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이 평화로운 오르카 함장실의 어느날 아침.
사령관은 조간신문(함내 편집부 발행)을 읽고 있었다. 위아래로 빠르게 신문을 훑는 사령관의 눈을 기사 제목 하나가 끌었다
<멸망한 세계의 레시피를 발굴해라- 참치마가린빠다밥 편>
‘빠다밥이라… 한 번 먹어 보고 싶군.’
사령관이 생전 먹어 보지도 않은 음식의 맛을 상상하며 입맛을 다셨다.
기사 아래 소완의 한줄평,
‘차마 음식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쓰레기. 혓바닥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생명체에 대한 모독.’ 이라는 문장은 태연히 무시하고 말이다.
사령관은 탁자 아래로 한 손을 내리더니 검지 손가락을 위로 치켜 올려보였다.
책상 아래에서 업무수행 중인 알렉산드라에게 ‘지금 좋은 부분이니 업무의 속도를 높여라’라는 사인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 찰나였다.
쿠당탕ㅡ!
문 쪽에서 폭발음 같은 게 들려 놀라서 고개를 돌린다. 문이 터진 게 아니라 콘스탄챠가 문이 부서져라 열어 제낀 것이다.
“큰일입니다. 사령관 님!!”
그 말에 사령관이 작게 한숨을 쉰다.
세상에 지금 알렉산드라와 중대 업무에 골몰하는 와중에 그것보다 더 큰일이 어딨단 말인가.
“갑자기 뭔데, 콘스탄챠”
퉁명스러운 태도로 묻는 사령관.
“새로운 인간…… 님이 발견되었습니다!!”
“뭐라고!?”
그야 말로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기겁하며 기립하는 사령관. 알렉산드라의 탁월한 위기 대처 능력이 아니었다면 하반신에 상처가 났을지도 모른다.
*
“셋, 둘, 하나!”
“돌입합니다!”
불가사리의 파일드라이버가 불을 뿜었고 폐허 병원의 지하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와 동시에 경호부대원들이 쏜살같이 구멍 안으로 침투한다. 그들은 즉시 실내의 안전을 확보한다……만 그럴 것도 없이 어두컴컴한 실내엔 위협이라 할만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돌입팀에 안도와 함께 실망감이 퍼질 찰나……!
“저기 저거, 동면실 아니야?”
“!!”
과연 불가사리가 가리킨 곳에 동면실로 보이는, 유리 커버 너머로 침대 비슷한 기계더미가 있었다.
그 순간, 몇몇 바이오로이드의 뇌리에 스치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고…… 어째선지 그들은 동면실로 질주한다.
제일 먼저 움직인 건 레아였다. 날개 펴는 것도 잊고 헐레벌떡 전력질주.
“젖탱이 집어 넣고 저리 꺼져 이 아줌마야! 애초에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건데!?”
그런 레아를 밀치듯이 넘어 뜨리고 달리는 리리스. 그러나 레아도 만만찮다. 곧바로 일어나서 추격한다.
“당신네들이 경호부대랍시고 설치는 꼴을 제가 가만 두고 볼 거 같아요? 뻔하죠!! 새 인간 님한테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빨리 눈에 띄어서 어떻게 해 볼 생각!! 제가 모를 거 같아요!?”
“흥, 헛소리!! 난 사령관 일편단심이에요. 새로운 인간 님이 왔다고 제가 뭐 추호라도 관심 가질 거 같나요!?”
동면실을 향해 뛰기를 관둔 두 바이오로이드는 어느덧 주먹질을 하면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오른다고 누가 그랬던가? 두 바이오로이드가 쌈박질을 벌일 틈을 타서 동면실의 문을 연 건 다름 아닌 페로였다.
위이이이잉 ㅡ
장치가 작동되는 소리, 그리고 침대에 눕혀져 있던 인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온다. 기계가 자동으로 동면체를 해동시키면서, 신체에 피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야 페로!! 너 뭐하는 거야!? 언니 여기서 격전 중인 거 안보여!? 빨리 돌아와!!”
“그래요!! 최소한의 양심이 있으면 거기서 물러 나세요!! 인간 님이 눈 뜨기 전에 어서!!”
“우리 몽구스 팀은 이 부질 없는 전쟁에 중립을 선언하겠습니다.”
뒷편의 아수라장이야 어떻든 페로는 의연하다. 그녀는 그녀 나름의 최대한으로, 상냥하고 귀엽고 그러면서도 걱정하는 듯한 표정(상대방을 배려하고 있다는 점을 강력하게 어필)을 지으며 인간 님을 내려다 보려다가……. 뒤늦게 깨닫는다.
“이 뇌파는……! 설마 인간 님, 여성!?”
그랬다. 그들은 막연히 새로 발견된 인간이 남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마 처음에 발견된 인간 사령관이 남성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바이오로이드들 개인이 가진 사사로운 욕망이 객관적인 판단을 그르치게 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이곳의 바이오로이드를 포함한 오르카호 대다수의 인원들이 새로이 등장한 인간을 남성이라고 지레짐작하였고, 지금 이 순간 그 짐작이 깨끗하게 빗나갔단 사실이었다…….
*
닥터가 사령관과 바이오로이드들의 정신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해 미리 물색해둔 꽃이 만개한 어느 섬. 시쳇말로 힐링 플레이스다. 이곳에 오르카 호를 가져온 이유는 갑작스레 동면에서 깨어난 여성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몸은 좀 어떠신지.”
“조금 찌부둥한 것 외엔……. 더 없이 좋아요. 최고에요!”
