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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낡은 항공 점퍼를 걸친 레프리콘과 마주 앉은 나는 그녀가 건넨 조잡한 훈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끝에서 빗물이 떨어졌다. 레프리콘이 앉은 자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천히 젖어갔다. 커피를 내온 종업원은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맞은편에 앉은 레프리콘은 커피잔을 얼마간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책을 내고 싶다. 무슨 책을? 되묻자 대답하길, 자서전을 내고 싶다. 나는 말 없이 커피를 홀짝였다. 읽어는 보겠으나 출판된다는 보장은 없다. 대답을 들은 레프리콘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프리콘이 보낸 원고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십오만 자의 책 한 권 분량이었다. 철충의 등장과 전쟁, 종전까지의 기나긴 삶을 적은 이십오만 자의 원고는 자서전이라기보단 차라리 역사서에 가까웠다. 원고 어느 곳에서도 레프리콘의 발자취를 느낄 수 없었다. 그곳에는 레프리콘이 흘린 눈물이 몇 방울이었는지, 몇 발의 총알을 쐈는지, 얼마나 많은 동료를 떠나보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았다. 레프리콘은 사적인 내용은 중요치 않다 말했다. 출판하기 위해서 필요한 내용이라 말해도 고집불통이었다. 결국 레프리콘의 원고는 출판은 고사하고 손도 못댄 채 하드디스크 구석에 박혀 기억에서 지워졌다.

 

  그후 레프리콘은 몇 달간 출판에 대해 물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조용해졌다. 레프리콘이 보낸 원고에 떠들썩하던 편집부의 소란도 사그라들었다. 레프리콘 한 기가 글을 쓰겠다고 벌인 소동은 금세 기억에서 지워졌다. 하여 편집부장이 그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기억을 되짚느라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번 주에 죽었댄다.”

 

  “예?”

 

  “뉴스도 좀 보고 살아. 일만 하고 있으니 세상일에 까막눈이지. 음독자살이라나, 뭐라나? 신문에도 작게 실렸댄다. 작가를 꿈꾸던 바이오로이드, 죽다!”

 

  놀라운 소식이었지만 떠날 사람을 떠나보낸 듯해 담담하기만 했다. 그건 지독하게 무미건조한 그녀의 원고 탓도, 겨울비를 그대로 맞으며 돌아간 뒷모습 때문도 아니었다. 첫 만남에 보인, 유언을 남기는 듯한 자조적인 모습이 깊게 남아버린 탓이었다. 편집부장은 내 안색을 살피더니 곧이어 말했다.

 

  “위쪽에서 말이 오갔는지, 받은 원고 있지? 그거 가지고 책 한 권 내자더라.”

 

  “정작 작가는 죽었는데요?”

 

  “그러니까! 작가를 꿈꾸던 바이오로이드의 죽음! 이걸 잘 엮어서 책 한 권 내면 좋겠다는 얘기지.”

 

  “팔리긴 잘 팔리겠네요. 눈물샘 좀 자극하는 기깔나는 문장 몇 개 깔아주고…….”

 

  “바로 그거야. 주변 조사가 필요한데, 레프리콘이랑 만난 사람이 너밖에 없더라고. 차비랑 줄 테니, 내일은 출근하지 말고 적힌 주소로 가.”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썩 내키지 않았다. 접점이라고 해봐야 카페에서 몇 마디 말 나눈 것이 고작일 뿐이다. 망설이는 기색을 읽었는지 편집부장은 은근한 목소리로 부추겼다.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알아 오란 얘기가 아니잖아. 적당히 알아 오면 살을 덧붙이는 일쯤은 식은 죽 먹기 아냐? 그리고 잘 팔리면 어련히 보너스랑 챙겨주지 않겠어?”

 

  나는 적당히 얼버무리려던 것을 그만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편집부장의 은근한 압박도 압박이거니와, 새삼 레프리콘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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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프리콘의 사망지는 항구 도시의 여인숙이었다. 골목 후미진 곳에 나앉은 건물은 바닷바람에 페인트칠이 벗겨져 철근 콘크리트 속을 적나라하게 내보였다. 소금기가 허옇게 묻은 창에 임대 문의가 써 붙은 종이가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훤한 백열등 빛이 창가에 어른거렸다. 나는 어물쩍거리다 녹슨 철제 현관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술기운이 불콰한 중늙은이가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뭐요?”

 

  신경질적인 목소리 너머로 알코올 냄새가 훅 올라왔다. 나는 간단히 소개하고 레프리콘을 조사하러 왔다는 의사를 밝혔다. 레프리콘 얘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얼굴이 구겨지는 것으로 미루어 좋은 얘기를 듣기에는 그른 성싶었다.

 

  “남의 여인숙에서 뒈진 바이오로이드 따위 조사해서 뭐하게? 아직도 그년 얘기만 들으면 속에서 열불이 치미니, 얻어터지기 전에 빨리 꺼지쇼.”

 

  늙은이는 핏대가 불끈 솟아오른 주먹을 흔들었다. 하지만 순순히 물러서기엔 곤란한 형편인지라 이런저런 얘기로 늙은이를 설득하려 했다. 어떤 얘기에도 꿈쩍않던 늙은이가 관심을 보인 것은 금전이었다. 옳다구나 싶어 여인숙에 몰려올 관광객들, 입장료만 받아도 임대료보다 더 나올지도 모른다는 허풍 섞인 장담, 아니다 싶으면 적당한 호구 잡아서 임대를 내면 된다는 말까지. 그러고도 조금 부족한지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주머니에 넣어주자, 그제야 만족한 늙은이는 나를 여인숙 안으로 들여보냈다.

