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발탄 - 1

불발탄 - 2

불발탄 - 3

불발탄 - 4

불발탄 - 5

불발탄 - 6

불발탄 - 7

불발탄 - 8

불발탄 - 9


차가운 밤공기가 창고 안을 가득 채웠다.

폐 안까지 얼어붙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다행히 임펫이 데려온 창고로 지나가는 철충은 거의 없었고, 극히 한 두마리 정도가 주위를 서성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지만 곧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우리는 아까의 경보로 주위에 몰려들었을 철충을 피해 잠시 창고 안에서 몸을 숨기기로 하였다.


"주위가 잠잠해지면 부대로 복귀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해보도록 하지."


자신을 1447 임펫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이 참호의 행정보급관이라고 밝혔다.

그 덕에 31호 참호 곳곳에 숨겨지듯 배치된 탄약창고의 위치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우리는 그 장소들 중 하나에 몸을 감출 수 있었다. 


"예! 알겠슴다!"


막내였던 브라우니는 간만에 간부와 만난 탓인지 어딘가 군기가 들어있었다. 

브라우니는 생산되자말자 전선으로 끌려나왔을테니 간부를 볼 일은 특히 많지 않았을 것이다.


"저... 임펫 상사님?"


"음?"


"혹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의 소심한 물음에 임펫 상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했다.


"상황?"


"네. 왜 철충들이 벌써 32호 참호를 습격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33호 참호가 공격당한게 반나절 전인데..."


우리가 공격당한 33호 참호에서 벗어나 32호 참호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32호 참호는 완전히 불타버린 뒤였다. 적어도 한참전에 전투가 벌어졌다는 의미이다. 


"33호...? 아, 너희들 33호 참호에서 온거냐?"


임펫 상사는 놀랍다는 듯이 눈을 치켜뜨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브라우니가 건네는 수통을 받아마시며 이야기를 꺼냈다.


"적은 33호 참호에서 오지 않았어. 42호 참호에서 공격해왔지."


"42호 말인가요...?"


42호 참호는 동부전선이다. 바위산을 끼고 있는 참호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요새이다. 33호 참호 못지않은 방어력을 자랑하던 곳이었는데...


"바위산 너머로 무언가 폭격을 맞았다는 연락이 들어오긴 했는데...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41호 참호로 적들이 침범해왔지."


"아, 그럼 설마..."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적은 33호 참호를 뚫고 32호 참호로 들어온게 아니었다.

애초에 철충놈들은 42호 참호를 지나 41호 참호를 격파하고 3호 참호쪽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당연히 동부전선은 격전지일 수 밖에 없었다. 33호 참호는 북쪽에서 남하하는 적들을 상대하기 위한 참호이다. 그런데 동쪽에 있던 42호 참호가 뚫리는 바람에 중앙에 있던 32호 참호까지 일직선으로 밀리고 말았고, 33호 참호는 오히려 32호 참호에서 올라오는 적들에게 공격당해 함락당하고 만 것이다.


33호 참호보다도 32호 참호가 먼저 함락되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튼튼한 참호도 의미가 없다. 배후에서 공격당해 양쪽에서 협공당하기 전에 33호 참호에서 물러나는 수 밖에는 없으리라.


"앗, 그렇지만 33호 참호쪽에 둠 브링어 분들이 공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분명 철충은 33호 참호 북쪽에서 내려온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공습? 너희 대체 언제 내려온거야?"


"아마, 15시 조금 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그때면 아마 보급부대 차단을 위해서 내려왔을거야."


임펫 상사는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대충 그림을 그리며 설명해주었다.


"32호 참호가 함락되면서 31호 참호까지 위험에 빠졌고, 뒤이어 11호 참호의 안쪽의 사령부에 계시던 수뇌부 분들이 대피할 필요성이 생겼지. 그래서 결국 배가 있는 레드락 군항으로 몸을 피신하기로 했는데 북쪽에서 철충들이 내려온다는 정찰정보가 들어온거야. 이대로 33호 참호를 넘어 내려오면 23호 참호로 향하던 길목이 철충들에게 빼앗길 수 있다, 그렇게 판단한 인간님들이 둠 브링어에게 폭격 명령을 내리신거야."


그렇게 말하며 탄약이 있는 구석을 이곳저곳 뒤지더니 곧 어디선가 기다란 초코바를 한두개 꺼내들었다.

...왜 초코바가 탄약창고에서...?


"오, 역시 있었군."


그녀는 있을 줄 알았다는 듯이 자연스러운 손길로 초코바 하나를 입에 가져다 대고는 남은 초코바를 우리에게 던지듯 넘겨주었다.


"근무나 순찰중에 먹으려고 숨겨두는 놈들이 종종 있단 말이야. 특히 브라우니들..."


"이병! 브라우니!"


브라우니는 마치 자신의 일인것 마냥 자리에서 일어나 꼿꼿히 허리를 세우고 관등성명을 댔다. 어딜가나 브라우니들이 말썽이군.


