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탁하면서도 선명하게 중심을 찌르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 들었다.

"철남씨. 내가 몇번을 말해야 이해하겠어? 서류에 기입하는 금액에 지금 0이 더 들어갔다니까?"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고개를 떨군 당신의 앞에, 도도한 목소리로 책상 위에 내팽겨친 서류를 다시 들고 팔짱을 낀 한 여성이 잔소리를 늘여놓고 있었다.

"...내 선에서 이걸 발견해서 다행이지. 거래처로 넘어갔으면-"

따박따박 당신에게 으름장과 일침을 늘여놓는 그녀를, 그러나 당신은 그렇게 괴로워하지도 그렇다고 힘들어 하지도 않았다. 조명을 받아 반짝이며 내려오는 자연스런 긴 금발의 머리카락 사이로, 곱게 먹은 수수한 화장에도 불구하고 꽤 섹시한 미를 자랑하는 고운 미모. 가느다란 목 선을 타고 자연스레 내려가는 와이셔츠의 깃 사이로 보이는 유혹적인 가슴골. 그리고 검은색 여성 정장의 그 특유한 맵시가 조화를 이루는 상사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런 시련 쯤이야 가볍게 이겨낼 수 있었다.

"-해서 이렇게, 잠깐. 내 말은 듣고 있는거야!? 철남씨!?"

곧 시선이 흔들리며 정수리에 고통이 쏟아진다. 아차차- 너무 넋이 나가 있었나보다. 한숨을 쉬며 서류를 머리에 탁 탁 치던 레오나가 고개를 돌린다. 그 시선의 끝에 향한건 뒤에서 일이 벌어지든 말든 자기 할 일에 몰입해 있던 당신의 선임인 발키리 대리였다.

"발대리. 잠깐 여기 와봐."

"네."

무뚝뚝하게, 그러나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한 발 대리가 급하게 뛰어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오나는 아랑곳하지 않은채 서류를 자기 못지 않은 발키리 대리의 가슴팍에 툭 툭 찌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거 서류. 발대리가 철남씨한테 받아서 검토해서 올렸지?"

"네..."

"하아..."

길게 한숨을 쉬던 레오나가 당신에게 서류를 건네주고는 자리에 털썩 앉고선 팔짱을 낀다. 살짝 앙 다문 입술엔 출근길에 바른 옅은색의 분홍 틴트가 빛을 받는다. 두 보랏빛 감도는 눈동자가 껌뻑인다.

"철남씨. 우리 부서에 발령된지 얼마나 됐지?"

1년. 1년쯤 지났을 것이다.

"발대리는...말 안해도 알거고."

발키리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어떻게 발주 금액에 0을 더 붙여서 보낼 생각을 해...철남씨. 이거 철남씨가 담당하는 물품이잖아? 이 물품만 반년을 담당해서 발주하는데 어떻게 처음 실수하는거도 아니고 또 이렇게 사고를 칠뻔한거야?"

죄송합니다. 당신은 레오나에게 연신 고개를 꾸벅인다.

"죄송하면 죄송한 짓을 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발대리. 검토는 발대리 몫이잖아? 철남씨가 실수한건 발대리쪽에서 어떻게 좀 잡아줘야지. 그걸 그대로 내쪽으로 올려보내면 어떡해?"

비난의 화살은 발키리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그저 아무 말도 못한채 어쩔줄 모르는 표정으로 레오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또 숙였다.

"휴...내 쪽에서 발견해서 보내지 않은게 다행이지. 알았으면 다들 돌아가서 서류 다시 올려."

잔뜩 잔소리를 늘여놓던 레오나가 당신의 팔에 서류를 찔러넣고는 홱 자리를 돌린다. 그래도 잔소리는 잔소리인지 당신의 어깨가 조금 축 처진걸 본 발키리가 귀띔으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건넨다.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그래도 레오나 과장님이라 저렇게 끝내신거에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위로를 건네는 발키리의 모습에 당신은 살짝 안도의 미소를 짓는다.


