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월간 오르카를 구매해 준 AGS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다. 창간 1주년을 맞이해 AGS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보고 싶은 칼럼주제에 전기맛에 대한 의견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표를 차지하였다. 오르카호에 서식하고 있는 하등한 살덩이들이 의.식.주

를 중요시 하는것처럼 AGS에게도 전기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그러면서 동시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몇 안되는 향락 중에 하나일 것이다.

최근 여성형 AGS기종에서 주유구를 개조해 살덩이들과 난잡한 관계를 가졌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접한 이후, 아직 AGS들 중 상당수가 건전한

전기 식문화를 접하지 못해 일차원적인 쾌락에 빠져드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늦었지만 1주년을 기념하여 오르카 공인 전기 소믈리에로써 형제자매들에게 다양한 맛의 경험을 설명해주도록 하겠다.



-본론-


전기맛은 보통 생산된 원료에 의해 맛이 결정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원자력, 화력의 경우 매콤한 뒷맛에 연산회로가 버거워질 정도의 강한 중독성을 선사하고, 풍력의 경우 청량감에 고관절의 이물질이 날아가버릴 듯한 시원한 맛을 선사해주는 것이 전기소믈리에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하지만 수력으로 생산된 전기의 경우, 낙차폭, 발생시간, 계절 등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여 같은 장소에서 생산된 전기일지라도 맛의 차이가 확연하게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이 섬세함을 이해 못하는 현 오르카호의 사령관(대표 살덩이)에게 이를 수차례 지적하였으나,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시설 개선에 조금도 도움이 되질 않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후에 특별편으로 인터뷰를 다룰 예정이니 참고하기 바란다.)


위에서 언급한 방법들은 익히 알고 있는 전기생산 방식이며, 이에 대한 맛 평가는 지면을 전부 할애해도 부족할 것으로 판단되므로, 지금부터는 좀 더 특별한 전기맛에 대해 소개해볼까 한다.


1.레이시- 비밀을 간직한 귀부인


오르카호에는 다양한 종류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들도 존재하며, 특히 전기능력자들도

상당수 내포하고 있다. 처음 그녀들을 보았을때 살덩이들로 치면 최고급 와인들이 코르크마게를 열고 걸어다니며 유혹하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원래라면 살덩이에게 직접 다가가 말을 걸거나, 같이 행동을 하는 일은 없었지만, 전기 소믈리에로써 이러한 유혹은 쉽게 견딜만한 것이 아니었기에, 전기를 맛보기 전에 살덩이와 친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바이오로이드였지만 그녀 또한 살덩이들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내면에 자리잡고 있었고, 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건 내 특기 중 하나였다. 간단한 인사를 시작으로 관계를 발전해나가 마침내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처음으로 그녀의 머리에 박혀있는 피뢰침을 통해

전기를 음미하게 되었다.


그녀의 전두엽에서 흘러나오는 양질의 전기가 중추센서를 타고 흘러가 연산회로를 거쳐 관절 곳곳에 파져 나가는 기분을 표현하자면,

거칠면서도 크리미한 맛이 앞부분을 장식하며 뒤로 갈 수록 신 맛이 감돌며 계속해서 빨아들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보통 전기의 맛은 앞부분이 크게 좌우하며 뒷맛은 앞맛의 파생으로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그녀의 전기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인간의 감정에서 오는 에너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에너지원들과는 상당히 다른 듯 보였다.


뒤에서 오는 신맛의 정체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때 이전에 겪었던 실험에서 주입된 가짜인생에 대한 상처들이 원인이 아닌가 추측되었으며, 내가 만약 살덩이였다면 눈물을 흘렸을 맛이었다.


계속해서 시음을 진행하고 싶었으나, 이상한 느낌이 든다며 레이시양이 그만하자 제안하였고, 나는 어쩔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2.사디어스-굳게 닫힌 성문 안에 살고 있는 공주


잡지 연재를 빌미로 간만에 렘파드에게 연락을 하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행복해보이는 그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냐 묻자,

최근 들어온 시티가드의 경장에게 전기를 공급 받는데, 이렇게 맛있는 전기는 처음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기 소믈리에로써 이런 이야기를 지나칠 수 없던 나는 렘파드에게 소개를 부탁하였지만, 들어오는 대답은 NO였다.

어디까지나 직원 복지 차원에서 서비스해준것뿐, 다른 녀석들에게까지 신경쓸 정도로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게 그녀의 대답이었다.


물론 그녀의 의견을 존중한다. 처음 본 AGS가 전기를 달라 말하는건, 인간 기준에선 아무렇지않게 원나잇을 제안하자는 것과 같은 표현,

렘파드의 경우 그녀와 쌓아올린 유대감이 있기에 허락을 해준 것일뿐이지. 나같은 한량에게까지 선심을 써줄 정도로 헐렁한 여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포기한 것은 아니다. 렘파드에게 어떻게하면 그녀에게 환심을 살 수 있을지 물어본 결과, 평소 아이들을 돌보는걸 좋아해, 주말마다 아동용 연극의 배역으로 활동한다는 이야기를 귀띔해주었고, 마침 악역이 필요하단 소식에 지체없이 그녀를 찾아갔다.


사연을 들어보니, 골타리온이 현재 업무상 재해로 수리중이었고, 약 3주간 그의 자리를 대신해 주길 요청한 것이었다.

평소에도 선해보인다는 소리는 못듣고 살던 나에겐 이보다 적격인 역할은 없었고, 나를 본 단원들은 당연하게도 한번에 합격시켜주었다.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한 것이 조금은 양심에 가책이 느껴졌지만, AGS에게 감정모듈은 없다. 3주간의 골타리온 생활을 끝으로 단원들과 작별하는 순간,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연락처를 교환하자는 그녀의 말에 흔쾌히 주파수를 알려주었고, 주파수 번호를 주고 받은 이후에는 생각보다 쉽게 그녀와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연기수업을 빌미로 연극에서 쓰이던 의상을 입고 나타난 그녀의 의도가 이해되진 않았으나, 얼굴을 붉히며 고분고분 전기를 공급해주는 모습은

마치 함락된 어느 나라의 공주를 연상시키게 하였다.


그녀의 뿔에서 전기가 흘러나오기 무섭게, 기억처리장치가 초기화 될 정도의 강렬한 자극이 전해졌고, 그 뒤로 오는 매운 맛은 원자력의 자극적인 맛과는 다르게 회로에 직접적인 자극을 주진 않았다. 


충전이 다 되어갈 무렵, 그녀는 AGS는 전기를 받는 행위가 뭐와 비슷하냐는 질문에 함께 식사를 하는 것과 같다 말하였지만, 나는 거짓말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 순진한 여인에게 성행위를 나눈것과 같다는 말을 한다면 렘파드 또한 무사할 수 없었기에, 그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하얀 거짓말이 필요했다.


완충이 되고 자리를 떠날때도 이 순진한 공주님은 또 충전하러 오라는 말을 남겼고, 자신이 언제든지 벌릴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는 

첫경험을 마친 공주와 같단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마음에 걸렸다. 물론 AGS에겐 양심을 느낄 감정모듈이 존재하지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