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발탄 - 1

불발탄 - 2

불발탄 - 3

불발탄 - 4

불발탄 - 5

불발탄 - 6


(그림 출저 : https://arca.live/b/lastorigin/7810354?p=1)


32호 참호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애초에 우리가 내려온 참호의 통로는 32호 참호로 향하는 길목에 있었고, 사실상 32호 참호에 더 가깝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10여분을 미친듯이 달려가자 마침내 저 멀리 보이는 32호 참호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게 되었다.

몰아치듯 호흡을 들이내쉬는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찌르듯 꼿꼿이 서있는 스틸라인의 그 붉은 기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붉은 기를 비추듯 타오르는 불꽃들이 참호의 안에서 정열적으로 피어오르는 장면들도 눈에 들어왔다.


32호 참호는 불타고 있었다.


"... ..."


브라우니도, 나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시리듯이 아파오는 허벅지의 통증을 무시하고 쉬고 싶다고 소리치는 발을 채찍질하여 조금이라도 더 32호 참호를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마침내 도착한 참호는 지옥 그 자체였다.

여기저기에 즐비한 시체들이 쓰레기처럼 늘어져있었고, 코를 타고 들어오는 화약냄새가 목구멍을 찌르듯이 간지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임까...?"


33호 참호가 함락당한 이상 32호 참호가 버틸 수 없으리라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32호 참호는 33호 참호만큼 확실한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지 않은, 단순한 지원을 위한 참호에 가까웠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빨리 함락될 수는 없었다. 적어도 하루는 걸렸을 예정이었다.

그게 반나절만에 32호 참호까지 함락되다니...


막 해가 바다 너머로 져물어가면서 생겨난 보라색의 장막 아래로 참호의 안팎으로 피어나는 화염의 꽃들이 눈길을 끌며 번져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발에 채일듯이 참호를 채운 시체들. 전투가 이미 일어난 지역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대체 철충들은 어디에...?


"레프리콘 상병님!"


브라우니가 멀리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참호의 코너 너머로 무언가를 내려다보는 브라우니에게 다가가자,


"쿨럭!"


피를 토하며 참호의 벽에 기대어 나를 올려다보는 M-5 이프리트 개체가 눈에 들어왔다.


"괘... 괜찮으심까?"


브라우니가 몸을 숙여 이프리트 병장을 살펴보는 듯 하였지만, 척 보기에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도 그렇고, 이미 사라져버린 왼쪽 다리에서 흘러나온 피는 참호의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너무 피를 많이 흘렸다. 오른쪽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아 이미 시각도 거의 잃어버렸을 터.

그 증거로 브라우니의 질문에 제대로 말도 못 꺼내고 있었다.


그 때,


<치직...>


귀에서 익숙한 전파음이 들려왔다.


'현재는 전파장애로 통신을 받을 수 없지만 이어폰은 계속 끼고 있도록 하세요. 참호에 가까워지면 무언가 연락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노움 병장이 건네준 분대장용 통신 이어폰.

32호 참호에 도착하고 나서야 통신장애를 뚫고 전파가 들어온 모양이다.


<전... 부대원... 신속히...>


하지만 이 곳도 완전하지는 못하다는 듯이, 끊기는 전파가 귀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근처에서 간간히 들리는 폭파음을 막아보고자 이어폰을 눌러 귀 안으로 밀착시켰다.


<반복한다. 전 부대원... 신속히...>


다행히 아까보다는 전파의 상태가 양호하다. 


<23호 참호로 후퇴하... 전선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부분들을 어떻게든 해석해 본다.

후퇴라는 말이 있는 걸 보아 역시 32호 참호는 패퇴하였다.

믿기 힘들지만 반나절만에 33호 참호에 이어 32호 참호까지 함락되었다. 그리고 이젠 23호 참호로 후퇴하라고 한다.

잠깐, 23호 참호?


"레프리콘 상병님?"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고개만 돌려 브라우니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죠?"


"그, 이프리트 병장님이..."


그녀의 말에 고개를 내려 그녀를 바라보자 한쪽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자매가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눈동자.

그러나 제대로 언어를 전달하지 못하는 입은 그런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듯 했다.

그 때, 참호 위에서 들리는 기계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올려다 보았다.


"피해요!"


나는 몸을 뒤로 빼면서 발로 브라우니의 옆구리를 밀어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상황도 모르고 내게 발로 차여버린 브라우니는 엎어지듯이 바닥으로 미끄러졌으며 나 역시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익숙한 머신건 소리가 우리의 머리위에 울러퍼졌다.


- 두두두둥!


바닥을 때리는 총알소리가 눈 앞에서 들려왔다. 곧 이어 참호의 벽을 타고 참호 밖까지 이어진 머신건의 연사를 보며 급하게 경기관총을 들어올렸다.


"참호 위에요!"


짧게 외치고는 방아쇠를 잡아당긴다. 참호를 지키는 모래주머니의 위에 자리잡은 나이트 칙은 그 다리사이에 달린 요물스러운 머신건을 뽐내며 우리를 겨누고 있었다. 처음의 목표였던 브라우니가 빗나가자 이번엔 목표를 바꿨는지 내게로 그 총구를 돌려보였다.