-


오후의 실수를 만회하고 나서 마지막 서류를 처리하던 당신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폈다. 쌓인 서류철 너머로 보인 시계는 어느덧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은 금요일. 딱히 친구도 애인도 없던 당신은 한숨을 쉬며 이따가 혼술이나 하고 자야겠단 생각을 한다.

"뭐야, 아직도 안 갔어?"

그런 생각을 와장창 깨뜨린건 당신이 좀처럼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레오나 과장이 당신을 쳐다보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 퇴근한거 아니었나? 주변이 너무 조용한데다가 업무처리를 하느라 시간 가는줄도 몰랐던 당신이었기에, 상사의 존재감은 그 무엇보다도 위협적이었다. 만일 퇴근에 발목이라도 붙잡는 날엔

"마침 잘 됐네. 아무도 없으면 혼자 술이나 마시려고 했는데, 어때? 오늘은 내가 살테니까."

잡혔다. 그것도 덫에 제대로 잡혔다. 당신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최대한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를 썼다.

"뭐, 나빠보이지는 않나봐?"

도도하게 미소를 짓던 레오나가 손가락으로 차 키를 빙글빙글 돌리더니 사무실의 불을 끄고는 문을 열었다.

"오늘은 특별하니까 조수석에 앉게 해줄게. 오늘만이야."



-



"...듣고 있어? 철남씨?"

노릇노릇한 고기 굽는 냄새와 쨍 하고 들려오는 술잔 부딪히는 소리. 그렇게 레오나 과장의 차를 타고 끌려간건, 그녀의 집 근처에 있는 어느 허름한 삼겹살 전문 구이집이었다.

당신은 레오나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좀더 고급스러운 바에 가거나 아니면 느긋하게 우아한 분위기 속에서 와인을 마실줄 알았다. 그도 그럴것이 평소엔 전혀 빈틈조차 보이지 않는데다가 다른 부서 남자들의 대쉬란 대쉬는 모두 철벽같이 쳐내던 악랄한 상사로 소문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업무란 업무는 모두 완벽하게 해내던 그녀의 모습을 본 당신은 당연히 그럴거라 생각했다.

그런 당신의 앞에 있는건 살짝 기름이 묻은 정장의 깃에 풀어질대로 풀어진 와이셔츠 단추들, 반쯤 비운 소주병을 내리며 취할대로 취한 레오나 과장이 반쯤 풀린 눈으로 당신을 보고 있었다.

"낮엔 미안했어. 히끅. 그래도 다른 부서에 책잡히면 안되니까 좀 더 잘해보라고...그래서 일부러 발키리도 불러서 뭐라 한거야..."

"발키리도 참...걔도 착실하게 똑부러진 애지만 가끔 실수하는데다가 너무 착해서 뭐라 못한다니까...끄윽...혼내는건 결국 내 몫이지 뭐...나쁜 년 역할은 한명 쯤 해야하잖아?"

반쯤 풀린 혀로 차근차근 이야기를 건네는 레오나의 모습을 당신은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레오나의 주량에 맞춰 술이 들어간 탓일까? 아니면 평소에 남들 몰래 품고 있던 흑심의 탓일까? 술을 미처 마시지 못해 입 밖으로 흘러내린 소주 방울이 가느다란 목선을 타고 흘러 내려가더니 그 풍만한 가슴골 사이로 쏙 들어가는 모습조차 섹시해보였다.

"...철남씨."

그런 당신의 시선을 알아챈건지 레오나가 가슴골을 가리더니 째릿하며 당신을 노려본다. 아차.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었나. 당황해하던 당신은 머릿속에 온갖 안 좋은 생각이 담배연기마냥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당신. 버릇이 안 좋아. 오후에도 나한테 혼나면서 여길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지?"

다 알고 있었나...당신의 안색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한다.

"......이상한 생각 하고 있지?"

그런 당신을 놀리기라도 하는듯 살짝 능글맞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는 레오나.

"다 알아. 워낙 완벽한 나니까...그럴수 있다고 생각해."

당신은 잠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일을 잘하는건 좋지만 조금 히스테릭한 면이 있다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나르시즘까지 있을줄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레오나는 미소를 지으며 술잔에 술을 따르더니 한번에 털어넣고는 당신을 그윽하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그래도 말이야. 이건 아무한테나 하는 이야기가 아닌데. 철남씨. 되게 좋게 보고 있어."

