 HMD를 살펴보는 닥터를 재촉하듯 격정이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뭐가 문제야, 주인님이 그걸 쓰시고 구토하셨다고!”

 

“리리스, 이 아이에게는 잘못이 없어. 침착해.”

 

 사령관은 힘이 쭉 빠진 손으로 블랙 리리스를 진정시켰다. 그의 만류에 블랙 리리스는 머뭇거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흐-음..그럼 이건 어때, 오빠.”

 

“...어떤 거?”

 

“혹시 몸이 익숙지 않다거나, 뭔가 위화감을 느낀다거나. 그런 거 있어?”

 

 닥터는 생글생글 웃음을 지으며 친근하게 사령관에게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사령관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그런 위화감은 있어.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만 같은..”

 

 사령관은 어제부터 느껴졌던 신체적 위화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이 몸은 자신의 육체가 아니었다. 눈 높낮이도 달랐고, 몸은 의식하는 대로 움직여주지만 정작 머리가 몸을 거부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 응. 이제 좀 알겠네.”

 

 닥터는 해답을 찾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HMD를 함교 탁자에 올려두며 말을 이어갔다.

 

“이 HMD는 오빠의 지휘능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바이오로이드들의 시야를 연결하는 물건이거든. 오빠도 봤지? 언니들의 시야가 비치는 스크린들.”

 

“응, 소리도 신기하던데.”

 

“히히! 그것도 이 물건의 놀라운 점이지. 하여튼 이 물건은 오빠의 뇌에 언니들의 시야를 공유, 심지어 소리까지 공유하게 하는 장비야. 이걸로 오빠는 현장에 없어도 현장 지휘를 원격으로 할 수 있어. 물론 드론에 달린 카메라를 통한 공중 지휘도 가능해.”

 

“호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이 기계가 내보내는 정보의 양을 오빠의 뇌가 처리하지 못한다는 거야.”

 

 사령관은 닥터의 말에 망치를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결국에 나 자신의 문제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샘솟았다.

 

‘그러면 주인공도 아닌 내가..왜 여기 있어야 하는 거지?’

 

 함교에 들어와 HMD를 쓸 때만 해도 자신이 주인공이 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마치 자신이 이곳의 불순물이라는 것 마냥 게임 속 주인공은 잘만 쓰던 HMD가 자신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으음~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그래! 예전에 멸망 전 인류 중에 이런 타입도 있었거든?”

 

“...어떤 타입?”

 

“예를 들어 1인칭 시점의 게임을 하면 큰 울렁증을 느낀다거나, 시야가 막 흔들리는 게임을 하면 구역질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대.”

 

“..아.”

 

 사령관은 닥터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깨달았다. 곧잘 있었다. 친구들 중에도 항상 FPS나 어지러운 게임을 하면 토가 쏠린다고 발을 빼던 친구가 한 명씩 꼭 있었다. 닥터는 크흠-하고 헛기침을 하며 교수처럼 한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오빠의 경우에는 그 사람들보다 배로 심할 거야. 오빠, 콘스탄챠 언니한테서 들어보니까 어제 발견했을 때만 해도 기절하고 몸도 제대로 못 가눴다며?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힘든 상태인 건 분명해.”

 

“으응..”

 

“그런데 언니들과 동기화까지 해서 작전 지휘를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우선 몸부터 제대로 챙겨야 해! 이것이 이 닥터님의 소견!”

 

 닥터는 말을 끝마치며 허리춤에 양손을 올리고 엣헴-하고 머리를 위로 추어올렸다. 어린 소녀의 귀여운 행동에 사령관은 피식 웃으며 오른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포상까지는 안 바랬는데, 에헤헤. 오빠, 정말 친절한 사람이구나.”

 

“물론이죠, 닥터. 이 제가 인정한 주인님인걸요.”

 

 배시시 미소를 짓는 닥터의 말에 사령관 등 뒤에 서 있던 블랙 리리스가 그보다 더 으쓱거렸다. 그런 그 둘과 달리 사령관의 속내는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 작전 지휘도 못하는 녀석이 뭘 하면 되는 거지..’

 

 사령관은 지금 자신의 위치와 최후의 인간이라는 타이틀의 무게를 버틸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제부터는 진정한 의미로 전쟁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에게는 게임 속의 스토리에 대한 지식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철충..별의 아이..레모네이드..’

 

 당장의 철충만 해도 점점 연결체들이 대거 등장할 것이고, 그 때문에라도 그들에게 대항할 수단이 필요했다. 레모네이드는 오메가부터 떠올랐다. 8지역의 스토리에서 등장한 그녀는 악독하고 독선적인 인물이었다. 별의 아이를 생각하면 당장 바다로 나가기 싫을 정도였다.

 

‘사령관의 명함만 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 때리고 있을 수는 없어.’

 

 사령관은 무심코 어제 생긴 뺨의 총상에 손을 대었다. 콘스탄챠가 붙여준 반창고의 효능이 좋았던 탓일까, 이제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지만 이 상처로 인해 이곳이 절대 게임 속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당신이 왜 여기로 돌아온 거죠?”

 

“언니?”

 

 사령관은 닥터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춘 채 곰곰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지휘는 애초에 불가능, 사실 생각해보면 작전도 전술도 모르는 그가 당장에 지휘봉을 잡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에 빠져 있던 순간, 그의 옆에 누군가 섰다.

 

“...어?”

 

 사령관은 누군가 자신 옆에 서자 무심코 올려다보고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의 옆에 선 이는 방금 함교를 나선 철혈의 레오나였다.

 

“...철혈의 레오나?”

 

“여전히 멍청한 얼굴이네. 사령관.”

 

“이이익!!”

 

 철혈의 레오나는 떠날 때와 마찬가지인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사령관을 내려다보았다. 사령관의 의자 뒤에 서 있던 블랙 리리스는 이제는 아예 울그락불그락한 표정이 되었지만.

 

“...분명 나한테 기대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왜 돌아온 거야?”

 

“어머, 부관이 가면 어딜 가겠어?”

 

 철혈의 레오나는 피식 웃으며 벙찐 사령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자길 바라보는 닥터에게 시선을 옮겼다.

 

“닥터, 사령관의 상태는?”

 

“공황 장애를 동반한 신체 부적응이 심각해. 따라서 당장에 HMD를 이용한 지휘는 불가능! 앞으로 좀 더 지켜봐야 할 거 같아.”

 

“그래? 그럼 사령관, 당신은 이것부터 해야겠어.”

 

“? 뭘..”

