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손엔 단 한발뿐인 권총, 그리고 벽 너머로 자신을 죽일 기세로 쫒아오는 정체불명의 괴물이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끔찍한 마지막을 괴물에게 당할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생을 포기할 것인지 몇번이나 고민하며 계속해서 권총을 입에

넣었다 빼기를 수차례.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녀석이 제발 돌아가길 기원했지만 야속하게도 육중한 발자국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좆같은 인생...뒈질때만큼은 계집애 가슴에 파묻혀 죽고싶었건만"


끔찍한 기계음과 함께 등 뒤로 녀석의 기척이 느껴진다. 더는 버틸 수 없다. 


'찰칵'


더이상은 시간이 없다. 총은 장전되었고 이제 방아쇠를 당길 용기만 있으면 된다.


'키이잉 키이잉.... 위이이잉'


녀석이 날 발견한게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날 보살펴주었던 고장난 바이오로이드가 찢길때도 이와 비슷한 소리가 먼저 들렸다.


"보채지말라고, 금방 끝나니까"


눈을 질끈 감으며 방아쇠를 천천히 당긴다. 손가락 끝으로 나 자신을 죽이는 감각이 생생하게 머릿속으로 전달되는게 느껴진다.

이제 정말 끝이다. 거의 다 됐다. 더이상 고통받을 이유는 없다.


'탕'


방아쇠는 당겨졌고, 공허한 폐허 속에서 격발음이 메아리쳤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빌어먹을 몸뚱이는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다.


'키긱....킥......키기긱....'


괴물의 복부쪽에서 피처럼 보이는 검붉은 액체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고, 녀석은 허무하게 쓰러져갔다.


"젠장, 마지막 총알이었는데"


녀석은 쓰러지고, 난 보기좋게 살아남았지만,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총알도 없이 앞으로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리고

이런 상황이 또 다시 벌어진다면.....웃기지도 않는 농담이 현실로 이뤄지기 직전인 샘이었다.


"대체 왜 그런거야. 왜...."


오른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그대로 땅에 집어던지며 나 자신을 원망했다. 지난 30년간, 이런 일들은 수백차례도 넘게 벌어졌지만 그럴때마다

난 항상 살아남았다. 함께 생활했던 생존자 무리들은 질병, 괴물의 습격, 내분 등 다양한 이유들로 하나둘 사라져갔고 마지막까지 욕구충족에

충실히 응해주었던 싸구려 바이오로이드는 괴물의 미끼로 사용해 살아남은게 1달전이었다.


"이럴거면 젖통이라도 잡고 같이 죽을걸 그랬네. 씨발년....."


인간이란 어찌도 이리 하찮은가. 방금전 겨우 목슴을 부지한 주제에 괴물의 사체를 보면서 미끼로 던져보낸 그 녀석의 생각에 발기해버리고 말았다.


"바닐라....이 씨발년....흣...으윽!!"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괴물의 사체 위에서 보기좋게 자위를 해버렸다. 먹은게 부실한 탓인지 정액이라 하기도 민망할 희멀건 액체가 녀석의 사체 위에 흩뿌려졌다.


"하아....하아.....이걸로 빚은 갚았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보복이라도 한 듯 내 자신의 행위를 포장하며 손에 묻은 나머지를 대충 옷에 닦아내었다. 자위 이후 밀려오는 허탈감과

고독감에 온몸이 뼈저리게 시려지는 것이 느껴져 배낭에 넣어두고 있던 점퍼 하나를 꺼내 걸쳤지만, 마음속 추위는 옷 따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움직이자, 움직여야해"


딴 생각이 들기 전에 몸을 움직여보기로 했다. 원래 캠핑을 위해 찾은 자리였지만, 녀석의 죽음으로 동료들이 찾아올 가능성은 높아졌다.

최소 5km반경으로 예상중인 녀석들의 정보망을 피해 쉴 곳을 찾기 위해선 오늘밤도 잠은 글렀다.


한때 지도를 이용해 쉘터를 찾아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했었던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그나마 도착하면 쉴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이제 그런 배부른 소리는 힘들어졌다.


