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온 세상을 잠기게할 기세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모든 걸 덮고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숲길.


멀리서 희미한 등대 불빛이 깜빡일 때마다 바닥에 그려지는 인간 형태의 그림자만이 쓸쓸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정적을 깬 것은 귀에 거슬리는 금속의 마찰음이었다.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 이끼가 잔뜩 낀 손잡이를 잡아당기는 사람 모양의 그림자.


1년만에 닿은 누군가의 손길이 익숙치 않았는지 반 쯤 열리던 문이 덜그럭 대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외딴 등대의 방문자가 멈춰선 팔에 힘을 주어 잡아당기자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풀려버린 나사가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부서진 문이 그대로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등대 기둥을 타고 울려퍼졌다.


잠시 굴러가는 문짝을 바라보던 방문자는 무신경하게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지하 깊은 곳까지 이어지는 나선 계단.


흘러들어온 빗물이 난간에 부딪히면서 내는 청명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벽에 붙어있는 전구들 중에 박살나지 않은 것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간간히 켜져 있는 전구 아래로 사람 모양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이 계단이 끝나긴 하는 건지 의심이 들 무렵에서야 바닥에 닿은 두 발.


그제서야 광활한 지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등대 밑에 이런 곳이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은 장소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잠수함이 입구만 내민 채 방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듯이 시뻘겋게 녹슨 해치.


방문자는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잠수함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잔뜩 젖은 옷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계단 끝에서 잠수함 입구까지 이어져있었다.






'딸깍'


고요한 어둠의 세계를 밝히는 무기질적인 소리.


환한 랜턴빛 너머로 일렁이는 방문자의 팔.


퍼져나가는 빛이 비추는 것은 거대한 잠수함에 걸맞는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긴 복도였다.


방문자는 말없이 걸었다.


랜턴이 흔들리면서 생긴 동그란 빛무리가 벽을 훑고 지나가자 암흑 속에 숨어있던 시뻘겋게 녹슨 벽과 축축한 이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익숙하다는 듯 방문자는 그저 걷고 또 걸었다.


'파삭'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방문자의 발걸음이 멈췄다.


반사적으로 발을 향해 랜턴의 빛을 비췄다.


바퀴까지 달려 도저히 인간의 다리로 보이지 않는 차가운 금속제 의족과 그 아래에 짓밟힌 하얀 부스러기.


방문자는 잠깐 말없이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발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걸음은 어디를 향하는 걸까.


목적이 정해져 있기는 한 걸까.


멈추는 건 대체 언제일까.


새하얀 백골이 랜턴의 빛을 반사하며 빛날 때마다 방문자가 잠시 멈칫했지만 걸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치 영겁의 시간이 지난 듯한 착각마저 들 무렵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무한한 걸음이 마침내 마지막을 고했다.


손에 든 랜턴은 눈 앞의 거대한 문짝과 그 위에 달린 작은 글씨를 비췄다.


'ㅅ령과ㄹ"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명패.


글씨를 확인한 방문자가 방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수면에서 흘러들어온 희미한 달빛이 잔잔하게 비추는 방.


곳곳에 부서진 채 방치된 탁자들 사이로 옅은 거미줄이 일렁거렸다.


그 안에서 유일하게 망가지지 않은 탁자 하나가 있었다.


방문자는 말없이 다가가 그 위를 비췄다.


'사령관 여기에 잠들다'


날카로운 것으로 탁자 위에 새겨진 문구 주변에는 시들어서 말라 비틀어진 꽃잎이 수북히 쌓여있었다.










사령관.


인형들의 주인이자 희망.


그는 인형들을 인도하는 목자이자 가야할 길을 밝히는 등대였다.


그와 연결되었을 때 인형들은 안식을 얻었고 가느다란 인형실에 자신의 모든 걸 맡겼다.


삶의 의미, 희망 그리고 목적 까지도.


오랜 전쟁 끝에 마침내 마지막 남은 적이 쓰러지는 순간.


증오스런 적들은 숨통이 끊기는 중에도 기어코 인형실을 잘라내고야 말았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


삶의 의미, 희망 그리고 목적까지도.


그제서야 인형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인형실에 의지했는지 깨달았다.


등대를 잃은 배는 바다를 하염없이 떠돌았다.


그들의 항해에는 목적도 의미도 없었다.


이미 그들이 탐험하지 않은 바다는 이 세상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배에서 내릴 수도 없었다.


실이 끊긴 인형들은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그러자 인형들은 하나둘씩 바닷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죽어가는 환상 속에서나마 주인을 만나기 위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삶을 내던졌다.


몇몇 인형들은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쳤다.


자신이 살아갈 이유를 찾기 위해서 이 땅의 모든 곳을 헤집고 다녔다.


그들 역시 지금은 바다 밑바닥에서 먼저 간 인형들과 함께하고 있다.


신속의 칸.


마지막 남은 인형.


그녀는 모두의 죽음을 보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우리 모두가 죽으면 우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누가 기억할까.


더 이상 우리를 기억해줄 존재가 남지 않는다면, 우리의 치열했던 전쟁은, 행복했던 사령관과의 생활은, 주인잃은 인형들의 슬픔은 모두 덧없이 흩어지리라.


그녀는 결정했다.


내가 남아서 주인의 존재를, 인형들의 존재를 기억한다.


내 시간이 다하는 날까지 모든 기억을 짊어지고 살겠다.


그것이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녀는 품속에서 하얀 꽃 한 송이를 꺼내 주인의 무덤 위에 내려놓았다.


이번 꽃은 다음 방문까지 살아있기를 바라면서.










그녀가 등대 밖으로 나왔을 때는 밤이 더욱 깊어진 뒤였다.


문이 달려있던 곳으로 빗물이 파도쳤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급류가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외딴 등대의 방문자는 그 앞에 우뚝 선 채 거센 빗물의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


성난 파도가 다리와 부딪힐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얼굴까지 물이 튀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비는 점점 기세를 더할 뿐 약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는 길을 밝혀주던 등대 불빛마저 어느새 힘이 다했는지 아무 것도 비추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던 인형은 어둠으로 가득찬 세계에 다시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