 

 사령관은 그제야 시선을 그녀의 손으로 돌렸다. 그녀의 왼팔에는 2권의 책이 들려있었다. 사령관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다시 그녀를 보자 철혈의 레오나는 왼팔에 든 책들을 그의 무릎 위에 얹혔다. 생각보다 무게가 엄청나 허벅지가 꾹 눌리는 감각에 사령관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숙녀가 뭘 가지고 오는지 정도는 곧잘 이해할 것. 이해까지는 아니라도 받아줄 생각부터 해.”

 

“..뭘 하자는 거야. 철혈의 레오나.”

 

 사령관은 살짝 삐쳐 오른 성질을 죽이며 이해할 수 없는 언동을 하는 철혈의 레오나를 째려보았다. 그런 사령관의 시선에도 철혈의 레오나는 왼팔로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사령관이 해야 할 일을 가져왔지.”

 

“..내가 할 일?”

 

“HMD 못 쓴다며?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는 줄 알아?”

 

“..나한테 기대도 안 했다고 했잖아.”

 

“어머, 설마 그거에 삐진 거야?”

 

 철혈의 레오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샐쭉이 웃었다. 그 모습에 사령관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려 하자 철혈의 레오나가 다시금 웃음을 거두고 또박또박 들으란 듯 말을 이었다.

 

“기대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당초에 당신이 어디 군사훈련 받은 사람인지, 아니면 멸망 전에 군의 장교를 했는지, 그런 정보가 하나도 없는데.”

 

“...어?”

 

“방금 말했지.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필요도 없다고.”

 

“어..”

 

“그 말은 그대로의 의미야. 난 당신한테 나처럼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안 했어. 내가 좀 많이 잘 났어야지.”

 

“...”

 

 사령관은 그녀가 당당하게 내뱉은 말 한마디에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던 분노가 팍 식어버렸다. 당당하게 웃으며 금발을 넘기는 철혈의 레오나가 아름답다는 생각보다 진짜 철판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의 옆에 있는 닥터와 블랙 리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언니..”

 

“?”

 

“그거..제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 않아?”

 

 닥터의 얼굴은 차마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얼굴이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철혈의 레오나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사실인데 부끄러울 게 뭐가 있어.”

 

“...듣고 있는 제가 다 부끄럽네요. 정말.”

 

 셋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령관은 문득 자기 무릎에 놓인 책자들을 들어 제목을 유심히 보았다.

 

<전략의 기초>

 

<전술의 기초>

 

“...?”

 

 한 손에 들기도 힘들 정도로 페이지가 족히 400은 넘어 보이는 책자의 제목들에 사령관은 당최 이걸 왜 그녀가 들고 왔는지 사령관은 쉬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령관이 책자를 들고 멍한 눈으로 보고 있자 철혈의 레오나가 무덤덤이 입을 열었다.

 

“사령관, 그게 앞으로 당신이 곁에 항상 두어야 할 물건이야. 저런 기계가 아니라.”

 

“...? HMD 대신에 이걸?”

 

 사령관의 물음에 철혈의 레오나는 눈에 띄게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이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당신은 정말로 저딴 기계로 모든 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한 거야?”

 

“뭐? 저걸로 지휘하는 거 아냐?”

 

“저건 지휘를 보조하는 장치에 불과한 거지, 지휘를 주도해야 하는 건 당신이야.”

 

“아..”

 

 철혈의 레오나의 말에 사령관은 이번에야말로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다는 느낌을 실감했다. 입을 벌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령관에게 철혈의 레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정말 나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에는 백 만년도 더 걸리겠네.”

 

“하?! 당신, 누구 멋대로 주인님을 당신 것처럼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는 경호원인 당신도 왜 주인님이랑 선을 넘으려 드는 거야? 경호나 하면 될 일을.”

 

 철혈의 레오나와 블랙 리리스는 서로를 노려보며 마주 섰고 닥터는 그런 그녀들의 싸움에 관심이 없다는 듯 하품을 내쉬었다. 속내는 어떻게 저 둘을 떼어놓고 오빠랑 놀 궁리로 가득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 주인공이 아닌 내가..’

 

 사령관은 한참을 두 손에 든 책자를 바라보았다. HMD를 착용하기 전과 달리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격앙은 없었지만 무언가 다른 것이 가슴 속에 샘솟기 시작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까가 아니야. 해야만 해.’

 

 이곳에 온 지 겨우 하루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령관은 죽음의 문턱을 한 번 경험했다. 이 세상은 그를 반겨주는 세상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그는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주인공이 아니야.’

 

 사령관은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에 있는 HMD를 바라보았다. 그 자신은 저걸 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게 이 몸이 거부하는 건지, 저 물건이 거부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거부하는 건지 알 방도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방도를,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해.’

 

 고작 하루다. 하루 만에 사령관은 두 차례 목숨을 이 함선에 있는 이들에게 도움받아 살아남았다. 그들이 기다리는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다. 하지만 최후의 인간이라는 것은 주인공과 자신의 공통점이었다.

 

‘뭐든지 해보겠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뿌득-

 

 책자를 쥔 사령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책자의 딱딱한 겉표지가 그 힘에 소리가 나자 서로를 노려보던 철혈의 레오나와 블랙 리리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흐음. 눈빛은 마음에 드네.’

 

 철혈의 레오나는 사령관의 눈빛을 보고는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를 다짐한 듯 눈 끝이 날카로워진 사령관의 모습이 퍽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철혈의 레오나는 허리를 굽혀 사령관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며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령관, 저 기계로 당신이 지휘할 수 있는 인원이 얼마나 될까?”

 

“...?”

 

 사령관은 그녀의 물음에 허공을 응시하던 눈을 돌려 어느새 허리만 굽힌 채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회색빛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었다.

 

“당신이 저 기계에 미련을 가지지 못하게 하려는 거야. 얼마나 될까, 그래서?”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거부반응이 일어나서 잘 모르겠네.”

 

 그의 말을 들은 철혈의 레오나는 허리를 펴고 머리에 권총을 두들기며 사령관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못해도 1자리 수를 넘기기는 어렵겠지.”

 

“우씨! 아니거든, 레오나 언니! 최대 인원수는 3자리 수까지 가능해!”

 

“하지만 그걸 그가 못 받아들이잖아. 그러니 1자리 수.”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사령관은 빙빙 돌려 말하지 말라는 듯 철혈의 레오나를 째려다 보았다. 철혈의 레오나는 자신한테 기죽는 듯하면서 또 안 죽는 그에게 흥미를 느꼈다.

 

“내 관할 부대인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만 해도 수십은 가뿐히 넘어. 내가 관리할 수 있는 인원만 해도 가볍게 100은 넘어가지.”

 

“...”