 

  여인숙에 들어오자 늙은이는 가타부타 말도 않고 소주를 병나발로 마셔댔다. 곧이어 내게도 한잔 권했는데, 마시지 않으면 입도 뻥끗하지 않을 모양새라 소주잔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늙은이는 소줏잔이 텅 빈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석 달쯤 됐을 거요. 내 정확히 기억하는데, 가을비가 내리는 날이었지. 우산도 없이 홀딱 젖은 여편네 하나가 남는 방 없냐고 묻는 게 아니요. 워낙 추레한 몰골이라 대뜸 돈부터 내놓으라고 말했는데, 의외로 순순히 돈을 내놓더라고. 찜찜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디 그런 놈이 한둘이야? 나도 먹고 살아야 하니 방 하나 내줬지. 알고 보니 주변 공사판에서 또라이로 유명한 년이더군. 제 군 생활하던 시절을 못 잊었는지, 브라우니만 보면 그게 막일꾼이건 십장이건 경례부터 시킨다는 게요. 브라우니야 워낙 순하니 꼬박꼬박 받아줬지만, 곱게 보일 턱이 있나? 여기 들어와 처음 한 달간은 이곳저곳 다니며 일하나 싶더니, 결국 어디서도 받아주질 않았지. 그 뒤로는 방에 박혀 두문불출하더니만 뒈져버리지 뭐야.”

 

  끝에서는 감정이 격해졌는지, 늙은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술병을 쥔 손에 힘줄이 한껏 돋아 있었다. 나는 늙은이의 말을 곱씹다 물었다.

 

  “왜 죽었는지 아십니까?”

 

  “낸들 아나? 먹고살기 힘드니 죽었겠지.”

 

  곧이어 늙은이는 유서도 없었고, 소지품이라곤 원고 한 뭉치뿐이었다고 말했다. 그 탓에 한동안 경찰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지만, 아무런 증거도, 증인도 없어 결국 자살로 결론지었다고.

 

  “씨뿔년, 왜 여기서 죽고 지랄이야, 지랄은. 장사 망치려고 작정한 게 아니고서야…….”

 

  나는 병나발을 불어대는 늙은이에게서 더 이상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 없다는 걸 직감하고 일어섰다. 레프리콘의 과거를 어렴풋이 더듬을 수 있었지만, 그 이야기가 글에 무슨 보탬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늙은이의 한탄을 뒤로 한 채 여인숙을 나왔다. 배웅은 없었다.

 

  거리의 인력 사무소를 돌아본다면야 레프리콘의 발자취를 못 좇을 것도 없다지만, 무슨 수로 그 많은 인력소를 돌아 수소문한단 말인가. 점심도 거른 채 방황하던 내가 터무니없음을 알면서도 근처의 인력 사무소를 찾아간 것은 그만큼 막막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무작정 찾아간 인력 사무소의 소장은 예상치도 못한 환대로 나를 맞이했다.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습니까?”

 

  소장은 싸구려 믹스 커피 두 잔을 내며 말했다. 나는 간단한 소개와 함께 내가 하려 했던 일을 가감 없이 말했다. 소장은 크게 웃더니 운이 좋았다며, 자신이 레프리콘과 각별한 사이였다고 말했다. 놀라 묻자 대답하길,

 

  “레프리콘이 써온 글을 읽고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곤 했습니다. 어디서 알아 왔는지, 대학교 중퇴라는 학력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꼭 좀 봐달라고 하더군요. 대단치도 않은 학력에 글 쓰는 학과도 아니었지만, 막일 다니는 놈 가운데선 그나마 낫다며…….”

 

  아직 따뜻한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던 소장은 죽기 전까지 레프리콘이 쓰던 글에 대해 얘기했다.

 

  짧고 무미건조하다. 레프리콘이 가져온 글을 읽은 소장의 첫 소감이었다. 정말로 필요한 표현 외에 모두 쳐낸 문장은 집착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읽기 불편할 정도니 바꾸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에도 레프리콘은 고집불통이었다. 답답한 심정에 혹시 다른 글은 없냐고 소장이 묻자, 레프리콘은 선뜻 원고를 내주었는데, 놀랍게도 앞서 본 글과는 전혀 딴판이었다고 했다.

 

  “알고 보니 이전에 쓴 글이더군요. 그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 그리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참 딱하다 싶었죠. 한번 보시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레프리콘이 쓴 원고의 사본이 있느냐고 물었다. 소장은 금세 서랍에서 종이 묶음을 꺼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용을 읽어야 알겠지만, 이만하면 글을 쓰기에 충분할 것이다. 소장은 문을 나서려는 나를 급히 붙잡더니 명함 한 장을 내밀며 덧붙였다.

 

  “더 알고 싶으시면 여기 적힌 곳에 가보십쇼. 전에 일하던 곳이랍니다.”

 

  나는 명함을 앞에 두고 잠시 망설였다. 소장이 재촉하니 마지못해 품에 넣긴 했지만, 명함에 적힌 곳에 찾아갈지는 확실치 않았다. 하여 나는 일단 출판사로 돌아갈 심산에 터미널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싣고 원고를 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