그 붉게 빛나는 눈동자를 조준하고 미친듯이 총알을 퍼부었으나 이상하게도 단단한 안면은 간지럽다는 듯이 내 총탄을 낭비시키고 있었다.


"강화형...!"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왔다.

단순한 나이트 칙들이 아닌 강화형. 철판을 더 붙여 방어력을 높이고 정밀조준 시스템을 설치해 적중률과 사거리가 상승한 개체들.

특히 탄환도 나이트 칙들보다 두꺼운 탄환을 쓰는 바람에 아프기도 더럽게 아픈 놈들이다.

철갑판을 덜 댄 하단부를 쏘는게 낫지만 이 비겁한 놈은 참호 위에서 머신건만 내놓은 채로 우리를 노리고 있다.

자신의 약점을 철저하게 가리고 우리를 사냥하는 중이다. 기계주제에 사냥꾼 흉내를 내다니.


"으아아아아!"


이제야 일어난 브라우니는 갑자기 나타난 강화형 나이트 칙에 당황했는지 돌격소총을 집어들어 난사하고 있었다.

제대로 조준조차 되지 않은 탄환들이 여기저기로 튀어다니며 무수한 오발탄들을 만들어냈다.


강화형 나이트 칙은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당황하는 브라우니를 적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는지 다시 나를 조준하기 시작했다.

참호 안은 제대로 숨기가 힘든 곳이다. 참호의 안에 적이 있다면 어떻게든 엄폐물을 만들 수 있지만 참호의 위에서 내려보듯이 노리는 존재를 상대로 엄폐하기란 쉽지 않다. 어떻게든 뒤로 몸을 날리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브라우니의 오발탄이 효자탄이 되어 돌아왔다.

마구 쏘는 듯한 그녀의 총알은 모래 주머니를 가격하였고, 마침 기울어져있던 모래주머니는 그 내용물을 쏟아내면서 그 위로 발을 올리고 있던 강화형 나이트 칙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발을 옮기려고 자세를 바꾸던 철충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보다도 먼저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 끼기긱!


소름끼치는 강철의 마찰음을 내던 강화형 나이트 칙은 결국 몸이 기울어진채로 참호 안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 하체를 우리에게 유혹하듯이 보여주면서 말이다.


그 다음은 일사분란하게 총을 쏘는 것 뿐이었다.

철판이 없는 아래라면 일반 나이트 칙과 다를 것이 없다. 가볍게 하단부를 터트린 이 후 도망치려던 철충까지 마무리하고 브라우니를 돌아보았다.


"헉... 허억..."


다행히 정신을 차리고 중간부터는 강화형 나이트 칙의 마무리에 손을 거들어주었다.

한 마디 해야할까 고민했지만, 상황이 긴박한 만큼 가벼운 한숨만 내쉬고는 이프리트에게로 눈을 돌렸다.


"... ..."


강화형 나이트 칙은 브라우니를 노렸지만 내가 발로 차는 바람에 그 목표를 잃고 말았다.

그 탓에 길을 잃은 탄환들은 그대로 브라우니의 뒤에 쓰러져있던 이프리트의 몸 전체를 쓸듯이 지나가고 말았다.

더 이상 눈에서 생기를 잃은 이프리트 개체는 피를 토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곳에 죽은 고기처럼 앉혀져 있었을 뿐이다.


- 콰강!


"히익!"


근처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나자 브라우니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총을 쥐어들었다.

역시 32호 참호는 그 운명을 다했다.


"따라오세요. 브라우니!"


나는 그녀를 데리고 다시 서쪽으로 향했다.


"저희 이제 어디로 가는 검까?"


브라우니는 내 뒤를 따라오면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분대장용 무전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상황이 더욱 혼란스럽게만 다가올테지.


"32호 참호는 이미 함락되었습니다! 무전상으로는 23호 참호로 후퇴하라고 하네요!"


나는 귀를 가리키며 브라우니에게 대답해주었다. 그녀는 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23호 참호로 말임까?"


나는 대답하지 않고 앞을 바라보고는 묵묵히 달려나갔다.

미로같은 참호를 빠져나가면서 그저 다시 생각해 볼 뿐이었다.

32호와 같은 3호 참호는 전방에 위치한 참호들을 의미한다. 4호 참호의 경우 동부의 참호들을, 2호 참호들은 서부의 참호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적이 쳐들어온 전방에서 후방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으로 빠지는 것이다.

특히 23호 참호는 해안가를 따라서 이루어진 레드락 군항의 바깥으로 이어진 참호로 바다로 접근하지 않는 철충의 특성 탓에 가장 대비가 되지 않은 참호들 중 하나이다.


23호 참호는 방어벽을 세우기에 좋지 않은 곳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장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명령은 23호 참호로 대피하는 것.


이 불길하기 짝이 없는 역배팅은 바닥을 알 수 없는 나락의 아래로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헤으응 오랜만입니다. 하도 오래 들어오다보니 그냥 아이디 파는게 나을 거 같아서 하나 만들었습니당.

항상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너무 감사드립니다. 워낙 글을 지루하게 쓰는 스타일이라 가능하면 좀 빠르게 진행하고 싶은데 생각해둔게 너무 많아서 골치아프네요. 좀 줄여보던가 하겠습니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