 

“거기다 불굴의 마리가 이끄는 스틸라인은 또 어떻고? 수백은 가볍게 넘길걸?”

 

“...”

 

“그녀들을 전부 저런 기계 하나에 의존해서 지휘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안일한 거야. 당신에게 필요한 바탕은 저딴 것에 의존해서 키울 바탕이 아니야. 오히려 다행이야. 당신이 저런 사도로 빠질 원천 자체가 없어졌으니.”

 

 HMD를 사도라 말하는 철혈의 레오나를 보고 사령관은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저걸 못 써서 크게 낙담하였는데 그걸 사도라 하다니. 솔직한 마음으로 웃고 싶었다.

 

“앞으로는 바빠질 거야. 딱 보아하니 전략도 전술도 모르는 것 같은데. 내 예상이 틀려?”

 

“..인정, 아암! 인정합니다!”

 

 철혈의 레오나의 질문에 사령관은 울적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애써 담담한 척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 침울해 있었냐는 듯, 한 손을 번쩍 들고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하는 학생처럼 구는 모습에 가라앉은 넷의 분위기가 새삼 밝아졌다.

 

“오빠, 앞으로 오빠의 치료는 내 전담이니까, 만약 무슨 일 생기면 내 연구실로 찾아오면 돼!”

 

“그래, 고마워. 닥터.”

 

“히히, 이 여동생만 믿으라구.”

 

 닥터는 배시시 웃으며 뜀걸음으로 촐랑촐랑 걸으며 함교를 떠났다. 그녀가 떠나자 철혈의 레오나가 한층 가벼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령관, 앞으로 이곳을 올 일은 적을 거 같네.”

 

“? 그럼 어디서 일해?”

 

“집무실이 따로 있어. 거기서 당신은 앞으로 서류 업무를 주된 일로 할 거야.”

 

“..그럼 지휘는?”

 

“설마 전략과 전술을 한달음에 익힐 물건이라 생각했어? 당신 혹시 머리에 지휘모듈이라도 심을 심산이야?”

 

“...진짜 말 한마디를 안 져주네.”

 

“져줄 만한 이유가 없어.”

 

 철혈의 레오나는 방금과 같이 또다시 함교의 개폐문 앞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도 그녀는 고개만 돌려 함교 의자에 앉아 있는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뭐해? 알아서 찾아오게?”

 

“...하하하.”

 

 사령관은 멋쩍은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등 뒤로 블랙 리리스 역시 웃으며 따라붙었다. 철혈의 레오나는 고개를 돌린 채 그가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의 당신의 성장을 기대할게, 사령관. 날 실망시키지 마.”

 

“..장담은 못하겠네. 그거.”

 

그렇게 셋은 함교를 떠나 집무실로 이동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18) Day 121. PM 05:08

 

 사령관은 자신이 이 세계로 떨어지게 된 첫날과 둘째 날을 회상하다 웃음을 지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던 자신과 그걸 옆에서 지켜 봐주던 이들, 그들과의 과거에 사령관은 상념에 푹 빠져 있었다.

 

“정말이지. 처음부터 레오나는 너무했다니까.”

 

 사령관은 한참 동안 감았던 눈을 떴다. 그가 흘렸던 눈물이 말라붙어 눈을 떠도 시야가 흐렸다. 흐릿한 시야를 따라 책상의 두 번째 서랍을 열어 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칙-

 

 사령관은 입에 담배를 한 개비 물고 옛 과거들을 계속해서 회상했다. 둘째 날부터 시작된 서류 업무와 철혈의 레오나의 엄격한 교육 아래 전략과 전술을 공부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녹록하지 않았다.

 

“콘스탄챠!”

 

 첫 전술 지휘를 맡을 때는 HMD가 아닌 집무실의 홀로그램 지휘 패널을 잡았다. 최신식이라 자랑하는 닥터의 말답게 3D 홀로그램은 정찰을 기반으로 그려지는 전장의 모습과 원형 포인트로 나타나는 부대원들의 위치를 비추어 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되는 것이 있었다.

 

“주인님, 저는 괜찮아요.”

 

“아..아냐, 내가 적들의 위치를 잘 못봐서..”

 

 홀로그램 패널은 띄워주는 것뿐만 아니라 공중에 손짓하는 것만으로도 전장의 360도 전체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찰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보일 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령관, 침착해. 당신이 그녀보다 더 당황했잖아.”

 

“..지금 침착하게 생겼어?”

 

 첫 전술 지휘의 가장 큰 미스는 정찰의 부족이었다. 그 때문에 콘스탄챠는 옆에서 등장한 나이트 칙의 기습에 왼팔에 큰 부상을 안은 채 복귀했었다. 모두 자기 잘못이라고 여겼다.

 

“사령관, 당신은 당신의 위치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해.”

 

“...”

 

 철혈의 레오나는 전술 지휘의 미스보다도 사령관의 행동거지를 더 타박했었다. 사령관은 짧아져 가는 담배를 무심히 바라보며 재떨이 위에 담뱃재를 털어 넣었다.

 

“권속이여! 오늘도 짐과 함께 시간을 보낼 영광을 주도록 하마!”

 

 종종 사령관은 함교로 향했었다. 철혈의 레오나는 그런 그를 못 마땅찮게 보았지만 그를 따라 함교로 나섰었다. 결국 그는 HMD를 다룰 수 없었다.

 

“가위 바위 보! 묵에 묵에 찌! 으라챠! 내가 이겼다!”

 

“에엑! 권..권속이여! 다시! 다시 하는 거다!”

 

 굳이 함교까지 찾아와 놀아달라는 LRL과 놀아줄 때면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자신이 실수하는 순간, 이 아이도 죽고 이 함의 모두가 죽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이 그를 엄습했다. 그래서 그는 종종 어디론가 가서 숨어버렸다.

 

“바보 발견!”

 

“..쿨럭”

 

 사령관은 아무도 없는 곳을 항상 찾아 헤매었다. 우연히 발견한 부식창고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멍하니 어둠 속에 자신을 안겼다. 그가 바라보는 어두운 그림자 속에 전에 살던 곳들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사령관, 난 사령관이 좀 더 나한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길 원했는데..이 모습을 보니 한 백 년은 더 걸리겠네.”

 

 사령관은 외로웠다. 아무도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줄 수 없다는 생각에 미쳐 몸부림을 치고 싶었다. 친구도, 가족도,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의지할 길이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홀로 어둠 속을 바라보며 이전의 세계를 그리워했었다. 그럴 때마다 철혈의 레오나는 그런 그가 숨어 있는 곳을 귀신같이 찾아내었다.