당신은 다른 의미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정말이야. 알잖아? 다른 부하들한테 이런 소리 안하는거. 심지어 발대리 칭찬도 앞에서 안 하는걸."

당신은 레오나에게 조금 많이 취한게 아니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무슨 소릴...취하기는 내가 뭘 취해..."

레오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고는 반쯤 풀린 눈으로 당신을 그윽하게 쳐다본다.

"철남씨 여기 온지 1년 됐잖아? 우리 부서로 온건 반년전이지만...부서 발령시킨 마리 과장이 엄청 후회하고 있더라니까? 그때 철남씨 여기로 보내면 안됐다고...그때 욕심내서라도 붙잡고 있었어야했다고...당연히 철남씨 눈 여겨보고 있던 내 입장에선 절대 안 내줬지."

당신은 조금 머쓱해졌다.

"일도 똑부러지게 하고...잔실수는 내쪽에서 선 그어줄테니까. 앞으로 열심히 잘 해 보자고..."

당신을 독려하며 빈 술잔에 소주를 타내는 레오나의 얼굴은 조금 행복해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착각속에서 당신은 레오나와 잔을 나누었다.


-

"끙...너무 많이 마셨나...으으..."

그렇게 한잔 두잔 걸치다보니 한병이 되고 두병이 된 당신과 레오나.

당신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발걸음은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웠다. 차박차박 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따라 도착한 곳은 그녀가 사는 원룸이었다.

당신은 레오나의 주머니에서 키를 받아 그녀의 방 문을 열었다. 혼자 사는 독신 여성의 편견을 깨고 의외로 달콤하면서도 향긋한 내음이 당신의 콧 속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불도 키지 않은 어두운 방 안으로, 잔뜩 술에 쩔은 레오나를 침대로 눕혔다. 여기까지 왔다면야 이제 당신이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상태가 괜찮은지 고개를 돌려본 당신의 눈에 들어온건, 바닥에 널부러져 거의 풀어지다싶이 한 와이셔츠 사이로 보이는 풍만한 가슴골과 새하얀 브레지어, 오르락 내리락하며 그 언덕이 움직이는 레오나의 모습은 고혹적이면서도 섹시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저 히스테릭에 소주를 발칵발칵 잘 들이키는 상사일 뿐이라며 고개를 젓고는 방을 나서려했다.

"...야...가긴 어딜가..."

예상치못한 힘에 잡았던 문고리를 당기어 문을 닫고는 그대로 침대 위로 레오나와 몸을 겹쳐 쓰러진다. 몰캉한 감촉이 두 손 그대로 전해져오며 당신의 뇌를 깨우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며 손을 떼려했지만 왠일인지 레오나는 그 손을 꽉 잡고서 그대로 당신을 끌어안았다.

"...내가 뭐하러...철남씨...응? 여기까지 왔으면 알잖아..."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악마의 단순한 유혹이 틀림없다. 비록 레오나 과장이 매우 섹시하면서도 매력적이지만 이렇게까지 하고싶진 않았다. 아니 정말인가? 안하고 싶었던가? 아니. 그래도 이건...

"...뭘 고민 하고 있어...? 안 먹을거야...?"

레오나의 애교섞인 칭얼거림에 당신의 뇌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쌍둥이래."

맑은 하늘 위로 새파란 구름들이 장관을 펼치는 어느 날의 옥상.

레오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당신에게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

"...일단 사내연애는 하지말자고."

고개를 끄덕인 당신의 모습을 본 레오나에, 속으로는 며칠 못 가고 그 약속을 깨버릴건 레오나임에 틀림 없으리라 당신은 생각했다.

"그럼...잘 부탁할게? 철남씨?"







솔직히 쓰면서 발대리 발대리하니까 발키리한테서 발냄새 날거같다

두서없이 자기전에 막 쓰다보니 엉망이긴한데 일상물같은거도 써보고 싶었음

담엔 좀 진득하게 각잡고 써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