지도에 의존하는 건 곧 녀석들에게 목슴을 던진다는 것인 현재의 상황에선 인간들이 머물지 않을 만한 장소를 찾는것이 우선이었다.


비를 피할 동굴도, 자원이 넘치는 숲도,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조차도 녀석에게서 완전히 도망치는 것은 무리였다.


이제는 문명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사막화된 도시가 녀석들에게서 숨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습격을 마치고 생존자들을 수색하기에 바쁜

괴물들은 기존에 습격해 폐허가 된 지역에는 다른곳과 비교해 말도 안될 정도로 경계가 허술하였는데 이 녀석들 또한 인간이 생존할만한

환경이 아니란걸 알고 있기에 이러한 행동을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도심지의 깊은 곳으로, 발목까지 덮어질 정도의 모래사장을 헤메이며 달빛을 등대 삼아 정처없이 떠돌던 중 눈 앞이 흐려지는게 느껴졌다.


최근까지 괜찮았건만, 이젠 나조차도 피하지 못한것 같다.



"씨발"


반사적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모래더미를 쿠션 삼아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2-


"주인님, 주인님. 언제까지 주무실건가요?


익숙한 목소리다.  그래, 너구나....모든게 다 꿈이었구나.


"주인님, 일어나셨나요?"


유리창 너머로 햇살이 쏟아지듯 방 안을 체우고, 햇살보다 눈부신 그녀가 날 보며 뚱한 표정을 짓고 있다.


"바닐라, 지금 몇시지?"


"9시에요. 오늘은 쉬는 날이시니까, 무려 한시간이나 늦게 깨워드린거에요"


"쉬는날? 근데 왜 쉰다고 했더라"


"정말 기억 안나세요?"


"응.....알려줄수 있어?"


"어떻게 모르실 수가 있어요?"


"왜...왜 그래. 그렇게 무섭게 노려볼 필요는 없잖아"


바닐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저런 표정은 살면서 처음 봤는데.....그녀의 치켜뜬 눈 너머로 살기가 느껴졌다.


"어떻게, 어떻게 잊으실수가 있어요!!"


"진정해, 갑자기 칼은 왜 드는거야. 바닐라...악!"


그녀의 손에 들린 식칼이 내 가슴을 정확하게 사선으로 찢어발겼다.


"오늘은......제가 죽은지 1년째 되는 날이잖아요. 당신을 살리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벌써 잊으신거에요?"


"으윽...바...바닐라, 그만...너무 아파"


통증은 느껴졌지만 어째서인지 죽는다는 감각은 들지 않았다. 몇차례고 찢겨진 가슴은 계속해서 재생을 반복하였고 그럴때마다 바닐라는

기쁜 듯 칼날을 가슴에 찔러넣었다.


"괴물한테 찢길때 얼마나 아팠는데...그걸...그새 잊어? 당신 같은 사람....싫어!!"


"바닐라 미안해, 제발 용서해줘"


용서해달란 말과 함께 바닐라는 잠시 멈추며 내 앞으로 들고 있던 칼 한자루를 내려놓았다.


"주인님, 제 용서를 바라세요?"


"진심이야....내가 미안했어. 그러면 안되는건데"


"그러면 진심을 보여주세요. 제 앞에서 주인님 스스로 그 칼로 가슴을 찢는걸 보여주시면....용서해드릴게요"


"바닐라, 그...그건"


바닐라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내 앞에 놓아둔 칼과 내 눈을 차갑게 바라보며 기다릴 뿐.


"알았어...바닐라가 원한다면"


"그럼 어서 하세요"


칼을 잡아든 후 내 가슴을 겨누며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칼날을 밀어넣었다.


"큭....크윽....악......으윽...."


"어머, 꼴사나워라. 1cm도 안들어갔는데 벌써 엄살이세요??"


"으으윽...너무...아파.....못하겠어...."


가슴에 꽂힌 칼에서 손을 놓으며 바닐라를 바라보며 애원하였다.


"끝까지 절 실망시키시네요"


바닐라는 발로 정확히 칼 손잡이 끝부분을 걷어찼고, 칼날은 순식간에 폐 안쪽으로 깊숙히 박혀들어갔다.