 

“하다못해 사령관실에서 먹던가 할 것이지. 무슨 알비스처럼 몰래 숨어서 먹고 있어?”

 

“여..여기가 편해서?”

 

 언제나 도망치는 자신을 잡아다 다시 집무실에 앉히는 건 블랙 리리스가 아닌 철혈의 레오나였다. 아니, 어쩌면 그 둘은 내통하고 있던 게 아닐까. 블랙 리리스는 사령관이 부탁하면 마지못해 하면서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성격이었으나 철혈의 레오나는 그런 걸 봐주지 않았다. 사령관은 담배를 하나 더 꺼내어 입에 물었다.

 

칙-

 

“네리 등장!”

 

“오, 네리. 어서 와.”

 

“헤헤, 사령관! 오늘 네리는 어땠어?”

 

 사령관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어떻게 해서든 메꿀 방도를 찾아 헤맸다. HMD를 쓸 수 없으니 항상 홀로그램을 이용한 전술 지휘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처음 보는 물건을 당장에 잘 쓰는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네리가 기관총으로 철충들을 싹 쓸어버렸다고!”

 

“하하, 보진 못했지만. 오늘도 수고했어. 네리.”

 

“헤헤!”

 

“..온몸에 자잘한 상처가 많구나. 우선 수복실부터 가봐.”

 

“응! 사령관. 또 봐!”

 

“그래, 들어가.”

 

 하루가 지나면 지날수록 다친 아이들이 늘어났다. 사령관은 스스로 자책하며 자기 자신을 코너로 몰아세웠다. 점차 수면 시간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몸이 점차 망가지기 시작한다는 걸 깨달은 건 항상 자신의 옆에 붙어 있던 블랙 리리스의 걱정 어린 눈빛 때문이었다.

 

“사령관, 이 전술은 이 상황에 적합하지 않아. 오히려 우회하는 편이 더 빠르게 목표에 도달할 수 있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쪽 스쿼드들이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잖아.”

 

“그쪽 스쿼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 스쿼드는 내 부하들이거든.”

 

 사령관이 학습해야 하는 전략 전술의 폭은 커도 너무 컸다. 기동, 경장, 중장형 바이오로이드, 거기에 다양한 타입의 병종군들, 그녀들은 제각기 다른 부대 소속이었기에 통일된 지휘권은 항상 그에게 주어졌다.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어떠한 전략을 구상을 해보아도 정작 실전에서는 먹히질 않았다. 게임과 현실의 괴리감에 사령관은 점차 마음속 어딘가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오빠, 잠은 제대로 자는 거야?”

 

“응, 물론이지. 닥터.”

 

“하지만 점점 오빠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어. 급격하게 오르는 심박수나 혈압도 그렇고. 얼굴을 숨겨도 바이탈 체크를 속일 수는 없어.”

 

“...그래?”

 

“...오빠, 최면 치료라고 알아? 그거 한 번 해보는 게 어떨까?”

 

 사령관은 흩어지는 연기 너머로 그가 걸어온 길을 되새겼다. 닥터와 블랙 리리스의 걱정이 어린 시선, 그리고 항상 무표정했지만 자기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철혈의 레오나. 그녀들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자신은 이미 없었을 것이라 예상했다.

 

“사령관님! 충성! 헤헤.”

 

“충성!”

 

“..그렇게 각 안 잡아도 돼. 브라우니 2호, 레프리콘 219.”

 

“헤헤, 보십셔. 상병님. 저희 사령관님은 그렇게 깐깐한 분이 아니라 했잖슴까.”

 

“..브라우니 2호, 그래도 상관에게 무례한 행동은 하지 마세요.”

 

 철혈의 레오나는 중상자를 챙기는 사령관에게 너무 신경을 쓴다고 타박했다. 하지만 사령관은 그녀들 한 명 한 명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부상자를 줄이고 챙기기 위해 정찰과 보급에 매진했다. 각 부대의 보급병들과 정찰병들의 통솔은 그가 도맡았고 전투형 바이오로이드들의 전략과 전술은 철혈의 레오나가 도맡았다.

 

“사령관님, 너무 그렇게 마음 쓰실 필요 없어요. 저희의 역할은 사령관님을 지키고 인류를 재건하는 거니까요.”

 

“맞습니다. 각하. 어차피 전장에서 죽고 스러질 몸, 언제가 되었든 저희는 발할라로..”

 

 하지만 정작 전장에서 다치고 돌아오는 이들도 자신들의 상태에 무감각했다. 사령관은 그 사실에 더더욱 절망했다. 그녀들은 자신들을 바이오로이드,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고 했다. 하지만 로봇도 없던 세계에서 건너온 사령관에게는 그 사실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령관, 이런 모습을 다른 애들한테 들키면 위신 추락 정도로 끝나진 않을 거야. 일어나.”

 

“..넌 아무렇지도 않아? 철혈의 레오나?”

 

 사령관은 다 타버린 담배를 재떨이 위에 비벼껐다. 이제는 휩노스병도 없었다. 목 뒤에서 항상 느껴지던 NNIE 제어회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가 뜨거워지고 점점 무거워져 왼팔로 머리를 지탱했다.

 

“우릴 부정하려 하지마. 사령관. 당신이 뭐라 하더라도..우리는 바이오로이드야.”

 

“뭐가..뭐가 바이오로이드야..씨발.”

 

 왼손에 가려진 시야 너머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밖이 비쳤다. 사령관은 그 너머에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며 항상 이 함의 바이오로이드들을 떠올렸다. 바다는 오르카호, 각양각색의 물고기들은 바이오로이드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들을 따사로이 비추는 해가 되길 원했다.

 

“사령관, 훌륭한 지휘관은 어떤 사람인 거 같아?”

 

 해가 되기 위해, 그녀들과 함께 걸어가기 위해 사령관은 닥치는 대로 업무에 매진했다. 철혈의 레오나는 20일째 되던 날, NNIE 시술을 그에게 권했었다.

 

“이걸..지금 나보고 하라는 거야?”

 

“거기에 서명만 한다면 사령관은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을 거야. 이 오르카함의 함장으로서도 저항군의 총사령관으로서도.”

 

 그녀가 내민 서류에는 멸망 전 인류가 개발했던 NNIE 시술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초기에는 군사 목적으로 개발된 이 시술은 인간의 오감을 강화하고 뇌내 호르몬 분비를 제어해 전장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받을 시술은 후자였다.

 

“오빠, 이거 꼭 해야겠어?”

 

 사령관은 뇌에 전자회로를 깐다는 것이 꺼림칙했으나 이내 그 서류에 결제 도장을 찍었다. 그는 20일이란 시간 동안 자신을 돌아봤다. 그는 주인공이 되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했었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었다. 주인공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했었다.

