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맛 주의@@






1


자신을 바라보며 짓는 다정한 미소, 묶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부드러운 입맞춤까지.

팬텀은 사령관의 그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는 임무를 수행하는 순간까지도 그와의 추억들을 잊지 못했다.


[...팬텀? 거기 말고, 오른쪽이야.]


“아. 미안합니다, 사령관.”


리시버 넘어로 들리는 목소리에 팬텀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들에 연결된 선과 사방이 검게 그을린 벽,

오래된 폐허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곳에 사령관이 찾는 소중한 물건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하하, 미안할 건 없어, 그냥...조심하라는 거지...]


“..네,알겠습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몸을 감싸고 있는 은폐장을 여몄다.

긴 복도에 늘어선 철충들은 모두 겨울의 냉기에 멈추어 있었고,

얼어붙을 때 생긴 서리들은 철충들을 마치 청동으로 된 파수꾼으로 보이게 했다.

그 살벌한 풍경에 팬텀은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보통은 이런 철충들이 가득한 곳에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 않겠지만, 

단순히 물건만 가져오는 임무라면, 완벽한 은폐능력을 가진 팬텀에게 철충의 수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그 방으로 들어가면 될거야!]


들뜬 사령관의 목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자 작은 문이 보인다.

숨을 가다듬고 문고리를 돌리자 철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잔뜩 쌓인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어서 빨리 임무를 완수하고 사령관의 품 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팬텀은 숨을 죽이고 방 중앙에 놓인 상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  깡


팬텀의 발에 채인 깡통이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문이 부서지며 검은 그림자가 뛰어들었다.

팬텀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단검을 휘둘렀지만 뛰어든 철충의 공격을 저지하는데는 역부족이었다.

쇠가 쇠를 튕겨내는 듯한 느낌과 함께 손아귀에서 단검이 빠져나갔다.


“큿!!”


[팬텀!!!!!]


팬텀이 미처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철충의 공격이 그녀의 몸을 때렸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고통이 뇌를 후벼팠다.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팬텀의 입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크으으윽….”


팬텀은 떨리는 손을 다잡고 자신의 복부를 내려친 철충에게 총을 쏴갈겼다. 

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에 얻어맞자 아무리 튼튼한 놈이라도 타격을 입었는지 크게 울부짖으며 비틀거린다.

 

“외톨이로 만들어 주마!”


남은 칼로 붉게 달아오른 코어를 후비자 까드득하는 소리가 울리며 철충의 움직임이 멈춘다.

회색으로 변한 코어에 박힌 단검을 회수하고 방 한편 높게 난 창문으로 뛰어올랐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대책없이 총을 쏴갈겼으니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철충이라고 해도 금세 깨어날 것이다. 


“크흡…”


창틀에 매달린 팬텀은 입을 틀어막고 세어나오는 신음을 억눌렀다. 


창문 밖에는 까마득한 절벽이 펼쳐져 있었다.


절망감에 미처 참지 못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사령관, 나 돌아가지 못할수도 있을 것 같아…


“미안해...사령관...”


팬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귀에서 부숴진 리시버의 파편을 꺼냈다.







2



팬텀은 창틀에 몸을 기댄 채 망토 사이로 발밑을 흘깃 내려다 보았다.

그곳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철충들이 단잠을 깨운 침입자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


그녀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장에라도 이 곳을 벗어나, 사령관이 기다리고 있을 오르카 호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하아...”


손을 뻗어 힘없이 늘어진 다리를 매만지자, 차가운 고깃덩이를 만지는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게다가 망토 사이로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가 망가진 폐를 찌르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온다.

아무리 튼튼한 몸이라고 해도 이런 상태로는 싸우기는 커녕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겠지.


차라리 아드레날린이 돌고 있을때 조금이라도 더 움직였어야 했는데...

명백한 실책이였다.


"...큿."


짧게 혀를 찬 그녀는 저 멀리 펼쳐져 있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추위가 밀려오고 있었다.