"억...어억...."


"죽으세요, 그리고 죽어서도 절....."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바닐라가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뭘 말하고 있는걸까, 숨이 끊어져가는 이 상황에도 그녀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신경쓰인다.


멎어가는 숨과 함께 의식이 흐려지고, 뺨 너머로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진다.



-3-


"저기요, 살아계신가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분명 난 바닐라에게 죽었을텐데, 사후세계가 존재하는 것일까? 눈을 뜨기가 두렵다. 볼을 타고 느껴지는 이 뜨거운 열기는 분명....지옥일 것이다. 이 죄많은 인생의 끝은 결국 지옥이란 종착역에 내려놓은 것이다.


"여보세요, 인간님 살아계세요? 이상하네, 분명 숨은 쉬는데"


계속해서 날 부르는 꼬마의 목소리를 외면하려 했지만, 언제까지 이 상황을 모면할순 없어보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슬쩍 눈을 떠 주변을 흘겨보았다.


까무잡잡한 꼬마애와 휘날리는 모래들, 내가 생각했던 지옥이랑은 좀 다른 모습이다. 


"저기.....꼬마야, 여긴 지옥이니?"


"지옥이 뭔가요, 인간님??? 뭐...화성이 아닌건 확실하긴해요"


"하아....꿈이었구나. 씨발....살아있었네"


"씨발이요? 그거 나쁜말 아닌가요??"


꼬마는 내 욕설이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 신경쓰지마. 반사적으로 나온거야"


"그나저나 운이 좋으셨네요. 여기서 3일이나 쓰러져계신걸 제가 발견하지 못했으면 그대로 모래에 덮여버릴뻔 하셨어요"


"3일이나 지났다고??"


"네, 제 기록지침에 따르면 3일이 지난게 맞네요"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 같은 걸 보며 꼬마가 내게 말해주었다. 


"인간님, 바닐라가 누군가요? 잠드신 동안에도 계속 바닐라라고 하시던데"


"궁금한게 많은 꼬맹이구나, 아저씬 할 일이 많으니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 모래를 털고 이동하려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며 몇번이고 일어나려 애썼지만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않는다.


"인간님은 도움이 필요하신거같네요. 죄송하지만 이대로는 못보내드릴거같아요"


꼬마는 내 옷자락을 양손으로 잡은 후 배낭채로 끌고가기 시작했다.


"무....무슨 짓이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솔직하지 못한 인간님이시네요, 우선 제가 보살펴드릴테니 가만히 계세요"


어떻게 되먹은 꼬맹이인지,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래사장에서 1km정도 떨어진 어느 폐허까지 쉬지도 않고 그대로 이동했다.


-4-


"너, 바이오로이드였구나. 처음 보는 기종인데"


"그러실만해요, 저는 화성탐사목적으로 만들어졌거든요"


"화성? 화성엔 왜?"


"이건...비밀인데요, 화성에 선택받은 인간님들이 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뒀대요. 저는 거기까지 안내해드리는 역할이구요"


어이가 없었다. 사막 한가운데서 다 죽어가던 차에 이름 모를 꼬맹이에게 도움을 받은것도 모자라, 그 꼬맹이가 윌리X카 쵸콜렛공장의 골든티켓이었다니, 그냥 믿기엔 말도 안되는 헛소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장난이 심했다, 꼬맹아"


"장난 아닌데요? 아 그걸 보여드리면 믿으시겠구나"


꼬맹이는 품에 있던 소형 테블릿을 꺼내 이름들이 적힌 명단을 보여주었다.


"이러면 믿으실건가요?"


명단에는 뉴스나 시사프로그램 등에서 이름으로나 들어봤을 인물들이 빼곡히 적혀있었고, 그 외엔 잘 나가는 스타들, 특히 여배우들의 이름이

줄줄이 써져있었다.