 

“...닥터, 난 내가 얼마나 모자른 놈인지 나 스스로가 잘 알아.”

 

 주인공이 되기 위해, 다정하고 착한 그의 가면을 쓰는 것이나,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철혈의 가면을 쓰는 것이나. 사령관에게는 다를 것이 없었다. 이미 자기 자신은 절벽에 떨군 지 오래였었다.

 

칙-

 

 사령관은 담배를 또다시 물었다. 이제 입안이 텁텁하게 마르고 목이 따가웠다. 워울프가 건네준 담배도 이제는 몇 개비 남지 않았다.

 

“후우..”

 

 방안은 이미 그가 핀 담배의 연기로 자욱했다. 바닐라가 이걸 보면 화내겠지. 사령관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여태껏 써 왔던 가면이 벗겨지자 되려 몰려오는 감정과 기억의 파도에 그는 휩쓸리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다. 불굴의 마리, 오르카 1호의 함장이자 현 저항군 총사령관이다.”

 

“저 역시 반갑습니다, 각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불굴의 마리는 예상보다 더 딱딱한 인물이었다. 군인이라는 주형틀이 있다면 거기서 만들어진 인물처럼 다가왔다. 그녀와는 하급 병사들의 복지에 관해 자주 부딪혔었다.

 

“앵거 오브 호드, 신속의 칸이다.”

 

 신속의 칸은 철혈의 레오나 못지않은 차가운 인상이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그녀는 보급도 없이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그래서 사령관은 그녀 부대의 보급을 도맡았다.

 

“멸망의 메이야. 환영 파티는 준비되었겠지?”

 

 멸망의 메이는 게임 속보다 훨씬 거만한 성격이었다. 둠브링어의 폭격을 과신하며 전장에 나서기를 즐겼다. 사령관과 가장 자주 부딪힌 지휘관이었다.

 

“인류 최후의 함대 총지휘관 무적의 용이오. 앞으로 주군을 위해 싸우겠소.”

 

 어떻게든 작은 실마리를 찾아 헤맨 끝에 만난 무적의 용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불신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사령관은 그것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역시 무적의 용의 능력과 함대의 힘만을 원했었다.

 

“호오, 그대가 사령관인가? 만나서 반갑다. AA캐노니어 지휘관, 로열 아스널이다.”

 

 집무실에 도착해 사령관을 흥미롭다는 듯 내려다보는 로열 아스널은 내심 무언가 거북했었다. 적갈색의 두 눈동자가 마치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보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사령관은 자신이 선택한 NNIE 시술이 틀리지 않았다고 여태껏 생각해왔다. 철혈의 레오나의 말마따나 자존심이 강한 그녀들을 조율하기 위해서는 냉정한 카리스마가 필수적이었다. 가면의 효과 덕택일까, 그녀들은 자신의 중재안을 마지못해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 가면은 오늘 보기 좋게 깨졌다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것도 다 폈네.”

 

 사령관은 필터까지 불이 타오른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텁텁한 목과 메마른 입안에 시원한 음료를 들이붓고 싶어 의자에서 일어나 방 한 켠 구석에 놓인 정수기로 걸음을 옮겼다.

 

꿀꺽-꿀꺽

 

-당신의 바램은 무엇입니까? 인간?

 

 무적의 용을 찾아 멸망 전 인류의 해군기지를 찾아 헤맬 때 인적이 드문 섬에서 리오보로스의 유산, 로크를 만났었다. 거대한 검은 몸체에 금색의 테를 두르고 붉은 안광을 연신 내뿜는 그 모습은 가면을 쓴 사령관마저 압도하는 웅장함이 깃들어 있었다.

 

-신체를 스캔해 보니 목 뒤에 NNIE 회로가 있군요.

 

“..눈치가 빠른데.”

 

-저 암컷 바이오로이드를 속일 수 있을지언정 제 시야모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로크의 붉은 안광이 발광하며 사령관을 찬찬히 훑어보는 듯 느린 속도로 고개를 움직였었다.

 

-이 무덤의 주인이자 저 로크의 주인이신 앙헬 리오보로스 각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죠.

 

-바이오로이드들을 인간처럼 대하는 이들은 위선자다. 인형 따위에게 사랑을 주고, 사람을 두려워해 도구에게 감정을 품는 자위행위에 몰두한 위선자.

 

“...극단적인 양반이네.”

 

-그분에게는 다양한 가면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통치자, 대성한 사업가, 정적을 무참히 죽일 수 있는 살육자. 어떻게 보면 극단적이면서도 항상 자신이 있으셨지요. 하지만 그런 그분도 자신을 속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르군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날 독대하고 싶다니.”

 

-그 암컷들은 그대의 진정한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가면 뒤에 숨어 있는 그대를 말입니다.

 

“..내 진짜 모습?”

 

-그렇습니다. 범인(凡人) 주제에 원치 않게 높은 자리에 앉아 스스로 깔려가는 그대의 모습을 그녀들이 본 적이 있습니까?

 

 로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령관의 가면을 뚫고 그를 발가벗겨 내었다.

 

-당신은 우둔한 인물이군요. 스스로 자신의 비밀을 숨기고,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는 우둔한 인간. 겁이 많고, 유약하고, 그러면서도 그걸 저딴 암컷 유기체들로부터 자신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쓴, 당신은 우둔한 인물입니다.

 

“...”

 

-하지만 그런 당신이기에 저는 흥미가 생겼습니다. 천재의 길과 범재의 길, 본래 겹쳐지지 않는 길에 선 당신의 상황. 부디 그 끝을 보고 싶군요. 저를 함선에 동행하게 해주시겠습니까?

 

“...합류를 환영한다. RF87 로크.”

 

-영광입니다. 저의 새로운, 우둔하기 짝이 없는 각하. 당신의 가면이 벗겨질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로크는 천천히 고개를 수그렸었다. 로크의 합류로 사령관의 직할부대, AGS 로보테크의 전력이 증강되었다. 닥터는 이를 퍽이나 로크를 좋아했었다. 사령관의 비밀을 공유한 친구처럼 그를 대했다. 로크 역시 닥터를 영민한 아이라 부르며 둘의 사이는 생각보다 빨리 가까워졌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지 창밖으로 주홍빛이 새어 들어왔다. 사령관은 수면 너머 비치는 주홍빛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노을이 지는 햇빛 아래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는 것을 본 사령관은 개인 화장실에 들어가 세면대 앞에 섰다.

 

“태양이라..그래, 나는 그녀들의 태양이 아냐.”