3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났다.

밤 사이 창틀에 쌓인 눈을 긁어모은 팬텀은 그것을 입에 쑤셔넣었다. 

차가운 눈이 목을 긁으며 내려가자 잠시나마 허기와 갈증이 가신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시뿐이였다.


"배고파…"


팬텀은 잔뜩 쉰 목소리로 울먹거렸다.

바이오로이드는 인간보다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음식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은 인간과 같다.

위를 갈아내는 듯한 통증은 눈을 베어먹는 것 정도로는 가시지 않았다.

공복에서 비롯된 그것은 이미 내장이 뭉개진 고통을 아득히 넘어가고 있었다.


"....."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지고 있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해가 여섯번 지고 뜰 때까지 구조대는 오지 않았다.


"...사령관…"


팬텀은 눈을 감고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자기같은 싸구려 바이오로이드 하나를 위해 많은 철충들을 죽이며 길을 뜷는 것은 엄청난 자원낭비다.


그는 다정하지만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의 목숨을 등에 지고 있는 지휘관이니까.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아파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보고싶어…"


감긴 눈에서 흐른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온다.

임무를 마치고 오는 그녀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 어디에 숨어도 금세 찾아내는 다정한 눈빛, 

우물쭈물 변명하는 자신에게 장난스럽게 건내는 쓴 에스프레소의 온기들이 너무도 그립다.


다시 한번 그것들을 느낄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지러운 몸으로는 창틀에 기대어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차라리….이대로…"


뛰어내려 버릴까, 그녀는 뒷말을 삼키고 발 밑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새카만 구멍을 바라보았다.

주인이 있는 바이오로이드는 자살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바이오로이드인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상처의 고통이 그녀의 정신을 착실히 갉아내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사령관..."


하지만 끝내 그녀는 뛰어내리지 못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보다 다시는 사령관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두려웠다.


그녀는 여전히 겁쟁이였다.




4


가끔씩 꿈을 꾸면, 마치 연극을 보는 것 처럼 과거의 추억을 타인이 된 것처럼 지켜볼 수 있다.

지금의 팬텀이 그랬다.

그녀가 지켜보고 있는 일년전의 자신은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소심한 성격이였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아주 가깝게 다가와 버린 사령관에게 매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당황해 하곤 했다.


“어..어쩐일로 저를 불렀나요..사령관…? 줄게..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사령관실로 불러낸 그날 역시 팬텀은 사령관에게 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거리고 있었고, 

사령관은 변함없이 다정한 미소로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


"자, 여기, 파티마의 상점이 영영 닫혀버리는 바람에...이런 것 밖에 못 줘서 미안해."


그렇게 말하는 그의 손에는 작은 상자에 담긴 나무 반지가 들려 있었다.

서툰 솜씨로 깎은 반지는 빛나지도 않고 보석도 달려있지 않았지만 팬텀의 심장을 더욱 빠르게 뛰게 하는데는 충분했다.


“다음엔 더 제대로 된 걸 구해서 줄게, 약속할게.”


“어...어째서 저한테 이런 걸…”


“음..팬텀을 사랑하니까? 하하하.”


그는 그렇게 말하며 특유의 쾌활한 웃음을 지었다.


사령관은 팬텀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물고기가 물 속에서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것은 팬텀도 마찬가지였다.


“고마워요..사령관...그리고 나도 사랑....”


그래서 팬텀은 참 낭만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내미는 반지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


그리고 꿈이라는 것이 으래 그렇듯 곧 팬텀의 기억은 뒤죽박죽이 되어 뭐가 뭔지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고, 

그녀는 곧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잠들었던 걸까. 팬텀은 차가운 바람에 몸서리치며 눈을 떴다.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또 그의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아..”


그녀는 손을 뻗어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꿈에서 느꼈던 온기는 오래전에 사라진 뒤였다.