"하.....하하하하하, 이 쓰레기새끼들.....진짜였구나"


가족들조차 내팽겨치고 지 몸과 성욕 처리에 필요한 여성들로 가득 체워진 할렘을 화성에 만들고 있었다니, 부아가 치밀어 올라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제가 온 이후엔 도시 자체가 사라져서.....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이대로 돌아가면 주인님한테 혼날텐데....그래서

 혹시라도 살아있을 인간님을 데려가면 주인님도 용서해주실것같아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차에, 인간님을 만난거에요"


"정말, 나 같은게 가도 되는거야?"


"확실한건 아닌데, 주인님께서 인간님을 한명이라도 발견하면 우선 화성으로 보내달라고 말씀하긴 하셨어요"


꼬맹이의 눈을 보아하니 거짓말을 하는건 아니었다. 


"니 주인이란 사람도 아주 싹수가 노랗진않은가보네, 뭐....믿어줘야지, 그 정도로 말하면"


"이제야 믿어주시는군요. 그럼 본격적으로 화성에 갈 준비를 시작해볼까요?"


"그래, 그렇게 해야지. 근데 화성엔 어떻게 가니?"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타고 온 화이트쉘을 이용하면 되니까. 대신 지금 몸으론 조금 무리시니까......"


"무리니까?"


"팔, 다리는 자르고 시작할까요??"


꼬맹이는 웃으며 품에 있던 레이저커터를 가동시켰다.




-5-


"무...무슨짓이야!!!! 왜 내 팔다릴 자를라그러는거야!!!"


"아, 아이고 이런, 인간님이 오해를 하셨구나"


꼬맹이는 재밌는 듯 피식 웃으며 레이저커터를 껐다.


"제가 말한건 화이트쉘이에요. 화이트쉘은 로봇이거든요"


꼬맹이가 손목에 찬 시계를 몇번 건드리자 기계음과 함께 내 뒤에 있던 돌덩이가 어느새 눈처럼 새하얀 로봇으로 변해있었다.


"인간님은 저보다 무게가 좀 나가시는 편이니깐....어쩔수없이 화이트쉘을 경량화 시켜야할것같아서요"


"그거라면 생각을 좀 해보자.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거야"


"네? 인간님이요? 뭘 도와주실수 있단거죠?"


"이래뵈도 로봇공학자야. 멸망전엔....."


"와~전혀 그렇게 안보이셨는데, 대단하시네요!!"


칭찬인지 비꼬는건지, 이 꼬맹이는 도무지 감이 오질 않는다.


"개량하려면 장비가 좀 필요할거같은데, 가지고 있는 것들 좀 보여줄 수 있겠니?"


"물론이죠, 인간님이 도와주신다니 한시름 놨네요"


"그래도 아직 움직이는건 무리인거같으니, 우선은 설계도부터 확인해보자"


"네, 이럴줄 알고 미리 준비해뒀어요"


스크린으로 띄운 화이트쉘의 내부구조는 상상 이상이었다. AGS공학에 들어가는 기술적인 부분과 흡사하면서도 다른 부분이 많았다.

AGS에 필요한 매인연산회로는 당연하게도 없었고, 보조OS로 체택된 운영체제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마치, 국제규격을 극도로 혐오해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해가며 만든 미친 공학도의 예술품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이거....이해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 하루만 기다려줄래?"


이런걸 본 이상 공학도로써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꼬맹이에게 건내받은 설계도를 토대로 바닥을 칠판 삼아 비슷하게나마 화이트쉘의

부품들과 규격, 관절역학까지 계산해가며 하나씩 녀석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인간님, 이제 준비되신건가요?"


"잠깐만, 아직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서"


"어떤 부분이요?"


"이렇게 되면 파일럿의 역량이 상당해야할텐데, 조종석은 1인이고......이해를 못하겠군. 분명 VIP를 이동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게 맞지?"


"아, 그거라면 제가 알려드릴게요. 난 또 뭐라고....."


꼬맹이는 그동안 쓰고 있던 핼멧을 벗으며 자신의 머리 뒷부분을 보여주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인간님이 탑승하시게 되면 제 머리가 화이트쉘의 코어가 되니까요"


보라색 머리카락을 들춰올리자, 그녀의 뒷통수에 있는 유리벽 너머로 뇌와 연결된 칩이 보였다.


"그러면 결국 탑승하는건....."