"후후... 너는 꽤 군기가 들어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일단 먹어둬. 앞으론 뭘 먹지도 못하고 달려야할 것 같으니까."


"옙! 감사함다!"


"감사합니다. 잘먹을게요."


브라우니와 나는 초코바를 입에 가져다 넣었다. 차가운 냉기가 초코에 스며들어 평소보다도 깊은 단 맛이 입 안에 퍼져나갔다.

그렇게 혀 뒤로 넘어간 초코의 에너지가 몸 전체로 스며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임펫 상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희는 이제 어디로 가게 되나요?"


임펫 상사는 잠시 눈을 감고는 생각에 빠지더니 곧 답변을 내주었다.


"이대로 외각을 따라 23호 참호로 가는 길은 힘들겠지."


임펫 상사의 말에 따르면 32호 참호가 함락되자 소수의 부대는 33호 참호로 올라가 북부 전선을 붕괴시켜 보급로를 열었고, 나머지는 모두 남하하여 11호 참호를 향해 진격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쯤이면 못해도 31호 참호는 격전지가 되어있을 것이고, 그 옆으로 지나는 23호 참호의 길목에도 철충들이 득실득실 몰려있을 것은 안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역시 참호 밖으로 달려나가는..."


"너는 정말 용감한 레프리콘이구나..."


안타깝게도 나의 의견은 용감한 발언으로 취급되어 묻혀버리고 말았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무리수이긴 하지.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딱 하나 있긴한데..."


임펫 상사가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열었다.


"23호 참호로 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던 주사위가 갑자기 엄청난 관성으로 튀어올라 테이블 위로 되돌아올 줄이야.

구석에서 초코바를 우물거리던 브라우니도 임펫 상사의 말에 관심이 생겼는지 어느샌가 옆에 다가와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모든 참호가 그렇지는 않지만 소수의 참호들은 참호의 아래에 갱도를 파는 경우가 있다. 특히 서로 참호전을 진행하는 경우에는 그런 경우가 많지."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다. 참호 아래에 갱도를 파내서 자원을 채취하는 경우도 있을 뿐 아니라, 상대의 참호 아래까지 갱도를 파내어 폭탄을 설치하거나, 자신들의 참호가 함락당할 위기에 직면하면 갱도 아래에 설치된 폭약을 터트려 상대가 참호를 이용할 수 없게 만들거나 참호안에 들어온 적들을 몰살시키기 위한 용도로 갱도를 유지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폭격과 같은 공격을 피하기 위한 갱도를 파는 경우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폭약의 효력이 강해진 현대에 있어서 그러한 종류의 갱도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


"그럼, 그 갱도가 23호 참호와 연결되어 있다는 건가요?"


"글쎄... 갱도가 지나는 길목은 역시 지도가 없으면 기억하기가 어려워. 땅을 파는건 더치걸들의 일이지 전투원들의 업무가 아니니까."


결국 갱도가 23호 참호까지 이어지는지, 어떻게 갈 수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주사위가 테이블 위가 아니라 천장으로 올라가 버렸나.


"하지만 참호 아래에 갱도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고 적어도 철충들이 득실거리는 여기보다는 낫겠지."


"그렇지만, 갱도 아래에 폭탄이 심어져 있는 것 아닙니까? 터지는 건 아닐까요?"


"그럴 경우는 없어. 터트리려면 32호 참호가 함락당한 지금 진작에 터트렸겠지. 아마 터트리기도 전에 무력화당했을 가능성이 클거야."


결국 갱도가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듯 하다.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이것보다 나은 방안은 없다. 다시 참호 밖으로 달려나가는 미친 짓을 했다가는 이번에야 말로 스카우트에게 쫓겨 철충들의 장난감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알겠습니다."


나는 각오를 다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브라우니도 이해를 하긴 했는지, 아리쏭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참호 밖으로 달리는 것 보단 안전하다는 거 아님까?"


"...그래요. 그런 것 같아요."


"그럼 전 찬성이지 말입니다!"


아무래도 어지간히 나에게 불만이 쌓였던 모양이다. 다음에 면담이 필요하겠는데.


"좋아 결정된 것 같으니 날 따라와."


임펫 상사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장구류를 챙기고는 앞장서서 창고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하늘은 별이 가득한 밤하늘로 가득차 있었다. 가볍게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시야를 가리듯이 피어올랐다.

하루종일 채찍질한 몸도 잠시 휴식을 취한 것으로 어느샌가 무거워져 버렸다.


부디 갱도 아래만큼은 안전하기를, 그렇게 기도하며 족쇄같은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원래는 여기서 다른 친구를 등장시킬 생각이었는데 결국 임펫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누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스틸라인 섹돌들 중에 누가 제일 좋은지 물어봤는데 음쇼섹이 젤 많더라구요.

그런데 대장급이 참호안에서 혼자 나오는 건 좀...

결국 적당한 임펫으로 결정했습니다.


애들은 진짜 단 한표도 못받은 친구들입니다...

근데 사실 저도 누군지를 모르겠습니다. 신규캐릭터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