눈물을 닦아낸 손에는 맨들해진 나무반지가 소중히 끼워져 있었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팬텀은 그것을 빼서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그곳에는 반지만큼이나 서툰 솜씨로 새겨진 글자가 있었다.


[MORS SOLA]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뜻을 가진 단어는 유치찬란하기 짝이 없었지만,

철충과의 전쟁이 한참인 지금 그것만큼 사령관의 심정을 대변하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그의 다정한 마음을 느낀 팬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랑합니다. 내 반쪽...사령관님.”


지금 꿈을 꾸면 다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팬텀은 그렇게 속삭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몸이 균형을 잃고 떨어지며 전신이 붕 뜬듯한 기묘한 안정감을 가져다 주었다.

사령관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꿈속에서 그녀는 행복할 것이다.





5



긴 세월의 흐름으로 무너져 내린 건물들이 늘어선 도시에는 낡은 대저택이 하나 있었다. 

다른 집들과 달리 혼자서만 높다란 절벽 위에 뿌리박은 그 저택은 새하얀 눈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사령관이 자신의 바이오로이드 군대를 끌고 향하는 곳은 그 건물이였다.


“사령관을 엄호하며 전방의 철충들부터 제거하도록! 건물에 충격을 줄 수 있는 모든 무기의 발포는 금한다!”


브라우니들의 총구가 불을 뿜자, 미친듯이 돌진하던 철충들이 구멍 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군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나 많았다.

쓸려나가는 족족 빈자리를 채우는 철충들의 모습에 사령관은 입술을 세게 물어 뜯었다.


삼일이면 도착할 줄 알았건만, 팬텀과의 연락이 끊긴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아무리 튼튼한 바이오로이드라도 물도 식량도 없이 철충들이 가득한 곳에서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확률은 아주 희박했다.

하지만 그는 그 적은 확률에 모든 것을 걸고 이곳까지 달려왔다.


“사령관님, 안쪽의 철충은 모두 제거 했습니다.”


“응, 고마워 마리.이젠 내가 혼자 가볼게.”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팬텀이 지났을 긴 복도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었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철충들은 이미 고철덩어리로 변해 여기저기에 늘어서 있었다.

작은 문 앞에 멈춰선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열었다.


"...."


고요한 방 안은 코어가 박살난 철충 한 기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격렬한 전투 끝에 부숴진 상자들이 방 이곳 저곳에 늘어져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작은 상자를 발견한 사령관은 손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그것을 움켜쥐었다.

마침내 그가 찾던 물건을 손에 넣었으나, 기쁜 마음 따위는 전혀 들지 않았다.

천천히 방을 흝던 그의 시선이 방 한 구석에 고정되었다.


사령관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너무도 익숙한 여성의 실루엣이 있었다.

그는 흔들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팬텀..?"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팬텀의 몸을 감싼 망토는 아침 서리에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연상케 했다.


"...."


그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것 같은 얼굴로 미동도 없는 그녀의 몸을 천천히 껴안았다.

항상 그에게 온기를 나눠주던 품속은 이제 너무도 차갑기만 하다.

그것을 느낀 그의 어깨가 천천히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팬텀…팬텀..."


너무도 생생하게 얼어붙은 탓에 당장이라도 그녀의 입이 오물거리며 어색한 목소리를 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네,하고 수줍게 대답하는 소리는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너무나도 차가운 현실에 그는 두 눈을 꽉 감은 채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상자가 툭, 하고 떨어지며 아름다운 보석이 박힌 반지가 굴러 나왔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눈길도 주지 않고 그저 그녀를 더욱 꽉 껴안을 뿐이었다.


"...."


차갑게 얼어붙은 여자와 흐느껴 우는 남자의 발 아래,

이제는 쓸모 없어진 반지가 아침 햇살을 받아 서글프게 반짝이고 있었다.










원래 해피엔딩으로 쓰려 했는데 파혼 대회라고 생각하다 보니까 새드 엔딩이 되어 버림…

대회 참가를 의의로 두고 슥슥 써봄

긴 글 읽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