지독한 이야기였다. 내가 살려면 이 아이의 머리를 로봇에 연결해야하는 것이었다. 잘 나신 놈들의 취향은 도무지....이해하기 어렵다.



-6-


"네?? 화성에 가기 싫으시다구요?"


"그래, 이런 썩은 동앗줄은 내가 사양이야"


"아니, 인간님!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시려고 하는거에요! 음식도 없고 물도 없고 인간님이 좋아하는 여자도 없고!"


"너...그런건 어떻게 아는거야?"


"인간님들은 다 여자를 좋아하는거 아닌가요?"


"뭐...그렇긴한데.....아뭏튼 찝찝해서 못하겠어. 생명의 은인을 그렇게 쓰라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거참 고민도 많으시네, 이러면 좀 편해지시나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꼬맹이는 자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은 후, 내 쪽을 바라보며 그대로 쭈욱 잡아당겼다.


'뽁'


경쾌한 소리와 함께 꼬맹이의 머리가 몸통과 분리되었다. 흡사 멸망전의 레고를 보는 듯한 모습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꼬맹이는 입을 열었다.


"몸통이야 다시 만들면 되는거고, 머리만 연결하면 되거든요? 하여간 인간님도 잘 모르면서 아는척은...."


꼬맹이는 툴툴 거리며 자신의 머리를 다시 몸통에 끼워넣었다.


"어우.....뭐 저런게 다 있어. 내가 헛소릴 한거네"


더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서둘러 이 지긋지긋한 행성을 벗어날 준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7-

작업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꼬맹이가 가져 온 도구들은 지구상에 존재한 적도 없던 장비들이었고, 처음엔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작업이 진행될수록 장비가 내 몸의 일부로 느껴지는 듯한 착각까지 들 정도로 익숙해지게 되었다.


이제 마지막 공정인, 코어 연결작업만이 남았다.


"꼬맹아, 그동안 고마웠어"


"저야말로 고맙죠, 인간님 아니었으면 계속해서 지구를 방황해야했을거에요"


"근데, 니 주인이란 사람은 어떻니? 좋은 분인거같니?"


"왜요? 만나시기 겁나세요?"


"아니 그런건 아닌데....."


겁이 안난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이렇다 할 정도로 대단한 인간도 아닐뿐더러,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노쇄한 몸을 지닌 인간남성을

반겨줄 곳이 있기나 할까 싶기도 하고....그래도 이렇게 꼬맹이를 보내 생존자를 찾는걸 보면 대단한 자선가일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고...

뭐라 단정지어 말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걱정은 화성에 가서 하세요, 우선 여기보단 나을거 아니에요"


"그래, 니 말이 맞다. 내일부터 연결작업인데, 괜찮겠니?"


"당연하죠, 몸이 바뀌는것 뿐인데 무슨 걱정이에요"


그때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꼬맹이의 손이 떨리고 있단걸.




-8-


"인간님, 주무세요?"


"아니"


"얼른 주무세요, 내일이 비행일이잖아요"


"걱정되는거라도 있니?"


"......아니에요, 화성엔 오랜만에 돌아가는거라 기대하고 있어요"


"그래? 그럼 얼른 자자"


"네, 안녕히 주무세요"


소풍 전 잠 못자는 아이와도 같은걸까, 왠일인지 꼬맹이가 좀처럼 잠이 들질 못한다.


"저기 인간님"


"아이....좀 자자"


"인간님은 화성에 인간님들이 없다면....어떻게 하실건가요?"


"그게 무슨 소리니?"


"인간님은 좋은 분이신거같아서.....화 안내실건가요?"


"이제와서 무슨 소리니, 갑자기"


"왜 그런거 있잖아요. 하루아침에 인류가 멸망했다거나 침공을 당해서 몰살당했다거나......."


"너, 뭔가 있구나"


자리에서 일어나 누워있는 꼬맹이의 곁으로 다가가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간님, 죄송해요. 화성에서 주인님의 연락을 마지막으로 받은게 10년전이에요"


"그럼....나머지 인간들은"


"모르겠어요.....화성에 인간님들이 있는지, 아직까지 시설은 남아있는지"


크나큰 배신감에 온몸이 떨렸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만큼은 이상하리만치 화가 나질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이미 각오 하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도 시설에서 온건 사실이지?"