 

 사령관은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시원하게 내려오는 물줄기로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씻어 내렸다. 수도꼭지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받아 세수하던 그의 머릿속에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당신 재밌는 사람이네?

 

“뭐?”

 

 며칠 전 갑작스레 연락해온 에바 프로토타입은 홀로그램 스크린 너머로 사령관을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았었다. 그녀의 남색빛의 두 눈동자는 그의 곁에 선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들이 아닌 사령관만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며 무덤덤이 작전 회의실에 앉아 있는 사령관에게 말을 걸었다.

 

-외강내유, 딱 그게 맞아떨어지는 남자네.

 

“당신, 갑자기 나타나서 남의 사령관을 마음대로 평가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에바 프로토타입이 사령관을 유심히 쳐다보자 그의 옆에 서 있던 철혈의 레오나가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었다. 사령관은 회로의 도움을 받아 얼굴을 굳힌 채 에바 프로토타입의 이야기를 들었다.

 

-당신, 지금 그 모습에 당신은 만족해?

 

“무슨 소리냐?”

 

-아니, 뭐. 겉으로는 멀쩡한 척을 하는데..당신, 지금 속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그녀의 말에 철혈의 레오나는 움찔했지만 그것은 이미 사령관의 신경을 벗어난 일이었다. 에바 프로토타입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당신, 당신이 보기에는 내가 인간 같아? 아니면 바이오로이드 같아?

 

“...인간. 인간 같아.”

 

“사령관? 지금 무슨..”

 

 사령관은 에바 프로토타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내막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최초의 바이오로이드, 그와 동시에 처절한 운명을 맞이한 여자. 사령관의 대답에 그녀는 깔깔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인간, 인간이라..그래, 난 인간이야. 스스로 하고 싶은 걸 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을 나 스스로 찾아가지. 난 인형이 아냐. 자율성은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바이오로이드와 같은 인형이 아니지.

 

“...”

 

 배꼽을 잡으며 웃던 그녀는 돌연 웃음을 거두고 날카로운 눈으로 사령관을 응시했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인간 같지는 않네.

 

“각하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불굴의 마리는 그녀에 대한 적의를 감추지 않았다. 두 눈에서 푸른 전자기가 맴돌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사령관은 달랐다. 비웃음이 가득한 그녀의 말에 사령관의 머릿속이 핑 돌기 시작했었다.

 

-이번에는 다른 질문이야. 최후의 인간.

 

“...뭐냐.”

 

“사령관! 더 이상 저 여자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어!”

 

 멸망의 메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에바 프로토타입에게 삿대질을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닥쳐, 자위 기구들 주제에 인간들의 대화에 끼어드려 하지마.

 

“뭐? 당신, 지금 말 다했어?!”

 

 사령관은 갑작스레 찾아오는 졸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 머리를 짚었다. 그의 이상 증세에 블랙 리리스와 콘스탄챠가 크게 당황했었지만 그는 그녀들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는, 바이오로이드일까? 아니면 인간일까?

 

“...아.”

 

 그녀의 물음과 함께 사령관은 몰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었다. 끊어지는 의식 속에서 당황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사령관은 연거푸 하던 세수를 멈추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하..하하하!”

 

 거울에 비친 사람은 이전과 다른 인물이었다. 갈색의 머리칼 대신에 흑색의 머리숱이 눈에 들어왔다. 가느다란 체구 대신에 건장한 체구, 하루가 멀다하고 온몸에 퍼지던 철충의 잠식은 더는 없었다. 이곳에 와서 하루도 빠짐없이 보던 주인공의 모습은 더는 없었다. 하지만 몸의 이질감은 이전과 다름이 없다고 느꼈다.

 

“이건..이건 내가 아니야!”

 

와장창-!

 

 그의 주먹을 꽉 쥐었다. 깨진 유리 파편들은 여전히 그를 비추었다. 사령관은 힘없이 난장판이 된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 창 너머로 들어오는 주홍빛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

 

 갈 곳을 잃은 시선이 책상 위에 올려둔 그의 단말기로 갔다. 손목형 단말기에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다는 노란 점등이 깜박이고 있었다. 사령관은 단말기를 집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발신자는 블랙 리리스였다.

 

<주인님, 철혈의 레오나가 작전 회의실로 주인님의 직할 부대 및 독립 부대, 소대의 지휘관급과 부관급 모델들의 참석을 희망하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동생들에게 호위를 맡기고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착한 리리스가>

 

“...리리스가?”

 

 메시지를 읽은 사령관은 전문을 읽으며 정신을 다잡기 시작했다. 항상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블랙 리리스가 자리를 비울 정도의 사안이라는 생각에 전문을 다시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라도 그는 익숙한 이름에 시선을 고정했다.

 

“...레오나.”

 

 사령관은 단말기를 꽉 쥐었다. 사령관과 그녀가 함께 보낸 시간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다. 화내고 싸우고, 다투고, 남몰래 피식 웃던, 그녀와의 시간 속에는 가면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녀 앞에서만큼은 유약한 모습도, 겁쟁이인 자신도, 모두 드러내었다.

 

“혼자서 다 짊어지려고 하다니.”

 

 사령관은 단말기를 손목에 차며 옷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 한 사람이 들어갈 만큼 그에게는 불필요하다 할 정도로 큰 옷장의 문을 열었다. 몇 벌의 흰색의 함장 제복과 흰색의 군모가 눈에 들어왔다. 사령관이 손을 뻗어 함장 제복의 겉옷을 집으려 하자 옷장 구석에 놓인 물건들이 노을빛에 비추어지며 은은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

 

 옷장의 구석에 놓인 물건들은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는 HMD와 흰색의 권총용 홀스터,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은색의 권총이었다. 사령관은 그 물건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기절하기 전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정리해뒀구나.’

 

 사령관은 HMD를 원망이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결국 마지막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저거였지. 저것만 다룰 수 있었어도..’

 

 사령관은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이윽고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레오나한테는 나중에 돌려주어야겠는데.”

 

 사령관은 HMD를 무시하고 허리춤에 홀스터를 두르고 함장 제복의 겉옷을 입으려 했다. 하지만 제복의 치수가 변한 그의 몸에 맞지 않았다.

 

“...하아.”

 

 사령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겉옷을 어깨에 걸쳤다. 옷장의 문을 닫고 그는 책상 위의 담뱃값을 왼 주머니에 넣고 굳게 닫힌 방문 앞에 섰다. 창밖의 노을빛이 그의 등을 비추었다.

 

“나를 대체할 건 준비되었어. 이게 정말로 마지막이야.”