사령관의 물음에 여자가 활달한 태도로 대답한다. 사령관은 잠시 몸이 찌부둥한데 더 없이 좋을 수가 있나 생각하다가 관두기로 했다. 닥터의 메디컬 체크 결과로는 여자는 건강한 편이었고, 애초에 사령관은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위인이 아니었다.
“동면 이전의 기억은 어떤가요?”
여성은 방금 긴잠에서 깨어났다. 떠올리기 괴로울 수도 있는 질문을 하는 건 좀 지나친 게 아닌가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사령관은 그딴 걸 신경 쓰는 인물이 아니다.
“기억이 어떻냐고 물으시는 건……. 그렇네요. 동면에서 깨어난 후 기억이 온전치 않은 경우가 종종 있나보네요.”
“네. 사실은 제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사령관은 말하면서 혹시 이 여자가 질문을 되돌려 대답을 회피하려는 게 아닌가 불안해 했지만, 뒤이어 그녀가 대답하는 걸 보고 안도했다.
“저…… 제과 회사 사장의 딸이었어요.”
“제과 회사 사장 님의 딸이셨군요.”
여자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이야기를 이어 간다.
“어렸을 적엔 온통 사탕과 과자, 그리고 초콜릿이 둘러 쌓인 곳에서 자랐어요. 어머니가 초콜릿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온 세상을 과자와 초콜릿으로 덮으려 했죠. 저는 그런 어머니가 만든 세상에서 자랐구요. 돌이켜 보면 저는 동화같은 세상의…… 동화 속 공주 님처럼 자랐죠.’
“동화 속 공주 님 같았군요.”
여자는 마지막 말, '동화 속 공주 님 같았다'라는 말을 스스로 하기 부끄러웠는지 뺨을 붉혔다.
사령관은 그녀의 말에서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아우로라 모델이 근무했던 초콜릿 공장. 그곳이 바로 이 여자가 말하는 곳 아닐까?
‘설마 발렌타인 사건이 이렇게 연결될 줄이야.’
사령관이 생각에 잠기려는 찰나 여자가 이야기를 계속한다.
“전 아직도 어릴 적 습관을 못 버리나봐요. 전 아름답고 예쁜게 좋아요. 초콜릿 세상에는 맛만 좋은 것들 뿐 아니라 온통 아름다운 것들 투성이었거든요. 근무자들도 모두 예쁜 바이오로이드들이었죠.”
“근무자들이 모두 예쁜 바이오로이드들이었군요.”
여자는 매우 밝은 목소리로 “예!”하고 대답하더니 재차 말을 잇는다.
“역시 알아 주시는군요! 과연 그렇겠지요. 수 백명의 바이오로이드들한테 사령관 님이라고 떠받을여지니까 아시겠죠. 잘 알겠죠. 바이오로이드들의 멋짐을 아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그렇죠? 네. 바이오로이드들은 인체 조직이 사람과는 달라요. 오리진 더스트로 보호받아서, 피부는 언제나 이 꽃잎처럼 매끈매끈하죠. 하나같이 반듯한 생김새구요. 남성 고객들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겠지만요. 몸매의 곡선은 또 어떻구요. 그리구요, 그리구요. 이렇게 안으면 바이오로이드들은 입장 때문인지, ‘아가씨 이러면 곤란합니다’ 하고 부끄러워 하는데 그게 또 얼마나 귀여운지! 저희 집에 아우로라라는 애가 있었는데요, 들어보시겠어요?”
“아우로라라는 애가 있었군요.”
사령관은 건성으로 대답하면서도 ‘이 여자 정신 나간 년이구만.’하고 깨닫는다. 그는 기억을 잃었지만 깨어난 후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을 접하면서 여자 보는 눈 하나만큼은 훌륭하게 성장한 것이었다.
“근데, 조금 엇나간 이야기지만 혹시 빠다밥이라고 아십니까?”
“아, 네. 가난한 사람들이 식사 대용으로 먹는……. 아, 죄송해요. 서민들의 삶은 그닥 밝지 않아서…….”
사령관은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곤 곧바로 실망하였다.
그러는 한편 이 두 사람의 대화를 멀리서 지켜보는 자가 둘 있었다. 그들은 키가 큰 꽃의 화단 아래 그늘을 틈타 사령관과 여자를 미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멀찍히 떨어져 있어 사령관 일행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멀리서 보면 그 둘은 꼭 연인이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키키키킥…. 멍청한 해충 년이 감히 나의 주인님을 탐내? 잘라줄까? 아랫도리 실금부터 정수리까지 싹둑하고?”
“스토커, 입 조심해! 인간 님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리리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놀랐다. 바이오로이드들은 원래 인간에 대해 맹목적인 호감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다. 특별히 인간을 공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기에 시저스 리제같은 가정용 바이오로이드는 아무리 연적일지언정 상대가 인간이라면 악의를 표출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결함 모델이라더니 정말이었나?’
리리스가 속으로 의문을 표할 적에 리제가 정색을 하고 리제를 돌아본다.
“이봐, 해충. 너 새로 온 인간한테 꼬리치러 병원 지하 임무에 자원했다며? 레아 언니가 말하길 가랑이 사이에 무슨 액체를 질질 흘리면서 동면실로 뛰어 들어가는 게 아주 가관이었다던데? 무슨 낯짝으로 주인님한테 들러 붙는 거야? 응?”
터무니 없는 음해에 리리스가 어금니를 뿌득갈고 갈았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