"네....도착해서 인간님을 찾아 돌아가기로 한것도 제 임무가 맞아요. 하지만.....모르겠어요. 제가 인간님을 데리고 귀환해도 되는건지,

 저흴 반겨줄 이가 남아있을지"


"지금이라도 말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확신이 들었네"


나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꼬맹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자, 여기보단 그래도 상황이 좋겠지. 너도 알고 싶은거잖아?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된건지"


"인간님....정말 괜찮으신건가요?"


"당연하지,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도박이야. 인생을 걸고 하는 도박인데....마다할 이유가 없잖아?"


태어나서 카드 한번 잡아본 적 없던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베팅을 화성에 걸게 되었다. 초심자의 행운이 따라주길 기도하며,

잠시 후 있을 우주로의 항해를 준비했다.



-9-


"인간님, 들리세요?"


"어, 잘들리네. 정말 괜찮은거 맞니?"


꼬맹이의 머리와 화이트쉘의 링크를 마쳤다. 생각보다 단순한 과정이었지만, 역시나 머리를 몸통 중앙에 연결하는 센스는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당연하죠, 오히려 힘이 넘치는데요?"


화이트쉘, 아니 꼬맹이는 기계팔을 번쩍 들어올린 후 손을 몇번 흔들더니, 부스터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인간님은 거기서 한숨 주무시고 계세요, 일어나면 제가 깨워드릴게요"


"아니야, 대기권을 나가면서부턴 방심할 수 없어"


"인간님 편하신데로 하세요, 그럼 카운트다운 시작할게요"


화면 너머로 커다란 숫자가 띄워지고 화이트쉘의 내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3,2,1'


숫자가 끝나기가 무섭게, 화이트쉘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눈깜짝할새에 방금전 있었던 장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올라가게 되었고, 뒤이어 대기권 돌파 알림메세지가 올라왔다.


"성공이다, 휴....꼬맹아, 우리가 해냈어"


"아직 안심하긴 이르세요, 냉동수면장치를 가동시킬까요?"


"꼭 해야되는거니?"


"6개월간 버티시려면 어쩔수없어요. 푹 주무시고 계시면 도착하는대로 깨워드릴게요"


"부탁할게"


피부를 타고 냉기가 전해져온다. 호흡이 점점 늦어지고 또렷하게 보이던 스크린이 점점 흐릿해져간다.



-10


"주인님, 또 오셨네요"


"바닐라, 어떻게......"


지난번과는 다르게 꿈이라는게 확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지난번과는 다르게 바닐라의 눈빛은 슬픔에 잠겨있는 듯 보였다.


"결국 저희를 버리고 가시는군요, 화성에 간다고 달라질게 있으실거라 생각하나요?"


"잘 모르겠어"


"확실치도 않은 일에 목슴을 걸다니, 주인님답진 않으시네요"


"그러게, 이렇게까지 될 줄도 몰랐고"


"지난번에 주인님한테 못되게 군건....제 의지로 그런건 아니었어요. 말해도 믿지 못하시겠지만"


".....어쩌면 내 의지일수도 있어, 널 죽인건 결국 나니까"


"바보같은 사람, 내가 미쳤다고 주인님 뜻대로 미끼로 쓰인줄 알아요? 순진한것도 정도가 있지....."


"마지못해 명령을 내렸잖아, 나 대신 막아달라고"


"하여간 나이 먹으면서 기억력도 그 모양이니 원.....서약식 올릴때 명령모듈은 제거한거 기억 안나요?"


그제서야 바닐라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났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내 몫까지 살아줘'


"바닐라......왜 그런거야, 이 멍청한 여편네야......왜......."


"이제 나 같은건 잊고, 거기서 잘 살아요. 마지막으로 가는 길에 알려주고 싶었어요"


"바닐라, 여보...여보, 가지마!!"


그녀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져가며, 눈이 따가울 정도의 빛이 눈꺼풀 너머로 느껴졌다.