 

 사령관은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리고 문의 개폐기에 손을 대었다. 문이 열리고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가만히 두 눈을 감고 서 있는 고양이 소녀였다.

 

“페로.”

 

“네, 주인님.”

 

 페로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과 달리 축 늘어진 꼬리는 바닥을 탁탁 치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네.”

 

“아시면 됐습니다.”

 

 무덤덤이 말하는 그녀의 입과 달리 그녀의 꼬리는 더욱 세차게 바닥을 때렸다. 사령관은 피식 웃었고 그의 웃음에 페로는 감았던 두 눈을 떴다. 푸른 빛과 노란 빛이 감도는 아름다운 오드아이였다.

 

“이제 마음의 정리가 다 되셨나요?”

 

“..그래.”

 

“새로운 몸은 괜찮으신가요?”

 

“..응.”

 

“..그러면 됐습니다. 주인님이 괜찮으시다면..”

 

 둘이 서로를 마주 보며 대화를 하는 사이 양쪽 복도 끝에서 힘찬 뜀박질 소리와 함께 두 여성이 뛰어왔다.

 

“주인님!”

 

“주인!”

 

 하치코는 한 손에 방패를 들고 양쪽의 검은 귀가 팔락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달려왔고 펜리르는 꼬리를 격하게 흔들며 네 발로 달려왔다.

 

“하아, 둘 다 진정..”

 

“주인님! 나오셨어요!”

 

“주인! 오늘 나 잘했어? 포상 줘!”

 

 양쪽에서 달려온 둘은 페로의 말을 무시하고 사령관에게 달려들어 그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덕분에 사령관은 양팔이 눌린 모양새가 되었다.

 

“..둘 다 어디 있다가 이렇게 달려오는 거야?”

 

“주인을 지키고 있었어!”

 

“리리스 언니가 주인님 방에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라고 했어요!”

 

 그녀들의 당찬 목소리에 사령관은 그녀들의 가슴팍에 끼어있던 두 팔을 빼내려 했다. 둘은 그걸 느꼈는지 서서히 포옹을 풀어주었고 그는 둘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 주었다.

 

“헤헤..”

 

“히히..이것도 포상이야?”

 

“그래. 오늘 너희 모두 수고가 많았어.”

 

 하치코는 사령관의 손길과 칭찬에 기분이 좋았는지 아예 그의 손에 뺨을 부비적 거렸다. 펜리르 역시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빨간 꼬리를 세차게 공중에 흔들어 대었다.

 

“...”

 

“아, 페로도 해줄까?”

 

“..아뇨. 저는 괜찮아요.”

 

 담담히 두 눈을 감은 채 꼿꼿이 서 있는 페로와는 달리 그녀의 꼬리를 동그랗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사령관은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와! 주인님이 웃었어요!”

 

“주인, 새 몸이 맘에 들었어? 오늘따라 더 따뜻한 거 같아!”

 

 사령관은 펜리르에게 뻗었던 손으로 페로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페로의 꼬리가 세차게 휘휘 젓기 시작했다. 사령관은 이마에서 턱으로 손을 내려 그녀의 턱을 살살 긁어주었다.

 

“그릉..그릉..”

 

 페로는 두 눈을 감고 사령관의 손길에 턱을 맡겼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셋은 서로를 보고 싱긋 웃음을 지었다. 사령관이 손을 떼자 그녀는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다시 한번 너희들에게 고마워.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

 

“..다음부터는 그런 무모한 행동만 안 해 주시면 됩니다.”

 

 페로는 흥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령관은 삐친 그녀의 모습을 보고 힘든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 이제 어디 가실 거에요?”

 

“작전 회의실, 거기로 가자.”

 

“그러면 빨리 이동하시죠. 아마 지금쯤 아래층에서 주인님의 퇴실을 보고 다른 이들이 달려오고 있을 겁니다.”

 

 앞서 걷는 페로의 등을 따라 걷던 사령관은 미소를 거두고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사령관은 왼 주머니의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주인공은 이런 거 안 피웠겠지. 딱 봐도 엄친아 스타일이었니.’

 

 LRL을 비롯한 어린 체형의 바이오로이드들은 사령관의 담배 냄새를 꽤 싫어했었다. 물론 철혈의 레오나 역시 그의 하루 개비 수를 제한할 정도로 그가 담배를 멀리하기를 원했다. 워울프나 더치걸들의 경우에는 담배를 손수 구해 와서 나눠 줄 정도로 담배를 좋아했지만.

 

 주인공은 유능했다. HMD를 이용해 그녀들의 작전 지휘를 도맡았겠지, 하지만 사령관은 달랐다. HMD를 쓰지 못해 3D 입체형 홀로그램과 지휘관급들의 작전 계획서를 검토해 그녀들을 지휘했다.

 

 주인공은 허물이 없는 인물이었다. 바이오로이드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했다. 하지만 사령관은 달랐다. 이전의 세상에 대한 가치관과 삶을 그대로 기억하는 인간인 그는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의 차이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때문에 그녀들을 멀리했다.

 

 주인공은 그녀들의 사랑을 부담 없이 받아주었다. 하지만 사령관은 달랐다. 그 또한 이 함의 바이오로이드들을 주인공과 같이 챙겼으나 그녀들의 사랑을 받아주지는 않았다. 사령관은 그 사랑이 단순히 자신이 최후의 인간이기에, 사령관이기에 주는 사랑이라고만 생각했다.

 

“주인님, 도착했습니다.”

 

“그래.”

 

 사령관은 상념에서 깨어나 그의 앞에 있는 거대한 문 앞에서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 페로는 그의 심호흡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혹시 모르니 저희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음.”

 

 철혈의 가면은 부서졌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가면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양손을 주머니에서 빼고 그는 가면을 쓸 준비를 했다.

 

기-잉

 

 육중한 문이 소음조차 내지 않고 열리기 시작했다. 사령관의 앞에 컴패니언들이 주르륵 일렬로 섰다.

 

“주인님! 방안에 언니들이 다 있어요!”

 

 사령관은 활기찬 하치코의 목소리에 웃음을 지었다.

 

“주인! 우는 사람이 있나 봐! 냄새가 나!”

 

 사령관은 펜리르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우는 사람이라니.

 

“..하치코, 펜리르. 어서 언니 옆에 서세요.”

 

 페로의 지적에 세 명은 우르르 블랙 리리스의 옆으로 이동했다. 블랙 리리스는 어느새 문 옆에 서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말 빈틈없는 경호원이라고 사령관은 생각했다.

 

‘..아르망도 있었나.’