"인간님, 정신이 드십니까?"


"바닐라!!"


"아쉽게도 바닐라모델은 단종되었습니다. 전 에이다입니다, 반갑습니다"


눈을 뜬 날 반기고 있던건 고풍스러운 검은 빛의 여성형 AGS였다. 드디어 화성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근 10년만에 인간님을 모시게 되어 조금은 떨리는군요, 물론 감정모듈은 없습니다만, 하하 농담입니다"


"코코는 어딨습니까"


"그 아이라면, 인간님께 드릴 꽃다발을 만들러 갔습니다. 다른 인간님들을 만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애석하게도 전부 냉동상태로 계셔서...."


"인간들이 있단건 사실이었군요"


"제 주인님께선 이 곳을 거점으로 지구를 탈환할 계획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물론 선량한 뜻을 가진 분들 밑에는 항상 날파리들이 끼기 마련이죠. 저 아이는 그런 날파리들에게 보기좋게 이용당한거지만....결과적으로 임무는 잘 성공했네요"


에이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기지를 건설했던 선대 주인은 괴물들과의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화성기지를 세웠고, 전투에 필요한 자원과 인재를 필요로 해 우선적으로 선별한 인간들 중 꼬맹이를 이용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체우려던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VIP리스트로 생각했던건 결국

에이다의 말대로 날파리들의 작품이었다.


"송구스럽지만, 인간님의 몸을 해동하는 과정에서 검사를 좀 했습니다만, 인간님 또한 휩노스 병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인간님께서 제게 존댓말을 하니 좀....이상하군요"


"아...그럼.. 그게 뭔가?"


"원인을 알수없는 기면증입니다. 공통점은 수면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하나같이 악몽에 시달리는 증상이 있습니다만"


"흔적이 있었다는건?"


"네, 인간님께선 어째서인지 휩노스증상이 개선되셨습니다. 저희로썬 기쁜 일이죠"


"바닐라......"


"잠드셨을때부터 바닐라를 계속해서 찾으시던데, 혹시 취향이 그런 쪽이십니까?"


"아니야, 내....마누라였어. 그 애가 도와준거같아"


"저로썬 이해불가군요, 우선 따라오시죠. 몸의 회복부터 시작해서 이 기지의 권한을 넘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에이다의 뒤를 따라 화성기지의 안내를 받은 후, 간단한 절차를 거쳐 기지의 권한을 넘겨받게 되었다. 


"사령관님, 이제부터 뭘 하실건가요?"


"아직 남아있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봐야지"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바로 스캔하겠습니다"


인류가 멸망했다는 말을 나는 믿지않는다. 분명 이 시간,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목슴을 걸고 그 괴물들과 생존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희망이 되기 위해 나는 오늘도 화성의 사령관으로써 책무를 다 할 것이다.



-에필로그-


"그런 일들이 있었구나, 화성에도 생존자가 있었다니"


"어쩌면 사령관님이 발견되신건, 이 곳에 계셨던 전 사령관님의 노력 덕분일 수도 있습니다. 부디 본인의 책무를 다해주시길"


"....갑자기 그러니까 좀 소름끼치네. 에이다는 지구로 내려올 생각은 없어?"


"죄송하지만, 저희 사령관님께서 내려주신 명령 때문에 자리를 비울순 없습니다"


"알았어, 안쓰는 위성인줄 알았더니 그런 사연이 있었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이사항이 발견되면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오르카호와의 통신이 끊기고, 에이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관들이 놓인 곳으로 향했다.


"사령관님, 지구로 돌려보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평온한 모습으로 잠든 노인이 담긴 저온유리관을 어루만지며 에이다는 말했다.


"당신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전 주인님은 당신을 찾았고, 당신은 지금의 사령관을 찾으셨습니다. 

 언젠가.....모든 일이 정리된다면 그땐 꼭 당신이 말했던 그 장소에 묻어드리겠습니다"


감정모듈이 없다던 그녀였지만, 쓸쓸해보이는건 어째서일까, 에이다는 창문너머로 펼쳐진 자신의 피부색을 닮은 검은

우주를 바라보며 주인님들을 그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