 

 사령관은 아르망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청아한 푸른색 눈동자가 가녀린 속눈썹 사이로 은은하게 비쳤다. 그녀는 사령관을 한번 쳐다보고는 눈을 내리감았다.

 

‘가자. 이게 내 마지막 일이야.’

 

 사령관은 가면을 꺼내 들었다. 이 가면은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두 눈을 감고 작전 회의실에 한 발을 내디뎠다.

 

“주인님이-”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의 양옆에 서 있던 이들이 전원 허리를 굽혀 그에게 인사하였다. 사령관은 두 눈을 살짝 뜨고 그녀들을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정말, 연출이 과하잖아.’

 

“...나 쓰러진 지 5시간 채 안 지났다. 근데 또 여기 모두 모여서 뭘 작당하고 자빠졌냐.”

 

 사령관은 짐짓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었다. 지금의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답하고 짜증이 나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탓에 고개를 숙인 아르망이 움찔거리는 걸 그는 보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회의실 중앙으로 향했다. 이미 아는 사실을 입에 담으며 그는 짐짓 모른 체했다.

 

“얼씨구, 이번에는 작전관들도 모여 있네. 대체 또 뭘 하려고..아니 잠깐, 다들 왜 울고 있어?”

 

 그의 두 눈에는 홍련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미호와 라비아타 품에 안겨 우는 콘스탄챠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저 둘이 왜 우나 싶은 순간 가운데 홀로그램에 눈이 갔다.

 

‘..저건 나잖아?’

 

 가운데 홀로그램이 비추는 영상에는 몸이 바뀌기 전의 그의 등이 보였다. 뭐지, 저거 무슨 영상이야. 누가 찍은 거지? 탈론 페더인가? 그의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찬 순간 원형 테이블을 넘어 누군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오빠!”

 

 기세 좋게 달려와 자신의 가슴팍에 안긴 소녀의 정수리를 보고 사령관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아이는 언제나 한결같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그녀의 머리를 원 없이 쓰다듬기 시작했다.

 

“오우, 우리 여동생께서 왜 이렇게 울상이실까.”

 

“우-응...”

 

 닥터는 그의 품에서 떠나기 싫다는 듯 그의 굵은 허리를 얇은 팔로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사령관은 그녀를 떼어놓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했다.

 

‘그냥 작전 내막을 실토하는 자리인줄 알았는데..’

 

 근 4달이란 시간 동안 가면 뒤에서 키워 온 그의 눈칫밥이 각각의 지휘관들의 표정을 훑기 시작했다.

 

‘불굴의 마리와 무적의 용은 놀란 표정, 신속의 칸도 마찬가지, 로열 아스널은 왜 웃고 있지? 멸망의 메이는 왜 저렇게 축 늘어져 있어? 그리고 레오나는..’

 

 철혈의 레오나를 찾던 사령관의 시선이 테이블 앞에 주저앉아 두 눈이 붉게 물든 어느 여성에게 꽂혔다. 힘없이 테이블에 기대어 서 있는 그녀의 뒤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발키리가 서 있는 걸 보고 나서야 사령관은 저 여성이 철혈의 레오나임을 인식했다.

 

‘...널 너무 힘들게 했네. 레오나.’

 

“...사령관?”

 

 항상 당당하던 그녀였다. 언제 어디서라도 자신감이 가득 차 있던 그녀는 사령관이 이곳에 온 이후부터 항상 그의 롤모델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녀에게 세뇌당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유독 자신은 그녀만큼은 떼어놓지 않았다.

 

‘난 어쩌면 네가 되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레오나.’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그녀에게 타박을 받고 그녀에게 희망을 걸고 그녀에게 짜증을 내고 결국 최근에는 그녀와 싸우고 말았다. 사령관은 쉰 목소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철혈의 레오나의 흔들리는 동공에 시선을 맞추어 주었다. 그리고 부디 그녀가 지금의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그는 과장되게 큰 함박웃음을 지으며 활기찬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 나 왔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을 숨기고 꺼내 두었던 주인공의 가면을 썼다.

 

 ---------------------------------------------------------------------------------------------------------------------------


...아 씨벌 3만자...이제야 기승전결에서 승이 끝났네.

씨발...쓰다가 이걸 수정만 몇 번 했는지를 모르겠다. 앞에 던진 짜잘한 장치들 회수하고 전 내용을 암시할 장치까지. 아오 씨발 내 대가리야. 그래도 이 침울한 작품을 정주행까지 해주는 라붕이들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퍼즐이 빗나가지 않게 3일동안 쓰고 하루동안 계속 내 글을 검토했어. 내 필력의 한계야 이게.


이렇게 조온나 길게 썼는데 결국 이번 편의 핵심은 사령관이란 인물이야. 평범한 사람, 평범하게 게임을 즐기던 라붕이 사령관이 내몰리게 된 심리 서술과 상황 서술이 필요했다. 근데 쓰는 동안 내가 과몰입해서 씨발 내가 정신병에 걸리는 줄 알았네.


아무도 피드백을 해주지 않아서 10년지기 친구 놈한테 읽어달라고 해봤는데 확실히 글 쓸 줄 아는 놈이 쓴 글을 읽으니까 이것저것 집어주더라.


장점=> 정형적인 기승전결 구조가 아닌 퍼즐형 구조. 장치가 많아 뒷내용을 다시 읽어보면서 짜맞추게 한다. 몰입감이 나쁘지 않다. 관조적 입장에서 더 나아가 인물의 내면심리를 읽게 한다. 드라마틱한 장치가 부족해 소설보다는 영화보는 느낌.

단점=>원작은 애니 3화 분량으로 끝낼 내용인데 그걸 1쿨 분량을 짜냐? 씹덕 팬픽인데 씹덕력이 부족해. 씹덕물에 씹덕력이 없으면 어떡해? 한 화 한 화가 호흡이 너무 길어. 너무 시리어스해서 보다가 자겠다. 그리고 레오나 애호물이라는데 이건 혐성물이지.


덕분에 글 수정을 3일동안 여러 차례 했다. 장점은 살리고 단점을 줄이려고 했는데 시발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네. 올리지 말까까지 생각했어. 글을 쓰는 나도 암울해지더라.

하여튼 간에 이런 작품도 꿋꿋이 봐주면서 재밌다고 해주는 라붕이들이 있는데 포기하기 어렵더라. 다음 편부터는 전 단계가 될거야.

이제 자잘한 장치들은 승에서 얼추 맞췄다고 생각해. 이제 제일 큰 퍼즐인 작전의 개막과 내막을 다음 편부터 풀거야.

진짜 긴 글인데 항상 읽어줘서 고맙다. 피드백은 진짜 언제든 환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